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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강좌/노동자 교양 경제학 제3마당 임금과 잉여가치

현장에서 미래를  제55호
채만수

지 상 강 좌









임금과 잉여가치



강의 : 채만수 / 부소장







1. 노동력 재생산비로서 임금


1) 임금은 ‘노동의 대가’?

ꠏꠏꠏ 이른바 ‘무노동 = 무임금’론의 근거. 그렇다면, 이윤의 원천은?


임금 문제는 자본가와 노동자간의 이해가 가장 직접적으로 충돌하는 지점입니다. 임금이 높은가 낮은가에 따라서 자본가와 노동자간의 이해관계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임금이 무엇이냐는 문제는 바로 자본의 이윤이 무엇이냐, 혹은 그 원천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의 뒷면입니다. 그래서 임금이 무엇이냐를 밝히는 문제는 곧바로 자본의 이윤이 무엇이냐를 밝히는 것으로 통하지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은 그 임금의 본질을 은폐하거나 왜곡시키기에 급급하고, 그리하여 임금을 둘러싼 황당한 미신이 적지 않은데,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임금은 노동의 대가’라는 주장이지요.

파업을 할 때마다 파업기간에 대한 임금 지급 문제가 노사간의 쟁점으로 떠오르지 않아요? 그리고 그때마다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이른바 ‘무노동 = 무임금’이라는 주장이 요란하고 말입니다. 이 ‘무노동 = 무임금’론이 바로 ‘임금은 노동의 대가’라는 황당한 ‘사실’에 근거한 주장이지요. “임금은 노동의 대가인데, 노동이 제공되지 않았으니 임금도 줄 수 없다” ꠏꠏꠏ 이런 말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임금은 노동의 대가’이기 때문에 ‘무노동 무임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런 질문을 해야 되겠지요. “만일 임금이 정말로 노동의 대가라면, 자본의 이윤은 어디서 생기는 것이냐?”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또 “이윤이란 노동자들이 행하는 노동 중에서 노동자에게 지불되지 않은 노동이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질문을 받으면 정말 대꾸할 말이 없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닙니다. 그런 질문에 말문이 막힐 사람들이었다면, 애초부터 ‘무노동 무임금’과 같은 억지는 쓰지도 않았겠지요. 그러면 그들은 자신들의 이윤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할까요?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기계나 자신들이 생산에 제공한 원료 등등, 한마디로 ‘자본의 기여분’이라고 하는 거지요. 어때요? 그럴 듯하지 않아요? 임금의 노동의 대가고, 이윤은 자본의 기여분이라…?

지난번에 우리는 현대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노동가치론을 ‘시대에 뒤쳐진 것’으로, 따라서 잘못되고 쓸모 없는 것으로 취급한다는 사실을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그러한 태도는 결국 이윤의 정체, 그 원천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말입니다. 말하자면, 노동가치론에 대해서 동의해야만, 아니 그것을 이해해야만 ‘무노동 무임금’이라는 주장이 잘못이라는 것에 동의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현대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따라서 자본가들과 그들의 직무를 대신하는 중간관리인들은 이미 이에 동의하기는커녕, 이를 이해할 수조차 없도록 훈련되어 있지요. 그러니 그들은 정말 진심에서 ‘무노동 무임금’이라고 믿고 있고,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지요. 말이 통할 리 없는 것이지요.

더구나 최근에는 혼란이 더 극심해지고 있지요. 이른바 ‘정보화 사회’니 ‘지식기반 사회’니 ‘디지털 경제’니 하는 논의들이 유행하면서, 근대경제학에 대립하여 진지하게 ‘정치경제학’, 즉 맑스경제학을 연구하고 추구한다는 경제학자들조차 노동가치론을 ‘재검토’한다는 소리가 요란하니까 말입니다. 이러한 논의가 대중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각 논자들이 그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이제 더 이상 노동이 가치의 원천이 아니라 지식과 정보 등이 가치의 원천”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이른바 ‘정보화 사회’든, ‘지식기반 사회’든, 혹은 ‘디지털 경제’든, 그것들을 근거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 기초한 상품경제 사회에서, 노동가치론을 재검토하겠다고 드는 것 자체가 사실은 노동가치론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고, 상품의 가치․가격의 원천이나 실체가 무엇이며 그것이 왜 사회적 규정인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당연히 노동가치론에 대한 부르주아적 부정(否定)으로 직통하는 통로지요.

상황이 이러다 보니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대화가 아니라 투쟁, 즉 힘이지요. 실제로 여러분들이 많이 경험한 대로입니다. 이른바 ‘무노동 무임금’을 주장하면서도 노동자, 노동조합 측의 투쟁이 강할 때는 자본은 못이기는 척하고 파업기간 중의 임금을 지불하지 않습니까? 정의는 언제는 힘에 의해서만 실현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2) 노동력의 재생산과 자본제적 생산의 재생산


다시 본래의 문제로 돌아가서, 그러면 임금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시 자본주의적 생산, 혹은 자본주의 사회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되돌아가야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첫 강의에서 이에 대해서 공부했었죠. 노동과 생산의 객체적 조건인 생산수단을 소수의 자본가들이 배타적 독점적으로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즉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롭고, 그리하여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자본가와 무산자로서의 노동자가 결합하여 사회적 생산이 이루어지는 것을 자본주의적 생산이라고 하고, 그러한 생산관계가 지배적인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라고 말입니다. 기억나지요?

자, 그런데 여기서, 만일 이렇게 자본주의 사회란 것이 생산수단의 독점적 배타적 소유자로서의 자본가와 무산자로서의 임금노동자의 결합에 의해서 생산이 이루어지는 사회라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자본가와 임금노동자의 존재 자체가 자본주의적 생산, 따라서 자본주의적 사회 그 자체의 전제(前提)가 된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 양자 중에 만일 어느 한쪽이라도 없다면 그 생산은 전혀 자본주의적인 생산이 아니고, 따라서 그 사회는 전혀 자본주의 사회인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임금노동자들의 존재, 그것도 그들이 끊임없이 집단적으로 존재하는 것, 즉 임금노동자계급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과 그 존속의 절대적 전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임금노동자계급은 어떻게 해야 존재할 수 있고, 또 재생산될 수 있는 것입니까? 말할 나위 없이 그들이 먹고 입고 살아야 하고, 자식을 낳아서 기르고 가르쳐야 되겠지요?

그렇습니다. 바로 여기에 임금의 정체가 있습니다. 다름 아니라 임금이란 바로 이렇게 노동자 가족이 먹고사는 비용이지요. 다른 말로 하면, 임금이란 노동자 가족의 생계비이고, 경제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노동력의 재생산비’지요.

자본가는 토지나 공장, 기계, 원료 등등의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있지만, 그들 생산수단이 그 자체로서 생산을 하지 못합니다. 설령, 예컨대 정말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전해서 그 자체로서 생산을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즉 영남노동운동연구소의 임영일 교수 같은 사람들이 노동자들이 자본에 고분고분 협조적으로 되어야 하는 근거로서 설교하는 것처럼 과학기술혁명의 성과로 자본이 생산에 더 이상 노동자를 요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생산이 그렇게 무인(無人)으로 이루어진다면, 자본은 그 상품에 대한 시장을 발견할 수 없고, 따라서 더 이상 자본주의 사회일 수 없지만 말입니다.

과학기술혁명의 결과로서 사회적 생산의 주요부분이 무인화되면 왜 자본은 그 생산물에 대한 시장을 발견할 수 없느냐구요? 그거야 그렇게 되면, 임영일 교수의 말대로, 자본은 더 이상 노동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게 되고, 그렇게 되면 노동자들은 더 이상 소득이 없게 되고, 따라서 자본의 생산물을 구매할 수단, 능력이 없어지니까 그런 거지요. 이해할 수 있겠지요?

