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 민영화1
일본국철 민영화 경과와 그 이후
-경영상태와 고용문제를 중심으로-
1. 들어가는 말
198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신보수주의 신자유주의 정책 기조 하에 공기업 민영화가 대대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일본에서의 공기업 민영화는 나카소네 정권 하에서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일본 국철도 80년대 초반부터 민영화를 향한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수행하였고, 1987년에 이르러서는 분할 매각을 통한 민영화를 전격적으로 단행하였다.
한국철도도 80년대 후반부터 구조조정을 진행하고 있는데 95년 이후는 그 강도를 높여 나가고 있다. 99년 4월 기획예산위에서 철도 민영화방안을 확정한 이후 건설교통부는 철도민영화 구체시안을 마련하기 위한 연구사업을 발주한 상태이다. 지금까지의 한국철도구조조정 과정은 민영화를 위한 사전포석이라는 점에서 일본국철과 유사한 형태를 띠고 전개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87년 민영화를 단행하여 98년 청산사업단을 해산함으로써 일단락짓게 된 일본국철의 민영화 과정과 그 결과를, 경영상태와 노동자의 고용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일본국철의 민영화가 남긴 허와 실을 살펴봄으로써 한국철도의 민영화를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서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았으면 한다.
2. 일본 국철 민영화 개요
일본철도 민영화 추진 배경은 누적되는 재정적자를 해소할 필요성과 전후 일본의 전투적 노동운동을 대표해 온 국철노동운동을 무력화하려는 의도가 맞물려 있었다. 아래에서는 철도경영상태와 국철노동운동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1)국철노동운동의 이해
1872년 개통된 일본철도는 1907년 국유화를 거쳐 1949년 공기업체제로 전환하였다. 공기업체제로 전환하기 직전인 1948년 일본 정부는 개정국가공무원법, 공공기업체노동관계법을 제정하여 중노위, 지노위와 별도로 공기업체 노동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로써 공기업노동권은 강제력 없는 ‘권고’ 수준의 적용을 받게 되었으며 협상권은 인정하되 파업권은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전후 국철의 노동운동은 정부의 온갖 탄압에도 불구하고, 민간부문의 협조주의와 대비되는 공공부문의 전투주의 노선을 주도하였는데 대표적으로 국철노동조합(이하 國勞)과 동력차노동조합은 직장교섭에 바탕을 둔 직장투쟁을 조직하고 연공에 의한 승급을 쟁취하여 노동자간 경쟁을 방지하고 평등주의를 쟁취했다. 국철의 대표적인 노동조합인 국노는 65년 26차 정기대회에서 ‘현장 노동운동을 정착’ 시킨다는 방침 아래 ‘현장의 문제는 현장에서 의견을 수렴하여 교섭하고 해결한다’는 운동을 전개했다. 즉 ‘직장단체교섭확립’이 불가피한 22개 항목에 대해 68년 7월1일부터 현장협의제를 실시1)하였다. 또한 연공주의를 정착시켰고 종신고용을 실현하였으며 노동자가 주도하여 다이아2)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또한 69년부터 ‘생산성 향상운동’ 분쇄투쟁을 전개하여 승리로 이끌어 냄으로써 71년 국철 당국은 노동조합에 굴욕적인 각서를 쓰게 되었다.
그 후, 국노는 75년 공노협에서 결의한 ‘파업권 탈환을 위한 파업’을 8일간이나 단행하였는데 이 투쟁은 파업에 동참하기로 했던 노조들이 모두 참여하지 않은 상태에서 국노 단독으로 수행한, 노동자의 권리회복을 위한 가장 높은 수위의 투쟁이었다. 이 투쟁이 진행된 8일간 어떠한 열차도 운행하지 않았다. 이 투쟁은 자본과 정부에게도 체제유지의 핵심적 관건으로서의 의미가 있었고, 투쟁은 총자본 대 총노동의 전면적 대결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 투쟁에서 국노는 대량징계 및 202억엔의 손해배상 청구를 당하기도 했지만 투쟁 이후 실시한 조합원 의식조사에서는 투쟁의 정당성에 대해 여전히 높은 지지율을 보였다. 이후 국노는 ‘국민의 국철’ 민주화․재건 방침을 결정하고, ‘국민의 국철’을 제안하는 투쟁을 전개한다.
