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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에서 필요에 대한 독재는 끝났는가?
Has the Dictatorship over Needs Ended in Eastern Europe?
헝가리는 1960년대부터 포괄적인 경제 개혁을 채택함으로써 여러 국가사회주의 나라들과 구별되었다. 이 개혁들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이른바 프라하의 봄과 함께 대체로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는 시도로 해석되었다. 이 새얼굴의 주된 특징은 신경제 메카니즘(the New Economic Mechanism)1)을 통해 강제축적과 중공업에 대한 스탈린주의적 편향을 극복하고 소비와 농업의 상태를 개선하는 것이었다.
그 개혁들은 정치적 만족을 겨냥한 것이었고, 동시에 인간의 필요도 더 잘 만족시켰다고 할 수 있다. 동일한 시기에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을 필요의 이론(the theory of needs)과 결합시킴으로써 비판적 사회 이론에 중요한 공헌을 한 철학적 경향이 헝가리에서 출현하였다. 이 비판적 저작들이 씌어진 이래, 그 체제는 전복되었다. 새로운 시대에 가장 무자비한 신자유주의가 구 국가사회주의 세계에 도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언급한 철학자들은 필요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 않으며 정치와 사회에 관한 자신들의 이전 이론을 무시하고 있다.
1981년
동유럽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적 저작 중 하나인 ꡔ필요에 대한 독재ꡕ(Dictatorship over Needs)는 1970년대 후반 세 명의 헝가리 철학자에 의해 씌어졌고, 1981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출판되었다. 페렝 페어(Ferenc Feher), 아그네스 헬러(Agnes Heller), 기요르기 마르쿠스(Gyorgy Markus)는 이른바 부다페스트 학파 뛰어난 맑스주의 철학자인 게오르그 루카치(George Lukacs)의 제자들의 대표적 지도자들이었다.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ꡔ필요에 대한 독재ꡕ의 이론적 기반은 헬러의 초기 저작인 ꡔ맑스에 있어서 필요의 이론ꡕ(The Theory of Need in Marx)2)에 의해 제공되었다. 이 책에서 헬러는 인간의 필요는 사회적으로 상대적인 것이라고, 즉 특정한 사회체제나 생산양식에 고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도얄과 고우(Doyal and Gough)에 따르면, 헬러는 보편적인 인간의 필요에 대한 회의론을 그 논리적 극단으로까지 밀고 나갔다. 그녀는 “사회가 인간의 의식과 무엇이 기본적 필요이고 무엇이 아닌가를 공식화하는 데 미치는 전체적인 영향력 때문에, 필요충족을 극대화시키는 데 있어서의 진보라는 관점에서 문명들을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3) 다시 말해 상대주의적 접근에 의해 필요에 대한 독재는 생활수준과는 무관한 정치적 개념이 된 것이다.4)
그들의 비판적 연구를 통해 페어, 헬러, 마르쿠스는 동유럽체제가 계급없는 사회를 향해 전진하는 대신 “필요에 대한 독재”를 대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5) 이 비판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결론을 가진 복합적인 것이었다. 저자들은 민주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세계질서라는 목표에 동의를 표하였다.6) 그들은 필요에 대한 독재와 필요의 관리 ‘또는 제한‘을 구분하였으며, 후자는 자본주의의 특징이라고 생각하였다. 비록 그 내부에는 한 가지 선택밖에 존재하지 않지만.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최소한 형식적 선택의 자유는 유지하기 때문에, 필요의 구조는 그 체제 내에서 변형될지언정 궁핍화하게 되지는 않는다.
세 저자들이 비록 레닌주의-스탈린주의적 정치적 실천에 대해 심각한 비판을 제출하였지만, 그들의 저작은 맑스주의 철학과 담론에 대한 연결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포스트루카치안들의 맑스주의와 공식적 맑스-레닌주의 사이의 간극은 수십년 동안 명백한 것이었다.
루카치의 부다페스트 학파와 집권 헝가리 공산당(HSWP) 사이의 관계는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바르샤바 조약군의 군사 개입 이후로 악화되기 시작했으며, 1971년 루카치가 죽고 몇 년이 지난 후에는 적대적으로 되었다. 루카치의 추종자들 중 몇몇 지도적 인물들이 당에서 축출되었고, 직장으로부터 쫓겨나기까지 했다. 그들은 또한 자신의 나라에서 떠날 것을 종용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헝가리에서도 외국에서도 실직자가 되지는 않았다. 본국에서 그들은 대개 번역자로서 고용되었다. 외국에서는 그들의 이단적 지위가 학문적 직업을 얻기에 좋은 배경이 되어 주었으며, 이전에 루카치 자신이 자기 제자들을 외국의 동료들에게 추천했기 때문에 특히 그러했다.