잠깐 옆으로 샜는데, 아무튼 생산수단은 그 자체로서 생산을 할 수 없고, 따라서 가치와 잉여가치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자본가는 시장에서 노동자를 구매하게 되는데, 보다 정확히 얘기하면, 고대의 노예제 생산처럼 노동자 그 자체를 구매하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노동자가 노동할 수 있는 능력, 즉 노동력을 일정 시간 구매하는 것입니다. 이 매매를 뒤집어서 노동자의 측에서 보면 노동자는 자신을 파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노동할 수 있는 능력, 즉 자신의 노동력을 일정 시간 파는 것입니다. 이렇게 노동력이 매매되는 시장을 ‘노동시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컨대 남대문 시장이나 낙원상가 앞, 기타 무수히 많은 곳에 새벽시장으로 서는 ‘인력시장’처럼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형태를 취해서 나타나기도 하고, 취직시험을 치르는 대기업의 사원모집이나 게시판의 공고를 통한 모집, 요즘의 인터넷을 통한 모집 등 보다 비가시적이고 추상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자,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자본가가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했는데, 그리고 그것이 또한 사실이기도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 생산수단이 끊임없이 매매되면서 번갈아서 화폐와 상품의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이제는 자본가가 화폐를 가지고 시장에 가서 그것을 구매한다고 상정합시다. 그러면 자본주의적 생산은 이렇게 됩니다. 즉, 자본가는 화폐(기호를 G라고 합시다)를 가지고 시장에 가서 생산수단(기호: Pm)과 노동력(기호: A) 등의 상품(기호: W)을 구매해서 그것들을 결합시킴으로써 생산을 합니다. 이 생산은 물론 한편에서는 생산수단이 생산적으로 소비되는 과정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발휘하여 그것들을 생산적으로 소비시킴으로써 보다 커다란 가치를 갖는 새로운 상품(기호: W')을 만들어내는 과정, 즉 노동과정이자 가치의 증식과정입니다. 이 과정을 생산과정(기호: P)라고 합시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생산된 상품 W'를 시장에서 팔아서 다시 화폐 G'를 회수하고, 그 화폐로서 다시 앞의 과정을, 필시 보다 큰 규모로, 반복하곤 합니다. 이것을 기호와 식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됩니다.


      Pm                                                           Pm

G ꠏꠏ W <      … P … W'(W + ∆w) ꠏꠏ G'(G + ∆g) ․ G' ꠏꠏ W" <      …

       A                                                             A


여기서 ‘ꠏꠏ’는 매매가 이루어지는 것, 즉 유통을 의미하고, ‘…’은 그 유통의 중단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우선 이런 얘기부터 해야겠군요. 즉, 중상주의 시대라고 알려진 자본주의의 초기 시대에는 자본의 이윤에 대해서, 그 원천은 ‘상품을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데에 있다’는 관념이 지배했다는 사실 말입니다. 실제로 당시는 영국이나 네덜란드, 스페인 등 전기(前期) 제국주의 국가들의 약탈무역의 시대였고, 또한 그러한 약탈무역과 그 무역에서의 부등가교환(不等價交換)이 이들 국가와 왕후장상(王侯將相)의 거대한 부의 커다란 원천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관념에 일정한 근거가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당연한 일이지만, 정상적인 상태라면 모두가 다 싸게 구매해서 비싸게 팔려고 할 터인데, 거기에 이윤의 원천이 있다는 것이 타당하겠습니까? 모두가 다 싸게 사서 비싸게 팔려고 드는 결과로 사실은 모두가 자신들의 상품을 그 가치대로 사고 파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끊임없이 발생하는 가치로부터의 우연적인 상하의 일탈과 괴리는 그것이 끊임없고 무수하게 발생하기 때문에 서로 상쇄되면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실제로 상품은 그 사회적 가치대로,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난 시간에 말한 것처럼 생산가격대로 판매되는 것입니다. 상품은 같은 값끼리 교환되는 것, 즉 등가교환(等價交換)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보면, 위의 자본주의적 생산의 정식(定式)은 이윤의 원천은 상품의 교환과정, 즉 유통과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산과정에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즉, 자본가가 일정한 화폐액으로 같은 크기의 가치를 갖는 생산수단이라는 상품과 노동력 상품을 구매하여 이것이 생산과정을 거치면, 생산수단은 자신의 가치를 그 크기대로 새로운 상품에 이전함에도 불구하고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특수한 성격과 능력 때문에, 그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서 생산적으로 소비된 생산수단으로서의 상품의 가치뿐만 아니라 노동력의 구매에 투하한 자본의 가치를 포함한 본래의 상품의 가치보다 더 큰 가치의 상품이 생산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증대된 가치부분이 바로 자본의 이윤을 이루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가치를 증대시키는 노동력 상품의 특수한 성격과 능력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선 노동력의 지출로서의 노동만이 가치를 창출한다는 능력입니다. 생산과정에서 소비되는 생산수단의 가치도 사실은 그것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노동시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인데, 그것은 살아 있는 인간노동이 아니기 때문에 생산과정 중에 그것이 소비됨으로써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치를 새로운 상품으로 이전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생산수단들을 소비시켜서 새로운 상품을 만드는 노동자의 살아 있는 노동만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인데, 이때 노동자는 일정 시간 노동하는 능력 자체를 자본가에게 팔았기 때문에 자본가는 그 시간만큼 노동자에게 노동을 시켜서 그 시간만큼의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생산된 가치의 크기가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임금으로 지불한 가치보다 훨씬 큰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자본가는 노동자의 몇 시간인가의 노동력에 대해서 지불했는데, 그 지불액은 사실은 노동자가 그 시간에 지출하는 노동이 창출하는 가치보다 훨씬 적은 것이고, 따라서 노동자가 실제로 노동하는 것보다 훨씬 적은 노동시간에 대해서만, 혹은 같은 말이지만, 노동자가 실제로 지출하는 노동보다 훨씬 적은 노동에 대해서만 지불하는 것이지요.

이상이 바로 임금과 이윤의 실체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한편, 노동자가 그 노동력의 재생산비, 즉 생활비를 획득하기 위해서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판매한다는 것은 이제 노동력이 자본의 요소로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렇게 노동력이 자본의 요소로 됨으로써 자본은 상품, 즉 가치를 갖는 생산물을 창조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자본가는 다시 노동자를 고용할, 따라서 노동력을 구매할 자본 부분을 재생산하고 획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노동자는 자본에 의해서 고용되어 거기에서 자본가를 위해서 자본의 이윤뿐만 아니라 자본가가 자신을 재고용할 재원을 생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여 자본의 요소로서 노동을 한다는 것은 사실은 자본가의 상품과 이윤을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자본관계, 즉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그 자체를 재생산하는 것입니다. 맑스는 이를 누차 강조하는데, 예컨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노동력의 부단한 매매는 한편에서는 노동력을 자본의 요소로서 영구화하고, 이에 의해서 자본은 상품, 즉 가치를 갖는 사용물품의 창조자로서 나타나고, 이에 의해서 다시 노동력을 구매하는 자본 부분이 노동력 자신의 생산물에 의해서 끊임없이 생산되고, 따라서 노동자는 자신이 거기에서 지불받는 자본재원(資本財源)을 끊임없이 스스로 만들어낸다.” (ꡔ자본론ꡕ 제2권, MEW, Bd. 24, SS. 380-381.)


어쩔 수 없이 표현이 어렵지만, 여러분 정도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요?



2. 이른바 ‘고임금’론


1) 임금 수준의 국제적 비교


자, 이제 임금 자체의 크기에 대해서 얘기해 봅시다.

임금을 둘러싼 여러 논쟁 중에 ‘한국 노동자들의 임금은 고임금’이라는 주장이 팽배하지요? 어때요? 한국 노동자들의 임금은 정말 고임금입니까?

아니라고요? 정말입니까? ‘고임금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여러분이 혹시 부정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봅시다. 97년 말의 경제위기 이후 많은 사람들이 귀국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어 지금은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잘 짐작을 못하겠는데, 예컨대 그 경제위기 전에는 대략 20만 명 정도의 ‘외국인 노동자’가 있었지요? ‘외국인’에 대한 차별의식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이주 노동자’로 부르자는 주장이 있고, 저도 거기에 동의합니다만, 아무튼 지금도 무시 못할 수의 이주 노동자가 이 땅에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대부분은 이른바 ‘불법 체류자’로서 법망에 쫓기면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우선 임금 수준은 어떻습니까? 보도를 통해서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들 중에 ‘많이 받는 사람’이 한국인 노동자 평균임금의 70퍼센트 정도를 받는다고 하지요? ‘많이 받는 사람’이 그 정도니까 보통은 그보다 훨씬 못하고요. 더구나 그들의 노동조건은 어떻습니까? 아주 비인간적이고 잔인하고 ‘고대의 노예만도 못하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 아닙니까?