2) 국철의 경영상태 및 민영화 과정
1955년까지만 해도 국철은 육상수송에 있어 거의 독점적 지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로확장과 개인승용차, 화물차가 증가하면서 81년 여객수송의 24.36%, 화물운송의 7.8% 수준으로 떨어졌으나 철도는 여전히 교통수단의 중요역할을 담당하였다.
<표1> 교통기관별 분담률 (단위 : %)
|
년도 |
국철 |
사철 |
자동차 |
선박 |
항공 |
여
객 |
1955년
1975년
1981년 |
55.0
30.3
24.3 |
27.1
15.3
15.7 |
16.6
50.8
55..4 |
1.2
1.0
0.8 |
0.1
2.7
3.9 |
화
물 |
1955년
1975년
1981년 |
52.0
12.9
7.8 |
8.4
0.2
0.2 |
11.7
36.0
42.4 |
35.5
50.9
49.5 |
0.0
0.1
0.1 |
자료: 草野 厚著, 「國鐵改革-政策決定게임의 주역들」, 중앙공론사刊, 1989.2.
줄곧 흑자를 유지하던 국철은 고속전철인 신간센이 개통된 1964년을 기점으로 경영적자가 급등하게 된다. 이는 경영능력을 넘는 설비투자로 인한 차입금이 증대한데 주요 원인이 있다. 73년 오일쇼크 이후에는 경기부양대책의 일환으로서 설비투자를 강요받게 되어 매년 1조엔 이상 투자하게 된다. 일본 정부는 공항, 항만, 도로건설에 대해서는 국고부담으로 충당했지만 철도에는 이를 적용하지 않았고, 70년대 말에 이르러서야 장기채무 보류조치가 2회에 걸쳐 이루어졌다. 또한 설비투자에는 정치가의 입김3)도 크게 작용해 불필요한 곳에 철로를 깔거나 역을 만들고, 엉뚱한 곳에 급행열차를 정차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표2> 국철의 재정상태(1963-86) (단위 : 10억¥)
|
1963년 |
1964 |
1966 |
1971 |
1976 |
1981 |
1986 |
1998년 |
총수입 |
568 |
600 |
794 |
1,178 |
1,993 |
3,173 |
3,605 |
|
총지출 |
511 |
630 |
854 |
1,412 |
2,907 |
4,259 |
4,637 |
|
당년손익 |
57 |
△30 |
△60 |
△234 |
△914 |
△1,086 |
△1,361 |
|
손익누계 |
159 |
129 |
△53 |
△799 |
△3,514 |
△7,586 |
△15,482 |
|
부채 |
689 |
831 |
1,368 |
3,087 |
7,998 |
16,151 |
25,065 |
28,800 |
* 1998년은 청산사업단 해산 당시(98.10.) 국가로 넘겨진 부채 총액임.
자료: 유희복, 「세계 주요 철도개혁사례,『한국철도』, 철도청, 97년 11월호.
<표3> 국철 민영화 과정
연도 |
추진과정 및 주요 내용 |
1975년 |
12월 ‘일본국철재건대책요강’ 발표-2년간 운임 50% 연속인상(합계125%), 5,000명 감원 |
1979년 |
‘국철재건 기본구상안’ 발표-6년간 75,000명 감원(35만명 체제목표), 적자지방선 폐지 |
1980년 |
국철재건특별조치법 채택-74,000명 감축, 철저한 ‘감량경영’을 목표로 지방선 폐지 |
1981년 |
3.1. 국철재건법 공표
5.1. 국철경영개선계획(35만명체제목표), 40개 지방선 폐지, 합리화 추진 |
1982년 |
*춘투직전 의도적 인사이동. 분할민영화에 취약하다고 판단된 수뇌부 경질.
