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정상회담의 명(明)과 암(暗)
그 계급적 성격․영향 및 민중적 대응과 관련하여
채 만 수
부소장
정세초점
4․13총선의 투표를 불과 사흘 앞둔 4월 10일 정부는 “6월
12-14일에 남북간에 정상회담을 갖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발표 시기가 분명 정략적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발표는
‘신북풍’이라며 한나라당과 자민련 등 야당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지만, 그 반발은 ‘발표시기’에 관한 것일 뿐 남북간에
정상회담을 갖기로 한 사실 그 자체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일찍이 70년대에 “모든 통일은 선(善)”이라는 주장도
등장했지만, 실제로 남북통일은 ‘적어도 겉으로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민족적 염원이어서 회담을 갖기로 한 합의 그
자체를 비판하고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입을 연 모든 언론과 단체, 인사들은 이 합의를 열렬히 환영하고
나섰다.
이 글의 직접적 관심 사항은 아니지만 참고로 말하자면, 그런데
이 합의 발표는, 김대중 정권의 소망을 배신하고,
4․13총선에서 새천년민주당에 결코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
같지는 않다. 주지하다시피, 개표 결과 민주당은, 여당으로서의
프리미엄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에 13석이나 뒤지는 패배를
당했을 뿐만 아니라 영남지역을 사실상 완전히 한나라당이
‘싹쓸이’해 버렸다. 그런데, 이 싹쓸이는 “남북 정상회담
합의가 DJ의 민주당에 ‘호재’로 작용할 것에 대한 경계의
결과”라는 의견이 있고, 4월 20일의 TV 토론에서 민주당의
박상천 총무도 그것이 “득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불분명하다”는 발언을 함으로써, 민주당 내에도 그러한 분석이
강하게 있음을 시사했다.
아무튼 그거야 어떻든 남북 정상회담의 합의는 총선을 위한
일회성의 것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장기적인 전략의 표현이고,
따라서 차후 중․장기적인 정세를 규정할 주요 요인이다.
이에 대해서는 사실상 모두가 동의하고 있는 바인데, 문제는
그렇게 해서 조성될 정세의 성격이 무엇이며, 제 계급계층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가이다.
제 계급․계층의 동향
민주당이 남북 정상회담 합의를 4․13총선의 득표전략으로
이용하려 했고, 이 때문에 여야간에 티격태격 다툼이 있었던
것처럼, 부르주아 정치권에서는 당연히 앞으로도 이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려고 하고 또 그것을 견제하려는 여야간에
갈등과 대립이 빈발할 것이다. 평소와 같이 기타의 이해관계, 즉
잉여가치의 배분을 둘러싼 끊임없는 다툼을 동반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종파적 수준의 것이다. 당파적 수준, 즉
계급적 수준에서는 여야 공히 이해를 같이하고 있고, 당사자들도
이를 명백히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 총선이 끝나자마자,
그간에 ‘신북풍’이라며 반발하던 한나라당은 성과 있는
정상회담을 위해 ‘초당적으로 협력할 것’을 다짐해 왔고, 4월
24일의 김대중 대통령과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간의 회담에서도
이를 확인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여야간에 ‘거국내각’을 합의하는 등,
권력구조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하리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거국내각을 구성한다는 것, 특히 자신보다도 당세가 큰
한나라당과의 거국내각은 현재의 집권당이 권력의 상당부분을
상대방에게 양도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정도는 소수당인
자민련과의 ‘공동정부’에서의 권력 일부의 양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비중의 것일 것이다. 이 때문에 과거 야당총재로 있을
당시 김대중 씨는 정부를 향해서 고비고비마다 ‘거국내각을
구성하라’는 정치공세를 펼친 바 있다. 또한 87년의 대선 때에
김대중 씨는 김영삼씨와의 사이에 한 사람은 대통령 후보를 맡고
한 사람은 당수를 맡는다는 이른바 ‘역할 분담’을 거부하고
김영삼씨와 나란히 대통령에 출마한 적도 있다. 아마도, 못
가지면 못 가졌지 권력을 나눠 가지지는 않겠다는 심정으로
말이다. 특별히 ‘위기국면’도 아닌 상황에서 이렇게 권력의
생리를 잘 알고 그에 대한 독점욕이 강한 김대중 대통령에게
거국내각을 통한 그러한 권력의 양도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한편, 부르주아 정치권에 주요한 정치적 지분을 가지고 있는
김대중 씨의 입장에서 내각제는 대통령직으로부터의 퇴임 후에도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보증할 것이기 때문에,
더구나 총선 결과 증명된 것처럼 특히 지역감정의 역학상
민주당에 의한 차기 권력의 재생산이 거의 무망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추상적으로만 보자면, ‘내각제 개헌’과 그에
따른 권력의 배분을 통한 부르주아지의 총단결이 제기될 수도
있다고 상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총선 결과가 단일
야당 우위의 양당제로 드러난 마당에 한나라당이 이를 받을
것으로 기대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한나라당의
이회창 총재는, 아마도 내심 차기 대통령 당선을 자신하면서,
오히려 ‘대통령 중임제 개헌’을 여론에 타진하고 있는
상황이다.
