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철 의
연구위원/ 철도 민주노조 추진위원회 사무국장
이렇게 본다
파업유도, 특별검사, 그리고 김대중 정권
“조폐창 조기 통폐합 결정은 파업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며 사실상 파업유도는 없었다.” - 1999년 12월 17일
수사결과 발표를 마친 강원일 특별검사 회견문 가운데서 -
“조폐공사 파업은 사실 우리가 만든 거다. 공사, 이런
정부투자기업체에 구조조정이 필요한 시점인데, 어떻게 할까
그러다가 거기(조폐공사 노조)서 조짐이 있어서 우리가 아래에
지시해서 복안을 만들었다. 사실 우리가 (파업을) 유도를 한
거야. 거기 사장이 강희복이라고 고등학교 후배인데, 얘기가
통하더라고. 그래서 옥천에서 경산으로 기계도 옮기고, 사실
그냥두면 조폐공사 구조조정은 2002년에나 가능하게 돼
있었다고. 공사, 이런 공기업체에 파업이 일어나면 우리가
어떻게 한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그랬는데, 그쪽이 너무 일찍
손을 들고 나와 버린 거야. 그래서 싱겁게 끝났지. 그게
잘됐으면 지하철 파업 이런 것도 없었을 텐데. 그전에
총장님한테 말씀드렸더니 처음에는 무슨 얘긴지 잘 못 알아
들으셔서 고개를 갸우뚱하시더라고. - 1999년 6월 7일 진형구
대검 공안부장 발언 가운데서 -
있는 사실도 덮어 버린 특별검사의 활동
조폐공사 노동조합 파업유도 사건에 관한 강원일 특별검사의
활동이 사실상 끝났다. 과연 특별검사가 새로 밝혀 낸 것이
무엇인가? 없다. 사실을 밝혀 내기는커녕 있는 사실도 덮어
버렸다. 그의 결론은 “진형구는 파업유도를 하지 않았고, 공안
합수부 회의는 조폐창 조기통폐합과 연결되지 않으며, 강희복과
진형구가 파업유도를 협의한 것은 밝히지 못했다.” 강원일
특별검사의 기자회견문, 「경향신문」, 12월
17일.
는 것이다.
그는 또 “조폐창 통폐합은 경쟁력 강화가 목적이고, 통폐합을
하면 파업이 불가피하고, 옥천창이 없어지고 인력이 감소하니까
노조세력이 약화되는 것이지 그걸 목적으로 통폐합을 한 것은
아니라.” 고 했다. 또 “1월 7일 경찰도 옥천 경찰서장이 독자
결정한 것이지 대검 공안부가 지시했다고 볼 수는 없다.” 같은
날 「경향신문」 회견문.
는 해석까지 덧붙였다. 나머지는 더 말할 것도 없는 내용들이다.
강희복을 구속하고 여러 가지 법조항을 동원했지만 요식 행위일
뿐이다. 진형구는 오히려 “별로 잘못한 것도 없는데 과장해서
발언한 희생양”으로 감쌌다. 대전지검이나 대전 지방 노동청도
약간 개입한 흔적이 있지만 파업을 유도한 정도는 아니고 애매한
부분이 있어서 검찰의 판단에 맡긴다고 하였다. 한심하다. 고작
이 정도의 결론을 얻고자 언론이 그토록 떠들어댔는지 통신에
조폐공사 파업유도 관련기사가 12월 22일 현재 2,054건이 올라와
있다.
, 검찰수사에 국회 국정조사, 국회청문회에서 특별검사까지
이르는 지리한 과정을 거쳤는지 한심한 생각뿐이다.
진형구가 한 이야기를 돌이켜 보자. 웬만한 사실은 거기에 다
나와 있다. 대검을 비롯한 공안기관의 노사문제 개입과
불법․부당한 탄압을 이만큼 생생하고 짧게 이야기 할 수
있는가? 우선 구조조정과 관련한 정부의 지침이 나와 있고
검찰총장에게 보고했다는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하고 있다.