*6월 삼총위원회 국철재건방책 발표
*7.30. 제2임조3차 답진 - 3공사 분할민영화와 국철재건감리위원회 설치 요구 |
1983년 |
6.10. 국철재건감리위원회 발족-분할민영화 작업 개시. |
1984년 |
12.25. 전전공사 민영화 |
1985년 |
7.26. 국철재건감리위원회 최종답신-‘국철개혁에 관한 의견’발표. 6사 분할. |
1986년 |
12월 국철개혁=분할민영화 관련 8법안 공표(일본국유철도개혁법)-당시 채무 5조599억엔은 일반회계로 인계하여 무이자 대부형태로 전환하고 채무는 인수회사가 인계한다. 희망퇴직자를 모집(퇴직금과 기준임금 10개월치 추가지급)하여 잉여인원을 줄이고 55세 미만은 퇴직후 국가기관, 자치체, 특수법인에서 근무하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한다. |
1987년 |
4.1. 분할 민영화 단행 |
자료: 김혜란,「일본국철의 분할 민영화와 그 결과」,『철도경영합리화와 노동자의 대 응』,철도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1997.
국철민영화는 6개 여객회사와 1개 화물회사, 기타 5개사로 분할되어 최종적으로 87년에 완료되었지만 이미 10년여에 걸쳐 감량경영과 적자선 폐지, 운임 인상에 의한 공공성 포기, 국노 무력화 책동, 노노간 분할 통제4) 등 민영화를 위한 사전준비를 체계적으로 진행하여 왔다.
<표4> 국철 분할민영화로 발족된 회사
구분 |
신설조직 |
경영형태 |
주요업무 |
영업키로 |
노동자수 |
여객철도회사
(6개사) |
JR북해도
JR동일본
JR동해
JR서일본
JR사국
JR구주 |
주식회사
″
″
″
″
″ |
여객철도사업 |
2,542
7,452
1,984
5,091
837
2,101 |
12,719
82,469
21,410
51,538
4,455
15,000 |
화물철도회사 |
JR화물 |
주식회사 |
화물철도사업 |
노선사용료지불 |
12,005 |
신간선관리 |
신간선소유 특수법인 |
공사 |
신간선 대여 |
2,012 |
64 |
장기부채등관리 |
국철청산사업단 |
공사 |
청산업무 |
|
2,520 |
기타회사 |
*철도통신회사
*철도정보시스템회사
*철도총합기술연구소 |
주식회사
주식회사
재단법인 |
통신
컴퓨터서비스
연구개발 |
|
570
279
550 |
* 민영화 당시 재고용된 노동자수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다. 이는 해고 이후 신규채용하는 과정에서 변동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부분의 통계가 20만명 내외로 되어있다.
자료 : 김혜란, 「일본국철의 분할 민영화와 그 결과」『철도경영합리화와 노동자의 대 응』,철도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1997.
: 유희복,「세계 주요 철도 개혁사례」,『한국철도』,철도청, 97년 11월호. 재구성
민영화 직전 장기부채 25조엔과 퇴직연금부담액 5조엔을 포함하여 국철민영화하는데 소용되는 총비용은 37.2조엔으로 산출되었다. 이 중 약 16%에 달하는 5.9조엔은 민영화한 3개 JR여객회사(4.6조억엔)와 1개 화물회사가 떠맡았으며, 신간선보유기구가 5.7조엔을, 나머지 25.6조엔을 청산사업단이 인수하였다. JR동일본, JR동해, JR서일본 3사간에는 수익격차를 시정하기 위해 신간선 임대료에 차등를 두어 수익조정을 꾀하였고, 수송수요가 적어 경영 불안정이 예상된 JR북해도, JR사국, JR구주 등 3섬회사는 채무승계 면제와 총액 1.3조엔의 ‘경영안정기금’을 지원하였다.