여기서 우리는 당연히 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받는 임금이 자신들의 국가에서 받는 임금보다 고임금이 아니라면, 그것도 현격한 차이의 고임금이 아니라면, 그들이 이국만리 이 땅에까지 와서 ‘불법체류’를 하면서까지 노예 같은 생활을 감수할 이유가 있을까?” 하는 질문 말입니다. 마조키스트(masochist)라고 하나요? 학대를 받는 데에서 성적 쾌락을 느낀다는 정신질환자말입니다. 그러한 정신병자가 아닌 바에야 그럴 리가 당연히 없겠지요. 결국, 한국 노동자들의 평균임금의 70퍼센트 이하라는 저임금이지만, 그것으로도 그들 이주 노동자들의 본국의 임금에 비하면 ‘아주 고임금’이라는 뜻입니다.

사정이 이런데도 한국의 임금이 고임금이 아니라고요?

이런 얘기도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중국에서, 대체로 재중국 교포 중 극히 일부에 의해서 저질러지는 것이지만, 한국인 관광객이나 상사원들을 상대로 한 잔인한 범죄가 가끔 보도되지요? 왜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지 알아요? 물론 이른바 ‘개혁․개방’에 따른 중국사회의 급격한 자본주의화, 혹은 자본주의적 행태와 의식의 확산이 기본적인 원인이겠지요. 그런데, 범행의 표적이 되는 ‘한국 사람들’ 쪽의 원인은요?

저는 아직 중국을 안 가봐서 직접 본 건 아니지만, 한국 사람들 술 마시는 것 보면서 중국 사람들 혀를 내두른대요. 술을 잘 마셔서요? 예, 술을 잘 마셔서지요. 그런데 모르면 모를까 설마 그냥 술을 잘 마시는 것만으로는 중국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한테 혀를 내두르지 않겠지요. 제가 듣기도 그렇고, 중국 사람들 독주(毒酒) 문화래서 우리가 멋 모르고 그들 마시는 대로 따라 마시려다가는 골로 가기 십상이라지 않아요? 그러면, 한국 사람들이 술을 어떻게 잘 마시길래 혀를 내두를까요?

여러분, 마오타이주라는 술 이름 들어보셨어요? 1972년이었던가, 여하튼 70년대 초에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닉슨이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하여 당시의 주은래 수상과 함께 마셨대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명주(銘酒) 중의 명주’입니다. 물론 중국에는 그 외에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주들이 많은데, 중국을 가고 거기에 있는 한국 사람들이 그러한 명주들을 물 마시듯 마신대요? 당연히 엄청나게 ‘비싼’ 세계적 명주들을 말입니다.

얼마나 비싸냐구요? 한 병의 가격이 중국의 노동자 한 가족의 한 달 생활비와 비슷하대요. 그렇게 비싼 술들을 물 마시듯 마셔대니, 혀를 내두를 수밖에요. ‘얼마나 잘 살면 저럴까?’ 하고 말입니다. 거기다, 연변 교포들 여기와서 얼마나 괄시당하고, 학대당하고, 사기․착취당하고 돌아가요? 그러니, ‘그래, 니들 잘 살아서 흥청멍청 하는 것 내가 좀 돌려 써보자’ 하는 오기가 생기고, 그것이 결국 문제의 잔인한 범죄로까지 연결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면 다시, 그 명주 중의 명주들이 얼마나 비쌀까? 놀라지 마세요. 아마 여러분들은 놀라지 않겠지만, 룸쌀롱에서, 요정에서 하룻밤에 수십만 원, (아니 촌놈!) 수백만 원 술을 마셔대는 사람들한테 하는 소리예요. 그 명주 중의 명주들이 한 병에 그 값이 한국 돈으로 치면 겨우(?) 4~5만 원밖에 안 된대요. 그러니, 물 마시듯이 명주를 마셔대며 희열을 찾을 수밖에요.

어쩌다 보니까 술 얘기가 주제인 것처럼 됐는데, 이런 얘기 속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중국 노동자들의 한 달 월급은 4~5만 원을 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한국 노동자들의 평균임금은 얼마예요? 노동부 발표에 의하면, 대략 월 120만 원이 넘지요?

한국의 120만 원 대 중국의 4~5만 원!!

이래도 여러분, ‘한국 노동자의 임금은 고임금이 아니다’라고 주장할 자신 있어요?

뭔가 좀 이상하고, 답답하지요? 분명히 고임금이 아닌데, 또 저렇게 보니까 고임금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어렵고,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위 얘기 속에 모든 대답이 다 들어 있어요. ‘120만 원 대 4~5만 원’ 하면, 당연히 그 4~5만 원이 아주 작은 돈이지만, 중국에서는 그것이 노동자 한 가족의 한 달 생활비라는 것 아닙니까? 한국 사람들 술 마시는 것 보고 중국 사람들이 혀를 내두르는 이유도 그래서 그렇고요. 그러니, 중국에서의 4~5만 원은 여기서의 그 금액과는 도저히 비교도 안되는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120만 원 대 4~5만 원’이란 식의 비교는 단순히 각각의 나라의 월 임금을 공정 환율로 환산해서 비교한 것이지요. 각각의 금액으로 그 국가에서 구매할 수 있는 생활자료의 양, 즉 실질임금을 비교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중국과 한국, 그리고 주로 이 나라로 이주 노동자들이 많은 오고 있는 동남아 국가들과 한국 간에는 사회․문화적 차이 때문에 실질임금의 크기에 차이가 있고, 필시 한국 쪽의 그것이 보다 크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사소한 것이어서, 각각의 국가에서의 명목임금을 공정환율로 환산한 것을 형식적으로 비교할 때의 엄청난 차이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결국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화폐액으로 표시되는 그러한 명목임금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실질임금이고, 특히 그것이 노동력을 정상적으로 재생산하기에 충분한 크기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입니다. 만일 중국에서는 그 명목임금이 4~5만 원이지만 한 가족의 생활비로서 충분하고, 한국의 그것은 120만 원이지만 충분하지 못해서 빚을 져야만 살 수 있다면, 우리는 이렇게 얘기해야 합니다. “중국의 임금은 정상적인데, 한국의 임금은 저임금이다”라고 말입니다.

저는 중국의 사정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그것이 정상적인 임금인지 아닌지 잘 모르고, 따라서 방금 ‘정상적인데’ 하고 말한 것은 단지 가정일 뿐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임금이 고임금이긴커녕 저임금이라는 것은 결코 가정이 아니라 현실이고 사실입니다. 좀 오래된 자료이긴 합니다만, 그리고 “과소비 풍조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새삼스레 일깨워 준다”며, 임금을 보다 더 가혹하게 억누르기 위한 부르주아적 위선과 음모를 덧붙여서이긴 하지만, 1995년 5월 3일자 ꡔ동아일보ꡕ는 그 전 해인 1994년도에 “우리나라 가구당 부채가 평균 8백23만원”이라는 대우경제연구소의 조사자료를 보도하고 있습니다. 이 ‘가구당 부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바로 임금이 생활비에 그만큼 못 미친다는 것이고, 그만큼 저임금이라는 것이지요. 지금의 형편도 결코 1994년보다 개선된 것이 아니고요.

그런데도 자본과 그 나팔수들은 환율로 환산한 한국의 명목임금을 동남아 국가들이나 중국 등의 그것들과 형식적으로 비교한 위에서 ‘고임금’ 운운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 지독한 위선이요 기만이지요. 만일 그런 식으로 비교하면, 이웃 일본의 임금은 우리보다 몇 배나 더 높고, 실제로 그 때문에 일본에는 한국에서 간 불법체류 노동자들이 적지 않지요.

다시 얘기하지만, ‘한국의 임금은 고임금’이라는 자본측의 주장은 위선적․기만적인 것이고, 사실은 적지 않은 가계 부채가 증명하는 것처럼 아주 저임금입니다. 제가 앞에서 여러분에게 ‘부정직한 것 아니냐’ 했던 것은, 그저 얘기를 풀어나가기 위한 것이었고, 농담이었던 것이지요.


