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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을 넘어서기

현장에서 미래를  제50호
힐러리 웨인라이트

힐러리 웨인라이트, “분열을 넘어서기” 쉴라 로보탐 등(1979), ꡔ분열을 넘어서서ꡕ,

보스턴: 앨리슨 출판사, 211~253쪽.

(Hilary Wainwright, "Moving Beyond the Fragments" in S.Rowbotham et al.(1979),

Beyond the Fragments, Boston: Alyson Pub, pp.211~253.)




분열을 넘어서기

(Moving Beyond the Fragments)



                  린 시걸(Lynne Segal)







지역 경험1)


다른 누구보다도 좌파들은 어떤 정치적 견해와 경험을 두고 항상 더 격렬하고도 비판적으로 논쟁한다. 하지만 그 논쟁은 정통적이라고 여겨지는 특정한 토론의 틀 속에서 제한적으로만 이루어지는 게 보통이다. 혁명 정당과 강령의 필요성, 당과 계급의 관계, 노동계급의 권력장악이 갖는 성격에 관한 논쟁이 그러한 고전적 논쟁에 속한다. 이러한 것들이 중요한 논쟁 시 서로 충돌함에 따라,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더 나은 삶을 위한 실제적인 투쟁 경험들은 역사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나는 우리가 지역 사회에서 사회주의를 위해서 싸우는 사람들과  페미니즘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의 활동들로부터 어느 정도 유용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나는 1972년부터 아일링턴(Islington)에 살면서 자율주의적(libertarian) 페미니스트와 역사를 함께 해온 한 여성으로서 이 글을 쓴다. 아일링턴은 런던 중심가에 인접해 있다.2) 이 곳에는 대규모의 산업적 기반이 없기 때문에, 노동자들 대부분은 공공 부문이나 작은 공장에 고용되어 있다. 아일링턴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처럼 그곳에서 일하지 않는다. 나의 정치적 경험은 작업장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지역활동가로서 얻은 것이다.

나는 여성운동 뿐 아니라, 런던의 자율주의 좌파로서 지난 7년 동안 내가 한 경험에 근거해서 논의를 전개할 것이다. 비록 주관적인 설명일 수밖에 없겠지만, 나는 그것이 여성과 혁명 정치, 그리고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과 관련된 일반적인 논쟁점을 이끌어낼 수 있기를 바란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여성 해방운동에 대한 좌파 전체의 반응이 경멸적이었던 1969년과 1970년 당시에는 영국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쉴라 로보탐의 책이 나와 함께 일하는 좌파 동료들에 의해 무시되고, 분파주의적이며 개량주의적이라고 선언되었던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1970년에 한 여성 그룹이 ‘미스 월드’ 대회에 반대하는 시위를 조직하였다. 몇몇이 체포되기도 했는데, 나중에 그들은 그들이 한 일을 설명하는 팜플렛을 출간하였다. 이것은 1972년에 나에게 영향을 주고 나를 고무시켰던 것 중에 하나로 기억된다. 왜냐하면 ‘왜 미스 월드인가?’라는 이 팜플렛은 성적 대상으로서 여성의 굴욕뿐 아니라, 여성들이 그들 자신의 억압에 대항해서 최초로 저항하면서 느낀 공포와 자신감의 결여에 대해서도 다뤘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성이 정치적으로 저항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대부분이 그것들을 공적으로 말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남성들이 우리에게 제시한 세상에 수동적이고 의존적으로 관계 맺는데 익숙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또한 남성에 의해서 지배되는 것에 익숙해 있었다. 즉, 지배되길 원치 않기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바꾸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율주의


나는 자율주의 좌파의 사상과 페미니즘 사상은 여러 측면에서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 설명해 보겠다. 우선, 양자는 모두 새롭다. 1970년대 자율주의 정치는 이전의 아나키즘에 그다지 크게 빚지지 않았다. 아나키즘이 맑스주의만큼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68년의 급진적 학생 세대는 대체로 ‘조직된’ 자율주의와 아나키스트 그룹의 노력으로 급진화된 것이 아니다. 나는 그것을 1960년대 초반 내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아나키스트 학생이었을 때의 개인적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1968년 5월 이후로 부각되었던 정치적 견해들을 이해하기 시작하는데는 몇 년의 시간이 걸렸다.

자율주의 정치는 마르쿠제(Marcuse), 체 게바라(Che Guevara), 초기 맑스로부터 랭(Laing), 바네겜(Vaneigem) 등3)에 이르는 많은 다양한 사상가들로부터 영감을 받아서 순전히 자생적으로 출현한 사상으로만 볼 수 없다. 이것의 출현은 자본의 호황기, 곧 모든 것이 가능해 보였던 때, 즉 서구 세계 자본주의에서 생산한 모든 재화를 어떻게 구매하도록 할 것인가가 주요한 문제로 보여졌던 시기의 산물이었다. 이는 무의미한 소비에 대한 반발을 야기했다.: ‘소비를 하면 할수록, 삶의 질은 더 나빠진다’(consume more, live less).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삶의 질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소외된 노동이 개인의 정신에 미치는 효과를 말하면서, 분업 자체가 인간 잠재력의 발전을 저지하는 것으로 보았던 청년 맑스의 글들과 같은 심리학적인 저작들이 중시되었던 이유이다.

1968년에 활동한 이들에게 당시는 무슨 일이든 가능한 때로 여겨졌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미제국주의가 그들의 기술에도 불구하고 극복될 수 없는 존재는 아니라는 교훈을 베트남으로부터 얻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당시에 이를 알고 있었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어느 편에 속해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우리는 확실히 한 조그만 국가가 죽을 힘을 다해서 ‘야수’와 싸우는 것을 보고 정치적으로 고무되었다. 1968년에 프랑스, 1969년에 이탈리아 전역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노동자들의 투쟁으로부터, 사람들은 노동 계급이 더 나은 삶을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고, 더 나은 삶은 소비재로 구입될 수 없다는 교훈을 얻었다. 예를 들어, 학생들은 그들의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는 대표를 통해 1968년 5월의 노동자-학생 동맹과, 1969년 튜린(Turin)에서의 노동자-학생 회의처럼 산업 노동자들과 함께 행동할 수 있다는 생각에 고무되었다. 그리하여 계급투쟁은 다시 한 번 의제로 떠올랐고, 1970년대 초 이탈리아와 영국에서 지속된 계급적 전투성은 지배 계급이 경제적 호황기의 상황에서 지배를 지속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나중에 살펴보듯이 1970년대 초기의 낙관주의와 당시 우리를 고무시켰던 노동자 투쟁의 전투성은 1970년대 중반의 자본주의의 경제 불황 때 살아남을 수 없었다.