<표5> JR여객 각사 발족시의 경영제원
|
JR 북해도 |
JR동일본 |
JR동해 |
JR서일본 |
JR사국 |
JR구주 |
계 |
자본금(억엔)
자산액(억엔)
(경영안정기금)
승계장기채무액(억엔) |
90
9,761
(8,822)
- |
2,000
38,845
( - )
32,987 |
1,120
5,520
( - )
3,191 |
1,000
13,163
( - )
10,158 |
35
3,239
(2,082)
- |
160
7,380
(3,877)
- |
4,405
77,908
(12,781)
46,338 |
자료 : 손장훈, 「세계 주요 철도 개혁사례」,『한국철도』, 철도청, 97년 11월호.
<표6>잉여인력 취업현황 (단위 : 명)
공공부문 |
관련기업 |
다른 산업체 |
자력취업 |
연례퇴직 |
청산사업단 |
계 |
7,320 |
10,450 |
12,400 |
16,240 |
6,300 |
23,660 |
76,370 |
자료 : 김해수,「일본철도의 관련사업 추진 개요」,『한국철도』,철도청, 1998.9월호.
<표7> 국철과 JR여객회사 비교
사항 |
국철 |
JR여객회사 |
근거법 |
일본국유철도(1948년 법률 256호) |
여객철도회사 및 일본화물철도주식회사에 관한 법률(1986년 법률 제88호) |
법인격 |
공법인(정부기관과 거의 같음) |
특수회사(민법, 상법의 적용) |
사업의 범위 |
철도사업 등 법률상 명기되어 있는
것에 한함. |
철도사업의 허가를 얻어서 그 밖의 사업을 경영할 수 있음 |
국가에 의한
규제 |
*임원의임명(총재-내각,부총재,이사-허가)
*국회에 의한 예산결의
*결산 국회 제출
*운임결정주의(제정법,일본국유철도운임법 등)
*예정노선의 법정(철도부설법)
*사업의 양수-허가
*영업선의 양도-원칙금지 |
*신주발행, 사채모집, 차입금의 인가
*대표이상의 선임 및 해고의 결의 허가
*사업계획의 허가(철도사업법)
*운임허가제(철도사업법)
*사업종별, 각선마다의 면허(철도사업법)
*사업의 양도-허가 |
노동관계 |
공기업체노동관계법 적용 |
노동조합법 적용 |
자료: 손장훈, 「일본국철( JNR) 민영화의 경험과 한국철도에의 교훈」, 『한국철도』, 철도청, 1998.5월호
민영화 직전 국철 직원 총수는 약 27만여명(국노조합원 약 20만명)에 달하였는데 대략 7만여명의 잉여인력이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하였다. 분할된 각사에 재취업된 인원은 20만 3,579명이었고 7만여명은D <표6>처럼 분산되었는데 청산사업단에 소속된 23,660명 중 1,047명은 3년 임기보장이 끝남과 동시에 90년 4월 1일자로 해고되어 1999년 12월 말 현재까지 복직투쟁을 하고 있는 상태다.
민영화 당시 철도사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시켜 사업영역의 다각화를 통한 관련사업 수익 확대기반이 조성되었다. 그러나 <표7>에서 보는 것처럼 ‘여객철도회사 및 일본화물철도회사에 관한 법률’에는 운수장관의 JR각사에 대한 절대적 감독권한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JR각사는 국철시대보다 더 엄격한 감독관청의 통제가 들어오고 있어, 또다른 관료지배 형성의 단초가 마련되고 있다는 우려가 크다.
3) 노동조합의 대응
국노는 계속되는 인원감축과 지방선 폐지에 맞서 76년 ‘국철민주화․재건’ 방침을 결정하고 77년에는 ‘국민의 국철’ 민주화․재건방침을 확정하여 ‘민주적규제․자주적규율의 확립’ 방침을 제기하는 한편 통합교통체계 운영수립, 체계적인 공공교통기관의 정비, 모든 교통 운수노동자의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였다. 또한 81년에는 ①공공교통 우선의 통합교통체계 확립 ②국철경영구조의 민주화 ③국철재정의 개선 ④‘국민의 국철’을 위한 정책실시 ⑤노동조건의 충실한 확보 ⑥민주적 노사관계 확립을 골자로 한 ‘국철의 민주적 재건에 관한 제언’ 등의 정책 요구 투쟁을 벌여 나가는 한편 국철노동조합과의 연대, 교통관련 노동조합 연대, 국민적 연대를 광범위하게 벌여나갔다.