검찰이, 국회가, 특별검찰이 진형구의 발언만 제대로 추적했어도
많은 부분을 밝혀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오직 사실을 덮거나 축소하거나 왜곡하고 덮는
데만 힘을 썼다. 검찰이나 청와대는 진형구를 “폭탄주를 마시고
실언한 과시욕이 강하고 경솔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실언한 괘씸죄를 묻고 “파업유도를 단독으로 했다.”며 책임을
씌워 구속하였다. 국회 국정조사와 청문회는 정치적
이해득실만을 따지는 여야의 공방에 묻혀 ‘속빈강정’이 되어
버렸다. 민주노조 운동의 항의와 투쟁으로 만들어 낸 특별검사의
수사결과는 이제까지의 모든 성과를 물거품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파업유도건에 관련해서 무엇이 요구되었는가
이 같은 결과는 1999년 2월 1일부터 2월 28일 사이에 “한국
조폐공사 옥천조폐창 진상조사단” 박원순 변호사 (참여연대
사무처장), 김윤자 교수(한신대,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 협의회
대외협력위원장), 김도형 변호사(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
박석운 소장(노동정책 연구소장, 고용․실업 대책과
재벌개혁 및 IMF대응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 집행위원장)등
4명으로 구성되었다. 진형구의 파업유도 발언 이전 시기이기
때문에 주로 옥천창 폐쇄의 부당함을 조사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이 벌인 진상조사 결과 및 전국 공공운수 사회 서비스 연맹이
펴낸 공안사건 개입의혹 사례집 “그것이 알고 싶다”가 내린
결론에 턱없이 못 미치는 것이다. 진상조사단 박석운 조사위원은
민주노총 기관지 ‘노동과 세계’에 특별기고한 기고문을 통해
공안검찰이 조직적, 체계적, 일상적으로 파업유도 공작 등
공안탄압을 일삼아 왔으며, 진형구 부장이 폭탄주를 매개로 삼아
실수로 진상을 공개한 것이고, 조폐공사 사례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며, 나머지 전국의 사업장에서 너무나 비슷한 공안탄압이
일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
그는 또한 대한변협에서 파업유도 특별검사를 고위검사 출신인
강원일로 추천한 것을 치명적인 실수로 들고 있다. 따라서
노동계나 범진보 진영이 모두 나서서 특검에 의한 진상의 축소,
은폐공작을 폭로하는 투쟁을 해서 ‘초특검’을 세우자고
주장하였다.
한편 공공연맹은 대검공안부외 기획예산처의 관련에 대하여
의혹을 제기하였으며 불법적 공안탄압으로 자행된 제반사항의
원상회복 연맹은 구체적으로 당시 구속자 4인 석방 및 관계자
형기말소 및 국가배상, 공사측에 의해 제기된 고소고발 취하,
손해배상 및 가압류 취하, 피해보상, 징계무효 등을 요구하였다.
또한 파업유도 공작 가해자들의 해임과 문책, 처벌과 옥천창의
원상회복 등을 요구했다.
및 강희복, 김태정, 진형구 등의 공안대책회의 참가자들의 처벌
등을 요구했다.
연맹을 비롯한 민주노조 운동의 요구가운데 결과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진형구, 강희복의 구속뿐이다. 가장 큰 현안인 옥천창
이전문제는 노사간 의견이 어느 정도 접근했으나
기획예산위원회가 훼방을 놓아서 교섭이 결렬되었다고 한다.
파업유도 공작으로 인한 조폐공사 노동조합의 피해에 비추어 볼
때 이 같은 성과는 너무 보잘 것이 없다. 노조는 1998년 12월
18일 이후 직위해제 84명, 파면 10명 등 총 600여명이 징계를
받았으며 7명이 구속되었다. 조합비에 대하여 3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였으며 노조간부 8명에 대하여 4억원의
손해배상과 가압류가 진행되었다. 1997년이래 기획예산위원회와
공사측의 공격으로 1223명의 조합원이 직장을 떠났으며 옥천창에
근무하던 조합원 334명중 203명이 경산으로 이주하여 생활해야
했다. 이외에도 고소고발이나 부당노동행위로 인한 피해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투쟁의 결과로 ‘사건화’된 파업유도 사건
그래도 파업유도 사건에 대한 언론의 보도나 국회 국정조사,
청문회, 검찰수사 및 특별검사의 활동은 민주노조 운동이
투쟁으로 만들어 낸 결과다. 그들은 기를 쓰고 사실을 덮고자
했으나, 사실은 이미 만천하에 드러났다. 조폐공사 노조가
투쟁으로 구조조정 공격을 맞받아 치지 않았으면 이 같은 공작이
드러날 까닭이 없었다. 노조는 회사측의 구조조정 공격에 대하여
파업투쟁으로 맞섰으며 옥천창 시설이전을 위원장이 분신하며
막고자 했다. 노동조합은 집행부 구속 및 조합원 징계, 가압류
및 손해배상 청구, 옥천창 폐쇄 및 경산창 이전 등으로
초토화공격을 받는 가운데서도 진형구 발언 파동이 일어나자
농성을 벌였으며 최근 또다시 파업투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외
국회 청문회 등에서 보여준 집행부의 책임감이나 투쟁의지는
파업유도를 하던 공작을 하던 “민주노조는 싸울 때가 되면
단호히 싸운다.”는 태도를 보여 주는 것이다. 정권과 자본의
총체적인 탄압이 하나의 노조에 집중했을 때 이같은 태도를 보여
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권력의 자리에서
기고만장하다가도 위험에 처했을 때 보여주는 진형구의
구역질나는 짓거리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진형구 발언이 있은 뒤 이른바 관계자들이 보여준 비굴하고
치사한 태도를 돌이켜 보자. 당사자인 진형구는 “당시 내가
너무 술에 취해 기자들에게 말한 일이 없다.” 「동아일보
」,회견기사 중, 1999년 6월 9일.