1968년 이후, 이전에 학생이었던 대부분의 새로운 자율주의 좌파들은다음과같은이슈들을중점적으로강조하였다.첫째,자율성(autonomy) - 이는 개인주의와는 다른 말이지만,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권을 갖는 것을 의미했다. 자율주의자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질을 바꾸기 위해 행동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사람들은 단지 역사적 힘의 수동적 도구로만 볼 수 없다. 여기에는 ‘민중’을 위하여, 혹은 ‘민중의 이름’으로 일한다고 주장하는 모든 조직에 대한 깊은 의심이 자리잡고 있다. ‘민중에게 권력을’은 우리의 동지들이 시위에서 체포되는 것을 보면서, 또는 우리 자신이 연행되면서 되풀이해서 외쳤던 슬로건 중의 하나이다. 우리가 본 바대로, 우리는 억압적인 국가의 폭력에 대항하여, 당장 우리 자신의 삶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민중이었다. 이는 우리가 투쟁하는 과정 속에서 다른 이들, 곧 조직된 노동 운동이나 조직된 좌파, 또는 지역 관청 내 진보 세력이나 노동당의 좌파들과 연대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들 모두가 본질적으로 개량주의자이고, 우리 자신이 우리의 삶을 통제하려는 시도에 적대적이라고 보았다. 이는 우리의 활동에 대한 그들의 반응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둘째, 개인적 관계들 - ‘당신은 당신 자신의 정치를 하라.’ 우리는 현재 우리의 사회적 관계가, 혁명 이후에 우리가 창조하고자 하는 사회적 관계를 반영하거나 ‘예시할(prefigure)’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과 현재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욕망은 미래에 사회주의를 건설하는데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자본주의하에서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고, 오직 그것을 전복시킬 조직을 건설할 수 있을 뿐이라는 레닌주의적 입장에 반대했다. 우리는 혁명적 운동이 공적 정치와 사생활 사이의 균열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이들에 반대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삶의 질에 있어서 즉각적인 개선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혁명적 운동에 참여할 이유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어떤 형태의 사회주의 정치에는 참여하지만, 가정에서 아내나 자식들과의 관계나 함께 일하는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서는 여전히 권위주의적이거나 무비판적인 이들을 비판했다. 우리가 염두에 두었던 사람들은 예컨대, 자신이 ‘정치적인’ 일에 관여하는 동안, 자신의 아내는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게 하는 전투적인 남성 활동가들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정치적 활동이 어린이들과 함께 하는 이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길 원했고, 또한 아이들까지 포함하는 활동이 되길 원했다.

셋째, 자신의 억압을 중심으로 조직하라. 당신은 여성, 무단 거주자, 세입자 등으로서의 위치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이는 핵가족에 대한 공격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랭과 라이히를 읽고, 우리가 우리 부모의 제한되고 다른 사람의 삶을 제약하는 삶의 방식으로는, 결코 되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확신했다. 우리는 억압, 곧 다른 이의 삶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한 사람의 권력이 경제적인 사회관계 만큼이나 개인적인 사회적 관계에서도 커다란 부분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집단 거주, 집단 육아와 탁아소를 설립하는 것4)에 대한 강조로 이어졌다. 가족은 신경증과 사람들로 하여금 억압받는 가운데 협조하도록 하는 ‘머릿속의 감시자(the policeman in the head)’를 생산하는 것으로 보였다.

넷째, 전위와 투쟁의 위계를 거부하기. 우리는 산업 노동계급이 혁명 투쟁의 전위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거부했다. 자율주의자들은 일상의 모든 영역이 혁명가들에게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전통적 좌파들은 지역 사회가 아니라 작업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만 관심을 두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자율주의자들은 집안에서 일하는 이들, 아이들을 돌보는 이들 등의 사람들이 공장에서 일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을 한다고 언제나 주장했다. 이는 이론적으로는 국제사회주의자 그룹(IS)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본주의는 바야흐로 파국의 시점에 이르렀으나, 오직 ‘영구적 군사경제’라는 지주에 의해서 의해서만 구제된다는 트로츠키 좌파의 영구적인 환상을 거부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5) 우리는 이것이 투자 정책과 같은 경제적 수단뿐 아니라, 국가 이데올로기와 모든 수준에서 표출되는 관념들의 헤게모니를 통해 경제를 안정화시키는 국가의 역할을 과소평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자본주의 국가가 대부분의 좌파가 이전에 주장한 것보다 훨씬 더 탄력적이고 유연하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자율주의자들은 국가의 역할과 경찰 및 군대뿐 아니라 교육, 건강, 성역할 학습 등을 통한 억압의 강한 힘과 부드러운 힘에 관한 더욱 풍부한 국가이론을 발전시켰다.6)

대다수의 좌파보다 앞서서 우리는 청소년들과 함께 하는 활동을 강조하였다. 좌파 그룹들도 청소년 분과를 두고 있었지만, 자율주의자들은 청소년의 집, 청소년 신문, 놀이동산과 자유 학교를 설립하는 등 실제적인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활동은 실제적이었을 뿐 아니라, 젊은이들이 다른 상황을 경험할 수 있고 자기결정의 감각을 발전시키는 것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예시적이기도 했다.7)

우리는 지역 신문 발간, 주택 무단 거주자(squatters) 및 세입자 집단 조직에 기초하여 주거지역 중심의 조직활동을 꾀하는 등 주로 지역사회 정치에 관여하였다. ‘모든 이에게 좋은 집을’이라는 슬로건은 특히 독신자용 주택을 공급하지 못하는 지역 당국을 겨냥해서 우리가 사용한 슬로건이었다. 무단 입주 운동은, 사람들이 더 이상의 잦은 이사나 관리인들과의 충돌을 견뎌내기 힘들게 되고, 또 그들이 지방의회에 매수되어 단기임대주택을 제공받거나, 빈집의 수가 감소하면서 쇠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성과들을 이뤄 냈다. 그 운동은 결국 아일링턴에서 의회가 정책을 바꿔서 독신자들을 위한 집을 제공하도록 강제했던 것이다. 즉, 무단 거주 운동이 주거정책관료들에게 ‘공동거주 독신자(shared singles)’라는 개념을 소개함으로써 그것이 가족 단위에 추가되도록 했던 것이다.(투쟁들이 개량주의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을 단순히 ’개량주의‘라고 폐기해서는 안 된다.)

당시는 아일링턴과 같은 시내 자치구들에서 주거 지역 재개발 사업(gentrification)과 중간계급이 노동계급의 주택을 구입하던 시기였다. 집주인들은 프레블(Prebbles)과 같은 부동산 중개회사와 공모하여 세입자들을 그들의 집으로부터 쫓아내고자 했다. 아일링턴 세입자 운동은, 모든 비산업적 피켓은 불법이라는 역사적인 대법원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프레블사에 대항하여 여러 달 동안 피켓팅을 했다. 우리는 레인(Raine), 프레쉬워터(Freshwater), 조 레비(Joe Levy)와 같은 악질 부동산 소유자들에 관한 조사와 우리가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때까지 주거 체계가 일반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면밀한 조사를 수행했다.

