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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강좌/노동자 교양 경제학

현장에서 미래를  제54호
채만수

지 상 강 좌






여러 활동가들이 그 동안 갈망해오던 노동자 교양 강좌의 첫 포문을 2000년 1월 13일에 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열화와 같은 관심 중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한 분들을 위하여 강의를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강좌의 목표는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와 그 운동법칙에 대한 윤곽을 수강생들이 머리 속에 형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노동자 교양 경제학’ 일곱 마당의 목표입니다. 그러한 윤곽을 형성하면, 구체적 상황들에 대한 비판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강좌는 시간상의 제약으로 구체적으로 많은 것을 다 말할 수는 없기 때문에 요점 별로 논쟁적인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다만, 이 지상중계는 본래의 강의 내용을 기본으로 약간의 보완을 가하고 있기 때문에 강의를 수강한 분들에게도 유익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지 상 강 좌



강의 채만수 부소장

상품․가치․화폐․가격






우리 강좌에서는 짧은 시간에 자본주의 경제의 구조와 그 운동법칙에 대한 대강을 밝혀야 하기 때문에 강좌를 ‘자본주의란 무엇인가’부터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이유 때문에 앞으로도 반드시 과학적인 경제학의 체계에 따라서 강좌가 진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의 주제는 경제학 공부를 체계적으로 하게 되면 가장 처음 부딪치게 되는 문제, 즉 상품, 화폐에 관한 것입니다. 이 부분은 경제학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맑스도 ꡔ자본론ꡕ에서 이 문제, 즉 이 문제를 다루는 제1권 제1편이 가장 어렵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세포를 연구하는 것이 성장한 신체를 연구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뿐 아니라 경제학에서는 현미경도 시약도 없이 상상력이 그것을 대신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그렇습니다. 이 문제가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은 현대의 부르주아 경제학이 이 문제에 대한 분석을 사실상 포기한 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도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6~70년대, 아니 80년대 중반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ꡔ자본론ꡕ을 공부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파쇼적인 사상 탄압 때문에 책 자체를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인데, 지금은 책이 있어도 읽지를 않습니다. 동유럽 및 소련에서 사회주의가 붕괴되어 그 사상적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당 수의 사람들은 이 부분이 어려워 더 진전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죠. 그런데 맑스는 이 부분이 제일 어려워서 이곳만 이해하면 나머지 부분들은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힘을 내봅시다.

그런데 좀 힘 빠지는 소리를 하면, 사실은 지금 이 문제, 특히 화폐를 이해하는 것은 맑스시대보다 어려워요. 그 당시는 화폐가 금이었고 실제로도 금이 화폐로서 유통되고 있었지만, 물론 지금도 화폐가 금이긴 하지만, 지금은 금이나 금의 교환권인 ‘태환은행권’ 대신에 지폐, 즉 금과 교환되지 않는 불환은행권이 유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조건에서는 많은 경제현상이 금본위제, 즉 금화가 유통하고 있던 시대와는 거꾸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1. 사적 소유와 상품생산


ꡔ자본론ꡕ 제1권 제1편 제1장을 보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부(富)는 방대한 상품의 집적으로 나타난다고 하고 있죠. 여기서 우리는 먼저, ‘그러면 왜 상품으로 나타나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집안에서 가족끼리 물건을 사고 팝니까? 원시공산사회의 내부에서는 물건을 사고 팔았습니까? 아닙니다. 가족끼리도 혹은 원시공산사회의 공동체 내부에서도 노동의 결과물인 생산물을 사고 팔지 않습니다. 그냥 무상으로 나눠가지지요.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도 많은 실험적인 소위 공동체를 실현하고 있는데, 그 공동체 내부에서도 물건을 사고 팔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그것은 생산수단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의 경우에는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가족이 아예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지 못한 특수한 공동체이기 때문에 적절한 예가 되기 어렵군요. 하지만, 원시공산사회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생산수단을 공유하는 실험적 공동체 운동의 경우를 봅시다. 그러한 공동체들은 생산수단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의 노동의 생산물도 공동체가 공유하게 되고, 따라서 그것들은 사거나 팔리지 않고 공동체 구성원 사이에 무상으로 분배되는 것입니다.

노동의 생산물이 상품이 되는 것은 바로 생산수단이 배타적․사적으로 소유되어 있기 때문이고, 따라서 생산물이 시장을 통해서 사고 팔리지 않으면 사회구성원 사이에 유통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점, 즉 생산수단이 사적으로 배타적으로 소유되어 있기 때문에 노동 생산물이 상품으로 등장하는 것은 핵심적으로 이해해야 할 점 중의 하나입니다.

이런 반론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즉, ‘생산수단이 공유였던 원시공산사회 후기에도 시장, 즉 상품거래가 있었다’고 말입니다. 훌륭한 반론입니다. 그런데, 그 상품거래가 ‘원시공동체 내부에서’ 이루어졌던 겁니까? 아니지요. 바로 공동체와 공동체의 경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말하자면, 공동체 내부에서는 생산수단이 공유되어 있었지만, 그 외부에 대해서는 ‘배타적으로 소유’되어 있었기 때문 아니었겠습니까? 실제로 우리 사회를 포함한 자본주의 사회의 여러 실험적인 공동체도 생산수단을 공유하고 있는 그 내부의 성원에 대해서는 노동 생산물이 상품으로서 나타나지 않지만 그 외부에 대해서는 상품으로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외부에 대해서는 공동체가 그 생산수단을 배타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반론도 있을 수 있습니다. 20세기의 사회주의에서도 노동 생산물이 상품으로 되었고, 또 예컨대 중국에서처럼 지금도 그렇다고 말입니다. 참으로 난감한 문제제기군요.

솔직히 말하면, 저는 소련이나 동유럽에서의 상황을 잘 모릅니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아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실정을 잘 알고 있다고 얘기한다면, 십중팔구 거짓말 아니겠어요? 신문․방송․텔레비전 등의 정보란 것이 사실은 모두 무언가의 장막, 무언가 목적의식적인 거짓의 필터를 통과해서 전달된 것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아무튼 대답은 해야되겠지요? 극히 추상적인 대답이라도 말입니다.

첫째는, 20세기 사회주의는 그 생산력이 극히 낮았기 때문에 아직 자본주의적 시장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거나, 생산력을 증대시키는 방편으로 그것을 의도적․목적의식적으로 이용한 측면을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표적으로는 레닌 생전의 ‘네프’, 즉 ‘신경제정책’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고, 지금 중국의 이른바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후자의 예로 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중국의 경우, 갈수록 더욱더 자본주의적 색채를 농후하게 띠어가고 있고, 그래서 현재 중국의 경제체제가 과연 사회주의적인가, 혹은 정말 사회주의라는 지향을 견지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갈수록 설득력을 얻고 있지만 말입니다.

두번째로는, 소련 등 발달한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시장’과 그 속에서의 상품은 외형적으로는 시장으로 보이고 상품으로 보였지만 본질적으로는 단지 사회주의적 사회적 분업의 생산물을 분배하는 기술적 수단에 불과해서 본래적 의미의 시장과 상품은 아니었지 않나 하는 점입니다. 예컨대, 소련의 경우 농민 개인의 주거에 부속되었던 채마밭 등, 극도로 제한된 ‘사유지’에서 생산된 상품의 교환의 장으로서의 시장과, 국가적 경제․생산계획에 따라 국유기업이나 협동조합적 기업에서 생산된 생산물의 분배를 위한 ‘시장’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하여, 만일 생산력이 정말 고도화되어 ‘능력에 따라서 일하고 필요에 따라서 분배하는’ 그런 사회가 되면, 시장과 형태상 닮은 유통기구는 존재할지 모르지만, 생산물이 ‘상품’으로서 나타나진 않지 않겠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 정도 하고 넘어 갑시다.

아무튼 상품은 사고 파는 노동 생산물인데, 결코 어떤 상품이 필요하다고 해서 사는 사람이 지불하고 싶은 만큼 주고 사는 것도 아니고, 파는 사람도 받고 싶은 만큼 받고 파는 것이 아니지요. 각각의 상품은 각자 자기의 가격을 가지는데, 그 가격은 무엇이고 그것은 어떻게 결정되느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2. 상품의 가치크기와 가격


(1) 상품의 사용가치와 가치, 교환가치


상품은 두 가지 요소의 통일입니다. 하나는 가치이고, 다른 하나는 사용가치입니다. 뒷것부터, 그러니까 사용가치라는 것부터 얘기를 해봅시다.

만일 물건이 전혀 쓸모가 없다고 하면, 그것은 상품이 될 수 있겠습니까? 상품으로 될 수 없겠지요?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애를 써서 어떤 물건을 만들어도 그것이 전혀 쓸모가 없다면 그것은 상품이 안 되는데, 바로 그 쓸모, 즉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상품의 그 능력이 곧 사용가치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인간의 욕망이란 것은 전적으로 주관적인 것이지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은, 예컨대 ‘배가 고프다’라는 욕망을 왕왕 수치화(數値化)하는데, 즉 일정한 양으로 측정하는데, 그것이 정말 가능하고 타당한 일이겠습니까? 주관적인 것을 객관적인 양으로 측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용가치는 양적으로 측정이 불가능합니다. 다만 질적으로만 서로 다를 뿐이지요. 또한, 욕망이란 주관적이기 때문에 그것은 다양한 것이고, 그것이 무언가는 사회도덕적 혹은 법률적으로는 몰라도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용가치도 그것이 어떤 욕망을 충족시키는 능력이건 경제적으로는 상관이 없습니다.