고 발뺌했다. 직속상관인 김태정 당시 검찰총장은 “진 전부장이
앞으로 일어날 사태에 대하여 열심히 챙기는구나.”고만
생각했다. 「한겨레」, 1999년 7월 29일.
박상천 당시 법무장관은 “조폐공사 파업문제와 관련해
구두보고도 받은 적 없다.” 「중앙일보」, 1999년
6월 10일.
고 부인으로 일관했다. 기획예산처이든 청와대든 오로지
자기들과는 관계가 없다고 발뺌하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그래도 파업유도 공작 사건은 김대중 정권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했다. ‘국민의 정부’가 노동자들의 투쟁에 이전 정권과
하나도 다름이 없이 탄압한다는 것을 백일하에 드러냈다. 한동안
검찰은 우왕좌왕하며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렇게 검찰이
반신불수처럼 휩쓸리고 있을 때 유리한 국면이 만들어 졌는데도
민주노조 운동이 총반격할 힘이 부족했던 사실은 안타깝기만
하다.
파업유도 공작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있으면 그들은 언제나 모여 앉아 각종 대책을 내놓고 파업을
부수거나 노동조합을 부수기에 골몰했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은
아예 대놓고 정부와 대통령이 진두지휘 했다. 대책회의, 담화문
발표, 경찰투입은 마치 공식과 같았다. 김영삼도 한때
노동조합을 ‘국가전복 세력’이라고 이야기했다가 망신을 산
일이 있고 명동성당이던 조계사던 마구 공권력을 투입했다.
심지어 노동법 날치기 통과를 직접 지시했다가 정권의 명을
재촉하기고 했다.
김대중 정권은 겉으로는 “합법파업은 보장한다.”고 늘
주장했다. 또한 ‘생산적 복지정책’이니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발전’이니 하면서 자신들은 뭔가 다른 것처럼
이야기해 왔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이 얼마나 체계적으로
노동자들의 투쟁을 탄압하고 가진 자들만 대변해 왔는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김대중 정부는 기획예산처를 앞세워 이른바
구조조정이니 빅딜이니 하면서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을 펼쳐
왔다. 그 피해는 모든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들에게 돌아갔다.
김대중 정권이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에 어떻게 대응해 왔는지는
몇 가지 사례로도 충분하다. 조폐공사 노조는 조폐창 조기
이전을 통해 경찰 투입의 명분을 세우려 했으며 서울 지하철,
부산 지하철 노동조합 등 노동자들의 투쟁이 있는 곳이면 모두
경찰을 투입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노조간부에 대한 구속,
조합원에 대한 징계, 손해배상 청구 및 조합비 가압류 등 이전
정권과 다른 점을 하나라도 찾을 수 있는가?
조폐공사 노동자들의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그들은 이미 김대중
정권의 본질을 분명하게 폭로하였다. 그들의 투쟁은 정권과
검찰의 파업유도 공작에 대항한 것이었지만 사실은 파업권
쟁취투쟁이기도 하였다. 정권과 검찰은 “임금인상 투쟁은
적법일 수 있지만 구조조정 반대투쟁은 불법”이라는 말도
안되는 기준을 세워 놓고 탄압하고자 했다. 조폐공사 노동자들은
그 선을 과감히 돌파하였으며 그 결과 단위 노동조합으로는
버티기 힘들 정도의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조폐 노동자들은
또다시 파업투쟁을 벌이고 있다. 옥천창 가동과 복귀, 임금인상
등 그들이 쳐놓은 기준은 아랑곳없이 싸우고 있다.
조폐공사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이 끝내 승리하기를 기원한다.
그들이 어떤 탄압과 공작에도 굴하지 않고 싸워 이기는 모습을
보고 싶다.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