85년 7월 재건감리위가 ‘국철개혁에 관한 의견’을 제출하자 국노는 그 의견에 대결하기로 결정하고 파업을 감행했다. 이 파업은 경영합리화의 여파가 매우 엄혹한 시기에 단행된 것이지만 1,588분동안 67,700명의 조합원이 참가하였다. 그 해 12월 국노는 5,000만명 서명집약집회를 열었는데 대국민 서명은 3,300만명을 넘었다.
한편 국노 조합원 중에는 사회당원이 많았기 때문에 국철에 대한 사회당의 입장은 매우 중요했다. 사회당은 ‘초기 분할 민영화 반대에서 → 분할은 반대하지만 통합교통체계를 확립하는 주식회사로의 전환은 필요하다는 쪽으로 입장을 전환 → 이 과정에서 사회당, 총평, 운수장관 사이에 교섭테이블을 구성하여 ①3년 내에 완전 취업 보장을 전제로 ②국노 운동방침을 수정(국노의 모든 법원제소 철회)하고, ③고용안정협약과 노사관계 정상화 담화를 발표할 것을 합의’했다. 그러나 국노 중앙위(86.10.)는 수선사대회에서 이를 거부하여 합의에 찬성했던 구지도부는 총사퇴하고 신지도부가 구성되었다. 신지도부 중심의 국노는 최근까지 해고자 복직투쟁을 지원하여 왔으나 ‘국노 해고자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정부의 구두 약속에 따라 99년 3월 국철개혁법을 인정함으로써 사실상 민영화를 인정하게 되었다.
3. 민영화의 결과
그렇다면 민영화를 전후한 철도산업 경영상태와 노사관계는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정리해 보자.
먼저 공공성 후퇴의 문제를 들 수 있다. 민영화 직전 지방선은 국철경영악화의 주요한 요인으로 지목되어 왔다. 이 과정에서 적자 지방선이 민영화 초기에만 29개 노선 1,412㎞가 폐지되었다. 이는 일본국유철도법 제1조 ‘국가가 국유철도사업특별회계를 유지하고 철도사업과 그외 일체의 사업을 경영하며 능률적인 운영으로 발전시키고, 나아가 공공의 복지를 증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이에 일본국유철도를 설립한다.’라는 취지와 목적을 완전히 폐기한 것이다.
이에 반해 기존 국철노선의 경우 운임인상은 규제된 편이고, 서비스도 부분적으로 향상되었다. 이것은 민영화에 대한 국민의 반발을 고려한 초기 조처의 결과로 볼 수 있다.