다음엔 가치의 문제인데, 사실은 이 가치를 둘러싸고 경제학이 구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경제학의 중심적인 문제이자 중심적인 개념입니다. 사회의 ‘착취나 억압’도 사실은 바로 이 가치의 착취이고 그것을 착취하기 위한 억압입니다. 그리고 시장에서의 상품의 교환도, ꡔ자본론ꡕ 제3권에서 분석하는 것처럼 구체적으로는 사회적인 변용, 즉 자본가들이 서로 많은 이윤을 취하려고 하는 이유 때문에 ‘이윤율 평균화’라는 변화를 겪긴 하지만, 기본적․추상적으로는 이 가치의 크기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그 상품의 생산에 투여된 노동, 혹은 그 노동량입니다. 그리고 노동은 인간의 뇌와 팔 다리의 일정한 운동인데, 운동의 양을 측정하는 단위는 시간이기 때문에 이 노동량, 즉 가치의 크기 역시 그 생산에 지출된 노동시간에 의해서 결정되고 측정됩니다. 즉, 그 생산에 10시간이 걸리는 상품의 가치는 2시간이 걸리는 상품보다 5배가 큰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문제가 발생합니다. 즉, 똑 같은 상품을 만드는 데에도 사람마다 시간이 다르게 걸립니다. 뿐만 아니라, 똑 같은 물건을 만드는 데에도 예컨데 작년보다는 금년에 시간이 적게 걸리는 일이 드믈지 않게 많습니다. 그럴 경우에 도대체 그 상품의 가치는 어떤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사람마다 그것을 만들기 위한 노동시간이 다를 때 동일한 상품이 각 생산자의 서로 다른 노동시간의 길이대로 서로 다른 가치를 가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일정한 시점에서는 그것은 하나의 가치만을 갖습니다. 그러면 어떤 하나의 가치를 가질까요?

다름 아니라 그것을 생산하는 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따라서 그 가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란 바로 어떤 사회에서 당시의 생산조건에서, 혹은, 같은 말이지만, 당시의 생산력 수준에서 그 상품을 만드는 데에 평균적으로 투여되는 노동시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생산자가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보다 아무리 더 많은 시간에 걸쳐서 어떤 상품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그 상품의 가치 크기는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만큼일 뿐입니다. 거꾸로 어떤 생산자가 사회적 평균시간보다 짧은 시간에 그것을 만들었다면, 그렇더라도 그 상품은 역시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의 가치를 갖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작년에 비해서 금년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 짧아졌다? 그러면 그 상품의 가치 역시 작년에 비해서 금년에 작아진 것입니다.

또 이런 문제도 있습니다. 어떤 상품을 만드는 데에는 특별한 훈련이 필요없는 그저 평범하고 평균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노동이 필요한 데에 비해서, 어떤 상품을 생산하는 데에는 특별한 기술, 다년간의 훈련이 필요한, 그런 노동이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만드는 데에 단순히 같은 시간이 걸렸다고 해서 같은 가치를 갖는다면, 그것은 어떻습니까? 심히 불평등한 것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똑같은 물건을 만드는 데에도 고도로 숙련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짧은 시간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금 위에서 본 것처럼, 숙련된 사람의 생산물이 비숙련된 사람의 생산물보다 그 가치가 작은 게 아닙니다. 도대체 어찌된 것일까요?

바로 숙련노동․복잡노동은 단순노동의 응축이고 자승(自乘)인 것입니다. 따라서 물리적으로 같은 시간일지라도 숙련노동 혹은 복잡노동의 경우는 단순노동의 몇 배의 가치를 갖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설명드린 대로 상품이란 가치와 사용가치의 통일이고 그것은 결국 노동의 생산물인데, 이 가치와 사용가치라는 상품의 이중성은 사실은 노동 자체의 이중성을 반영한 것입니다.

여러분들 앞에 있는 책상을 만드는 목수의 노동과 밭을 가는 농부의 노동을 예로 들어봅시다. 그 책상을 만드는 노동은 한편에서는 책상을 만들기에 유용한 형태로 지출되어야 합니다. 예컨대, 밭은 가는 노동의 형태와 책상을 만드는 노동의 형태는 확연히 다릅니다. 이렇게 특정한 사용가치를 만들기 위해서는 특정한 형태의 노동이 지출되어야 하고, 경제학에서는 그것을 ‘구체적 노동’ 혹은 ‘유용적 노동’이라고 부릅니다. 바꾸어 말하면, 노동의 이러한 구체적 성격 혹은 유용적 성격이 상품의 사용가치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수의 노동이나 농부의 노동이나 그 형태는 다르지만 그것이 모두 인간 노동력의 발휘라는 측면에서는 동일성을 갖는 노동이고, 따라서 추상적으로는 동일한 노동입니다. 가치를 규정하는 것은 바로 이 노동, 즉 추상적인 인간노동입니다. 그리고 그 크기에 따라서 상품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지요.

가치 자체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중요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모든 노동 생산물이 가치를 갖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노동의 생산물이라고 해서 모두가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데, 여러분이 음식점에서 사먹는 밥은 상품이지만, 여러분이 집에서 해먹는 밥은 상품이 아닙니다. 실제로 여러분은 집에서 밥을 사먹지도 식구에게 팔지도 않지 않습니까?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요? 다름 아니라 ‘가치란 사회적인 규정’이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사적 및 배타적인 소유에 기초해서 시장에 판매하기 위해서 생산되는 노동생산물, 즉 상품으로 생산되는 노동 생산물이 바로 가치를 갖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때 ‘가치’라는 말은 경제학적으로 엄밀한 의미를 갖는 말입니다.



(2) 가치의 현상형태로서의 가격


그런데 시장에서 상품을 사고 팔 때, 누구도 ‘이 상품의 가치는 얼마다’ 라는 식으로는 말하지 않습니다. ‘이 상품의 가격은 얼마다’ 라고 말하지요. 그러면 이 ‘가격’이란 무엇일까요? ‘가격이 가격이지 별 소리를 다 한다’고요? 실제로 현대 부르주아 경제학은 그렇게 출발합니다. 그러나 가격은 가격인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가 고찰해온 상품의 가치를 화폐로 표현한 것입니다. 어려운 말로는 ‘가격은 가치의 화폐적인 현상형태’라고 하지요. 말하자면, 가격과 가치는 그 실체가 같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상품 가격이 높다거나 낮다거나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을 만드는 노동시간이 많다, 적다를 나타내는 것이죠.

문제는 이 상품의 가격 혹은 가치가 경제학의 중심이 되기 때문에 다양한 논의나 이론들이 존재합니다. 특히 그 이론들은 단순히 상품에 대한 ‘순수한 이해’의 차이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계급적 성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개는 코미디지요.

그런데 여러 가지 코미디 중에 근대경제학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이론의 하나로 소위 ‘한계효용설’이란 게 있습니다. 효용이라는 것은 바로 쓸모라는 뜻인데, 이것은 오스트리아의 학자들이 주로 중심이 되어 제기한 학설입니다.

이 이론은 두 가지의 코미디를 안고 있습니다. 우선 하나는, 이 한계효용설은 ‘어떤 상품이 욕망을 충족시키는 능력이 크면 클수록 그 가격이 높다’고 코미디를 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욕망이란 주관적인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도대체 측정이란 게 불가능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그 크기에 따라서 가격이 결정된다고 코미디를 하고, 더욱 가관인 것은 난다긴다하는 ‘학자님들’께서 그것을 진지하게 논한다는 것이죠.

둘째로, 이들 한계효용설자들은, 그들에 조금 앞서 그들과 거의 동시대에 존재했던, 그러니까 19세기 중후반에서 20세기 전반까지 존재했던 ‘역사학파’라는 독일의 일군의 경제학자들을 비판하는데, 그 비판의 요지가 ‘당신들은 이론이 부족하다’는 것이었죠. 어떻습니까? 효용, 즉 쓸모의 크기에 따라 가격이 결정된다는 엉터리 이론의 소유자들이 남을 향해서 ‘이론이 부족하다’고 비판하니, 자신들은 ‘이론이 넘치는’ 코미디언들 아니겠습니까?

참고로, 독일의 ‘역사학파’에 대해서 잠시 언급하겠습니다. 19세기 중후반의 독일은 그 당시 영국이나 프랑스에 뒤떨어지는 자본주의 후진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 스미스나 리카도로 이어지는 고전파 경제학은 보편적인 경제학으로서 이들의 무역이론은 이른바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유무역론이란 사실은 독점을 위한 이론입니다. 무역이 자유로워야 자본주의 선진국이 그 상품을 세계시장에 마음대로 팔아먹을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바로 세계시장이 그 선진국의 자본에 의해서 독점되기 때문입니다. 19세기에 영국이, 그리고 오늘날 미국을 위시한 자본주의 선진국가, 곧 제국주의 국가들이 ‘자유무역’을 강력히 요구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의 그러한 독점적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서지요. 그런데 19세기 당시 자본주의 후진국이었던 독일이 이 입장을 수용해서는 시장을 온통 영국과 프랑스의 자본에 빼앗길 것이고, 이는 독일의 ‘민족자본’의 이해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에 저항하여 각종의 무역장벽을 쌓고, 또 국가가 자본의 축적을 강력히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을 반영하고 그것을 합리화한 것이 바로 역사학파의 이론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실제로 분석적 이론이 부족하고 주로 사실 자체를 기술하는데 강했고, 바로 그 점을 ‘이론이 넘쳤던’ 오스트리아 학파가 공격했던 것입니다.

가치․가격 문제와 관련해서 특히 재미 있는 것은 경제학에서 가치의 문제를 논하기를 포기하고 있는 현대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아담 스미스나 리카도 등 고전파 경제학자들에 대한 숭상입니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도 그들을 경제학의 시조로서 숭앙하는 것을 거부할 수 없어요. 그러나 지금 경제학자들은 노동가치론, 즉 가치의 크기는 노동시간에 달려 있다는 것을 따르지 않아요. 그러면서 방금 말한 ‘한계효용설’ 등 기묘한 설들이 나왔던 것인데, 최근 수십년래에는 아예 가치론 자체를 포기하고 있어요. 그리하여, 대학에서 경제학을 배우면 기묘한 이론(?)들을 많이 배우는데, 혹시 누가 ‘노동가치론’을 거론하면, ‘그것은 19세기의 낡은 얘기’라고 격하해 버리지요.