우리는 혁명적 지도력에 관련된 모든 통념들에 저항했다. 우리가 수행하는 정치는 기술을 공유하고, 현존하는 모든 권위주의적 관계를 무너뜨리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는 정치의 창조적인 측면을 강조했다. 정치는 즐겁고 따분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노동, 가족, ‘쾌락’, 소유와 관계들을 둘러싼 모든 부르주아적 사회 관계들에 대해 도전했다. 이것이 아마도 우리가 부르주아 사회에서 가장 억압받는 이들, 즉 감옥수, 홈리스, 실업수당 청구자 등을 지지한 이유이다. 그리고 우리는 당신이 가장 억압받는 이들의 물질적 상황을 공유한다면 그들을 투쟁으로 지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곤란에 처한 사람들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으면, 잃을 것도 없다네’라고 딜런(Bob Dylan)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러나 비참함은 언제나 곧바로 전투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가장 억압받는 이들은 그들이 전혀 싸울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분열되기도(smashed) 한다.



페미니즘


내가 자율주의의 사상에 핵심적인 것으로 언급한 이러한 논점들 중에 상당수가 페미니즘 사상에도 핵심적이다.

첫째, 여성운동의 자율성은 여성에게는 결정적인 문제이다. 좌파 그룹들은 이를 분리주의라고 보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형식적인 남녀평등의 강령이 그들 조직에서 여성의 실제적인 종속을 은폐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여성은 남성 지배에 맞서서 그들 자신의 투쟁을 조직해야한다; 그것은 여성들만을 위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둘째, 페미니스트들은 언제나 개인적인 것(the personal), 주관적인 것(the subjective)의 중요성과 총체적인 정치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는 개인적인 삶과 가정에서의 여성 억압, 임금 노동에서의 남녀 착취 사이의 연계를 볼 수 있는 정치를 의미한다. 여성들은 현존하는 남녀 사이의 사회적 제 관계에서 변화를 요구했다. 우리는 가정에서의 여성의 고립을 무너뜨리는 것을 돕고, 우리의 삶을 바꾸기를 원했다. 모든 성차별주의 이데올로기가 여성들 스스로를 열등하다고 느끼게 하고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여성 스스로가 생각하게 하고, 또한 남성들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해 왔기 때문에, 여성들은 자기 스스로를 바꿔야만 했다. 우리는 대부분의 이성애적(異性愛的) 관계에서 여성의 성이 억압되는 것처럼, 우리의 성이 남성에 의해 정의되고 통제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레즈비언의 요구와 여성이 자신의 성을 탐색하는 것이 지닌 중요성을 지지했다. 그것은 우리가 여성의 성적인 수동성과 남성에 의한 성적 대상화가 우리의 무기력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많은 페미니스트들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억압을 중심으로 조직하였다. 우리는 또한 핵가족을 여성 억압의 근원으로 보고 이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가족의 억압적인 이데올로기적 역할만을 비판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또한 가족을 여성이 임금을 받지 않는 노동을 하고, 그리하여 여성의 사회적 종속 일반의 기반을 창출하는 장소로 보았다. 우리는 오늘날 가사 노동, 자녀 양육과 노동이 조직되는 방식이 여성의 실질적인 해방이 이루어지기 이전에 모두 바뀌어야 함을 주장했다. 우리는 자본주의와 계급 투쟁에 대한 맑스의 분석이 이러한 변화를 개념화하는 데 있어서 그 자체로 적합한 이론적 도구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전통적 좌파가 여성 해방의 반자본주의적 성격을 점차로 깨달아 가는 동안,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이 노동력을 재생산하고 노동력을 뒷바라지하면서 수행하는 부불 노동이 어떻게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에서 필수적인지를 보여줄 수 있었다. ‘노동하는 여성이 자본의 권력을 유지한다’는 1970년에 옥스퍼드에서 개최된 최초의 여성 해방 회의에서 벽에 씌어진 슬로건 중 하나였다.

여성은 복지국가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자율주의자들 보다 더욱 철저하게 발전시켰다.8) 어머니로서 여성은 복지, 양육 보조, 교육과 건강 서비스 등의 형태로 남성보다 더욱 직접적으로 국가와 접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국가를 분석하는 것은 더욱 절실한 문제가 되었다. 우리는 오늘날 주로 여성이 지는 부담이 바로 이러한 사회적 서비스의 불충분함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공적) 보조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여성은 건강/보건 영역에 대한 많은 논쟁을 제기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재생산능력에 대한 통제를 요구하였다. 우리는 주로 남성인 의사가 여성들만의 병을 경멸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폭로하였다. 우리는 의사가 많은 여성문제의 사회적 원인을 조사하는 대신에, 수백만의 여성들에게 보통 신경안정제나 다른 약물을 처방하는 것에 대한 글을 출간하였다. 사실상, 페미니스트들은 의료진들이 여성성 그 자체를 약간은 병리학적인 것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확증할 수 있었다.9) 정신과 의사들은 오늘날 대부분의 여성들이 느끼는 수동성, 의존성과 무기력함을 정신적 건강에 반하는 것이라고 제대로 보았다. 그러나 일상 생활에서 강화되며, 여성의 억압적 사회화에 기여하는, 여성성의 이러한 측면 대신, 대부분의 의사들은 이를 여성의 본성으로 잘못 보았다. 이는 수많은 논쟁점 중에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넷째, 여성운동은 또한 ‘단계론(stageism)’ - 여성 해방이 혁명 이후로 연기될 수 있다는 관념을 거부했다.10) 우리는 남성 지배자 가부장제에 대항하는 우리의 투쟁이 계급 억압에 대항하는 투쟁만큼 핵심적이라고 주장했다.11) 우리는 여성의 억압이 계급 착취로 환원되어서는 안되고, 그것이 상호 연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억압이 계급 착취보다 더욱 오래되었고, 자본주의 계급 관계를 붕괴한 이후에도 지속될 수도 있다고 보았다.

사회주의 정치에 많은 새로운 쟁점들을 도입했을 뿐 아니라 - 우리 모두가 혁명 정치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 새로운 조직 형태를 발전시킨 것은 여성들이었다. 우리는 의식화 그룹을 도입하였는데, 거기서 모든 여성들은 그들의 비참함, 고립, 열등감이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거의 모든 여성들에게 일반적이고 물질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조건들의 산물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우리는 함께 토론하고 작업하는 방식으로서 보다 지원적이고 평등하다고 생각되는 소집단 방식을 도입하였다. 우리는 모든 여성들의 경험이 존중받길 원했고, 일반적인 원칙들보다는 바로 이것에 기반해서 운동이 성장해 가길 원했다. 우리는 경험이 없고 자신감이 부족한 여성들(그리고 남성들)이 공헌할 바가 없다고 느끼는 장소인, 노동운동과 좌파들의 공식적인 대중집회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맞서 싸우고 있는 지배와 종속의 제 형태는 전부터 그래 왔던 것처럼 비가시적인 것으로 남아있기 쉽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형태의 지도자 중심주의(leaderism)에 반대하였으며, 모든 사회적 관계에서 평등을 보장받기 위해 투쟁하였다. 우리는 여성들이 공헌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고 믿도록 할 필요성과 더불어 여성들의 투쟁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남성들이 문화의 모든 영역을 포함한 우리 삶 대부분을 지배해 왔기 때문에, 의식화의 일부로서 우리는 글쓰기, 시, 음악, 영화 등을 통해서 새로운 페미니스트 문화를 창출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자율주의적 좌파를 제외한 대부분의 좌파들이 지역에 무관심한 시기에 지역 공동체 속에서 지역적으로 활동했다.