두번째로 민영화 이후의 JR의 경영상태를 보자. 민영화 직후 일본정부는 민영화된 이후 철도의 경영이 흑자로 돌아섰다고 대대적인 선전을 했으며 이로 인해 일본철도 민영화는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앞의 <표5>에서 보았듯이 막대한 부채탕감, 경영안정기금 지원, 선로사용료의 경감(JR화물), 수송량의 증가로 인해 7개 회사 모두가 흑자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또한 철도관련사업 규제 완화 등에 의한 경영의 다각화로 관련사업수입이 전반적으로 늘고 있다고 하지만 12년이 지난 98년 9월 중간결산에서는 구주, 북해도, 사국의 3도회사와 화물 등의 4사가 영업이익에서 모두 적자로 판명되었다. 과거 국철시대에는 북해도, 구주 등의 지방적자를 도시권 수입에서 충당함으로써 국민의 철도로서의 경영을 유지했으나 현재 3도3사와 화물회사의 경영은 파산상태로 보여진다. 결국 국철 민영화는 한마디로 말하면, 추가적인 국민부담과 국철노동자의 희생 위에 3도 회사를 잘라버리고 3개의 고수익 여객회사를 만든 것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표8> JR 7사의 98년 9월 중간결산5) (단위: 억엔. 천만원 이하는 절하)
|
매상고 |
경상이익 |
순이익 |
동일본 |
9629(▼1.2) |
590(▼4.0) |
243(▼24.6) |
동해 |
5588(▼2.9) |
378(▼10.2) |
185(▼19.6) |
서일본 |
4603(▼3.0) |
239(▼21.4) |
90(▼40.4) |
구주 |
790(▼5.4) |
22(9.0) |
6(13.7) |
북해도 |
486(▼4.8) |
▼3(-----) |
▼18(----) |
사국 |
221(▼9.6) |
▼10(----) |
▼29(----) |
화물 |
832(▼9.3) |
▼79(----) |
31(----) |
* * 괄호안은 전년 동기비 신장률%. ▼는 마이너스, 적자
자료 : 98.12.1. 讀賣신문
또한 87년 국철청산사업단은 부채 25조5천억엔을 인수받았지만 국철용지의 86%를 매각(6조5천억엔)하고도 98년 10월21일 해산 당시 28조8천억엔의 부채가 국가의 일반회계로 넘어갔으며 1872명의 직원 중에서 99년 3월 현재 800여명의 고용이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다.
세 번째로 노동자들의 고용파괴, 근로조건 파괴를 들 수 있다.
위의 <표3>에 보듯이 일본 정부는 국철의 경영개선을 위해서는 35만 체제 유지를 목표로 설정한 바 있다. 35만 체제가 유지되면 국철 경영은 안정화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래 <표9>에서 알 수 있듯이 1980년도 41만여명에 달했던 국철 노동자수는 민영화 당시 20여만으로 감원되었고, 현재도 지속적으로 감원하고 있는 실정이다. 80년도에 비해 국철노동자수는 약 46% 수준으로 줄어든 것이다.
<표9> 국철노동자수의 변화 추이
년도 |
1960년 |
1965년 |
1970년 |
1980년 |
1984년 |
1986년 |
1987년 |
1991년 |
1995년 |
인원(명) |
44,2,500 |
462,400 |
459,700 |
413,600 |
358,050 |
277,700 |
203,579명 |
190,679 |
189,000 |
자료 : 草野 厚著, 「國鐵改革-政策決定게임의 주역들-」, 중앙공론사刊, 1989.2.
石川元也․本多淳亮 編, 「反轉攻擊-國勞運動45年に學ぶ」,1991.3. 재구성
이렇게 계속되는 감원조치로 인해 인건비 비율이 획기적으로 낮아졌으며 이는 전형적으로 정리해고에 의존한 경영개선이라고 볼 수 있다. 89년 영업비용 중 인권비 비율를 사철(社鐵)의 경우와 비교해도 대수사철의 평균이 약39%인데 비해 JR동해의 자료에 의하면 JR동일본은 29%, 동해14%, 서일본36%로 크게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6)
또한 노동강도 강화 등에 의해 노동조건이 크게 악화되었다. 1990년 운전관계노동실태조사단에서 실시한 승무원의 노동조건 조사보고서인 「국민과 운전노동자의 생명과 안전-근기지구에 있어 JR서일본의 운전노동 실태조사 중간보고」에 의하면 분할․민영화 전후와 비교하면 동력차승무원(기관사)의 승무시간은 평균 1.3배, 승무거리는 1.7배 증가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은 규칙적인 식사와 화장실 가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어 JR 화물에서는 ‘간이변기’를 지참하고 승무한 사례도 있다고 한다. 또한 잔업과 QC 활동이 반강제적으로 강요되고 있고, 시업전과 근무종료 후에 무급으로 오렌지카드의 판매활동 강제되었으며 휴일까지도 영업활동을 하도록 강요되었다. 이러한 세일즈 활동과 QC활동에 대해 협력하지 않거나 항의하면 인사고과에서 마이너스 평가를 받게 되고, 승급․승격에서의 차별화가 이루어지며 감봉 등의 조치가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관례였던 무료승차증제도 폐지되었다.