그런데 대학 강단에서 경제학 교수들이 그렇게 헛소리를 할 때, 영등포 문래동이나 청계천의 뒷골목에 있는 마치꼬바들, 즉 선반이나 밀링 한 대 사 놓고 일하는 ‘사장들’한테 가봐요. 이 ‘사장들’은 거의 대부분 자신의 고유한 제품을 만들어 파는 게 아니고 외부로부터 여러 가지 기계부품의 주문을 받아 가공해 납품하는 사람들인데, 이를 위해 당연히 수주(受注) 경쟁을 하고, 따라서 가격경쟁도 심각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견적을 낼 때 어떻게 내는지 알아요? 먼저 제품 한 개당 들어가는 원자재의 가격을 계산하고, 그 다음에는 하루에 몇 개 가공할 수 있느냐를 따져요. 뒤집어 보자면, 한 개를 가공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냐를 계산하는 거죠. 그런데, 동일한 물건이어서 재료 가격은 같은데도 불구하고 ‘공장’마다 다르게 가격이 산출돼요. 무엇에 따라 달라지겠어요? 바로 공장마다 하루에 그 제품을 몇 개나 제작할 수 있느냐가 다른 것이지요. 예컨대 선반 작업에 의해서 가공하는 부품이라면, 범용 선반을 가진 사람은 정밀하게 깎지도 못하면서 많이 깎지도 못하기 때문에 비싸게 견적을 낼 수밖에 없지요. 그에 비해서 CNC(컴퓨터 수치 제어 선반) 선반 등을 가진 사람은 설계도면대로 선반에 수치만 맞춰주고 가공재료만 물려주면 되기 때문에 제품이 보다 정밀하면서도 범용선반에 비해 훨씬 많이 가공할 수 있어요. 즉, 제품 하나 하나를 가공하는 데에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밖에 걸리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아주 싸게 견적을 냅니다. 다시 말하면, 견적을 싸게 내는 것과 비싸게 내는 것의 차이는 하나를 가공할 때 얼마만한 시간이 걸리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상품의 가치, 따라서 가격이 노동시간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노동가치론’을 누군가가 반박해 오면, ‘직접 가서 보라’고 하세요. 노동가치론만이 가치의 크기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이지요.

오늘 주제와 직접 관계는 없지만, 참고로 그러면 견적이 비쌀 수 밖에 없는 ‘범용 선반의 마치꼬바’는 어떻게 먹고 살까요? 주문량이 너무 적어서 성능이 좋은 기계를 가진 업자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그런 소량 주문에 기대서 먹고살지요. 그런데 공황, 즉 경제위기나 불황이 닥쳐오면 어때요? 주문이 전반적으로 감소하지요? 그래서 공황이나 불황과 같이 전반적으로 주문이 줄어드는 시기에는 성능 좋은 기계를 가진 업자들도 호경기 때에는 돌아보지도 않던 소량 주문을 사냥하기 때문에 범용 선반을 가진 마치꼬바들이 제일 먼저 제일 대량으로 파산하지요.

현대의 부르주아 경제학은 가치론을 포기했기 때문에 결국 ‘상품의 가격은 그 상품에 대한 수요-공급 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말하지요. 수요가 증대하면 가격이 오르고, 공급이 증대하면 가격이 내리고, 양족 모두 그 반대의 경우에는 반대의 가격변화가 일어나고, 등등 말입니다. 어때요? 맞지요? 실제로 상품의 가격은 그렇게 움직입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해봅시다.

제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이 마이크는, 잘은 모르겠지만, 대략 5만 원 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저기 대우자동차 동지들이 만드는 중형 승용차는 대략 1천3백만 원하고요. 그런데, 만일 이 마이크가 웬일인지 크게 인기를 끌어서 갑자기 수요가 폭증하는데 공급은 크게 못 미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이 마이크의 가격이 1천만 원, 1천3백만 원 하고 올라가겠습니까? 결코 아니지요? 이 마이크의 평상시 가격이 5만 원이었다면, 기껏해야 대략 6만 원이나 그보다 조금 더 올라가고 말겠지요? 마찬가지로, 실제로 경제위기로 재작년에 그러한 상황이 연출되었었는데, 갑자기 자동차에 대한 수요가 급감해서 자동차가 하치장마다 가득가득 쌓인다고 해서, 중형 승용차가 이 마이크의 가격만큼, 그러니까 5만 원이고 6만 원이고까지 떨어집디까? 분명 아니었지요? 1천3백만 원짜리 자동차라면 한껏 그 가격이 떨어져 봤자 예컨대 1천만 원 이하로는 떨어지지 않죠? 그리고 경기가 회복되자 다시 제 가격을 찾고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수요-공급 관계가 변하면 상품의 가격은 변하지만, 사실 그것은 일정한 기준 가격,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는 대의 가격을 기준으로 그 상하를 진동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기준되는 가격을 향해서 수렴하려는 끊임없는 운동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장기적으로 보면, 가격의 그 상하진동은 서로 상쇄돼서 바로 그 기준되는 가격을 그 상품의 가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요-공급 관계의 변화에 따른 가격의 변동은 그것이 아무리 현실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상품의 가격 결정에서는 부차적인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왜 마이크의 가격이 5만 원을 전후로 움직이느냐’, 혹은 ‘왜 중형 승용차의 가격이 1천3백만 원 전후로 움직이느냐’가 아니라 ‘왜 마이크의 가격은 5만 원이고 중형승용차의 가격은 1천3백만 원이냐’ 하는 것, 즉 5만 원의 변화나 1천3백만 원의 변화가 아니라 5만 원과 1천3백만 원 그 자체입니다. 그것은 결코 ‘수요-공급 관계의 변화’에 의해서는 규정되지 않고 따라서 그것에 의해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 마이크와 중형 승용차를 만드는 데 필요한 우리 사회에서의 평균적 노동시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고, 따라서 노동가치론에 의해서만 설명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것 한 가지. 그러면 부르주아 경제학은 왜 가치의 실체와 그 변화를 그것을 통해서만 설명할 수 있는 노동가치론을 부인하면서 ‘그것은 19세기의 유물’이라고 폄하하는 것일까요? 다름 아니라 바로 그들 경제학의 계급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80세기 후반에 아담 스미스 등이, 그리고 19세기 초에 리카도 등이 ‘노동가치론’을 과학적 경제학의 초석으로서 놓았을 때에는 부르주아들은 미처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결국은 자본의 이윤의 본질, 정체를 폭로할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노동가치론은 애초 아담 스미스나 리카도 같은 고전적인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에 의해서 발견되고 그 기초가 놓였지만, 그것이 완성되어 가면서 자본의 이윤의 정체라는 것이 결국은 노동자로부터 착취한 잉여노동이라는 사실을 폭로하는 것과 부르주아 경제학이 노동가치론으로부터 이탈하고 그것을 부인하면서 타락해가는 것과는 나란히 궤를 같이 했던 것입니다. 부르주아 경제학의 계급적 임무는 자본의 이윤의 정체를 은폐하고 합리화하여, 그것이 노동자 계급으로부터 위협받는 것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막아야 하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3) ‘아담 스미스의 역설’?


부르주아 경제학의 타락을 웅변하는 것, 따라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얼마나 무지하고 천박한가를 보여주는 것 중의 하나로 이른바 ‘아담 스미스의 역설’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는데 몇 년 전에는 당시 대학에서 경제학원론 중의 가장 인기 있는 것이 조순과 정운찬이 함께 쓴 책이란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도 그 책을 뒤적여 본 적이 있는데, 거기에도 바로 이 ‘아담 스미스의 역설’이라는 주장이 나와요.

그들이 말하는 소위 ‘아담 스미스의 역설’이란 이런 거예요. 이들에 의하면, 다이아몬드는 사용가치가 별로 많지 않은데도 엄청나게 비싸고, 물이나 공기 같은 것은 그것이 없거나 부족하면 사람이 살 수 없을 만큼 사용가치가 큰데도 공짜라서, 이것은 경제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아담 스미스의 역설’이라는 거예요.

어때요? 다이아몬드 반지 하나 없다고 자살하는 사람도 없진 않지만 사실 절대 다수의 많은 사람들에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다이아몬드는 엄청나게 비싸고, 정말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물이나 공기는 공짜거나 아주 가격이 싸고 …. 참으로 역설 아닙니까?

실제로 경제학자가 아닌 보통 사람들이 그렇게 그것을 역설이라고 하면, 우리는 함께 고개를 끄덕이면서 ‘세상 참 이상하다’고 웃을 수 있어요. 그런데 소위 경제학자라는 자들이 그렇게 얘기할 때, 그것은 경멸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왜냐구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우선, 사용가치란 사람의 욕망을 만족시켜 주는 성질인데, 그 욕망이란 것이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크다, 작다’ 논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이기 때문이고, 설령 그 크기를 논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크기와 가치, 즉 가격의 크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용가치는 상품이 상품이기 위한 하나의 조건일 뿐인 거예요.

그리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가격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은 가치, 즉 그 상품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지요. 그래서 다이아몬드의 경우에서 땅속 깊은 곳에서 파내서 반짝반짝하도록 가공하는 데에 많은 노동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비싼 것이고, 물이나 공기는 인간노동이 들어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값이 없는 것이죠. 어때요? 요즘 수질이 오염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물을 사먹는데, 이 역시 그 물을 정수하고 또 배달하는 데에 노동이 들어갔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따라서 저들 천박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소위 ‘아담 스미스의 역설’이라고 말하는 것은 역설이 아니라 아담 스미스의 노동가치론이 관찰된 결과이고, 역설은 다름 아니라 언필칭 경제학자라는 자들이 가치와 가격, 사용가치 간의 관계조차 모른다는 점이지요. 그러니 경멸받아 마땅하지 않겠어요?



(4) 토지 가격 ­‘경실련’류의 속류 토지 가격론 비판


자본주의 사회 혹은 상품경제에서는 노동생산물이 아닌 것도 많은 것이 상품으로 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토지예요. 그래서 토지의 가격은 무엇이고 어떻게 결정되는가 하는 것이 문제로 되는데, 여기서는 그에 앞서 토지 등의 문제에 대한 경실련(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류의 엉터리 속류이론부터 비판을 하겠습니다. 그들은 단단히 욕을 먹어야 하니까 말입니다.

경실련은 1989년인가에 출범해서 곧바로 한국의 대표적인 이른바 ‘시민운동단체’가 되었는데, 그들의 주장․이론의 대부분은 대체로 부정직하고, 그들이 내세우는 ‘서민’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 부르주아지를 중심으로 한 자본, 특히 독점자본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이예요. 그들 단체가 출범했던 당시는 한국 자본주의가 막 새로운 경제공황에 빠져들던 시기였고, 88년 그러니까 호황의 막바지부터 투기가 급증한 결과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여 도시의 ‘서민들’이 주거에 고통을 당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상황에 기초하여 이른바 ‘토지공개념’을 강화할 것을 강력히 캠페인하는 것으로 일약 ‘시민운동’의 주도권을 거머쥐었습니다. 이른바 ‘토지공개념’의 강화가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켜 서민의 주거고통을 경감시킬 것 같은 대중적 공감대를 형성시키는 데에 성공했던 거지요. 그래서 89년이었던가 90년이었던가 영등포의 어떤 국회의원 보궐선거에거는 이른바 ‘민중후보’라는 자도 ‘토지공개념 강화’를 공약이랍시고 들고 나왔지요.