그때까지 포스트맑스주의 철학자들의 두 번째 세대 또한 성장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이른바 루카치 유치원(Lukacs Kindergarten)이다. 그들의 주요 대표자인 야노스 키스(Janos Kis)와 기요르기 벤스(Gyorgy Bence) 또한 “소련식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서 맑스주의적 용어를 사용하였는데7), 그들의 지도교수인 기요르기 마르쿠스와 함께 맑스의 ꡔ자본ꡕ에 대한 비판을 쓴 다음에조차 그러하였다. 마르쿠스는 철학자로서의 젊은 맑스와 경제학자로서의 늙은 맑스 사이의 “모순들”에 관한 이론을 처음으로 개척해 나갔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동유럽에서 상품관계는 소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젊은 맑스에 의해 약속되었던 인간해방은 물질화되지 않았다. 따라서 맑스의 “경제정책”은 포기될 수 있는 것이었다.
강력한 철학적 공세들이 현실 정치상황의 뒷받침을 받으며 시장화를 위한 길을 열어 나갔다. 당의 공식 이데올로그들이 이런 입장에 도전하려면 그들이 포스트루카치안들과 공유했던 도그마, 즉 사회주의가 하나의 국가체제로서 분석되고 평가될 수 있다는 도그마를 포기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당은 그들이 수정주의라고 불렀던 경향에 대항하여 행정적인 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견해에 공감하는 정치가들조차도 당의 노선을 따라야만 했다.8)
1989년
1981년에 페어, 헬러, 마르쿠스는 동유럽에는 자본주의의 복원을 수행할 실질적인 능력이 있는 사회적 의지가 존재할 수 없다고 믿었다.9) 필요에 대한 독재를 하는 권위주의적 주체들은 “그들을 지배하는 새로운 군주를 얻기 위해서” 상황을 급격히 변화시키려는 의사가 없었다. 따라서 작가 게오르그 콘라드(George Konrad)10)와 함께, 그들은 이 지역에서 자본주의는 민주적 수단에 의해서는 복원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명백히, 국가사회주의와 “필요에 대한 독재”는 1989년 동유럽에서 전복되었다. 소련의 동의 하에 협의된 이행이 헝가리에서 진행되었는데, 이는 페어 등의 철학에서는 가능성에서 제외되었던 국가사회주의 위기의 결과였다. 야노스 키스 같은 몇몇 포스트루카치안들은 이행을 향한 길을 제시하기 위해 활동적인 정치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 또한 위기와 붕괴의 분석, 즉 왜 이행이 역사적으로 가능했는가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지는 못했다.
우리가 볼 때 순수한 체제적 요인들만으로는 동유럽 국가사회주의의 실패와 붕괴를 설명할 수 없다. 스탈린주의적 정치경제 메카니즘이 경제 성장의 “외연적” 국면만을 달성할 수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내포적” 국면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즉 생산의 질과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경제, 정치적 개혁이 불가피했다. 적절한 개혁이 수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사회주의 경제는 침체에 빠졌던 것이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싼 자본주의 세계로부터 가해지는 외부의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군사적 압력 없이 경제 침체 그 자체만으로는 결정적인 위기를 불러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압력은 레이건의 집권 초기 동안 더욱 가중되었고,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에서 IMF와 세계은행에 의해 추동된 긴축정책11)을 통해 명백히 나타났다.
이제는 더 이상 맑스주의자가 아닌 루카치의 제자들은 브레튼 우즈 체제의 기관들(IMF와 세계은행옮긴이)이 추진하는 긴축정책결국에는 헝가리 지도부의 소비지향적 경제정책의 토대를 침식하게 될을 결코 비판하지 않았다. 체제의 위기를 분석할 때마다 그들은 다만 국내적 요인들만을 고려하였다. 체제로서의 사회주의를 비판할 때, 그들은 정의 그대로 “일국사회주의”라는, 즉 새로운 사회는 세계자본주의와 공존하면서 건설될 수 있다는 스탈린주의적인그리고 사실은 루카치안적인 틀 안에 남아 있었다.