여야간의 이러한 권력관계는 남북간의 정상회담을 둘러싸고,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이후 조성되는 정세 하에서, 한편에서는
지배계급 내의 제 분파간의 무형의 연합이 이루지면서 동시에
권력을 둘러싼 종파적 투쟁이 끊임없이 계속될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끊임없는 종파투쟁이야말로, 한편에서는
‘정치’에 대한 즉자적 불신과 냉소주의를 조장하면서도,
부르주아 제 정파간의 반노동자․민중신성동맹을 은폐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신성동맹은 계급동맹이기 때문에 단지 부르주아
정치부대간에만 맺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먼저 자신들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영향하에 있는 일체의
정치․사회단체들을 동원하고, 마침내는 그 영향하의
대중을 동원할 것이다. 실제로 정부는 여러 배경과 이유 때문에
‘지성적이고 애국적’이라는 대중 이미지를 갖고 있는 인기
배우 문성근과 수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우리 모두 다 같이
손뼉을 짝짝, 우리 모두 다 같이 손뼉을 짝짝” 하며 “우리는
하나다”라는, 위선적 구호의 교묘한 대중최면을 시작하고
있다.
전경련이나 경총 등의 자본단체나 자유총연맹 등의
극우․반공단체들은 ‘자금부담’에 대한 타산과 ‘사상적
해이’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악선동을 병행하면서도, 남북
정상회담과 그에 의해서 조성될 남북경협 정국을 지지하고
최대한 이용할 것이다. 내외의 독점자본의 입장에서는, 이북의
경제력이 열악해서 이북 자체로부터 당장 커다란 잉여가치를
창출할 것은 아니겠지만, 전반적 과잉생산의 항상화로 절실히
요구되는 새로운 투자처, 새로운 시장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무형의 신성동맹에서 그것을 은폐하면서 최대의
정치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것은 다름아니라 이른바 시민운동
단체들이나 전국연합 등의 기존의 ‘민주화운동’ 단체들 및
통일운동단체들, 그리고 기타 ‘재야운동’ 단체들일 것이다.
그들은 대체로 몰계급적인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포위되어
있거나 그것으로 무장하고 있기 때문에 남북 정상회담을 일제히
지지․지원하는 일에 아마 총력을 다 기울일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비정부단체,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이른바
‘NGO’로서 일견 무당파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대중적 설득력도
꽤 높을 수 있다.
실제로, 다른 데는 다 제쳐 두더라도, 예컨대 민주노총의 기관지
ꡔ노동과 세계ꡕ 제100호, 4월 21일자에 실린
강정구 교수의 「남북정상회담, ‘눈앞 이해’보다
통일터전 닦아야」라는 기고문은, 이번의 남북합의를
“이제 정상회담이라는 우리 문제를 우리가 주도적으로
합의하였듯이 앞으로 통일문제를 포함한 우리의 모든 문제를
남북이 앞장서서 풀어나가는 초석을 확보한 셈”이라며 다음과
같이 글을 맺고 있다. 즉,
“정상회담을 단기적 표면사로 인식할 것이 아니라 장기적
구조사로 인식하고 이에 걸맞는 위상 설정, 의제 설정, 합의
도출 등을 통해 김대중은 남한의 대통령이 아니라 민족의
대통령으로, 김정일은 노동당총비서가 아니라 민족의 총비서로
승화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요구한다. 동시에 남북의 주민은
제각기의 단기적 이해관계에 맞추어 정상회담을 바라보고,
비판하고, 딴지 걸고, 방관할 것 등이 아니라 장기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지원하여야 한다.”