당시 저는 그러한 상황 전개를 보면서, 말도 안되는 ‘소부르주아 천둥벌거숭이들의 주장’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당시 여러분들 중에 저의 그런 비판을 읽은 사람이 있었다면, 필시 저를 가리켜서 “뭐 이런 친구가 다 있어?” 하고 욕을 했겠지요? 당시 ‘토지공개념의 강화’는 민중의 이익에 복무하는 것이란 허위의식이 광범하게 퍼져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토지공개념의 강화’ 여부는 전통적인 토지 소유자와 산업 부르주아지를 중심으로 한 자본 간의 투쟁이자 그들 자본의 이익에 봉사하는 주장 혹은 조치여서 직접적으로는 노동자․민중과 관계가 없었던 것이고, 그것이 강화되면 될수록 산업 부르주아지, 특히 독점자본․재벌의 힘이 증대되어 간접적으로는 그만큼 노동자․민중에게 해로운 것이었습니다.

왜 그것이 전통적 토지 소유자와 근대 부르주아지 간의 투쟁이냐고?

여기서 자세하게 논할 계제는 되지 못하기 때문에 간단히만 말하자면, ‘토지공개념’ 관련법에 의해서 중과세(重課稅) 등의 대상이 되는 토지는, 토지 소유의 절대적 면적 크기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토지에서 일정한 기준 이상의 영업 관련 세금을 내고 있느냐 여부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컨대 삼성그룹이 수십만 평, 수백만 평의 토지를 소유하고 그것을 골프장이나 ‘용인 농원’ 같은 위락시설로 이용하고 있어도 그 토지에서는 그 ‘근대적’ 영업에 따른 세금을 내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토지 과다 보유’라거나 기타 어떤 ‘토지공개념’ 관련법의 제재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떻겠습니까? 좀 시대 뒤떨어진 전통적인 토지 소유자가 예컨대 한 500평이나 1000평의 토지를 가지고 있는데 봉건적 무능력 때문에 그것을 ‘근대적으로’ 이용하지 못해서 일정 기준 이상의 영업 관련 세금을 내지 못하고 있을 때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토지공개념’ 관련법의 제재 대상이 돼서 중과세 처분을 받는다든가 하는 거지요. 토지를 ‘근대적으로’ 이용하는 근대 부르주아에게 그것을 팔지 않을 수 없도록 압력을 받는 것이지요. 그러니 결국 근대 부르주아, 특히 독점자본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 아니겠어요?

기본적으로 그러한 성격의 ‘토지공개념 강화’를 경실련은 마치 노동자․민중 등 ‘서민’의 이익인 것처럼 훌륭하게 포장해서 선전했던 것이고, 민중운동 진영의 천둥벌거숭이들이 부화뇌동했던 거지요.

그런데 경실련은 엉터리일 뿐만 아니라 정말 위선적입니다. 당시 이른바 ‘토지공개념’을 강화해야 한다고 방방 뛸 때 경실련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그 중의 하나가 바로 당시 성균관대에 있던 김태동 교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김태동이 김대중 정권에 들어와 무엇을 했습니까? 97년 말에 폭발한, 한국 자본주의에 유례가 없었던 심각한 공황으로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고 경제 전반이 침체에 빠지자 이번에는 부동산 경기를 자극하여 경제 일반을 자극할 양으로, 자신이 그 ‘강화’를 주장했던 ‘토지공개념’을, 대통령 경제수석․정책기획수석 비서관이라는 직책에서 자신의 손으로 ‘약화’시켜서 껍데기만 남겨 놓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경실련은 그러한 조치에 짐짓 눈감고 침묵하고요. 그러니 위선적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건 그렇고 ‘토지 가격’에 대한 경실련 류의 인식도 가관입니다.

90년에 경실련에서 낸 ꡔ경제정의ꡕ라는 잡지의 창간호에 보면, 바로 그 김태동이 토지문제에 대해서 글을 쓰고 있어요. 그런데 그 글에서, 토지 가격도 다른 상품의 가격과 ‘마찬가지로’ 수요-공급 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거예요.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그 사람은 ‘근대경제학자’로서 ‘상품의 가격은 수요-공급 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천박한 상투어밖에는 모르는 거지요.

더구나 그에 의하면, 토지 가격의 본질․실체와 다른 상품 가격의 그것은 같은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아까 앞에서, 일반적으로 상품의 가격은 그 가치의 화폐적 표현이고, 따라서 그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서 투여된 노동시간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김태동 등이 말하는 것처럼, 정말 토지 가격과 기타 상품의 가격이 본질상 같은 것이라면, 어떻습니까, 토지 역시 인간의 노동 생산물이겠지요? 그런데 이는 사실입니까? 아니지요? 토지는 본래 자연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서 결코 노동 생산물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토지 가격이 다른 상품 가격과 본질상 같다고 하는 저들의 주장은 사실은 말도 안되는 얘기입니다. 그것은 본질상 다른 것이고, 따라서 그 결정원리도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러면 토지 가격은 무엇이고, 그것은 어떻게 결정되는 것인가? 그것은 토지 소유의 실현으로서의 ‘지대의 자본화’이고, 따라서 그것은 지대의 크기와 일반 이자율과의 관계에서 결정되고 변화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토지 가격도 다른 상품의 가격과 마찬가지로 결정된다’는 엉터리 소리만 들어 왔으니, 이 애기가 도대체 무슨 뜻인지 쉽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렇다고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는 아니지요. 그 소리는 바로 저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소리니까요.

사람들은 토지를 어떤 경제적 이유 때문에 소유합니까? 바로 그 이용료 때문이지요.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집 지을 땅이 없는데 집을 지으려면 토지를 임대해야 합니다. 거꾸로 자신이 가진 땅을 임대하면 임대료를 받습니다. 그 토지의 임대료를 경제학적 용어로는 지대(地代)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연간 지대를 그 사회의 일반이자율로 나누면 그 토지 가격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일정 면적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데 그 토지에서 매년 1천만 원의 지대를 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일반 이자율은 연 10%라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그 토지의 가격은 ‘1천만 원 ÷ 0.1 = 1억 원’입니다.

왜 그렇느냐고요? 자, 봅시다. 그 사람이 그 1억 원을 가지고 이자놀이를 하면 1년에 얼마를 벌겠어요? 연간 이자율이 10%니까 1천만원의 이자 수입이 생기겠지요? 그런데, 이제 그 사람이 그 1억 원을 가지고 1천만 원의 지대․임대료가 들어오는 토지를 사도 그 경제적 효과, 즉 수입은 똑 같겠지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토지 가격은 지대를 일반 이자율로 나누는 값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설명할 여유는 없지만, 자본주의가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지대는 증대하는 경향이 있고, 일반 이자율은 하락하는 경향이 있어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발달하며 할수록 토지 가격은 비싸지는 경향이 있고요.

여기서 우리는 대강 이렇게 일반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노동 생산물이 아닌 것이 상품화될 때 그 가격은 그것을 소유함으로써 발생하는 소득을 일반 이자율로 나눈 값에서 결정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농담도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란 돈이라면 못할 짓이 없는 사회이기 때문에 드믈지 않게 ‘인신매매’가 이루어지는데, 젊은 여자는 대개 유흥가에 접대부로 팔아 넘기고, 젊은 남자는 새우잡이 배에 팔아 넘긴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때 예쁘고 애교 있는 여자는 그 접객업소에 많은 돈을 벌어줄 테니까 ‘값이 비싸고’, 그 반대는 ‘싸다’. 또 건장하고 힘이 센 남자는 새우를 많이 잡을 것이니까 ‘값이 비싸고’, 그 반대는 역시 ‘싸다’. 이런 농담 말입니다. 비정하지만, 현실이기도 합니다.



3. 상품의 가치구성­그리고, 사회적 소비의 한계­


이제 그러면 상품의 가치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를 봅시다. 제가 지금 입고 있는 이 양복 윗저고리를 예로 들어봅시다.

노동은 ‘운동’이라고 해서 허공에 대고 가위질을 하는 동작을 하고 바느질을 하는 동작을 한다고 해서 이 저고리가 만들어지는 것 아니지요? 이 저고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위나 재봉틀, 바늘, 다리미 등과 같은 기구, 즉 노동수단이 있어야 하고, 또 옷감 및 실 등과 같은 재료, 즉 노동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이 노동수단과 노동대상을 합해서 생산수단이라고 한다고 했지요? 예, 그리고 이 생산수단은 이 저고리를 만들기 위해서 ‘생산적으로’ 소비됩니다. 그리고 이 소비된 생산수단의 가치는 증발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저고리에, 즉 노동의 새로운 생산물에 그 크기 그대로 이전됩니다. 그러니까, 이 저고리에는 이 저고리를 만들기 위해서 소비된 생산수단의 가치, 즉 소비된 옷감이나 실, 재봉틀의 마모부분, 바늘의 마모부분의 가치 등은 이 저고리에 옮겨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저고리의 가격은 이것을 만들기 위해서 소비된 것들의 가격보다, 따라서 이 저고리의 가치는 이것을 만들기 위해서 소비된 것들의 가치보다 훨씬 크지요? 바로 그 차이 부분이 바로 이번에 이 저고리를 만들면서 새롭게 창출된 가치 부분입니다. 이 부분을 과학적인 노동자 경제학에서는 ‘가치 생산물’이라고 부릅니다. 부르주아 경제학의 ‘부가가치’와 같은 것이지요. 그리고, 소비되어 새로운 생산물에 그 가치가 이전된 생산수단의 가치와 이 ‘가치 생산물’의 합이 ‘생산물 가치’를 이루는 것이지요.