2) 노동력의 재생산비는 무엇에 의해서 규정되는가?


사실은 앞에서 다 나왔던 것이지만, 그러면 ‘노동력의 재생산비, 따라서 임금의 크기는 무엇에 의해서 결정되는가’를 보기로 합시다.

맑스는 예컨대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노동력의 가치 즉, 이 상품의 충분한 판매가격은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량에 의해서 규정되어 있고, 이 노동량 그것은 또 여기에서는 노동자의 필요생활수단의 생산을 위해서 필요한, 즉 그 생활의 유지를 위해서 필요한 노동량에 의해서 규정되고 있기 때문에, 임금은 노동자가 그것에 의해서 생활할 수밖에 없는 소득이 되는 것이다.” (ꡔ자본론ꡕ 제2권, MEW, Bd. 24, SS. 379-80.)


즉, 노동력의 재생산비, 따라서 임금의 크기는 노동자와 그 가족이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생활수단의 양과 그 가치 곧 가격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위에서 든 예에 비춰서 말하자면, 그 생활수단의 종류와 양이 아마 조금은 상대적으로 적고, 또한 그 가격은 무척 싼 동남아 국가들이나 중국에서의 명목임금의 크기는 그에 따라서 작고, 그것이 비싼 한국이나 더 비싼 일본에서는 그 크기가 그에 따라서 큰 것입니다.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특히 노동자들의 주거비용과 자식들의 교육비용이 엄청나게 비싸지요. 주거비용이 비싼 이유는 주로 토지를 소유한 불로소득자들의 소득인 지대(地代), 즉 토지 임대료가 엄청나게 비싸기 때문인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 기회에 얘기하기로 합시다.

그런데 여기에서 다시 문제가 되는 것은, 생활수단의 종류와 양에 대해서 얘기했지만, 바로 그 생활수단의 종류와 양은 무엇에 의해서 결정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한국의 노동자와 일본의 노동자, 혹은 한국의 노동자와 동남아 등지의 노동자들 사이에 그 생활수단의 종류와 양이 다르다면, 그것은 무엇에 의해 결정되겠습니까? 인종적, 육체적, 생리적 차이 때문에? 그건 아니지요?

그렇습니다. 그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 차이는 주로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것에 의해서 규정되고 있습니다. 외국을 거론할 것도 없이 우리나라만 들어 봐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어렸을 때인 50년대나 60년대에는 예컨대 초등학생들은 대부분 머리를 박박 깎고, 검정 고무신을 신고, 또 농촌에서는 가방 대신에 보자기에 책을 둘둘 말아서 허리나 어깨에 동여매고 학교를 다녔지요. 머리를 길러서 관리하는 것보다 박박 깎는 것이, 운동화나 구두보다 검정 고무신이, 그리고 가방 대신에 보자기가 훨씬 값이 쌌기 때문에 말입니다. 아니, 또한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는 그것이 전혀 어색하지도 이상하지도 않고 전혀 정상적인 것이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어린애들 보고 그런 꼴로 학교를 다니라고 하고, 또 그렇게 강요하면, 어떤 일이 생기겠습니까? 필시 엄청난 스트레스에 못 견뎌 애들이 가출하든지, 정신병원에 가는 사태가 나던지, 심지어, 요즘엔 애들도 자의식이 강해서 자살들 하지 않습니까? 그런 사태가 나겠지요. 오늘날에는 머리도 길러서 다듬어야 하고, 운동화, 그것도 많은 경우 값비싼 고급 브랜드의 운동화를 신어야 하고, 또 그런 가방을 매야 하는 것 아닙니까? 수많은 예를 들 수 있지만, 하나만 예를 더 든다면, 그전에는, 그러니까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50년대나 60년대에는 말하자면 멋쟁이들이나 가죽 구두를 신고 다녔지, 농민이나 노동자들은 대부분 고무신을 신고 나다녔습니다. 어때요, 여러분? 여러분도 지금 검정 고무신 신고 공장이나 회사에 다니고, 살 수 있겠어요? 여러분이 당장은 뭐라고 대답할지 모르지만, 불가능한 것이지요. 남들 신는 대로 가죽 구두를 신어야 하고, 아니면 요즘의 값비싼 운동화를 신어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리고 그만큼 임금이 그것들을 조달할 수 있는 크기가 되어야 하는 것이고요.

결국, 노동력의 재생산비, 따라서 임금의 크기는 노동자와 그 가족의 육체적, 생리적 필요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그들이 사는 사회의 사회적 문화적 요인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지요.



3. 임금의 형태와 체계


1) 임금 형태와 임금 체계

ꠏꠏꠏ 시간임금과 개수임금(성과급), 그 여러 변형태․혼합형태

ꠏꠏꠏ 기본급의 증대가 바람직


또한 임금과 관련된 기본적인 문제 중 하나가 임금 형태입니다.

노동조합의 책임자나 정책 담당자들하고 얘기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른바 ‘임금 체계’ 문제로 고심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받는 월급 명세서에 있는 임금의 항목에 어떤 것이 추가 혹은 삭제되어야 하고, 각 항목은 전체 임금에서 어떤 조건에서 어떤 비중을 차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지요. 그런데 이 문제를 이해하고 그에 올바르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먼저 ‘임금 형태’에 대해서 알아야 하지요.

누차 얘기한 것처럼 임금이란 노동력의 재생산비인데, 그 재생산비라는 것이 예컨대 ‘일 주일에 얼마, 한 달에 얼마가 아니면 안된다’ 하는 식으로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지요. 일정한 사회적 문화적 조건 속에서는 정상적으로 얼마지만, 그것을 중심으로 상하(上下) 일정한 탄력성이 있는 것이지요. 즉, 노동자측으로부터 보면, 임금의 크기는 일정한 정상적인 금액을 기준으로 그보다 약간은 많을 수도 적을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같은 시대, 같은 사회에서 동일한 가족 구성을 가지고 있는 노동자 가족의 생계비가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지 않아요? 어떤 사람, 가족은 상대적으로 좀 넉넉한 생활을 하고, 어떤 사람이나 가족은 무척 빡빡한 생활을 하지만, 그렇다고 굶어죽는 것은 아니고 말입니다.

한편 자본의 입장에서는, 다음 시간에 다시 좀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임금을 낮출수록 자신의 이윤이 커지고, 또한 이윤율이 높아집니다. 물론 이것은 개별자본의 입장에서 그런 것이고, 총자본의 입장에서는 이 임금의 저하가 과잉생산이라는, 자본주의 생산에 필연적인 모순을 더욱 심화시키는 한 요인이 되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얘기하면, 또 어떤 사람들, 특히 이윤율의 저하만이 공황의 유일한 원인이라고 떠드는 일부 관념적 ‘맑스주의자들’은 ‘봐라, 과소소비론이다!’ 하고 쾌재를 부를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윤율의 저하는 여러 요인에 의해서 올 수 있고, 생산과 소비간의 이러한 격차의 확대, 즉 한편의 과잉생산과 그 이면의 과소소비도 어쩌면 그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 점은 나중에 ‘자본주의적 생산의 위기’를 논할 때 다시 보다 자세히 논하기로 합시다.)

얘기가 잠깐 빗나갔는데, 아무튼 그러니까, 즉 임금 그 자체는 그 자체의 성격으로 인해서 일정하게 탄력성을 가지고 있고, 자본의 입장에서는 임금이 낮을수록 일단 그 이윤이 높으니까, 자본가들은 임금을 가능한 한 그 최저한까지 밀어붙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임금은 자본측에서 일방적으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노동자와의, 그것도 노동자 집단과의 끊임없는 대립․길항(拮抗) 관계에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막무가내로 밀어붙일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래서 무언가 교묘하게 이데올로기적으로 ‘합리적임’을 가장하면서 밀어붙이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래서 생겨나는 게 여러 임금 형태이고, 임금 체계입니다. 말하자면, 이들 임금 형태나 임금 체계는 결국 노동자들에게 지불하는 임금의 총액을 줄이면서 착취를 강화하기 위한, 자본가들의 고안물인 것이지요.