네번째로 사고급증을 들 수 있다.
JR 경영간부의 ‘사고는 감소하고 있다’라는 발언에도 불구하고 열차사고․중대사고의 건수 및 사상자수가 증가하고 있어 JR각사의 안전대책은 시급한 과제로 제기되고 있다. 특히 경영상태가 상대적으로 열악한 JR화물의 차량은 민영화 이후 전혀 교체되지 않아 매우 위험한 상태라고 지적되고 있다.
다섯째, 국노 파괴와 일본노동운동의 전투성이 거세되었다
국철은 민영화 과정에서 전원 해고하고 선별채용하는 방식으로 고용을 승계했다. 그 중 국노 조합원은 재취업 과정에서 많은 불이익을 받았는데, ‘국노탈퇴’가 재고용조건이 되기도 하였다.
국노는 81년 244,834명이었던 조합원이 1988년 39,520명으로 줄었고, 99년 현재 2만 3천여명의 소수노조로 전락했다. 이는 일본노동운동의 전투성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며 진보진영의 입지가 대폭 축소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7)
여섯째, 1047명 해고자들은 아직도 원직복직 투쟁을 하고 있다.
90년 청산사업단으로부터 해고된 노동자는 1047명으로 국노조합원이 962명, 그외 전동노 등의 조합원이 있었다. 해고 초기에는 다수가 생활고를 못 이겨 자살을 하기도 했다. 이후 국노 조합원은 전국적으로 36개 투쟁단을 조직하여 투쟁단별 기업운영과 아르바이트 등으로 경제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하며 가족까지 포함한 복직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있고, 국노해고자 중 72%가 99년 현재 투쟁단으로부터 생계비를 받고 있다. 또한 투쟁단을 지원하는 지역 공투위가 전국에 조직되어 있는 상태다.
국노는 해고자 지원사업에 적극적이어서 국노는 전체 조합원으로부터 매월 3천만엔 정도를 모금하여 해고자 1인당 월 3만엔 정도 지원하는데, 이를 92년부터 99년 현재까지 8년째 계속하고 있다.
99년 3월 국노는 해고자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정부의 구두약속에 따라 분할민영화의 근거가 되었던 국철개혁법을 공식적으로 인정함으로써 내용적으로는 민영화를 수용하는 셈이 되었다. 현재 국노와 정부는 교섭중인데 해고자의 요구는 ①해고철회와 JR로의 원직복직, ②임금․연금의 원상회복, ③해결금(위로금)의 지급, ④국노조합원에 대한 차별대우 철회와 국노와의 노사관계 원상회복 등이다. 정부는 돈으로 해고자 문제를 처리하려는 의도가 있는 듯하고, 일본의 고용문제가 심각한 상황이기 때문에 국철해고자 처리 방향은 이후 일본 고용문제 해결의 중요한 고리가 될 수 있기에 매우 민감한 사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98년 10월, 28조 8천억엔이라는 막대한 부채를 남긴채 국철청산사업단은 해산되었다. 해고자들은 여전히 투쟁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과제다. 일본 정부는 분할민영화 실패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못하지만 전면적인 재검토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8) 이로써 민영화와 공공성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참고자료】
서광석․심재익, 『철도청의 공사화방안 : 조직체계 및 공공부담 보상방안』, 교통개발 연구원.
김연규․양근률, 『철도사업의 구조개혁방안 연구』, 교통개발연구원 연구총서 98-15.
손장훈, 「일본국철(JNR) 민영화의 경험과 한국철도에의 교훈」,『한국철도』, 철도청, 1998 5월호
김해수, 「일본철도의 관련사업 추진개요-JR구주를 중심으로」,『한국철도』, 철도청, 1998 9월호
이용상, 「일본의 국철민영화와 노동조합의 관계」『지방자치』, 1995 7월호
조재준, 「일본철도의 민영화와 남겨진 과제들」,『한국철도』, 철도청, 1997.