그것을 간단히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그림> 상품(생산물)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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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산물  가치  --------------------------

 

 

소비된 생산수단 가치

    가치 생산물 (= 부가가치)



그런데, 생산에 소비된 생산수단의 가치는 자본이 그 생산수단을 구매하기 위해서 투하한 자본의 가치와 같고, 그 가치는 생산과정에서 변하지 않기 때문에 경제학에서는 그렇게 투하된 자본을 ‘불변자본(不變資本)’이라고 규정합니다. 앞으로는 우리도 이 부분을 불변자본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그러면 생산물의 가치, 즉 상품의 가치는 ‘불변자본 + 가치 생산물’이 되는데, 한 사회에서 1년간 생산된 총상품의 가치도 마찬가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회가 1년간 소비할 수 있는 최대의 크기는 바로 ‘가치 생산물’의 크기와 같습니다. 생산이 계속되어야만, 즉 재생산이 이루어져야만 그 사회구성원의 생활․생명도 재생산되는 것이고, 금년 크기의 재생산을 하기 위해서는 불변자본 부분이 재투자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확대재생산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가치 생산물 중 일부가 자본으로 전화되어 투자되어야 하기 때문에, 사회적 소비의 한계는 그만큼 가치 생산물보다 적은 곳에서 결정되겠지요.

지금 우리의 논의를 순수하게 하기 위해서 사회가 순수하게 자본가들과 노동자들로만 이루어졌다고 가정하면, 가치 생산물은 그 노동자들에 의해서 생산된 것이고, 따라서 그 노동자들도 노동력으로서 재생산되어야 하기 때문에 가치 생산물 중에서 일정한 부분을 ‘임금’으로서 소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부분은 자본가의 입장에서 보면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서 투하하는 자본인데, 바로 이 노동력이 그 구매에 필요한 자본의 가치 크기를 넘어서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이렇게 노동력 구매를 위해서 투하된 자본을 과학적인 노동자 경제학에서는 ‘가변자본(可變資本)’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노동자들이 창출한 가치 생산물, 곧 부가가치 중에서 노동자의 임금을 제외한 부분은 자본이 무상으로 취득하는 부분, 즉 자본이 노동자로부터 착취하는 잉여가치, 혹은 부불노동(不佛勞動)이고, 바로 자본의 이윤을 이룹니다.

이렇게 보면, 노동 생산물의 가치, 즉 상품의 가치는 ‘불변자본(c) + 가변자본(v : 임금) + 잉여가치(m : 이윤)’과 같고, 그림으로 보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림> 상품의 가치 구성 : 불변자본, 가변자본, 잉여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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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산물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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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생산물 -------------

 

 

 

    불변자본

       (c)

   가변자본

   (v : 임금)

       잉여가치

       (m : 이윤)


자, 이렇게 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겠습니까?

우선, 불변자본의 크기가 주어져 있을 때, 자본은 개개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을 줄여서, 즉 가치생산물의 크기를 줄여서 생산물의 가치, 즉 개개 상품 가치를 줄이고, 그리하여 가격을 낮춤으로써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가치생산물의 크기는 줄이면서도 이윤은 증대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자본은 두 가지의 방법을 추구하게 됩니다. 하나는, 상품을 많이 생산하여 팖으로써 잉여가치, 즉 이윤을 증대시키는 것인데, 이 때문에 상품 하나 하나를 생산하기 위해서 필요한 노동시간은 줄어드는데 노동자들의 현실적 노동시간은 늘리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에서는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은 줄어드는데, 노동자들의 노동일, 즉 매일 매일의 노동시간은 증대한다는 역설이 생깁니다. 다음으로는 자본은 잉여가치, 즉 이윤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노동자들의 임금, 즉 가변자본을 줄입니다. 즉, 노동자가 빈곤화되는 것이지요. 이는 경제위기의 궁극적 원인이기도 한데, 이들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에 임금을 얘기할 때, 그리고 경제위기를 얘기할 때, 다시 그리고 보다 자세히 고찰하기로 합시다. 여기까지가 상품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입니다



4. 화폐


(1) 화폐는 상품


오늘 처음에 출발할 때 자본주의적 생산이 지배하는 사회의 부(富)는 ‘방대한 상품의 집적’이라고 했지요? 이때 그 상품이란, 예를 들어 옷감이라든가 카메라라든가 기타 등등, 말하자면 보통의 상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화폐까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화폐도 상품인 것이고, 바로 이 점, 즉 화폐가 왜 상품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바로 ꡔ자본론ꡕ에서 ‘이해하기 어렵다’라고 한 문제지요. 그리고 오늘날 대부분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화폐란 상품이 아니라 ‘국가가 그 권위로 정한 일정한 기호나 추상적 힘’인 것처럼 주장을 합니다. 바로 그들 경제학의 파탄을 웅변하는 부분입니다.

우선 우리는 시장으로 나가 봅시다. 그러면 거기엔 여러 상품이 있는데, 임의의 한 상품, 여기서는 우리의 필수 주식인 쌀을 한 말 산다고 가정해 봅시다. 요즘 쌀 1말에 4만 원이 좀 넘는 것 같은데, 얘기하기 쉽게 4만 원이라고 합시다. 그러면, 쌀장사와 그 쌀을 산 사람 간에는 쌀 1말과 ‘화폐’ 4만 원을 맞교환하는 것으로 됩니다. 식으로 표시하면, ‘쌀 1말 = 화폐 4만 원’, 이렇게 되겠지요? 그렇습니다.

결국 쌀 1말과 4만 원은 서로 무언가가 양적으로 같기 때문에 서로 교환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이렇게 얘기할지 모릅니다. 쌀 장사는 돈이 필요하고, 구매자는 쌀이 필요하니까 맞바꾸는 것이라고요. 그 말도 맞습니다. 그런데, 쌀 장사가 돈이 필요하다고 해서 쌀 1말을 아무런 액수의 돈, 그러니까 예컨대 1천원이나 2천원, 아니 3만원하고 바꿉니까? 마찬가지로 구매자가 쌀이 필요하다고 해서 자기 돈 4만원을 아무런 분량의 쌀, 그러니까 예컨대 쌀 1되나 2되, 혹은 7되, 8되 하고 바꿉니까? 양쪽 다 아니지요? 쌀 장사는 돈이 필요하더라도 그 돈이 4만 원이어야 쌀 1말을 내주고, 구매자는 쌀이 1말이어야 돈 4만 원을 내주지요? 여기서 결국 다시 ‘쌀 1말과 돈 4만 원 사이에는 무언가가 같다’, 그런데 그 무언가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돌아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양자 사이에 도대체 무엇이 같습니까? 쌀 1말과 한국은행권 4만 원을 나란히 놓고 아무리 만져 보고, 들여다 보고, 무게를 달아 보고, 별짓을 다 해도 그 자체로서는 도무지 동일한 것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누가 발견했다고 우기면, 그것은 당연히 거짓말이지요.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도무지 같지 않은데, 무언가가 같아서 교환이 된다니 말입니다. 인류가 수천 년 동안 묻고 물었으나 사실상 맑스(Karl Marx, 1818-1883) 이전에는 아무도 해명하지 못했던 문제지요. 맑스에 와서야 비로소 해명된 문제지요.

맑스의 과학적 결론에 따르면, 이 양자, 즉 “쌀 1말과 돈 4만 원 사이에는 ‘가치’, 즉 그것들을 생산하기 위해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 같기 때문에 교환”되는 것입니다.

아니! 쌀 1말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과 1만 원짜리 한국은행권 4장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이 같다고? 도저히 믿기지 않는 얘기입니다. 그렇지요?

예, 그 둘은 같지 않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슨 말이야고요?

과정을 모두 생략하고 결론만 얘기했으니, 이해가 가지 않고 수긍할 수 없는 게 당연합니다. 그래서, 맑스가 증명했던 방식에 따라서 간단히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우선 역사에 처음부터 돈, 즉 화폐가 있어서 그것으로 물건을 사고 판 게 아니겠지요? 그래서 처음에 가마솥은 만드는 한 대장장이와 쌀을 생산하는 한 농부 사이에 교환이 이루어졌다고 가정합시다.

‘가마솥 1개 = 쌀 2가마’

라는 교환 말입니다.

우선 대장장이끼리 똑 같은 가마솥 1개와 가마솥 1개를 바꾸지는 않습니다. 혹시 대장장이들이 심심풀이로(?) 바꿨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런 경제적 의미도 없는 심심풀이 그 자체일 뿐 아니겠어요? 쌀을 생산하는 농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대장장이와 농부 사이에 교환이 이루어진 것은 대장장이는 쌀이 필요했기 때문이고 농부는 가마솥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서로 자신에게 없는 ‘사용가치’로서의 상대방의 상품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위에서 서로간에 ‘필요하다’라는 것만으로는 교환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무언가가 양적으로 같기 때문에 교환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양적으로 같지 않으면, 어느 한 쪽이 ‘손해’이기 때문에, 혹은 ‘밑지는 것’이기 때문에 교환이 이루어질 수 없는 거지요.

그런데, 여기서도 역시 가마솥과 쌀 자체의 물리적 성질을 보아서는 도무지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양자 간에 같은 것은 오로지 가마솥 1개를 만드는 노동시간과 쌀 2가마를 만드는 노동시간뿐이고, 바로 그래서 그러한 양으로 교환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하고도 단순한 원리 중의 하나는, 무언가가 서로 양적으로 비교되기 위해서는 공통의 단위로 환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길이는 길이에 의해서만이 측정이 가능하고, 무게는 무게에 의해서만이 측정이 가능하다는 것 등입니다. “여기서 부산까지는 몇 킬로 그램이냐?”와 같은 문제는 제기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아무튼 서로가 양적으로 비교되기 위해서는 그 비교되는 것이 동일한 단위로 환산되어야 하는데, 여기 상품의 거래에서는 그것이 가치로, 즉 노동시간으로 환산되고 있고,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해하고, 수긍할 수 있겠지요?

여기서 이 거래, 즉 ‘가마솥 1개 = 쌀 2가마’라는 교환을 보면, ‘가마솥 1개’는 자신의 가치를 ‘쌀 2가마’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제학에서 ‘가마솥 1개’의 가치를 표현하는 ‘쌀 2가마’를 ‘가마솥 1개’에 대해서 ‘등가형태(等價形態)’에 있다고 합니다. 일반화해서 말하면 이렇게 되겠지요. “상품의 가치표현에서 같은표(=) 오른쪽에 오는 항을 ‘등가형태’라고 한다.” 그런데, 경제학에서는 다시 이 ‘상품의 가치표현’을 ‘가치형태’라고 하니까 이렇게 됩니다. “‘가치형태’의 오른쪽 항은 ‘등가형태’다.”