우선, 강 교수가 “우리 문제를 우리가 주도적으로 합의 …
우리의 모든 문제를 남북이 앞장서서” 운운할 때 ‘우리’는
남쪽의 주민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남과 북의 주민을
가리킨다. 이는 강 교수가 같은 글에서 “이번의 정상회담
합의는 우리들 스스로의 자주적 합의”라고 규정하고 있는
데에서도 명백하다.
그런데 과연 그것은 ‘우리가 주도’한 ‘자주적인 합의’일까?
그렇게 규정하는 것은 맹목적인 민족주의적 열정에 달아오른
나머지 그것이 철저히 이른바 ‘페리 프로세스’로 알려진,
미국의 새로운 대북정책의 틀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처사이고, 그리하여, 설령 본의는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결코 그다지 자주적인 것이 못된다는 것을 은폐하는
처사이다. 강 교수가 같은 글에서 역시 ‘자주적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이른바 ‘햇볕정책’ 역시 그러한 미국의 새로운
대북정책의 틀 내에 있음은 물론이다.
또한 강 교수는 ‘민족의 대통령’이니 ‘민족의 총비서’니
하는 염원을 내보이고 있는데, 설령 그것이 수사(修辭)라
하더라도, 대통령이나 총비서 등은 국가의 기관(機關)이어서
민족은 그러한 기관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해둬야겠다
(우리말의 ‘민족’은 예컨대 영어의 ‘nation’과는 그 용법이
다르니까 말이다). 특히 나는 강 교수가 글에서 ‘남한
대통령’이니 ‘남북한’이니 하는 용어를 쓰고 있는데 주목하고
싶다. 사실 거의 모든 언론이 그렇게 쓰고 있지만, 남북이
상호간에 ‘정상회담’을 갖기로 했을 때에는, 극히 주관
관념적인 외교상의 ‘국가승인’ 여부를 떠나서, 남은
‘남조선’이 아닌 것처럼 ‘남한’이 아니라 ‘한국’이고,
북은 ‘북한’이나 ‘북조선’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객관적
현실을 사실상 그리고 정치적으로 승인․전제하는 것이고,
실제로 남북간에 주고받는 공식문건들에도 그렇게 표기하고
있는데, ‘객관적’이어야 할 ‘교수’가, 더구나 남북
정상회담을 말하면서, ‘남한’이니 ‘남북한’이니 하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그 사고가 얼마나 엄밀하지 못한가를
드러내는 일단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점은
대부분의 단체나 인사들도 마찬가지이다. (참고로, 강 교수의 이
기고문에 대해서 나는 ꡔ노동과 세계ꡕ 제101호,
4월 28일자에 반론을 쓰고 있고, 그 반론의 내용은 대체로 이
글에 수용되어 있다.)
아무튼 제반의 시민운동 단체들이나 재야운동 단체들의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기본적 태도는 이러한데, 다만, 이들 단체들은
여야 정치권이나 자본단체, 혹은 극우단체와 달리 국가보안법의
철폐나 개정, 정치적 자유의 확대 및 군축을 요구하고 있고,
또한 단체에 따라서는 비전향 장기수의 완전 석방과 북송 등을
요구할 것이다. 물론 그들의 요구는 독점자본과 국가에 의해서
대부분 수용되지 않을 것이고, 그 때문에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서 ‘일면 지지, 일면 투쟁’의 양상이 강화되고, 단체의
성격에 따라서는 남북 정상회담과 그에 기초한 남북의
‘협력’은 지지하면서도 김대중 정권과는 투쟁하는 단체도
등장할 것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야말로 이들 단체들과
노동자․민중운동 진영과의 (부분적) 연대의 근거로 될 수
있을 것이고, 노동자․민중운동 진영은 그 가능성을 놓치지
않고 그것을 현실적인 힘으로 구체화해야 할 것이다.