유희복, 「세계 주요철도 개혁사례」,『한국철도』, 철도청, 1997 1월호
심철보, 「JR그룹 7개사의 1996년도 사업계획 개료」,『한국철도』, 철도청, 1996 7 월호
김혜란, 「일본국철의 분할 민영화와 그 결과」, 『철도 경영합리화와 노동자의 대 응』, 철도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1997.
國鐵勞動組合編, 『國鐵勞動組合 50年史』, 노동순보사, 1996.
草野 厚著, 「國鐵改革-政策決定게임의 주역들-」, 중앙공론사刊, 1989.2.
石川元也․本多淳亮 編, 「反轉攻擊-國勞運動45年に學ぶ」,大月書店, 1991.3.
「責任はJRにあり」發刊委員會, 「責任はJRにあり」, 1999.2.
1) 현장협의제 확립은 일본 노동운동, 특히 민간기업에서 노사협의체제가 확보해지던 시기에 쟁취된 것으로 국노운동의 전투성을 상징하고 있다. 직장협약 운동은 14년간 진행되어 오다가 82년 12월 1일을 기점으로 무력화되는데 이는 민영화 사전단계에서 진행된 총자본의 노조무력화 책동의 일과정이었다.
2) 다이아란 Diagram의 약어로써 승무원들의 운행표를 일컫는다. 철도 당국은 노동자들의 노동강도를 강화할 때 승무원(특히 기관사)의 다이아를 개악한다. 민영화 이전 영국철도도 노조가 다이아 작성권을 갖고 있었다. 노동조합이 다이아 작성기준을 갖고 있다는 것은 노동조합의 강력한 힘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한국철도 승무원들은 다이아 작성에 노동자 참여가 보장되어 있지 못하고, 더욱이 다이아 작성 기준이 거의 전무하여 한 달 동안 휴일이 전혀 없거나 야간운행을 밥먹듯 해야 하는 고통을 당하고 있다.
3) 대표적인 예로 일본의 보수정객인 다나카의 고향 니가타에 신간선 설치가 이루어졌는데 이 지역은 북부 농경지대로써 승객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영원히 채산이 맞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라고 한다.
4) ‘국철파산론’, ‘규율 없는 국철’, ‘악관행의 국철’ 등 악의적 여론 조성과 밑으로부터의 직장규율총점검 실시령 등으로 노조 내부에 대한 공격 단행했다. 자민당의 국철노사관계 조사위원회인 삼총위원회가 작성한 ‘국철재건방책’은 국노의 모든 민주적 권리를 부정하는 내용이었고 82년 국철당국은 직장협의제 무력화방안을 제시하였다. 동노나 전시노는 ‘이러한 국철당국의 처사는 직장투쟁을 압살하려는 의도이지만 현재의 상황에서는 더 이상 획득할 것이 없다’며 국철당국과 사전에 협약을 체결하였고 ‘현장협약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선전하던 철노도 국철당국과 독자적으로 협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67년 7월1일부터 14년간 실시해오던 현장협약은 82년 12월1일을 기점으로 국노는 완전 무협약 상태로 빠지게 되었다.
5) 구주는 안정화기금에서의 수입 95억엔 때문에 경상이익단계에서는 22억엔의 흑자로 나타난 것이고 북해도와 사국은 안정화기금으로 메꿔도 적자이다. 화물은 79억엔이 적자이지만 토지매각 등으로 164억엔의 특별이익이 있어 순이익에서는 31억엔 흑자로 나타났다.
6) 石川]元也․本多淳亮 編, 「反轉攻擊-國勞運動45年に學ぶ」,1991.3.
7) “노동조합에 대응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민영화밖에 없다”는 국철재건감리위원회 위원장의 말이나, “총평을 붕괴시키려고 생각하고 있었죠. 국노가 붕괴하면 총평도 붕괴한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AERA 96.12.-30호 中重根元 수상의 발언 중에서)라는 발언에서 국노파괴, 총평파괴의 의도가 분명히 드러난다.
8) 강연자, 「국철 5․28 대회를 다녀와서」, ꡔ현장에서 미래를ꡕ, 1999년 7월, 4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