1980년대에 야노스 키스와 헝가리의 다른 포스트루카치안들은 소규모 이견 집단 운동인 이른바 민주적 반대파(Democratic Opposition)의 지적 지도자들이었다. 민주적 반대파의 글은 “samizdat”지를 통해 전파되었으며, 이들의 생각은 헝가리공산당의 기술관료들에게 점차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민주적 반대파에 속하거나 그 주변에 있는 경제학자들은 필명으로 비합법적인 “Beszel”지에 글을 쓰면서 또한 낮에는 헝가리 재무부를 위해 일했다. 그들 중 몇몇은 1984년 헝가리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개혁 결의안과 1987년 정부의 안정화 및 회복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민주반대파의 활동가들이 때때로 경찰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거나 구타당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또한 공산당 내 시장 지지파의 비공식적 이데올로그들이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1980년대에 국가사회주의 헝가리의 엘리트 기술관료들과 브레튼 우즈 체제의 기관들 사이에 시장 개혁을 위한 암묵적인 연합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긴축정책을 추동하는 외부의 주체는 숨겨져 있었기 때문에 노동계급의 생활수준을 공격하는 정책들은 지배권력인 공산당에 의해 서명되었다. 이 상황의 아이러니는 IMF와 세계은행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체제 개혁에 가장 개방적이었던 이른바 공산주의 엘리트들과 타협했다는 것이다. 이 아이러니는 1989년 동유럽의 드라마(연이은 사회주의 정권의 붕괴와 자본주의로의 회귀- 역자)로 나타났고, 또한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의 대재앙(계속되는 내전과 민간인 학살- 역자)으로 나타났다.
10년 후
동유럽 국가사회주의 정권의 위기와 붕괴 이후, 맑스주의자였던 지식인들의 행로는 다양하게 나타났다.
1989년에 헬러와 페어는 이행 중에 있는 동유럽 나라들이 스웨덴의 사민주의 복지국가와 같은 제3의 길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래지 않아 헬러는 헝가리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대중화시키는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부다페스트 학파의 일원이었던 철학자 미할리 바쟈(Mihaly Vajda) 또한 하이데거의 영향을 더 크게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포스트모더니스트가 되었다.12) 기요르기 마르쿠스와 야노스 키스는 인권을 존중하는 자유주의 경향을 대변하는 반면, 기요르기 벤스는 자유적 보수주의자가 되었다. 외국에 나갔던 사람들은 마르쿠스를 제외하고 모두 고국으로 돌아왔다. 지적 행로의 다양성과는 무관하게, 부다페스트 학파의 주요 인물들은 학술기관이나 대학 학부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들은 또한 몇몇 주요 사회과학 정기간행물들을 그들의 통제하에 두게 되었다.
대부분의 포스트루카치안들은 헝가리에서 IMF의 정치적 대변자로 기능하는 정당인 자유민주주의자 동맹(the Alliance of Free Democrats)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 정당은 페어 등이 동유럽에서 결코 가능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자유시장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일관된 지지자이다. 비록 자유민주주의자 동맹이 총선에서 결코 절대적 또는 상대적 다수를 획득한 적은 없지만, 그들의 경제 정책은 1990년대 내내 이행의 프로그램을 지배하였다.
그 결과로 출현한 체제는 결코 “필요의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것이 아니다. 기껏해야 그것은 “결핍의 민주주의”(democracy want) 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이행이 시작된 지 10년 후 헝가리의 국내총생산(GDP)은 1989년 수준에 가까스로 도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10년 전에 출발했던 상태로 되돌아왔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국내총생산은 동일하더라도 실물생산비율이 훨씬 감소하였으며, 또한 훨씬 더 불평등하게 분배되고 있기 때문이다. 1989년 이후에 대량실업과 주거가 없는 사람들이 나타났으며, 1990년대에 빈곤층의 수는 배로 증가하였다.
비록 다원주의가 동유럽 정치의 주된 특징이 되었지만, 지난 10년 동안 정책결정과정에서 인간적 목표의 중요성은 더 약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보건의료와 연금제도를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가 문제가 될 때, 병자와 노년층의 상태보다 금융적 이해관계가 우선적으로 고려된다.13) 선거과정은 실제 경제정책의 형성에는 거의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며, 노동자와 시민사회의 목소리는 대부분 무시되고 있다.
경제정책결정의 권력구조도 변화되었지만, 그것이 그 과정에 대한 대중의 참여가 이전보다 확대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공산주의 붕괴 이후 집권한 최초의 두 정부는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겠다고 약속하였지만, 1년 안에 긴축정책으로 급격히 선회하였다. 1998년에 집권한 우익 정부는 심지어 노동부를 없애고 (노사정) 3자 교섭을 상징적인 수준으로 격하시키기까지 했다.