이와 같은 정치활동 및 조직의 형태와 성격에 관한 많은 생각들의 예로서 70년대 초반 아일링턴에서 여성운동이 주도한 일들을 살펴보자. 1972년 8월 한 여성그룹이 요크 가에 최초의 지역 여성센터를 열었다. 이것은 영국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여성센터 중 하나다. 센터를 만든다는 생각은 대부분의 좌파가 조직하는 방식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에섹스 가 (街) 여성센터 소책자를 보면 그 취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여성센터는 우리 여성들 모두가 직면하고 있는 특수한 문제들에 대하여 다른 여성들과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필요성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들 중 많은 이들은 여성들만이, 우리가 갖고 있는 많은 문제들 - 예컨대 우리가 하루종일 아이들에 매달려 있어서 외출 조차할 수 없을 때 갖게 되는 외로움이나 괜찮은 주택을 찾아보거나, 우리 자신과 아이들의 건강 문제, 그리고 일자리를 얻어 가정을 윤택하게 유지하는 것과 같은 문제들 - 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다른 여성들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문제가 결코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또한 우리가 경험을 모두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면, 그것은 서로에게 큰 힘이 될 뿐 아니라, 변화가 필요할 때,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거리의 도시계획에 관한 것이든, 피임이나 육아, 학교, 근로 조건 문제든, 그것들을 보다 쉽게 변화시킬 수 있다. 우리는 여성들이 사태를 바꿔 내야 할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여성들이 직장이나 가정 모두에서의 일상 생활에서 대면하는 문제들의 근원에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센터는 첫째로, 어떤 식으로든지 그들의 고립으로부터 탈출하려고 노력하는 모든 여성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실질적인 지원을 제공하기 위한 장소이며, 둘째로, 여성으로서 우리가 사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자신감과 힘을 구축할 수 있도록 해주는 장소라는 생각에 입각해 있었다.

요크 가에서 우리는 당시 몇 안 되는 여성건강모임을 열어서, 국가와 관련된 여성건강 증진 운동에 관한 다양한 생각들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또한 가족수당 캠페인 운동도 활발하게 전개했는데, 거기서 우리는 가족수당의 인상과 그것을 여성에게 직접 지불할 것을 요구했다. 이 당시는 가사노동임금제((Wages For Housework) 캠페인이 개시되어 가정에서 일하는 여성에게 임금을 지불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던 시기이다. 우리는 가내노동(domestic work)이 노동이고, 그것도 임금을 지불 받지 못하기 때문에 평가절하되어 있고 비가시화 되어있는 중요한 노동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라는 데 동의하였다. 이러한 모든 활동은 좌파에 속하는 어떤 이들에게는 뜻밖의 사건들이었다.



우리도 역시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여성의 부불 가내노동이 여성억압에서 중심적인 문제이며 또한 노동 인력(노동력)의 재생산과 유지, 따라서 자본제적 사회구성체의 유지에도 중심적이라고 생각했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에 대한 이론적 논쟁이 있었다. ‘가사노동 임금제’(Wages For Housework)에서는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Mariarosa Dalla Costa)의12) 분석에 따라, 여성의 가사노동이 자본에 본질적일 뿐 아니라, 고용된 노동력에 근거한 자본가의 이윤에 직접적으로 부가되는 잉여가치를 생산한다고 주장했다. 만일 가정 주부가 없다면, 남성 노동자들은 그들을 돌봐 주는 누군가에게 대가를 지불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더 높은 임금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 생각엔 이 논쟁 자체는 그다지 중요한 것 같지 않았다. 왜냐하면 가정주부나 다른 가내 노동자들이 잉여가치를 생산하든 안 하든 간에, 우리는 여성을 가정에 묶어두는 노동분업에 도전하는 것에도 똑같은 관심을 두기 때문이었다.

여성이 스스로를 평가절하하도록 하거나 낮은 지위를 차지하도록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성을 가정 내로 고립시키거나 직장 내에서 착취되도록 하는 주요한 원인은 바로 가사노동에 대한 압력, 직장 여성의 직장/가정 이중노동, 여성이 맡아야 하는 일반적인 봉사 역할과 같은 것들이었다. 따라서 ‘가사노동임금제’ 캠페인의 해결책은 가정 내 분업을 제도화할 것이기 때문에 실천적 수준에서 잘못된 것이었다.(이탈리아와 캐나다에서는 그러한 제안에 따라 일을 추진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그것은 임금공세(wage offensive)를 통해 더 많은 돈을 얻어내기 위한 투쟁을 계급투쟁 속에서 권력을 장악하는 유일한 길로 보는 전통적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추구했던 경제주의의 또 다른 측면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론적 수준에서도 잘못된 것 같았다.

우리는 더 많은 가사노동의 사회화와 더 많은 탁아소 및 놀이터 확보 등을 일반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우리가 단지 여성의 욕구를 포괄하기 위해서 좌파가 활동적이었던 정치 활동 영역을 확장시킨 것만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또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어떠한 이득에 대해서도 통제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예를 들어, 탁아소를 요구하면서 단지 국가로부터 더 많은 탁아소를 위한 자금만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설립하는데 도움을 준 탁아소에서 보다 지역공동체에 근거한 관계들을 창출하고, 권위주의적이지 않으면서 성차별적이지도 않은 관계들을 창출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발 챨톤(Val Charlton)은 페미니스트들의 지방의회 기금확보를 위한 성공적인 투쟁에 기초하여 1972년에 설립된 런던 북부의 ‘어린이 지역공동체 센터’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어린이들과 관계해 왔던 권위주의적 양식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어린이들에게 되도록 많은 것을 스스로 선택하도록 하고 있다. 모든 활동이 양성의 어린이들에게 허용된다. 하지만 단지 모든 어린이들을 똑같이 다루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남자아이들은 종종 남자의 이점을 이미 배워서 알고 있으며, 그것을 약삭빠르게 이용한다. 일반적으로 이미 덜 모험적인 아이로 되어 있는 여자아이들 위주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어야 한다.13)

 

1972년에 또한 여성 죄수 문제에 관한 캠페인을 위해 여성들은 ‘홀로웨이Holloway) 감옥 지원 그룹’을 만들었다. 거기서 우리는 ‘자매들의 자유는 우리의 자유’라고 외치며 피켓 시위를 했고, 1973년에는 홀로웨이 감옥에서 화재로 사망한 패트 커밍스(Pat Cummings) 문제에 대해 항의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누구나 알고 있다시피 대부분의 여성 수인(囚人)들은 폭력죄로 갇힌 게 아니다. 절도, 사기, 매춘 등이 여성들이 감옥에 가게 되는 주된 이유이다. 여성들은 종종 적절치 못한 방법으로 가족을 돌보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려다가 감옥에 가기도 한다. 그렇지만 여성 수인들은 난폭하기로 악명 높은데, 주로 자기 파괴적인 쪽으로 난폭해서 자해하거나 감방에 몸을 부딪치기도 한다. 몇몇 사람들만을 돌보거나 그들에게 애정을 주는데 익숙해 있기 때문에 감옥의 여성들은 가정파탄과 자녀를 잃게 되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남성들보다는 여성들이 이런 경우에 더 많이 직면하게 되는데, 그것은 남성이 여성을 돌보는 것보다는 더 많은 여성이 남성을 돌보는 경향 때문이다.