그런데 다시 ‘가마솥 1개 = 쌀 2가마’로 오면, 이 양자가 교환될 수 있는 것은, 방금 앞에서 본 것처럼, 양자를 생산하는 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 같기 때문’입니다. 자, 여기서 이렇게 그 ‘노동시간’이 같기 때문인데, 어떤 상품, 예컨대 여기의 ‘가마솥 1개’의 가치를 노동의 생산물, 즉 상품 이외의 다른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불가능하지요?

그렇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생산물로서의 상품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가치는 다른 ‘상품에 일정 양에 의해서’ 상대적으로밖에 표현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경제학에서는 다른 상품의 일정 양에 의해서 상대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표현해야 할 상품, 즉 가치형태의 왼쪽 항을 ‘상대적 가치형태’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즉 ‘모든 상품은 자신의 가치를 다른 상품의 일정 양에 의해서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상품의 가치를 가격으로 표현하는 ‘화폐’는 상품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수긍이 안간다고요? 어떻게 4만 원이라는 한국은행권이 쌀 1말과 그 생산을 위한 노동시간이 같을 수 있느냐고요?­물론, 같지 않지요. 그러니까, 얘기를 더 진행시켜 봅시다.



(2) 화폐의 성립


사실 우리는 지금까지 ‘가마솥 1개 = 쌀 2가마’라는 교환관계를 고찰하여, 상품은 다른 상품의 일정 양에 의해서만 그 가치를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따라서 화폐는 상품이다’라는 결론을 이끌어 냈지, 화폐 자체가 역사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어떻게 성립되었고, 그 자체 구체적으로 어떤 상품인가에 대해서까지는 아직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지금부터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가마솥 1개의 가치를 ‘가마솥 1개 = 쌀 2가마’라는 가치형태로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가마솥 1개는 현실적으로는 쌀 말고도 기타 무수한 상품의 각각의 일정 양으로 그 가치를 표현할 수 있겠죠? 그래서 ‘가마솥 1개 = 쌀 2가마’라는 가치형태는 가장 ‘단순한 가치형태’, 혹은 ‘간단한 가치형태’, 혹은 ‘개별적인 가치형태’, 혹은 ‘우연적인 가치형태’지요.

그래서 가마솥 1개의 ‘전체적인 가치형태’ 혹은 ‘전개(展開)된 가치형태’를 표시하자면, 이렇게 되겠지요.


               쌀 2가마

               양복 1벌

               구두 7컬레

가마솥 1개 =     ․

                  ․

                  ․

                x량의 A 상품


이 전개된 가치형태에서는 가마솥은 자신의 가치를 무수한 상품의 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가마솥은 ‘전개된 상대적 가치형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가치형태에서는 상품의 가치가 결국은 무차별적이고 추상적인 인간노동이라고 하는 것이 더욱 명확해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쌀을 생산하는 노동이건, 양복이나 구두, 기타의 상품들을 생산하는 노동이건 결국은 가마솥을 생산하는 노동과 같게 된다는 것이 명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형태에서는 교환이 상품의 가치량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의 가치량이 교환을 규정한다는 것도 명백히 되어 있습니다.

이제 쌀이나 양복, 구두, 기타의 상품은 각각 자신의 특수한 상품형태로서 가마솥의 등가형태가 됩니다. 즉, 이들 각각의 상품은 상대적 가치형태인 가마솥에 대한 ‘특수한 등가형태’인 것이지요.

단순한 가치형태인 ‘가마솥 1개 = 쌀 2가마’는 가마솥 1개의 값이 쌀 2가마와 같으므로 ‘쌀 2가마로 가마솥 1개를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위의 전개된 가치형태는 가마솥 1개의 가치가 쌀 2가마와 같고, 또 양복 1벌이나 구두 7컬레의 가치와 같아서 무수한 상품의 특정한 양과 같다는 것을 보여주고, 따라서 ‘그들 각각의 특정한 양으로 가마솥 1개를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전개된 가치형태는 그 내부에 결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상품, 즉 가마솥의 가치표현은 미완성입니다. 새로운 상품 종류가 상품세계에 나타날 때마다 그것은 무한히 연장됩니다. 다음에, 여기에서는 상품의 가치표현이 여러 가치표현이 복잡한 모자이크로 되어 있습니다. 나아가, 이러한 미완성적이고 복잡한 가치표현은 당연히, 쌀, 양복, 구두, 기타의 무수한 상품으로 확대됩니다. 그리고 모든 상품의 공통의 가치표현은 당연히 배제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결함을 치유하기 위해서, 여기서 위의 전개된 가치형태를 단순히 뒤집어 봅시다. 실제로도, 가마솥의 소지자가 쌀이나 양복, 구두 등등의 상품으로 자신의 상품인 가마솥의 가치를 표현하면, 마친기지로 쌀이나 양복, 구두 등등의 소지자도 가마솥으로 자신의 상품의 가치를 표현할테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뒤집으면 이렇게 됩니다.


  쌀 2가마     

  양복 1벌     

  구두 7컬레   

     ․           = 가마솥 1개

     ․        

     ․        

   x량의 A 상품


이렇게 되면 모든 상품의 가치표현이 간단하고 통일적․일반적으로 되었습니다. 쌀이나 양복, 구두 등등이 모두 자신의 가치를 하나의 상품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간단하고, 가마솥이라고 하는 동일한 상품으로 표현하니 통일적으로, 따라서 일반적으로 된 것입니다. 이제 모든 상품이 공통의 가치표현을 얻은 것이지요. 그리하여 경제학에서는 이러한 가치형태를 ‘일반적 가치형태’라고 합니다.

여기까지 오면, 이제 ‘화폐의 발생’에 가까이 다가온 겁니다. 왜냐하면, 이전까지는 각각의 상품이 자신의 사적․개인적인 작업으로서 그 등가물을 발견하고, 또 등가형태에 서는 상품도 다른 상품의 도움없이 자신의, 말하자면, 사적․개인적 작업으로 다른 상품의 등가물이 되었음에 비해서, 이제 일반적 가치형태에서는 상품세계의 공동의 작업으로 하나의 상품이 등가형태로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모든 상품이 하나의 상품으로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고 새롭게 등장하는 종류의 상품 역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즉, 이제 그 등가물은 하나의 확고한 ‘사회적 존재’가 된 것이지요. 노동의 일반적인 인간적인 성격이 여기에서는 노동의 독자적인 사회적 성격으로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되면, 이제 가마솥은 ‘일반적 등가형태’로서, 어떤 특정한 상품으로서가 아니라 가치 그 자체의 화신(化身), 따라서 무차별적인 인간노동 자체가 응고(凝固)된 것으로서 나타나는 것이지요. 그리고 다른 모든 상품도 가치 자체의 화신으로서의 일반적 등가물과 같다는 형태에서는 그것들 역시 사용가치로서의 각각의 특수성을 잃고 단지 가치로서, 그것도 비교할 수 있는 일정량의 가치로서 나타나는 것이지요.

일반적 등가물은 이제 가치 일반의 형태로서 모든 상품과 직접적으로 교환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특정 상품이 일반적 등가물이 되는 것은 다른 모든 상품이 그것을 일반적인 상대적 가치형태에서 배제하기 때문이고, 또 그렇게 배제되는 한에서만 그것은 일반적 등가물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배제가 역사적․최종적으로 하나의 특정한 상품 종류에 고착된 순간부터 일반적인 상대적 가치형태는 객관적인 고정성과 사회적 타당성을 획득했던 것이지요.

일반적인 상대적 가치형태로부터 최종적으로 배제되어 그렇게 고착된 상품 종류, 혹은 일반적 등가형태를 최종적으로 획득한 상품 종류, 그것이 바로 화폐 상품이예요. 그리고 역사적으로 그것은 바로 금(金)입니다. 그리하여, 상품의 가격이란 다름 아니라 그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을, 그 생산에 있어 같은 시간이 걸리는 금의 양으로 표시하는 것이지요.

우리 사회에서 돈을 주고 받을 때 ‘금xxxxx원’ 등이라고 말할 때, 그 ‘금’은 그저 의미없는 허사(虛辭)가 아닙니다. 바로 그 금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금’이 아니라 ‘한국은행권’이나 기타 각국의 중앙은행이 발행한 은행권으로서, 사실은 종이쪽지에 불과한 것이 유통하고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은행권 혹은 지폐(paper money)라는 것은 사실은 금을 대리하는, 말하자면 ‘대리화폐’라고나 할까요? 그런 것입니다. 이러한 종이쪽지 돈에도 ‘태환은행권’이라는 게 있고, (국가)지폐나 ‘불환은행권’이라는 게 있는데, 전자, 즉 태환은행권의 경우는 그것을 발행한 은행이 그것과 그것에 표시된 일정한 확정된 금량(金量)과의 교환을 보증하는 은행권이고, 본래적인 은행권입니다. 국가지폐나 국가지폐화되어 있는 은행권으로서의 불환은행권은 국가가 자신의 ‘신용’을 담보로, 그리고 국가권력에 의한 강제통용력을 부과하여 발행하는 것으로서, 그 발행기관이 확정된 금량과 교환해주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만한 금량을 대표하는가는 자유금시장에서 검증됩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인플레이션’ 문제를 다룰 때 다시 얘기하기로 합시다.

마지막으로, 은행권과 관련한 한 가지 흥미있는 역사적 사실을 소개하면서 ‘화폐의 성립’에 관한 얘기를 끝맺읍시다.

방금 ‘본래의 은행권인 태환은행권은 그것을 발행한 은행, 이러한 은행을 발권은행(發券銀行)이라고 하는데, 아무튼 그 은행이 그 은행권에 표시된 확정된 금량과의 교환을 보증한 은행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은행권을 그 발권은행에 가지고 가서 거기에 표시된 양의 금을 요구하면 내주는 것이지요. 어떻습니까? 그렇게 보면, 본래의 은행권, 즉 태환은행권은 일종의 ‘금 보관증’ 같은 것 아닙니까? 실제로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적으로도 바로 그러한 ‘금 보관증’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금은방’, 그리니까 ‘금세공사(金細工士 : goldsmith)’에게 금을 맡기면, 그 금세공사가 그 보관증을 써 주었고, 그 보관증이 금을 대신에서 유통했던 것인데, 그 보관증이 ‘goldsmith note’로서 은행권(bank note)의 선구적 형태였던 것이지요.