70세의 아그네스 헬러는 뉴욕과 부다페스트를 정기적으로 오간다. 자신의 출판물들에서 그녀는 부다페스트의 신설 페리헤지 공항 터미널의 샌드위치가 형편없다고 비판하는데, 아마도 이것은 그녀의 개인적 필요에 대한 주변부 자본주의의 독재일 것이다. 이스트반 에오르시(Istvan Eorsi)14)와 산도르 라드노티(Sandor Radnoti)15) 같은 다른 포스트루카치안들과 함께, 그녀는 나토의 유고슬라비아 공습을 지지하는 지적 지도자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16) 반면 게오르그 콘라드 같은 다른 자유주의 사상가들은 평화주의자들의 전위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유고슬라비아 공격에 대한 포스트루카치안들의 지지는 비극적인 일이며, 또한 아이러니이다. 왜냐하면 부다페스트 학파가 처음으로 정치무대에 중요하게 등장한 것이 프라하의 봄에 대한 바르샤바 조약군의 무력개입에 반대하는 집단적 저항이었기 때문이다.
철학적 담화와 정치적 입장의 혼란 때문에 부다페스트 학파 중에서 가장 활동적이고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인 헬러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근대 세계와 화해한 포스트모던 사상가가 우리 앞에 있다.”17) 그 결과는 거대한 지적 여행의 당연한 논리적 결과물인 거대한 혼돈이다. “자유주의자들에게 헬러는 사회주의자처럼 보인다. 오늘날의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그녀의 윤리학은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의 한 종류처럼 보인다. 현실에서 그것은 둘 다인 동시에 둘 다 아니다.”18) 이 후자의 관점은 서구에서 전형적인 것인데, 서구에서는 우리 분석의 주제가 되고 있는 사람들이 고국에서 행해 왔던 지적인 변형과 전환들을 추적하기가 훨씬 더 어렵기 때문이다.
1차대전 도중, 루카치는 자신의 혁명적 맑스주의로의 전환을 세계정신에 의해 정당화했다. 비슷한 주장이 부다페스트 학파의 이상한 분열을 정당화시켜줄 수도 있을 것이다. 루카치 학파와 루카치 유치원은 자신들의 얼굴에 정치적 투쟁의 영향을 새기고 있다. 그들의 철학이 맑스주의보다 더 참되게 사회주의적이라고 생각했던 저자들은 자본주의 정권의 그 내부의 권위적 경향들까지 포함해서19)지도적 이데올로그들이 되었다20). 헤겔은 옳았다: 역사는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다. 우리 시대에 대한 진보적 분석은 다른 요소들을 필요로 한다.
번역: 강성윤(서울대석사과정, 경제학)/ 해외저널리뷰팀
1) 1956년 봉기에 의해 제공된 정치적인 이유들 때문에 야노스 카다르(Janos Kadar)와 다른 지도자들은 1980년대 초반까지 생활수준을 꾸준히 향상시킬 수 있었다. 1968년에 채택된 이른바 신경제 메카니즘은 소비재의 공급을 괄목할 만큼 신장시켰다.
2) Agnes Heller, The Theory of Need in Marx, Allison and Busby, 1976. ( ꡔ마르크스에 있어서 필요의 이론ꡕ, 강정인 옮김, 인간사랑, 1990.)
3) Doyal Len and Ian Gough, A Theory of Human Need, London: Macmillan, 1991.
4) 우리의 견해에 의하면, 도얄과 고우는 필요에 관한 보편주의적 해석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옳다. 왜냐하면 이렇게 접근할 때 필요의 관점에서 1990년대의 이행(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옮긴 이)에 대해 판단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5) Feher Ferenc, Agnes Heller and Gyorgy Markus, Diktatura a szuksegletek felett, Budapest: Cserepfalvi, 1991.
6) 사회주의에 대한 이러한 언어상의 수용은 포스트루카치안들이 서구 신좌파 서클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던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인기는 물론 신좌파들의 경제 개념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지만, 그것에 대한 논의는 이 논문의 한계를 넘는 것이다.
7) 키스와 벤스는 그들의 주요 저작인 ꡔ맑스주의적 관점에서 본 소련식 사회ꡕ(The Soviet-type Society from a Marxist Point of View)를 마르크 라코브스키(Marc Rakovski)라는 필명으로 집필하였다.