이러한 취약한 위치에 처해있는 여성들에게 공식 이데올로기는 여성들이 ‘범죄적’이기 보다는 적응력이 없거나 병약하다고 - 무기력하고 수동적으로 훈련되어 있는 우리사회의 여성들이 더 쉽게 수용하는 다른 역할을 - 설득시키는 쪽으로 작용하기 쉽다. 이런 점에 초점을 두고 우리는 감옥 내부 여성들을 병원보다도 훨씬 더 고립시킬 홀로웨이 감옥 재건축 이면에 놓여 있는 기만성을 폭로하고자 했다. 홀로웨이에 사는 여성의 50% 이상이 약물에 의존하고 있는데다가, 여성들이 자유롭게 공급받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약뿐이다. 새로운 홀로웨이 감옥은 심리치료를 통한 여성의 재활을 더 크게 강조하기 때문에, 애초에 여성들을 거기로 오게 했던 가장 큰 문제인 물질적 문제에 대해서는 단순히 스스로를 비난하도록 조장할 뿐이다.

그런데 요크 가는 여성 센터 자리로서는 그다지 좋은 장소는 아니어서 1973년에 폐쇄되고 1974년 2월에 에섹스 가에 새로운 여성센터를 열었다. 많은 여성 모임, 여성 캠페인과 활동들이 이 여성센터에서 시작되었다. 가장 성공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건강 모임이었는데, 이 모임은 여성 건강에 관한 문헌을 발간했고, 임신검사를 했으며, 여의사가 정기적으로 조언해 주는 시간을 마련했고, 자가 진단 방법에 대한 강좌와 학교 다니는 어린이들을 위한 건강교실을 열었다. 또한 의사 및 그들의 여성환자 처방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으며, 낙태를 위한 편의시설에 관한 정보도 제공하였다. 그리고 보다 일반적인 문제로서 단순한 치료의학이 아닌 예방적인 건강보호가 중요함을 주장하였다. 그렇게 성공적이지는 않았지만, 주거상태와 아동 및 여성의 가정 내 고립에 관한 소책자를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다. 우리는 보다 나은 주거를 위한 여성들의 투쟁을 지원했으며, 우리 중 일부는 주택 무단거주(squatting) 투쟁에 적극적이었다.

1975년까지 많은 캠페인이 여성센터로부터 시작된 그룹들에 의해 진행되고 있었다. 1974년은 공공지출 삭감 규모의 지속적인 증가에  반대하는 다양한 캠페인들을 전개하기 시작한 해였다. 우리는 우리 지역에 있는 ‘리버풀 로드(Liverpool Road) 병원’ 폐쇄를 막기 위한 캠페인으로 시작해서 그것을 지역공동체 건강 시설로 유지하기 위한 투쟁을 격렬하게 전개했다. 우리들 중 일부는 ‘아일링턴 탁아 행동 그룹’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들은 탁아소를 방문하여 노동자들의 노조조직화를 지원하면서, 지역의회가 탁아소 운영비를 삭감하려는 시도를 포기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그러한 삭감이 왜 여성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지를 알리는 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더 많은, 더 나은 서비스’를 위한 캠페인들이 정부의 삭감 압력과 동시에 발생하였다. 정부의 첫 번째 삭감 요구 조치가 내려 온 시기는 1974년 11월이었다. 그러자 아일링턴 지역에서는 삭감조치 전반에 대한 반대 캠페인이 시작되었고, 12월에 전투적인 활동가 그룹과 노동당 내외부의 몇몇 인사들이 함께 첫 번째 모임을 개최했다. 폭넓은 전선운동으로서 그 캠페인은 여성센터 그룹, 임차인 그룹, 공공부문 노동자와 같은 지역사회 그룹들과 특히, 법률상담센터, 특별위원회(Task Force) 및 지역주민 포럼과 같이 지방의회로부터 기금을 지원 받는 수많은 지역사회 봉사집단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이것은 아마도 자율주의운동과 페미니즘 그리고 노동운동 사이에서 발전한 첫 번째의 관계일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관계는 불편한 동맹 관계였다. 캠페인은 노조평의회로부터는 어떠한 실질적 지원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캠페인의 행동의 날이 있은 후 그들은 밖으로 나와서 캠페인을 공격하기도 했다. 이 캠페인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요즈음 아일링턴 지역에서는 보다 강력한 좌파적 입장을 견지한 복지삭감 반대 캠페인이 구성될 것에 대한 기대가 크다.

‘전국노동여성헌장 캠페인(National Working Women’s Charter Campaign)’도 당시에 시작되어, 1974년 10월에 첫 번째 상임집행위원회가 개최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있는 에섹스 가에서는 결코 대중적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지배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조직된 좌파들이 지도부 쟁탈에 골몰하였고, 캠페인이 매우 도식적으로 단순한 요구 사항들을 목록화하는 것에 불과했으며, 작업장에 고용된 여성들에 주로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다. 맑스주의자들은 여성들이 임금노동에 완전히 참가함으로써 여성해방이 성취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항상 주장해 왔다. 이와 같이 그들은 여성 투쟁을 계급투쟁에 종속시킬 수 있었다. 또한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들은 가정주부의 조직화가 갖는 중요성이나 임노동 체계 주변에 있는 수많은 여성들(예컨대, 매춘부)의 투쟁을 무시할 수 있었다.

지불노동에서 여성이 처한 상황을 개선하는데 필요한 요구들의 목록인 ‘노동 여성 헌장’은 원래 런던지역 노조평의회 산하 소위원회에서 정리한 것이다. 좌파 그룹에 속한 일부 여성들에겐 그것이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의 조직화를 위한 적절한 기초로서 간주되었다. 그 요구 사항들이 비록 피임, 낙태 및 탁아와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여성 운동내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기초할 만한 적절한 강령은 되지 못했다.(비록 우리는 스스로를 조직하고자 노력하면서 여러 가지 좌절에 직면하기도 하지만, 여성운동 내에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항상 있었다.)