남북 분단문제 혹은 통일문제의 본질
남북 분단문제 혹은 통일문제의 본질에 관해서는 그것을
제국주의문제, 민족문제, 국제문제로 보는 등,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 앞에서도, 시민운동단체나 재야운동단체들이 대체로
몰계급적인 민족주의에 의해서 포위되어 있거나 그로 무장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남북문제에 대한 이들 제 시각 중에서도 우리
사회에 가장 지배적인 것은 몰계급적인 민족주의적 시각이다.
그리고 남북문제가 마치 추상적인 통일의 문제이고, 역사적
맥락을 배제한 추상적인 ‘이산가족’의 문제라는 식의 담론이
횡행하고, 분단과 그 유지는 ‘외세’에 의해서 강요된 것이라는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의 잘못된 선전이 일반적인 사회적
인식으로 되면서 이러한 민족주의적 정서는 더욱 자극되고
있다.
예컨대, 앞에서 언급했던 강 교수도 예의 글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갖기로 한 이번의 합의를 부주의하게 ‘자주적이고
주도적인 합의’로 규정하면서 그것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호소할 양으로 분단과 그 유지는 마치 전적으로 ‘외세’에
의해서 강요된 것처럼 말하고 있다. “외세에 의해 분단이
강제된 지 반세기 여만에 만나는 남북정상회담은 앞으로의
이정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접근자세나 성격 및 의제 등에서 그
첫 단추를 제대로 꿰어야 한다”거나, “과거 미․소간의
동서냉전 하에서 남과 북이 아무리 협력하더라도 이 미국과
쏘련이 강제하는 외세의 위력 때문에 통일은 거의
불가능하였다는 역사적 경험” 운운하는 데에서 볼 수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 인식은, 그가 의도했든 아니든, 역사적
사실과 분단․통일문제의 본질을 왜곡하여 은폐하는
것이고, 분단을 있게 하고 분단현실로부터 단물을 빨아온, 강
교수 식의 민족주의적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민족반역자들’에게 부당한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것도
이중으로!
분단은, 강 교수의 주장과는 달리, 단지 ‘외세’에 의해서
강제된 것만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명백히 국내적 그리고
국제적 계급투쟁의 결과였고, ‘외세’로 불리는 미국과 쏘련의
대립이란 다름 아니라 노․자간 계급투쟁의 국제적
전선이었을 뿐이다. 또한 분단은 미국과 쏘련간의 냉전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승만 정권 이래의, 그리고 박정희
등의 군사정권에 의해서 계승되고 강화된, 민중에 대한 파쇼적
억압에 의해서도 유지되었다. 통일문제가 그러한 것처럼, 남북
분단문제는 주요하게 국내문제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강
교수가 말하는 것과는 달리, 남과 북(의 국가) 간에는 통일을
위한 ‘협력’이라는 ‘역사적 경험’은 없었고, 또한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남북 분단문제의 본질을 민족문제나 국제문제로 보는
것은 피상적인 인식으로서, 애초에는 지주와 자본, 그리고
이제와서는 독점자본의 착취와 지배를 은폐하는 것이다. 그
진실한 본질은, 분단의 동기․발단에서부터 그 유지나
앞으로 있을 통일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계급문제인 것이다.
말하자면, 민족문제로서의 남북의 분단이란, 제국주의적 억압과
미․쏘의 대립이 그렇듯이, 계급적 대립이 외화(外化)된
형태인 것이다.
이 점이야말로 부르주아 학자들이나 몰계급적인 민족주의자들이
인식하지 못하거나 어렴풋이 밖에 인식하지 못하는 점으로서, 그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몰계급적인 것으로 되면서, 자신들의
주관과 무관하게, 결국 반민중적인 것으로 되고 만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에는,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분단 및
통일문제를 그렇게 민족문제나 국제문제로서만 바라보는
피상적이고 몰계급적인 민족주의적 관점이 팽배해 있다.
그리하여, 이러한 몰계급적 관점을 극복하면서 그것이 결국은
계급문제임을 대중적으로 명확히 하는 것이야말로 남북 정상회담
및 그에 의해서 조성되는 정세에 대응하는
노동자․민중운동 진영의 이데올로기적 과제로 되지 않을
수 없다.