기본적인 임금 형태에는 ‘시간임금’과 ‘개수임금’(個數賃金)이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는 이 두 형태의 다양한 변형태와 혼합형태가 있고요.

시간임금은 말 그대로 임금을 노동시간에 대해서 지불하는 형태입니다. 하루 8시간의 노동에 대해서 5만 원을 지불했으면, 이틀 16시간에 대해서는 10만 원을 지불하는 식이지요. 아마 정규직의 노동자들에게는 적어도 기본적으로는 가장 익숙한 임금 형태일지 모르겠습니다. 이 시간임금과 관련한 대표적인 변형태는 아무래도 연공급제일 것입니다. 임금을 시간제로 계산하는데, 근속년수가 많은 노동자에게는 일정한 비율을 증액하는 제도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할 것 하나. 예컨대, 하루 8시간의 노동에 대해서 5만원을 지불한다고 할 때, 그 5만 원이라고 하는 하루 임금이 그 8시간에 그 노동자가 창출한 가치 전체에 대해서 지불한다는 뜻은 당연히 결코 아닙니다. 그 5만 원은 그 노동자가 2시간이나 3시간 정도의 시간에 창출한 가치의 크기에 해당할 뿐인데 그것이 8시간의 노동에 대한 것으로서 지불되는 것이지요. 이 경우 2시간 혹은 3시간의 노동이 노동자 자신과 그 가족의 재생산을 위한 필요노동이고, 6시간이나 5시간의 노동은 자본을 위한 잉여노동이지요. 이러한 사정은 심지어 장기간의 근속으로 그 임금이 상당히 증액되어 있는 경우에도, 필요노동과 잉여노동간의 비율에 약간의 변화만 있을 뿐,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임금에 대비되는 형태가 개수임금인데, 우리에게는 성과급, 실적급, 도급제 등등의 용어로 보다 더 알려져 있는 형태지요. 그 상품이 성격상 개수로 계량(計量)되는 것이라고 가정할 때, 몇 개를 만들었느냐에 따라서 임금을 지불하는 형태입니다. 예컨대, 어떤 상품 10개를 만드는 데에 대해서 5만 원을 지불하고, 20개를 만드는 데에는 10만 원을 지불하는 식의 임금 형태가 그것입니다. 도급제에서 대표적으로 눈에 확연한 형태로 나타나지요. 그리고 이러한 개수임금의 대표적인 변형태 역시 양이 증가함에 따라서 임금액을 증가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10개를 만들 때엔 5만원을 지불하지만, 20개를 만들면 10만5천 원을 지불하고, 30개를 만들면 16만5천 원을 지불하는 식의 계산 말입니다.

이는 물론 노동자들간의 경쟁을 격화시킴으로서 잉여가치의 양을 증대시키려는 것인데, 한편으로는 생산량을 증대시킴에 따라서 개개의 상품을 생산하는 데에 소비되는 생산수단의 양과 가치가 일정하기보다는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는 것 등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수임금 자체가 대부분의 경우 노동자들 간의 경쟁을 격화시키고, 그들을 분열시키려는 의도에서 도입되는 것입니다.

개수임금 또한, 시간임금과 마찬가지로, 예컨대 10개를 생산하는 데에 임금을 5만 원을 지불한다면, 그 5만 원이 그 상품 10개를 만들면서 지출된 노동, 따라서 그 노동에 의해서 창출된 가치생산물의 크기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컨대 3개나 4개를 만들 때 지출된 노동, 따라서 그 서너 개의 상품에 가치로 물질화된 노동시간만큼만을 지불하는 것이고, 7개나 6개에 물질화된 노동시간은 지불되지 않는 잉여노동이지요. 증량에 따라서 증액된다고 하더라도, 앞에서 얘기한 대로, 마찬가지고요.

이렇게 자본제적 생산에서는 임금은 지출된 노동의 일부에 대해서만 지불받는 데도 그 정체에 대해서 지불받는 것과 같은 외양, 즉 겉모습을 취합니다. 그리고 이에 비해서 노예제에서는, 노예와 그 가족 역시 재생산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노예의 노동시간 가운데 그 재생산에 필요한 부분이 노예와 그 가족에게 지불됨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불되지 않는 외양을 취합니다. 맑스가 명확한 형태로 지불한 사실인데, 그만큼 자본주의적 착취는 은폐되어 있고, 따라서 그만큼 그 체제가 이데올로기적으로 강고한 것입니다.

앞에서 아무튼 시간임금과 그 대표적인 변형태에 대해서 말했지만, 그것들의 변형태나 혼합형태는 무수한 형태로 존재합니다. 예를 들면, 최근 소위 벤처기업 및 대기업에서 유행처럼 도입되고 있는 연봉제 또한 어떻습니까? 실적급제, 따라서 개수임금의 변형태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시간임금과 개수임금이라는 이 양자간의 다양한 혼합형태는 전형적으로 이른바 ‘임금체계’에서 구현되고 있습니다. 이른바 ‘임금체계론’이란 추상적으로는 그러한 임금의 혼합형태를 분석하는 이론이고요.

그런데 사실 임금체계란 사실은 그 자체로서 너무나 명확하기 때문에 이론으로서 분석할 근거도 사실은 별로 없습니다. 사실은 임금체계 자체가 임금 총액을 축소시키면서 잉여노동을 증대시키기 위한 임금형태의 조합인 것처럼, 임금체계론이란 성격상 기본적으로 이 시간임금과 개수임금을 어떻게 조합시켜야 임금의 총액을 절약하면서 잉여가치의 생산을 극대화할 것인가 하는, 자본측의 노동경영학에 다름 아닙니다. 따라서 최근 몇 년래, 일부 노동운동을 연구한다는 단체나 학자들이 노동자의 이름으로 ‘임금체계론’을 크게 제시하고, 그것을 이래저래 조작함으로써 마치 임금문제의 핵심을 풀 수 있다는 듯이 주장하는 것은, 그들의 주관적 목적이야 무엇이든, 객관적으로는 자본의 이익에 봉사하고,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놀아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 이른바 ‘임금체계론’의 대표적 논자의 한 사람인 영남노동운동연구소의 강신준 교수가 노동조합의 산별조직화를 주장하면서 그 주요한 목표의 하나를 이른바 ‘노사 동반자 관계’에 두고 있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것입니다.

매를 맞아 죽더라도 어느 매에 맞아 죽는지는 분명 알아야 하니까 우리는 분명 각자 회사와 공장의 임금체계를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분석하고 그 각 항목을 이래저래 조정함으로써 어떤 금방망이라도 나올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접근입니다.

임금체계와 관련해서는 노동자들에게는 오직 하나의 원칙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즉, 법정노동시간에 가능한 한 많은 임금을 확보하고, 노동력의 재생산비, 다른 말로 하면 ‘생활임금’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임금체계상 기본급의 비율을 최대한 높이고, 가족 수당이나 기타 육아수당, 교육수당 등등 가족 구성의 변화에 따른 수당을 확보하는 것이겠지요. 중요한 것은 성과급적 요소를 배제하는 것입니다. 실제 이 성과급적 요소를 강화시켜 노동자들을 경쟁시키고 분열시켜서 무력화시킴으로써 잉여노동을 증대시키려는 게 자본측의 의도이고, 이에 대항에서 그러한 성과급적 요소를 없애는 것이 노동측의 과제입니다.




3) 생활임금과 관련한 생계비 모델

  ꠏꠏꠏ 이론 생계비와 실행 생계비


마치 ‘임금 체계’야말로 임금 문제의 핵심이라는 식으로 얘기를 하는 일부의 경제․사회학자들은 노동자들을 위해서 뭔가 획기적인 임금 체계를 발견하기 위해서 불철주야 노고를 사양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참으로 훌륭한 일이지요.

그런데 사실은 이미 훌륭한 임금 체계 혹은 모델을 가지고 있지요. 전노협 시절에 확립한 생계비 임금 모델이 그것이지요. 노동자 가족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여러 생활자료의 양과 가격을 조사하여 그것으로써 임금액으로 삼는 것은, 자본-임노동 관계라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주어진 것으로 전제하는 한에서는, 노동력의 재생산비로서의 임금의 성격에 가장 어울리는 임금 모델 아니겠어요? 그리고 이 생계비 임금 모델에는 성과급적 요소는 한 톨도 없지요.