헌장의 부적합성은 여성억압이, 여성들이 계급투쟁에서 차지하는 몫이 (남성과) 동일하지 않은 것에서 기인한다는 전통적인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는데 있다. 헌장의 요구들은 심지어 남성에 의한 지배에서 중심적인, 노동의 성적 분업(sexual division of labor)을 비판하지도 않았다. 설사 여성들이 직장에 다닐 수 있을지라도, 노동의 성적 분업으로 인하여,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저임의 낮은 지위에 속하는 일거리를 얻을 수밖에 없다. 요점은 여성들이 우연하게 저임금 직업에 종사한다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이 전적으로 ‘여성들의 직업’으로 집중된다는데 있다.14) 그리고 여성이 취업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직업들은 저임금에다가 지위도 낮은데, 그것은 정확히 그 직업들이 ‘여성들의 직업’이기 때문이다. 특정한 직업에 진입하는 보다 많은 여성들이 남성노동자들에게 위협이 되는 것은, 대거 참여한 여성들이 그 일의 지위를 낮추기 때문이다. 이것의 가장 좋은 예로 19세기말에 남성으로부터 여성으로 비서직이 이동한 것을 들 수 있다.15) 이처럼 노동에서조차 여성들은 그녀들의 계급적 지위뿐 아니라, 성에 의해서 억압받는다.

‘노동 여성 헌장(Working Women’s Charter)’은 기본적으로 페미니즘에 대한 노동조합의 반응이었다. 어떤 반응이라도 얻어낸 것은 좋았으나, ‘헌장’은 여성에 대한 노동조합주의의 부적합성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들 중 일부는 ‘헌장’ 캠페인 활동을 지지하였다. 하지만, 지역의 ‘헌장’ 그룹들은 사실상 ‘헌장’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고 활용했다. 아일링턴에서 여성들은 지역의 탁아행동그룹이나 리버풀 로드 병원 캠페인에서 활동하면서, ‘마크스 & 스펜서’(Marks & Spencers, 슈퍼 체인점) 및 기타 사업장에 속한 노동자들을 노조로 조직하고자 했으며, 노조평의회의 후원 하에 아일링턴 지역 여성 노동자 총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그러나 페미니스트 투쟁의 많은 측면들을 ‘헌장’으로는 포괄해 낼 수 없었다. 1975년에 ‘노동 여성 헌장’은 영국노총 총회에서 채택되지 못하고 기각되었다. ‘헌장’은 페미니스트 정치와 노동운동 정치 사이에서 망설이다가 기회를 놓치고 말았으며, 결국 살아 남지 못했다.

1975년에는 제임스 화이트의 반-낙태법안에 반대하는 투쟁을 위해서 지역 NAC(National Abortion Campaign, 전국 낙태 캠페인) 그룹이 구성되었다. NAC도 하나의 전국적 캠페인으로 조직되었다. 그러나 또다시 많은 여성들은 전국적 구조는 페미니스트적이 아니라고 하면서 의구심을 보였다. 그녀들은 NAC가 국제맑스주의그룹(IMG)에 의해 정치적으로 지배되고 있다고 보았으며, 그들이 국회의원에 대한 로비 활동에 주요 초점을 맞추는 것에 반대하면서 그것은 개량주의적이라고 보았다. 페미니스트들은 전국적 구조는 어떤 것이든 간에,  집중적으로 조직된 정치형태에서 보다 많은 경험을 가진 좌파 그룹 여성들에게, 정책결정의 측면에서 유리하게 한다고 생각하곤 했다. 이것은 항상 여성운동의 문제였고, 좌파그룹 여성들과 무정파적 여성들, 심지어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조류 사이에 뿌리 깊은 긴장을 야기하는 원인들 중 하나였다. 우리들은 좌파 그룹들 외부에서 느리게 움직였다. 우리들 각자는 특정한 전술이나 슬로우건 등에 대해 깊이 생각하였다. 우리들 대부분은 두려움 속에서 앞으로 전진했기 때문에, 전술과 조직 문제에 대한 답을 이미 모두 갖고 있는 것 같은 여성들에 대해 우호적일 수 없었다. 요즘 나는, 우리 모두가 어렵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정치적 차이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우리의 정치를 통해서 주장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많은 여성들이 낙태 편의 시설에 대한 여성의 접근을 위협하는 제약들에 대해, 지방시장 등에서 가판을 차려 놓고 반대하는 지역 활동에 몸담게 되었다. 우리는 또한 미스 아일링턴 미인 선발대회에 반대하는 다채로운 저항을 조직했는데, 거기서 우리는 남성들의 성적 대상으로서 여성의 지위로부터 기인하는 여성들의 삶에 대한 비하, 폭력, 속박을 상세히 지적하였다. 특히 우리가 일상적인 여성 강간과 폭력을 고발하면서, 이 지역 여성들에 대한 남성의 통제에 도전하였을 때, 우리는 지역 신문 등에서 심한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는 남성 지배에 중심적인 이데올로기인 성차별 이데올로기에 대한 아주 직접적인 도전이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성차별 이데올로기는 남성이 여성을 지배할 수 있게 하는 어떤 특별한 속성을 여성들에게 귀속시킬 뿐 아니라, 여성적이라고 여겨지는 이러한 특성들을 얕잡아 보게 하고, 격하시키기 때문이다.16)

아스날(Arsenal) 여성 그룹 등과 함께 우리는 지역에 기반을 둔 여성운동을 조직하기 위해서 지역총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우리는 초기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여성해방운동의 조직화를 위해 주도적으로 활동하는 모든 일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많은 의식화 및 학습 그룹들이 센터에서 시작되었으며, 여성들의 자조적(self-help) (심리) 치료 집단이 만들어 졌는데,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심각한 정서적 위기를 경험했던 여성들을 지원하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모든 참여 여성들이 정신 건강을 중요한 이슈로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성들의 심층적인 불안과 공포들 중 많은 것들이 여성들의 무기력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이며, 그것들은 종종 여성들이 남성들로부터 적절한 보살핌을 전혀 받을 수 없기 때문인 것으로 보았다. 우리 여성들은 정서적 지원을 베푸는데는 익숙해져 있었으나, 그것을 요구하거나 받는데는 그렇지 못했다. 바로 이 점이 페미니스트 심리 치료법과 ‘여성 심리 치료센터’를 아일링턴에 창설할 것을 강조하는 배경인 것이다. 우리는 스타크로스(Starcross)와 같은 지역 여학교에서 여성해방에 관해 강의했다. 그리고 몇몇 여성들은 센터에서 여학생들을 위한 여성 해방 교실을 운영하기도 했다. 또한 여성들을 위한 문해교육(a literacy class)도 이루어졌는데, 거기에는 전통적으로 남성들의 직업이었던 일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위한 그룹과 그외에 기억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그룹이 있었다.