금세공사나 은행이 자신이 보관 혹은 보유한 금량보다 얼마나 더 많은 보관증 혹은 은행권을 발행하느냐가 본래 은행신용의 창조 문제인데, ‘교양경제학’에서 다루기에는 너무 복잡한 문제입니다.

(3) 화폐의 기능


▷가치척도


화폐의 첫째 기능은 ‘가치척도’입니다. 화폐를 가지고 어떤 상품들의 가치를 재는 것이죠. 척도(尺度)라는 것은, 우리가 30cm자니, 줄자니, 할 때의 ‘자’라는 뜻이예요. 그러니까, 화폐의 첫번째 기능은 다른 상품의 가치를 재는 기능인 것이죠. 화폐 자체가 가치이기 때문에 다른 상품의 가치를 잴 수 있다는 것은 앞에서 얘기했지요?

그리고 상품의 가격이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렇게 상품의 가치를 화폐인 금의 일정한 양으로 표시한 형태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현실적으로 금화(金貨)가 유통하던 시절에도, 예를 들면, ‘자동차 1대 = 금 50온스’라는 식으로 가격이 먹여져 있지 않았죠? ‘자동차 1대 = 1000달러’ 하는 식이었죠.

이 또한 어떻게 된 것이겠습니까?

국가가 금의 일정 분량에 이름을 붙여서 그것을 ‘화폐명(貨幣名)’, 즉 화폐의 이름으로 썼던 것입니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단순히 가상적인 예를 드는 것이지만, 예를 들어서 ‘금 20분의 1온스’에 ‘1달러’라는 화폐명을 붙이면, ‘금 1온스 = 20달러’가 되고, 따라서 ‘자동차 1대 = 금 50온스 = 1000달러’­이렇게 되겠지요? 그래서, ‘자동차 1대의 값은 금 50온스다’라고 하지 않고, ‘자동차 1대는 1000달러다’하는 겁니다.

우리는 앞에서 화폐란 ‘금’인 것을, 그리고 그 성격상 ‘금’일 수밖에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화폐는 상품의 교환이라고 하는 사회적 경제행위의 필연적 산물이지 국가가 임의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닌 것입니다. 국가가 할 수 있는 것은, 방금 본 것처럼, 그렇게 법률에 의해서 금의 일정량에 그 ‘화폐명’을 붙일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을 경제학에서는 ‘가격의 도량표준’을 확정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화폐의 본질이나 그 성립의 경제적 논리, 국가가 가격의 도량표준을 확정하는 것의 성격 등을 이해할 수 없는 부르주아 경제학은, 이렇게 국가가 가격의 도량표준을 확정하는 것을 보고, “화폐는 국가가 이를 법률에 의해서 만든다”고 합니다. 어이없는 이른바 ‘화폐국정설(貨幣國定說)’로서, 걸출한 부르주아 경제학자인, 그 유명한 케인즈도 바로 그러한 미몽에 사로잡혀 있었지요.

그런데 참, 상품의 생산자나 상인들은 자신들의 상품에 가격표를 붙일 때, 현물로서의 금을 옆에 두고 상품과 서로 견주어 보면서 가격을 정합니까? 아니면, 그 가격에 해당하는 금을 가격표로서 매달아 둡니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지요?

그렇습니다. 가치척도로서의 금의 역할은 금 그것이 현물로서 나타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냥 관념적으로만 존재하면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가치척도로서의 화폐의 기능의 특징입니다.



▷유통수단


화폐의 두번째 기능은 ‘유통수단’으로서의 기능입니다. 사람들은 화폐를 주고 받음으로써 상품을 사고 팔지 않습니까? 즉, 화폐를 매개수단으로 하여 상품이 유통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때 상품이야 생산자로부터 소비자에게 팔리면 거기서 상품으로서의 생명을 다해서 유통을 멈추고 소비되어 버리지만, 어떻습니까, 화폐야말로 손에서 손으로 그 주인을 바꾸면서 계속 유통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이런 농담을 하지요. “돌고 도니까 돈이라고 하는 모양”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참고로, 이렇게 화폐는 유통 속에 남아서 계속 유통을 하지만, 정작 상품을 사고 팔 때는 호주머니 밖으로 잠깐 얼굴을 나타냈다가는 다시 누군가의 호주머니 속으로 숨어버립니다. 유통수단으로서의 화폐의 바로 이러한 속성 때문에 유통수단으로서의 화폐는 자꾸만 상징화되고, 그 상징에 의해서 대체될 수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서 그 상징의 완성물인 지폐가 등장하는데, 까다로운 얘기니까 ‘경제학에 그런 얘기도 있겠거니’ 하고 여기서는 그냥 넘어기기로 합시다.


▷화페로서의 화폐


화폐의 세 번째의 기능은 ‘화폐로서의 화폐’의 기능입니다. 좀 낯설지요?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은 필시 학교에서 “화폐의 기능은, 가치척도 기능, 유통수단 기능, 지불수단 기능, 축장수단 기능, 세계화폐 기능” 하는 식으로 배웠을 꺼니까 많이 낯이 설 것입니다. 이러한 분류는 부르주아 경제학에서 그저 화폐의 기능을 ‘나열한 것’으로서 전혀 논리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지요. 과학적인 노동자 경제학에서는 화폐의 기능을 그 성격에 따라 논리적으로 분류하여, 축장 기능, 지불수단 기능, 세계화폐 기능을 ‘화폐로서의 화폐의 기능’으로 일단 분류한 다음에 다시 그 세 기능을 하급분류하지요? 왜냐구요?

이 세 기능은 ‘원칙적으로 화폐가 현물로서 수행해야 하는 기능’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이들 기능 역시 지폐나 기타 다른 것에 의해서 대체되어 수행되지만, 그것은 신용의 발달에 따른 것, 따라서 신용의 기능에 의한 것으로서 화폐의 기능 및 성격 그 자체에서 유래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튼 이 ‘화폐로서의 화폐’의 첫 번째 기능은 ‘축장’ 기능입니다. 가치를 부로서 저장하는 기능으로서, 가장 원시적인 형태는 금을 항아리에 담아서 땅 속에 묻어둔다든가 벽장 깊이 간직하는 것 등이지요. 신용이 발달하면 주로 은행 등 금융기관이 그 축장의 기구로 되지만 말입니다.

다음에 ‘화폐로서의 화폐’의 두번째 기능은 ‘지불수단’ 기능입니다. 유통수단의 기능은 상품과 화폐를 맞바꿀 때의 화폐의 기능을 말하는데, 현실의 거래에서는 예컨대 많은 외상거래가 발생하지요? 그리고 약정된 기일이 되면 그 외상을 정리하게 되고 그때 돈을 지불하지요. ‘지불수단’ 기능이란 바로 그때의 화폐의 기능입니다. ‘유통수단’ 혹은 ‘구매수단’으로서 기능할 때 화폐는 그것과 같은 가치 크기의 상품을 받는 대가로 양도되기 때문에 그 거래에 의해서 거래 당사자 양쪽이 소지하는 가치의 크기에 아무런 증감(增減)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에 비해서 화폐가 ‘지불수단’으로서 기능할 때에는 어떻습니까? 지불을 하는 사람 쪽에서 지불을 받는 사람 쪽으로 화폐 가치가 일방적으로 이전되지요?

‘화폐로서의 화폐’의 기능에 마지막으로 ‘세계화폐’ 기능이 있습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상품이나 신용의 유통은 세계적인 것이고, 이를 매개하고 결제할 수단 역시 필수적으로 필요하겠지요? 바로 화폐가 그 역할을 하고, 이때의 역할을 ‘세계화폐’로서의 기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경제학에서는 흥미로운 말이 있죠. “세계화폐로서의 화폐는 국민적 제복(制服)을 벗고 나온다”고 하는 말이죠. 각각의 국민국가에서는 그 국가 주권의 작용으로 그 화폐는 예컨대, ‘원’이라든가, ‘엔’이라든가, ‘달러’라든가, ‘파운드’, ‘프랑’, ‘마르크’ 등등, 각각의 국민적 칭호와 각각의 법률이 정한 ‘금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은유적으로 ‘국민적 제복’이라고 하는데, 그들 국민적 화폐들이 세계화페로서 기능할 때는 그러한 국민적 제복은 의미가 없고, 그것이 얼마만한 중량의 금이냐고 하는 그 ‘금 내용’만이 문제로 되는 것이지요. 실제로 금화가 세계화폐로 기능할 때면, 그것에 영국 국왕의 초상이 각인되어 있건, 일본 천왕의 초상이 각인되어 있건, 혹은 기타 어떤 나라의 누구의 초상이 각인되어 있건, 그건 아무래도 좋은 거지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느만큼의 ‘금’이냐 하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최근 실제의 국제 거래, 그러니까 국제 무역이나 국제 금융의 움직임을 보면, 어때요? 실제로 유통하는 것은 ‘금’이 아니라 달러나 파운드, 엔, 마르크 같은 국민통화, 그것도 불환통화지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화폐의 기능에 의한 현상이 아니라 ‘신용’의 기능에 의한 것입니다. 그래서 국제적으로 신용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때에는 금을 대표하는 증서로서의 각국의 통화가 유통을 합니다. 그러나 그 신용에 중대한 파열이 생기면, 그때는 바로 화폐가 자기를 드러내지요. 그래서 국제 거래에서 국민적 통화는 자취를 감추고, 금만이 화폐로서 유통하게 되는 것이지요. 실제로 1930년대 대공황기와 특히 제2차 세계 대전을 전후해서 어땠습니까? 당시까지 지배적인 국제통화였던 영국의 파운드조차 국제적으로 통용이 안되었지요? 그리하여 ‘금’이 대량으로 미국으로 유입되고, 따라서 미국의 달러가 오늘날과 같은 지위, 즉 국제적 신인도를 획득했던 것이지요?