그런데, 이러한 생계비 임금 모델은 ‘일방적으로 노동자에게만 유리한 모델’이라며 강신준 교수가 한때 제시했던 ‘생활급 + 노동급’ 임금 모델은, 당시 제가 중국 춘추시대의 고사(古事)를 들어 ‘조사모삼(朝四暮三)도 결국 일곱’이라고 비판했던 것처럼, 사실은 자본이 추구하는 ‘기본급 + 성과급’ 모델을 다른 말로, 그것도 부정직하고 오해를 불러오는 말로 표현한 것에 다름 아닙니다. ‘조사모삼도 결국 일곱’이라는 저의 비판은, ‘조삼모사(朝三暮四)’라는 중국 춘추시대 송나라에서의 고사를 원용한 것입니다.

이 조삼모사의 고사란, 여러분이 다 아시다시피, 원숭이를 사랑해서 원숭이와 의사소통까지 가능하던 한 노인이 원숭이들의 먹이인 도토리를 줄려야 할 정도로 벌이가 시원찮아져서 원숭이에게 도토리를 ‘아침엔 3개 저녁엔 4개를 주겠다’고 했더니 원숭이들이 화를 내서 그러면 ‘아침엔 4개 저녁엔 3개를 주겠다’고 했더니 원숭이들이 좋아했다는 얘기 아닙니까? 아마 원숭이들의 단순하고 어리석음에 비유해서 일부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것이겠지요.

실제로 ‘생활급 + 노동급’ 모델은 ‘기본급 + 성과급’ 모델과 동일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뭔가 새롭고 다른 내용인 것처럼 이해한다면, 바로 우리가 저 송나라의 원숭이와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생활급 + 노동급’이라는 표현은 사실은, 당시 비판에서도 말했고 또 방금 전에도 말했던 것처럼, 부정직하고 유해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생활급’으로써 생활비, 그러니까 생계비를 확보하고, 연장근로라든가 기타의 추가적인 노동을 통해서는 그 생계비를 넘는 무언가를 확보하는 것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임금제도 중에 그러한 임금제도는 없습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경제제도에서 볼 때 자기파괴적이거든요. 왜냐고요? 그렇게 되면 노동자 가계에 잉여금이 쌓여가게 되고, 그리하여 시간이 지나면 그들 노동자들이 대부분 이제 임금노동을 그만두게 되기 때문이지요. 또한 그러한 임금제도는 있을 수 없다고 했는데, 본래 임금 형태 혹은 임금 체계라는 게 임금의 총액을 줄이면서 노동자들로부터 최대한의 잉여노동을 착출하기 위한 술수일 뿐만 아니라, 더구나 우리 사회에서는 자본가계급의 힘이 노동자계급을 압도하고 있는데, 그러한 생계비를 넘는 임금이라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런데 생계비 임금 모델과 관련해서는 상당한 금액의 차이가 나는 두 가지가 제시되지요. 하나는 ‘이론 생계비 모델’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행 생계비 모델’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론 생계비 모델이란, 일정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생활자료의 종류와 양을 설정하고, 물가 수준과 그 동향을 조사하여 임금의 크기를 정하는 모델입니다. 이 모델은 매우 규범적이고, 과거 전노협의 생계비 모델이 바로 그런 것이었지요.

그런데 그에 비해서 자본측이나 자본을 위해서 봉사하는 일부 경제학자나 사회학자 등은 노동자 가족들이 현실적으로 지출하고 있는 생활비를 품목별로 조사하여 그 합계로써 이른바 ‘실행 생계비’를 산출하고, 그에 근거해서 임금의 크기를 정하려고 합니다. 현실적으로 노동자들은 ‘인간다운’ 경제․문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그에 기초한 생계비란 역시 저임금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객관적인 사회조사’를 빙자해서 노동자들에게 계속적으로 저임금을 강요하려는 그러한 음모를 우리는 폭로하고 단호하게 저지해야 하겠습니다.


4) 은폐된 임금 형태들


오늘 임금문제를 시작하면서 “임금을 둘러싼 황당한 미신이 적지 않다”고 한 말 기억하지요? 실제로 그렇습니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이런 것까지 있습니다. 즉, 어떤 것은 사실은 임금인데 많은 사람들이 그것은 임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던가, 혹은 임금이 아닌데도 임금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 말입니다.

예를 들어, 요즘 갑근세라고 하나요, 근로소득세라고 하나요? 여하튼 여러분들 월급 봉투 받아보면 국가가 매달 꼬박꼬박 ‘세금’을 떼어가고 있지요? 그 세금은 월급 명세서에뿐만 아니라 임금협상․임금협정에서도 ‘임금’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노동력의 재생산비, 따라서 임금이 아니지 않아요? 그에 비해서 의료보험료를 한번 봅시다. 임금을 받는 여러분과 임금을 지불하는 회사가 아마 반반씩 지불하고 있지요? 이런 경우 여러분은 필경 회사가 여러분을 위해서 의료보험료의 절반을 부담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의료보험은 결국 보험가입자나 그 가족의 혜택으로 돌아오는 일종의 공제조합 같은 것으로서, 사실은 회사가 여러분에게 지불할 임금의 일부를 유보해뒀다가 지불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결국 회사가 여러분을 대신해서 지불하는 의료보험료는, 형태상으로는 임금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임금인 것이지요.

그런데 방금 예를 든 것들은 경제적으로도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사실 별 영향이 없는 하찮은 사항에 불과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심각하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이른바 국민주, 우리사주, 종업원지주제 등으로 불리는 제도를 통해서 노동자들의 일부가 얻는 소득, 이른바 주식 소득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1) 노동자들의 주식 소득 ꠏꠏ 이른바 ‘국민주’, ‘우리사주’ 등


매매차익이든, 배당금이든 노동자들이 주식의 소유와 매매를 통해서 얻는 소득은 일반적으로 자본가들이 그것을 통해서 얻는 것과 같은 성격의 ‘주식 소득’, 따라서 ‘자산 소득’으로 간주됩니다. 외형상 형태상으로는 그렇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만일 그 형태․외형에 홀려서 그렇게 믿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아주 천박한 것으로서, 자본-임노동 관계라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 각 계급의 소득이 어떻게 결정되는가를 은폐하는 것입니다. ‘우리사주’ 등의 소유와 매매를 통해서 얻는 ‘주식 소득’은 본질적으로 임금의 위장적 형태에 불과합니다. 다음과 같은 글을 봅시다.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지불하는 이자는 임금의 지불과 동일한 것이며, 따라서 자본가에게 있어서는 가변자본의 투하와 같다. 이러한 결론은 가치법칙의 기초 위에서, 그리고 노동력 가치의 개념을 고려하여 확립된다.” (Lau-rence Har-ris, ‘On In-ter-est, cre-dit and ca-pi-tal,’ ECO-NO-MY AND SO-CIE-TY, Vol. 5 No. 2, May 1976, p. 145.)


여기서 말하는 ‘이자’란 주식에 대한 배당금을 가리킵니다. 그리하여 자본의 입장에서 노동자들에게 배당금을 지불하는 것은 임금을 지불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배당금이 임금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가치법칙의 기초 위에서, 그리고 노동력 가치의 개념을 고려하여 확립된다”고 하는 점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노동자들의 이른바 주식 소득 역시 사실은 그들의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비용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만일 노동자들의 주식 소득이 노동력의 재생산비로서의 임금을 넘는 무언가라면, 그것은 노동자 가계에 축적되게 될 것이고, 그것이 어느 정도의 크기가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역시 그들은 소외된 노동으로서의 임금노동을 그만두겠지요? 그런 식의 경향이 사회에 자리잡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노동력 부족으로 임금은 폭등하고, 결국은 자본주의적 생산 자체가 소멸하게 되겠지요? 그런데도 총자본으로서의 국가가 법률까지 제정해서 ‘우리사주제’니, ‘종업원 지주제’니, ‘국민주’니 하는 것들을 조장하고 장려한다? 뭔가 이상하고, 앞뒤가 맞지 않지 않아요? 그리고 실제로도 ‘국민주’니 ‘우리사주’니 하는 것을 통해서 부자가 되었다는 노동자들도 찾아보기 힘들고, 더구나 노동력 부족에 의한 임금의 폭등이나 하물며 자본주의의 사멸 같은 사태는 그림지도 나타나지 않고 말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우리 사회에서는 노동문제에 대해서 발언하는 많은 경제학자나 사회학자들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많은 노동운동 단체들에 의해서, 그리고 많은 노동조합에 의해서도 이른바 ‘국민주’니 ‘우리사주’니 하는 것이 노동자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진보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아마 여러분들의 대부분도 그렇게 생각해왔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식의 이데올로기 공세가 엄청나게 강하니까요.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들은 철저하게 반노동자적인 것들입니다.