8) 페렝 페어는 거의 30년 동안이나 카다르 정권의 문화부 수장이었던 기요르기 악젤(Gyorgy Aczel)과 각별히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1974년에 악젤 또한 또다른 공산당 정치국원이자 1968년 개혁의 책임자였던 레즈 니어스(Rezs Nyers)와 함께 정치적 패배를 겪었으며, “수정주의” 철학자들의 결의안에 대해 이의를 표명하였다.
9) 트로츠키나 루카치 같은 스탈린주의에 대한 몇몇 주요 맑스주의 비판가들은 실제로 국가사회주의 이후에 자본주의의 복원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다는 점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루카치는 1968년의 시장 개혁이 헝가리에서 자본주의의 복원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고, 제3의 길 루카치는 “이것을 급진적으로 민주화된 사회주의 체제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을 주창하였다. (ꡔ오늘과 내일의 민주화ꡕ(Democrtisierung heute und morgen)를 보라.)
10) 게오르그 콘라드 또한 1950년대 초반 루카치의 세미나에 참가하였다. 1970년에 그는 사회학자 이반 스젤레니(Ivan Szelenyi)와 함께 ꡔ인텔리겐챠가 계급권력으로 가는 길ꡕ(The Road of the Intelligentsia to Class Power)을 썼다.
11) IMF는 냉전 기간 내내 유고슬라비아 경제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1980년대 초 전세계적 외채 위기가 발발했을 때 폴란드와 헝가리의 경제정책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하였다.
12) 하이데거의 주요 저작들을 헝가리어로 번역했던 바쟈는 부다페스트 학파 중 최초로 맑스주의는 죽었으며 자본주의는 폐지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마르쿠스와 페어는 이에 반대했으며, 바쟈가 이 점에서 부다페스트 학파와 단절했다고 주장하였다.
13) 경제학자 야노스 코르나이(Janos Kornai)는 사회주의적 공공부문에서의 시장개혁을 “너무 일찍 성숙한 복지국가”를 해체시키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이것은 물론 모든 다른 형태의 사회적 보호장치를 공격적으로 파괴하는 것에 붙일 수 있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이름이다. 그러나 코르나이가 만약 국가사회주의가 자신의 능력 이상의 복지를 제공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했다는 점에서 옳다면, 그 붕괴된 체제는 “필요에 대한 독재”가 아니라 “필요의 독재”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14) 루카치의 제자인 이스트반 에오르시는 유명한 작가가 되었으며, 1989년 이전에는 독일에서 살았다. 그는 이른바 자유민주주의자 동맹의 좌익에서 지도적 역할을 해 왔다. 그는 평화 메시지에 관한 기사에서 콘라드를 비판하였다.
15) 산도르 라드노티는 페렝 페어의 지적인 “자식”이었던 미학자이다. 그는 평화주의자들을 “철없는 바보들”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이 유고슬라비아 폭격을 반대함으로써 독재자 편에 섰다고 주장하였다.
16) 발칸 전쟁과 관련해서 헬러는 평화주의자들이 자유보다 생명을 더 소중히 여기며, 그 때문에 올바른 행동인 전투적인 투쟁 주장하는 대신 겉보기에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17) Laszlo Perecz, “A gondolatdetonator. Heller Agnes hetveneves”, Nepszabadsag, May 12, 1999.
18) Peter Murphy, “Az onrendelkezes etikaja”, Kritika, May 1999.
19) 철학자 가스파르 미클로스 타마스(Gaspar Miklos Tamas)에 의해 시작된 지상논쟁을 끝내면서, 헬러는 의회의 활동과 공공성을 제한하고 자신의 부패한 친구들을 초법적으로 행동하도록 한 총리 빅토르 오반(Viktor Orban)을 옹호하였다. 지리학적으로나 지적으로나 또 한 사람의 위대한 여행자인 타마스는 최근에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 거만함에 대항하여 급진적 프로그램을 가진 광범위한 좌익 동맹의 건설을 호소하였다.
20) 역사적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우리는 루카치의 몇몇 뛰어난 제자들, 예를 들어 런던의 이스트반 메자로스(Istvan Meszaros)나 부다페스트의 미클로스 알마시(Miklos Almasi) 등이 여전히 자본주의에 비판적으로 남아있다는 점을 언급해야만 하겠다. 알마시는 한쪽 발을 포스트모더니즘에 담그고 있는 미학자인데, 세계금융시장의 위기에 관해 헝가리에서 가장 인기있는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