그러나 여성센터로부터 시작된 모든 이러한 창의성과 열정에도 불구하고, 센터를 모든 여성들에게 일주일에 토요일과 수요일 밤 몇 시간 이상 개방하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많은 여성들이 일년 정도만 적극적이다가 센터를 떠나고 만다. 센터에 몸담고 일할 새로운 여성을 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고, 거기서 마주치는 여러 집단들이 서로 원활하게 의사소통하도록 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우리들 중 일부는 조정업무와 계획을 담당할 유급 직원의 급여에 필요한 돈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즉각 그런 생각에 반대했다. 그들은 지방의회나 국가로부터 돈을 받는 것은 배신행위(selling out)이며, 그들에 의해 이용당할(co-option) 수 있는 길을 닦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또한 유급 직원제가 위계구조를 창출할 것이라는 두려움도 갖고 있었다. 첫 번째 이유는 우리가 국가 분석을 통해 사회복지사(social worker)들을 체제의 억압적인 ‘연성 경찰(soft cops)’로 보았던 것에 근거한다. 우리가 자립과 집합적 활동을 강조하는 것과 국가 기금을 지원 받는다는 생각 사이에는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회복지사나 국가로부터 지원 받는 서비스 센터는, 사람들의 문제에 대한 개인적인 해결책이 있다고 잘못 전제하면서, 사람들이 그들의 문제를 집단적이고 직접적인 행동으로 해결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지만, 임금만 안 받고 급진적일 뿐이지, 어쨌든간에 우리도 역시 그러한 사회복지사가 아닐까?

당시에 우리는 국가부문에 속한 노동자들의 급진적이고 전투적인 잠재성을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이윤성에 얽매여 있는 국가에 의해 고용되어 있으면서,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노력하는 모순을 체험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 노동자들 중 많은 이들은 고객들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려는 그들의 노력이 헛된 것이라는 점에 대해 많은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다. 예를 들어, 일부 사회복지사들은 전부터 사람들에게 주택 무단거주 조언 센터나 어떤 특정한 이슈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건물 점거 투쟁 그룹들을 찾아가 보도록 권하고 있었다. 사회적 서비스와 국가영역에서의 복지삭감 및 폐지나 합리화를 통해 일자리를 위협하는 조치들의 대부분은, 민중들의 필요라는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에, 보다 광범위한 반자본주의적 투쟁들과 쉽게 연결될 수 있다. 많은 병원 노동자들, 교사들 등은 그들의 직업을 불만족스럽고, 어렵게 만드는 것이 단지 자원이 부족해서라기 보다는, 국가를 조직하는 공식적인 위계와 경직된 규칙들 때문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소위 자발적인 그룹들 예컨대, 법률상담센터, 주택지원센터 및 기타 급진적 조언 센터들에 대한 기금지원을 삭감해야 한다는 현재의 공격은 정확히, 그 센터들이 민중들의 요구 투쟁을 위한 공간을 제공하고, 투쟁들을 조직하는데 효과적으로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가해진 것이다. 그러한 삭감으로 절약되는 돈은 아주 미미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삭감의 동기는 정치적인 데 있다. 어떻게 보면, 이 자발적 그룹들은 ‘급진적 전문가들’에게 유일하지는 않을 지라도 주요한 새로운 일자리를 제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에섹스 가에서 우리가 자금을 지원받는 모순과, ‘베푸는 국가에 반대하여(to bite the hand that feeds you)’ 그것을 사용할 가능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는 못했다고 생각한다.

최근 들어서, 나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고민하면서, 이것은 좀 더 많은 분석이 필요한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다. 현대 국가는 거대하고 복합적인 조직체이다. 수많은 혁명적 전략들이 도출되었던 1917년 제정 러시아 시기의 국가와는 전혀 다른 상황인 것이다. 당시에 국가는 지배계급의 이익을 방어하는, 순수하게 억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현대 국가는 개량주의적 정치전략으로 정향된 노동자 계급운동과 자본가 계급 사이의 지속적인 타협을 통해 형성되어 왔다. 국가는 사회 전반으로 그 촉수를 뻗치고 있다. 국유화, 보건, 교육, 청년층과 노령층의 보호, 연구조사, 예술활동에 대한 자금 지원 등은 현대 국가가 1945년 이전에는 결코 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사회에 침투하는 몇 가지 방식들이다.

자율주의자들이나 페미니스트들이 보기에 국가통제의 은밀한 손은 지역공동체 축제에서 탁아소와 양로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 뻗쳐 있다. 우리는 체제 전체가 썩어빠졌기 때문에 그것에 집착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라고 주장하는 경향을 갖고 있었다. 우리가 우리의 일상생활에 대한 국가의 통제 정도에 대해 강조하는 것은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국가의 모든 부분들(ramifications)을 단일한(monolith) 것으로 보아, 국가의 발전에는 모순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틀린 것이다. 이것은 보수당 정부가 과거 노동당 정부에 의해 추진되었던 국가복지를 공격하면서, 국가 서비스 부문을 가능한 한 빨리 사적 부분에 팔아 치우려고 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볼 때 특히 그렇다. 오늘날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점은 ‘전국민 의료보장제(National Health Service)’에서부터 ‘학교 순찰제’에 이르는 기존의 많은 국가 서비스들을 지켜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국가 전복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집중적 형태일 필요는 없지만, 국가가 제공하는 서비스의 확장과 변혁을 위한 투쟁 전략의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사회주의 국가의 성격과 관련된 전반적인 쟁점을 제기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며, 여성억압의 기초가 되는 성적 노동분업에 투쟁하는 여성인 우리들에게는 핵심적인 문제다.

우리는 오늘날 개량주의와 국가에 관해 보다 정교한 분석을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전통적인 사회민주주의적인 관념에 기초한 것도 아니고, 사회주의를 단지 국유화에다 국가계획을 더한 것으로 간주하는 레닌주의 모델과는 다른 방식의 분석이다. 그 뿐 아니라, 국가 공여(provision)의 확장을 위한 투쟁의 필요성에 등을 돌리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국가의 복지제도들이 공격받을 때 그것을 방어하기 위한 전략인 동시에, 현재의 복지제도를 넘어서야 할 필요성을 주장하는 전략인 것이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매맞는 여성들이 그녀들의 폭력적인 남편들로부터 탈출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지난 수년에 걸쳐 설립되었던 160개의 여성 쉼터(women’s aid refuges)를 그러한 전략의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전국여성연맹(The National Federation Of Women’s Aid)은 쉼터가 여성들에 의해 여성들을 위해 운영되어야 하고, 자립과 독립성을 고무시켜 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지역 국가기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유사한 예로서, 쉴라 로보탐이 보여준 바와 같이, 국가기금을 제공받고 그것을 위해 투쟁한 사람들이 탁아소들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한 탁아소 투쟁의 승리를 들 수 있다.17)

이제 다시 내 얘기로 돌아가자. 우리 여성센터가 1976년 문을 닫을 당시, 우리는 단지 몇몇 사람만이 아쉬워하는 방식으로 일처리 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상당한 불안을 갖고 있었다. 처음부터 참여했던 한 여성은 ‘좋아. 이제 다시 시작해서, 또 다른 여성센터를 세우면 돼’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 후 3년 동안 아일링턴에 폭넓은 기반을 갖고 있고 개방적인 자율주의 여성 그룹은 없었다. 단지 의식화 그룹과 학습모임과 더불어 전국 성폭력 재난센터, 여성 쉼터, 반낙태 그룹 및 기타 특정한 이슈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그룹들만 있었다. 아일링턴에 지금은 새로운 여성센터가 설립되고 있다. 그러나 이전에 우리가 운영했던 여성센터와 새로 설립되고 있는 여성센터 사이에는 아무런 연속성도 없다. 새 여성센터는 마치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 같았다. 내 생각에는 새로운 여성그룹이 출발하는데 있어서 학습하거나 학습할 만한 어떤 교훈도 없었던 것 같았다. 에섹스 가에서 활동하였던 페미니스트들은 이 새 센터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그녀들은 한결같이 ‘안돼. 동일한 문제를 또 다시 반복할 순 없다’고 한다.