이른바 ‘우리사주’라는 것에 대해서 말하자면, 우선 그것을 통해서 노동자들은 ‘우리도 회사의 주인’이라는 허위의식을 갖게 되지요? 실제로 회사를 통제하고 관리하고 그 단물을 빨아먹는 것은 경영자라고 불리는 소수의 대자본가들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허위의식을 갖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제 자본가적 경쟁력 이데올로기의 신봉자가 되고, ‘우리 회사’가 잘되게, 경쟁력을 갖추도록 최선을 다 하게 되지요? 노동시간의 연장, 노동강도의 강화, 임금 일부의 포기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심하면 날마다 증권시장만 바라보면서 노동조합도 무력해지고, 임금인상이나 기타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한 투쟁 따윈 생각도 않게 되지요? 그러니 얼마나 반노동자적입니까?

그런데 거기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사주제나 국민주 등은 실제로 노동자들의 가계 준비금까지를 잉여노동 착취를 위한 자본으로서 동원하고, 결국은 그것을 대자본이 수탈하는 기구입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애경사(哀慶事)라든가 자식의 교육, 혹은 돌발적인 사고 등을 대비해서 많은 노동자들이, 실제로 돈을 모아서든 아니면 빚을 내서든, 가계 준비금이란 걸 마련하게 됩니다. 마치 기업들이 어음 등의 결제를 위해서 지불 준비금을 확보하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종업원지주제니 우리사주제니 국민주 제도니 하는 것들은 바로 이 가계 준비금을 끌어내서 주식을 사게 하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그 자금에 대한 통제권과 그것을 수단으로 한 잉여노동 착취능력을 소수의 자본가에게 위임하는 것입니다. 증식시장의 요동과 경제공황 등을 통해서 이윽고 휴지쪼가리로 전락할 ‘주식’이라는 종이쪽지 혹은 명의(名義)를 대가로 말입니다.

이것은 단지 가능성에 그치는 게 아닙니다. 실제로 그렇게 해서 동원된 자금은 대자본가들의 수중에서 자본으로서, 즉 노동자 자신들의 잉여노동을 착취하는 금원(金源)으로서 기능합니다. 그리고 또 실제로 주식시장이 요동치고, 공황 즉 경제위기가 닥칠 때마다 휴짓조각으로 변하면서 노동자 가계에 커다란 손실을 끼치게 됩니다. 좀 길긴 하지만, 다음과 같은 신문기사를 봅시다.


“최근 주가가 상승했지만 우리사주 조합원들은 지난해 11월 구제금융 신청 직전에 비해 여전히 손해를 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일부 대기업 상장사는 대규모 유상증자를 하고 있어 우리사주 직원들의 손실을 가중시키고 있다. 22일 증권거래소가 우리사주를 보유한 465개 상장사를 대상으로 구제금융 신청 직전인 지난해 11월 20일부터 1년이 지난 20일 현재 주식평가액을 조사한 결과, 우리사주 조합원 1인당 평균 184만1천 원의 평가손을 입었다. 지난해 11월 20일 우리사주가 보유하고 있는 1억7천여만 주의 전체 평가액은 1조7068억 원이었으나 지난 20일에는 1조4231억 원으로 줄어 2837억 원 상당의 평가손을 낸 것으로 집계됐다. 조사 대상 가운데 평가익을 낸 회사는 모두 59개사에 불과한 반면 주가가 떨어진 회사는 406개나 됐다. 평가액이 가장 많이 줄어든 회사는 선진금속으로 1인당 평가손이 무려 3300만 원이나 됐다. 이어 에스케이가스(1749만 원), 경농(1741만 원), 한솔화학(1443만 원) 등도 손실이 컸다. 특히 에스케이를 뺀 4대그룹 계열사들은 이 달에만 2조 원대의 유상증자를 하거나 할 예정이어서 주식 공급물량이 급증해 전반적인 증시 활황 속에서도 주가 상승이 더뎌 우리사주들이 속을 태우고 있다. 그러나 외국인 선호주인 메디슨은 1인당 4555만 원의 평가익을 내 눈길을 끌었다. 이어 부산도시가스(2025만 원), 대덕전자(1198만 원), 극동도시가스(1천만 원) 순으로 평가익을 보았다.” (ꡔ한겨레ꡕ 98. 11. 23.)


“삼성자동차 빅딜로 15만 삼성맨들 중 상당수가 갖고 있는 삼성차 주식이 휴짓조각으로 전락하게 됐다. 삼성차의 납입자본금은 8054억 원, 그러나 지난해 6월말 기준 자기자본(자산에서 부채를 뺀 것)은 6639억 원으로, 이미 1400억 원의 자본금이 잠식됐다. 7개월이 지난 지금은 손실누적으로 자본금 전액이 잠식된 것으로 알려졌다. 대우가 삼성차를 인수하게 되면 순자산가치가 마이너스인 삼성차 주식은 전량 소각될 것이 뻔하다. 삼성 직원들의 삼성차 지분은 30.6%로, 금액으로는 2464억 원어치다. 이 가운데 절반은 지난 95년 8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30개 그룹 계열사들이 삼성차 주식을 사들인 뒤 사원들에게 100% 특별보너스 형식으로 무상으로 나눠준 것이다. 나머지 절반인 1200억 원은 96년말 삼성차 유상증자 때 임직원들의 주머니에서 실제로 나간 돈이다. 그룹에서는 15만 직원 가운데 삼성차 주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10만 명을 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 결국 직원 한 사람당 120만 원씩 손해를 보게 됐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갖고 있는 삼성차 주식은 0.13%, 10억 원어치 정도로 총수라는 점을 감안하면 많지 않은 편이다. 삼성차 주식은 한때 주당 1만 원을 호가하며 회사 안에서도 활발히 사고 팔렸지만 요즘엔 거래가 뚝 끊기고 시세형성조차 안되고 있다. 계열사의 한 과장은 ‘미리 주위 동료들에게 주식을 판 운 좋은 사람은 얼마 안된다’고 말했다. 직원들 간에는 회사가 보상대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주장과 자기판단 아래 산 주식을 회사보고 책임지라는 것은 무리라는 반론 등 의견이 분분한데, 그룹에서는 아직 공식적으로 아무런 말이 없다.” (ꡔ한겨레ꡕ 1999. 2. 13.)


어떻습니까? 더 이상의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이 그 자체로서 명확하지요?

참고로 한 가지만 더 덧붙이자면, 위 기사는 삼성자동차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이미 97년 여름에 부도가 난 기아자동차는 어떻습니까? ‘우리사주’를 소유하고 있던 노동자들이 이중삼중의 손해를 보고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지요?


(2) ‘PCS범대위’와 ‘국민기업’론의 의미


여러분들 모두 기억하시겠지만, 96년도는 일반적으로 PCS라고 불리는 이동통신 사업자를 선정한 해입니다. 그런데 그 사업자 선정을 둘러싸고 말이 많았습니다. 일부의 노동운동 단체를 포함한 이른바 NGO(비정부단체)들도, 특히 참여연대와 같은 시민운동 단체들을 중심으로, 이른바 ‘PCS범국민대책위원회’라는 것을 결성하여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PCS 사업자 선정이 이권의 ‘재벌 나눠먹기’가 돼서는 안된다고 말입니다. 기억 나시지요?