남북 정상회담 그 자체 및 대응
이번에 합의된 남북 정상회담은 명백히 이중의 의의와 측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남북간의 냉전적 적대를 청산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함으로써 평화적 통일로 나아갈 ‘가능성’을 개척하는
긍정적 측면이다. 우리는 말할 것도 없이 바로 이 측면 때문에
남북 정상회담을 지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당연히 군비를
축소하고 국가보안법을 철폐하여 민중의 정치적 자유를
확대함으로써만 가능하다. 따라서 노동자․민중이 이러한
민중적 요구를 내걸고, (그리고 가능하다면 같은 요구를 내거는
시민운동단체나 기타 재야단체와 연대하고 그들을 견인하면서)
그 요구의 실현을 위해서 투쟁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가능성조차
결코 열리지 않을 것이다.
두번째 측면은 아주 복잡한 것이다. 국내외의 독점자본이 북에
대한 정책을 포위․봉쇄 및 파괴공작에서 유화와
‘포용(?)’, 그리고 공존으로 변화시키고 있는 것은,
한편에서는 그들 독점자본이 남녘에서 이제 물질적으로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으로도 그 지배를 확고히 확립했음을
표현하는 것이고, 또한 전반적 과잉생산의 항상화로 자본이
절실히 요구하는 새로운 투자처, 새로운 시장이 유화적 정책을
통해서만 열릴 수 있다는 조건과 계산을 표현하는 것이다.
총선국면에서 3월말에 대통령이 ‘북한특수’를 예고함으로써
득표를 노렸던 것도 시장과 잉여가치에 대한 독점자본의 열망과,
그 열망이 한국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되어 있다는
자신감을 표현한 것 아니겠는가?
이러한 의미에서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하여 부르주아
정치세력들이 다짐하고 있는 ‘초당적 협력’은 결코 단순한
수사나 빈소리가 아니라 계급적 본능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고,
남북 정상회담과 독점자본에 의한 남북경협 등은
노동자․민중에 대한 독점자본의 새로운 형태의 공격이자
위협으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실제로, ‘우리는 하나다’라는
식의 대중선동․대중최면을 통해서 제 계급계층을 동원하는
것도 그러한 공격의 일환이다. 그리하여, 만일 계급적 시각을
견고하게 견지하면서 그러한 공격에 대해서 진지하게 경계하고
투쟁하지 않는다면, 몰계급적인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사회운동이 정세를 철저히 주도하는 가운데, 더욱 절실하게
표현하자면,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몰계급적인 민족주의적
정서가 대중매체와 사회운동단체, 재야운동단체 등을 중심으로
더욱 강화되면서 노동자․민중 진영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포위․공격도 더욱 강화되고 구조화되는 가운데,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노동시장의 유연화 등이 거침없이
관철되는 등, 노동자․민중의 처지는 더욱 어려워질 것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이를 역전시키는 것이 당면의 과제로 되고, 이를
위해서는 남북문제․분단문제의 본질과 이후 정세의 계급적
성격에 대한 치열한 이데올로기적 투쟁과 더불어, 사회운동
일반을 새롭게 재편하는 작업이 절실하고도 시급하게 요구된다.
다름 아니라 현재 소시민적 사회․노동운동의 하층부분을
상당 부분 장악하고 있는 전국연합을 대체하면서 사회운동을
계급적 노동자․민중운동으로 재편하는 작업이다.
물론 기왕에도 민주노총을 비롯하여 여러 민중운동 조직들이
존재하고 그들 간의 연대운동․조직도 존재해 왔고, 또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웬일인지 민중운동의 전선은 상층전선의
형태를 취해 왔고, 그만큼 지역 장악과 대중동원에서 한계를
노정해왔다.
그리하여, 하나의 제안이지만, 가칭 ‘전국민중운동연합’
정도로 이름 붙여질 수 있는, 노동자․민중운동의 새로운
전선조직은 기본적으로 단체와 개인의 지역적 결합을 기반으로
하면서 전국적 부문조직이 이에 교직(交織)되는 형태, 즉 상층과
하층이 통일적으로 조직되는 것이어야 하며,
노동자․민중의 계급적 이익의 옹호와 그 해방을 명확히
목표로 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조직으로써 그 사업의
일환으로 통일문제 및 이와 관련하여 이후 조성될 정세에
대응함으로써만 노동자․민중은 위력적인 대응이 가능할
것이다. 노동자․민중적 통일만이 선(善)임을 명확히
하면서 지방과 중앙에서 서둘러 작업에 착수해야 할 때이다.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