한/노/정/연

번역: 신병현 연구위원 / 박정미 연구원


1) 이 글은 원래 1978년 8월 아일링턴 사회주의 센터에서 쉴라와 함께 나누었던 토론에 기초한다. ꡔ분열을 넘어서기ꡕ의 초판이 발행된 이후, 나는 책의 몇 부분들을 다시 썼다. 큰 불꽃(Big Flame)의 많은 친구들과 동지들, 그리고 다른 독립적인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해 준 논평은 초판에서는  다소 단편적으로 나타났던 몇몇 생각들을 명확히 하는데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도움이 되었다. 나는 나와 함께 이러한 배움의 과정에 참석한 모든 이들에게 매우 감사드린다.


2) 이 곳은 런던에서 금융가와 공원, 궁전이 몰려있는 중심부 시티(city)의 북쪽에 접해있는 지역이다. 이 곳의 바로 옆이 힐러리 웨인라리트가 소개한 해크니 지역이다. 이 지역을 가로지르며 북동쪽으로 뻗은 비교적 큰 도로가 에섹스 로드(Essex Road)이며, 그 옆으로 킹스크로스 역으로부터 아일링턴과 캠든 지역 사이로 북쪽을 향해  뻗은 도로가 요크 가(York Way)이다.(역자)


3) 목록을 뽑아내는 것은 어렵지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책들은 다음과 같다. 맑스: 1844년의 「경제학 철학수고」, 「독일 이데올로기」. 마르쿠제: 「에로스와 문명」, 「일차원적 인간」. 랭: 「분열된 자아」. 라이히: 「파시즘의 대중 심리」. 바네겜: 「일상 생활의 혁명」. 앙리 르페브르는 「폭발-맑스주의와 프랑스 봉기」에서 무엇이 1968년의 생각과 행동을 이끌었는지에 대해 설명을 시도한다.


4) 자율주의와 개인적 삶에 관한 논쟁으로는 ‘Coming Down to Earth’, Paul Holt, Revolutionary Socialism, no. 4, Autumn, 1979를 참조할 것.


5) 이 이론은 Michael Kidron이 Capitalism and Theory(Pluto press, 1974)에서 개괄한 바 있다.


6)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이는 이제는 유명해진 알튀세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에세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in Lenin and Philosophy, New Left Books, 1971)와 관련되어 있다. 거기서 그는 계급 관계는 두 가지 상호관련된 국가 제도, 곧 ‘억압적 국가 장치’(경찰 등)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특히 한 인간을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학습과정을 통해서 그의 계급 지위에 묶어 두는 학교 체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몇몇 맑스주의자들은 알튀세가 그람시나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같은 초기 맑스주의자들의 현대적이고 저속한 변종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람시는 그의 ‘옥중수고’에서 가족과 대중 매체와 같은 제도들을 언급하면서 ‘시민 사회’의 중요성에 대해서 썼다. 이는 국가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통제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계급 관계와 자본주의 국가를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7) 자율주의 무단 거주자 집단의 경험으로부터, 아일링턴이라는 지역 사회에서 청소년 관련 작업의 시도는 David Robins와 Philip Cohen이 쓴 Knuckle Sandwich(Penguin, 1978)에 다채롭게 묘사되어 있다.


8) 예를 들어, Elizabeth Wilson의 ‘Women and the Welfare State', Red Rag, pamphlet no.2, 1974를 참조하라.


9) 이는 Barbara Ehrenreich와 Diedre English가 For Her Own Good(Pluto Press, 1970)에서 잘 그려져 있다.


10) 이 개념은 Barbara Ehrenreich가 사회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그녀의 훌륭한 연설(Socialist Revolution, no. 26, October-December, 1975)에서 사용되었다.


11) Heidi Hartman은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사회 구조와 모든 사회적 관계를 언급하면서, 가부장제를 ‘여성에 대한 남성의 체계적 지배’로 정의하였다. (‘The Unhappy Marriage of Marxism and Feminism: Towards a More Progressive Union' in Capital and Class, no. 8, Summer 1979). 이 개념의 유용성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보편적임에도 불구하고, 여성 억압이 사회마다 다름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나는 이 개념이 매우 유용하다고 여기지만, 더욱 충분한 토론을 위해서는 R. Mcdouough와 R. Harrison의 ‘Patriarchy and Relations of Production'(in Kuhn and Wolpe, Feminism and Materialism, Routledge and Kegan Paul, 1978)과 Z. Einstein의 ‘Developing a Theory of Capitalist Patriarch and the Case for Socialist Feminism'(in Eisenstein, Capitalist Patriarch and the Case for Socialist Feminism, Monthly Review Press, 1978), 그리고 P. Atkinson, ‘The Problem with Patriarchy'(in Achilles Heel, no. 2)를 참조하라.


12) Mariarosa Dalla Costa, ‘Women and the Subversion of the Community’ in The Power of Women and the Subversion of the Community. M. Dalla Costa and S. James (Falling Wall Press, 1973). 이 논쟁에 관한 더 상세한 논의는 다음을 볼 것. Jean Gardiner, ‘Women's Domestic labour’, New Left Review, no.89, 1975.


13) Valerie Charlton, ‘The Patter of Tiny Contradictions’, Red Rag, no.5, 1973.


14) Mandy Snell, ‘The Equal pay and Sex Discrimination Acts: Their Impact on the Workplace’, Feminist Review, no.1, 1979.


15) Mary Kathleen Benet, Secretary: An Enquiry into the Female Ghetto, Sidgwick and Jackson, 1972.


16) 이에 반대하는 일부 주장들도 있고, 이러한 이슈들에 관한 대규모 시위 중 일부는 이들이 배후에서 주요한 추진력을 제공한 것이 사실이지만,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페미니스트들만이 여성에 가해지는 강간과 폭력에 관해 논의해 온 것은 아니다.


17) 탁아소, 놀이공간 및 기타 지역공동체 시설에 관한 이런 종류의 유사한 승리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Jan O'Malley: The Politics of Community Action, Spokeman, 1977.


1999-12-1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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