그런데 요즘은 일부에서 이른바 ‘대안 있는 운동’을 좋아하지 않아요? 사실 이때 ‘대안’이란 주어진 틀, 그러니까 ‘기존 체제 안에서의 다른 선택’을 의미하고,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의 합리화(?)를 지향하는 이른바 시민운동적 방식인데도 일부의 노동운동 단체들마저 이를 인식하지 못한 채 말입니다.

아무튼 그런 사정으로 인해서 ‘PCS범대위’ 내외에서는 “재벌 나눠먹기가 아니면 그러면 무엇이냐”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던 모양입니다. 그 ‘대안’을 둘러싼 ‘투쟁전선’의 분열 혹은 해이를 염두에 둔 듯 ‘PCS범대위’의 공식적 입장을 정하진 않았으나, 당시 이 범대위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던 인사들의 발언이나 신문 기고문 등을 보면, 그 사실상의 대안은 이른바 ‘국민기업’론이었습니다. 즉, 재벌에게 PCS사업권을 주는 대신에 ‘국민으로부터 광범위하게 주주를 공모하여, 그렇게 해서 세워지는 ’국민기업‘으로 하여금 PCS사업을 하게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국민기업’이라! 이 얼마나 근사한 말입니까? 그런데 그 실질적인 내용도 그 이름만큼이나 근사하고 훌륭한 것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른바 ‘국민기업’론 이 상정하는 ‘국민주주들’이란 필시 개인개인으로는 소액을 투자하는 광범한 다수의 노동자․민중일 것입니다. 결국 노동자․민중으로부터 자금을 모아서 이동통신회사 하나를 만들어내자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노동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어떤 식으로 귀결되는지에 대해서는 방금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노동자 자신의 돈이 자신들을 착취하는 자본으로 되는 것이고, 노동자들은 전적으로 외적 조건에 의해서 좌우되는 회사의 경쟁력을 위해서 자신들의 권리를 희생시키게 되고, 종국에는 그들이 돈 대신에 쥐고 있던 주식이 휴짓조각으로 되기 십상인 것이지요.

이른바 ‘국민기업’을 통해서 PCS사업을 담당해가자 하는 주장은 사실은 ‘PCS사업을 위해서 필요한 초기투자를 재벌을 대신해서 노동자․민중이 담당하자’는 의미였고, ‘그리고 나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나면 그때 가서 재벌님들께 상납하자’, 그런 뜻이었습니다.

왜냐구요? 상정하는 대로 광범위한 대중으로부터 자금을 모으기 위해선 그 기업형태는 ‘주식회사’일 것이고, 따라서 각각의 투자자가 투자하는 자본은 ‘주식’에 의해서 대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주식은, 어떤 법률적 제한에도 불구하고, 양도성(讓渡性)을 그 본질적 성질의 하나로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노동자․민중의 생활은 언제나 곤궁하구요. 그러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초기 투자자인 노동자․농민은 어절 수 없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주식을 헐값에 매도하게 될 것인데, 그것을 누가 사들이겠습니까? 결국 재벌들이 야금야금 사들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결국은 그 기업이 자리잡으면서 재벌에게 상납하는 것이 될 수밖에요. 재벌은 거대한 초기투자의 부담 없이 그 사업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근사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반노동자적이고 반민중적인 이른바 ‘국민기업’론의 내용입니다.

이 ‘국민기업’이란 것이 얼마나 반노동자적이고 반민중적인지는 쏘련과 동유럽에서 20세기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고 난 이후 이들 지역에서 진퇴를 거듭하면서 진행되고 ‘자본의 본원적 축적’ 과정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첫 시간에 제가 동유럽이나 러시아는 쉽게는 자본주의화되지 못할 것이라고 했지요? 자본주의화한다는 것은 직접생산자로부터 생산수단을 수탈하는 것, 즉 자본을 본원적으로 축적하는 것인데, 그 과정은 모공(毛孔)마다 선혈과 오물이 뚝뚝 듣는 잔인한 과정이어서 아래로부터의, 즉 노동자․농민으로부터의 광범한 저항에 부딪히게 되는 것이라고 했지요? 실제로 그렇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즉 공장과 광산 등에 대해서 사회주의적인 공유권․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노동자 대중의, 수탈에 대한 광범한 저항 때문에 오늘날 동유럽과 러시아는 계속적인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러시아 ‘마피아’로 알려진, 신흥의 강도적 자본가들은 어떻습니까? 어떻게든지 노동자들로부터 소유권을 탈취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이 고안해 낸 방식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우처(vouchers) 방식이라고 해서 이런 것입니다.

모든 노동자들에게 이른바 바우처라는 것을 줍니다. 이 바우처란 20세기의 사회주의적 소유방식이었던 국유(國有)나 협동조합적 소유에 대해서 각각의 노동자들이 일정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증표입니다. 그리고는 사회주의적 소유에 대해서 그것을 비효율과 관료주의, 그리고 부패로 가득찬 ‘오류’라고 낙인찍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보수 우익뿐만 아니라 노동자․민중을 얘기하고 ‘노동자 국가’를 얘기하는 많은 ‘좌파’ 속에도 팽배한 ‘국가사회주의의 오류’라는 낙인 말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사회주의적 국유와 협동조합을 해체할 준비가 일단은 되었겠지요.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개혁 정권’으로 대표되는 그들 마피아들은 효율과 발전, 자유를 위해서 사유화(우리 나라에서 일반적으로 ‘민영화’라고 하는 조치 말입니다)할 기업의 명단을 공시하면서, 바우처를 가진 노동자들에게 ‘자신이 주주가 되고자 하는 기업’을 신청하게 합니다. 그러면 그 기업의 ‘주식’과 그 노동자들이 소유하고 있는 바우처와를 교환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과거에는 사회주의적 공유에 기반하던 기업이 이제 자본주의적 주식회사로 전화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주주는 광범한 수의 과거의 사회주의적 노동자들이고요. 어떻습니까? 이렇게 해서 탄생한 기업이야말로 광범한 노동자들이 주주가 된 ‘국민기업’ 아닙니까? 그것도 주식이 철저하게 분산된 아주 이상적인 ‘국민기업’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러시아나 동유럽 국가들에서 마피아라는 신흥 자본가계급이 추구하는 자본의 원시적 축적 방식입니다. 왜?

사회주의 정권이 붕괴됐다고 해서 노동자들에게 막무가내로 “당신들은 이제 공장과 광산에 대한 아무런 권한이 없다”고 선언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만일 누가 어리석게도 그렇게 선언한다면 그를 맞는 것은 노동자들의 피의 항쟁, 폭동뿐이겠지요. 그러니 그러한 피의 항쟁, 폭동을 피하기 위한 속임수가 필요한 것이지요.

아, 훌륭한 ‘국민기업’! 그것을 통해서 소유를 분산시키고, 그리고 나선 야금야금 그것들을 집중시켜가는 것입니다. 노동자들은 과거에는 자신들이 사회주의적 통제권을 가지고 있던 공장에 대해서 아무런 권리도 갖지 못하는 무산자로 전락해가게 되는 것이지요. 가파른 속도로 말입니다. 러시아나 동유럽의 국가는 이제 노동자․민중의 폭동을 예방하고 대비하는 기구로 되고, 정부의 사유화 정책은 노동자․민중의 폭동을 자극하지 않도록 면밀하게 ‘속도 조절’되게 되지요.

그런데 이것은 단지 러시아나 동유럽의 얘기만은 아닙니다. 한국에서도 노태우 정권 시절인 80년대 말, 아직 89년 2/4분기 이후의 경제위기가 폭발하기 직전 한국통신 주식이나 포철, 한전의 주식을 이른바 ‘국민주’ 방식으로 매각했지요? 이들 기업의 이른바 ‘민영화’의 일환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제가 자세히 그 주주 수를 추적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소수의 손아귀 속으로 집중되어 있고, 또 그러한 집중이 진행중이지 않습니까? 누구의 손아귀입니까? 바로 한국적 독점자본의 형태인 재벌의 손아귀지요.

한/노/정/연


(실제의 강좌에서는 임금에 관한 이른바 ‘지불능력론’ 및 자본에 의한 잉여가치의 증대 방식 등까지 논의가 진행되었으나 필자의 사정으로 이번 호에는 여기까지 싣고, 나머지 부분은 다음 호로 넘깁니다.)

2000-05-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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