나중에 다시 얘기하겠지만, 1960년대 자본주의 세계시장에도 그와 유사한 사태들이 벌어졌었습니다. 제2차 대전 이후 미국의 국제수지가 누적적으로 적자를 기록하자 미 달러 가치에 불안을 느낀 국제투기꾼들이 런던이나 쮜리히의 국제금자유시장에서 달러를 방매하고 ‘금’을 투기적으로 사 모으는 이른바 ‘골드러시(gold-rush)’가 연거푸 발생하여, 결국 미국의 정부가 1971년 달러와 금과의 교환을 중지하는 사태로 발전했던 것입니다. 미국 정부도 더 이상 금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금’만이 진정한 (세계)화폐라는 것을 다시 한번 증명한 것이지요.

지금 자본주의적 신용제도의 고도의 발달로 주요 국가의 국민통화가 ‘국제통화’로서, 불안하겠지만, 기능하고 있지만, 앞으로 대공황 같은 사태가 발생할 경우, 화폐론적으로도 그 추이가 흥미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5. 상품의 가격 변동­상품 가격과 노동생산성, 노동강도


자, 이제 상품의 가격은 왜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봅시다. 다만, 여기서는 진정한 화폐로서의 금화가 통용되고, 또 설령 금화가 통용되지 안는다고 하더라도 금으로의 지불이 보증된 태환은행권이 통용되고 있는 상태라고 가정합니다. ‘인플레이션’에 의한 가격 변동, 물가 상승을 여기에서는 배제한다는 얘기지요. 이 문제는 나중에 얘기할 것이니까요.

우선 우리는 상품의 가격이란 그 가치, 따라서 그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을 화폐인 금의 일정량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예컨대, 이렇게, 즉 ‘자동차 1대 = 금 1,000그램’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금 1그램의 화폐명을 10,000원이라고 한다면, 자동차의 가격은 ‘자동차 1대 = 1,000만원’으로 표시되지요.

이제 이 자동차의 가격의 어떻게 변하는가를 봅시다.

먼저, ‘금’을 생산하는 데에서의 노동생산성은 변함이 없는데, 자동차 산업에서의 생산력이 증대되어서 자동차 1대를 생산하는 데에 과거에 비해서 10분의 1만큼 노동시간이 줄어들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노동생산성, 혹은 노동생산력이란 투여된 노동에 대해서 그 생산물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개념으로서, 예컨대 작년에는 어느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하루 8시간을 노동해서 1인당 어떤 상품을 8개를 생산했는데, 금년에는 시설의 개선이나 노동방식의 변화 등을 통해서 16개를 생산한다면, 노동생산성은 2배로 증대한 것입니다. 따라서 상품 하나 하나에 투여된 노동시간은 2분의 1로 줄었고, 따라서 화폐(금)의 생산에 노동생산력의 변화가 없다면 그 가격은 반절로 줄어드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위의 예에서는 자동차 산업에서는 노동생산성이 10%만큼 증대했는데, 금의 생산에서의 노동생산성의 변화는 없기 때문에 자동차의 가격은 이제 ‘자동차 1대 = 900만원’으로 표시되어, 가격이 10% 내리게 되지요.

반대로 자동차 산업에서의 노동생산성에는 변화가 없는데, 금 생산업에서의 노동생산성이 10% 증대했다면, 이제 단위 금량당 노동시간은 과거의 90%밖에 안될 것이기 때문에 자동차의 가격은 그만큼, 즉 10%만큼 올라가서, ‘자동차 1대 = 1,100만원’이 되겠지요? 당연히 그렇습니다. 그리고 예컨대 자동차 가격의 변화는 이 양자, 즉 자동차 산업에서의 노동생산성의 변화와 화폐인 금 생산업에서의 노동생산성의 변화간의 상호 비례관계에 의해서 변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것이 근본적이고, 실질적인 가격의 변화입니다.

물론 이외에도 가격 변화의 요인은 더 있습니다. 예컨대, 호경기에는 가격이 오르고 경제위기 때나 불황기에는 가격이 내리지요. 또 수요가 많고 공급이 적으면 가격이 오르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가격이 내리지요. 그런데, 이러한 가격 변동, 즉 경기 상황에 따른 가격의 등락이나 수요-공급의 변화에 따른 가격의 등락은 중․장기적으로 보면 서로 상쇄되지 않습니까? 실제로 그렇습니다. 그 때문에 이러한 가격의 변화는 실질적인 가격의 변화이긴 하지만, 근본적인 변화는 아니지요. 그래서 근본적인 가격 변동의 원인은 어디까지나 상품과 화폐를 생산하는 데에 있어서의 노동생산성의 변화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노동생산성의 변화에 따른 가격의 변동과 관련해서 주의해야 할 것 중에 ‘노동강도’의 문제가 있습니다. 특히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은 노동생산성과 이 노동강도를 구분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노동생산성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특히 주의가 요구됩니다. 노동강도를 예로 들어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아까 예를 든 것처럼, 어떤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작년에는 하루 8시간 노동해서 어떤 물건을 8개 만들었는데 금년에는 8시간 노동으로 16개를 만들었는데, 사실은 노동자들이 작년보다 2배나 더 고되게, 2배나 더 빠른 속도로 노동을 해서 그러한 결과가 나왔다면, 어떻습니까? 외관상으로는 노동의 생산력이 2배로 증대한 것처럼 보이고, 또 자본가들이나 부르주아 통계에서는 그렇게 처리하고 있지만, 실제 상품 하나 하나의 생산에 투여된 노동량은 작년의 그것과 변함이 없지 않습니까? 이 경우에는 그 상품 하나 하나에 포함되어 있는 노동량이 같아서 그것을 평균적인 노동으로 환산한다면 그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 역시 작년과 변함이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당연히 그 가격도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노동생산력과 노동강도의 이러한 차이는 중요한 것입니다.

이 밖에 현대 자본주의에서 상품 가격 변동, 특히 그 상승의 중요한 원인은 불환은행권, 불환지폐의 증발에 따른 인플레이션인데, 이 부분은 뒤 강의에서 다루기로 했지요?



6. 생산가격과 시장가격


지금까지 우리는 상품의 가격은 결국 그 상품을 만드는 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라고 해 왔습니다. 이 말은 당연히 맞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현실적인 시장의 가격은 그것과는, 즉 그 상품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과는 다소 다릅니다.

우선 수요와 공급이 변함에 따라서 상품의 가격은,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이 변하지 않더라도, 변하지요? 그리고 이런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즉, A, B, C 세 산업 부문이 있는데, 생산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A부문은 자본이 불변자본에 80, 가변자본에 20의 비율로 투자되고, B와 C는 각각 50대 50, 20대 80으로 투자되고 잉여가치율, 즉 가변자본, 즉 임금에 대한 부불노동 혹은 잉여노동의 비율은 모두 100%라고 가정합시다. 그리고 불변자본을 기호 c, 가변자본을 v, 잉여가치를 m으로 표시하고, 각 부문에 100의 자본이 투하된다면, A, B, C, 세 자본이 생산하는 생산물 가치와 개별적 이윤율은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생산물 가치,   개별 이윤율 [m/(c+v)]


A : 80c + 20v + 20m = 120            20%

B : 50c + 50v + 50m = 150            50%

C : 20c + 80v + 80m = 180            80%


    총자본 : 150c + 150v = 300

    총잉여가치 : 20m + 50m + 80m = 150m

    총생산물 가치 : 120 + 150 + 180 = 450

    평균이윤율 : 150m ÷ 300 = 50%


자, 그런데 자본은 무엇을 목적으로 생산을 합니까? 바로 이윤을 위해서 생산을 하는 것이고, 그것도 최대의 이윤을 위해서 생산을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만일 A, B, C라는 세 자본이 생산을 했는데, 그 결과가 위와 같이 되어서 이윤율이 A는 20%, B는 50%, C는 80%라면, 어떤 상황이 연출되겠습니까? 보다 이윤율이 높은 쪽을 향해서 자본이 이동하고, 그 결과 A 부문에서는 공급 부족이 C 부문에서는 공급 과잉이 발생하면서, A 부문 상품의 가격은 상승하고, C 부문 상품의 가격은 하락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자본은 더 높은 이윤율을 올리기 위해서 이동하고 경쟁하게 되는데, 그 결과 어떻게 되겠습니까? 서로가 더 높은 이윤율을 올리려고 경쟁하는 결과로 이윤율은 결국 평균화되겠지요? 그리하여 위 식들은 이제 이렇게 됩니다. 아래 기호 p는 이번엔 이윤입니다.


생산물 가격       이윤율 [p/(c+v)]


A : 80c + 20v + 50p = 150               50%

B : 50c + 50v + 50p = 150               50%

C : 20c + 80v + 50p = 150               50%


    총이윤 : 50p + 50p + 50p = 150p

    총생산물 가격 : 150 + 150 + 150 = 450


자, 이렇게 보면, A, B, C 간에 이윤율이 50%로 평균화되면서, A 부문의 가격은 그 가치 120보다 30이 큰 150으로 커졌고, C 부문의 가격은 그 가치 180보다 30이 적은 150으로 작어졌습니다. 그리고 보다 높은 이윤율을 향한 자본의 경쟁의 결과, 현실에서의 상품의 가격은 당연히 이 가격들, 즉 이윤율이 평균화된 가격을 중심으로 움직이겠지요? 이 가격, 즉 ‘비용가격’에 평균이윤을 더한 가격을 ‘생산가격’이라고 하고, 상품의 현실적 가격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무정부성 때문에 끊임없이 이 가격으로부터 일탈하면서도, 높은 이윤을 위한 경쟁 때문에 동시에 끊임없이 이 가격으로 수렴하게 되지요.

그리고 자본간의 경쟁을 통해서 이렇게 생산가격이 성립되는 것은 시장에서의 수요-공급을 통한 상품가격의 현실적인 등락을 통해서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또 동시에 바로 이 생산가격을 중심으로 각 상품의 수요-공급이 변하면서 시장의 구체적․현실적인 가격이 변화․형성되고요. 시장에서의 그 실제적 가격, 그것이 다름 아니라 바로 시장가격입니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확인해야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이렇게 자본간의 경쟁을 통한 이윤율의 평균화와 시장에서의 수요-공급의 변화로 상품의 가격이 그 개별적 가치로부터 괴리되지만, 상품의 총가격은 그 총가치와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혹은 평균적으로 보면, 여전히 상품의 가격은 그 가치를 화폐로 표현한 것으로서, 그 상품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생산가격’이나 ‘시장가격’에 대해서 논의하기 이전에 전개한 논의는 여전히 타당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한/노/정/연

2000-04-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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