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미학 - 프랑스의 反 CIP 노학연대
이 환 식 (인하대학교 정외과 강사)
1993년 3월 만성적 실업위기 속에서 집권에 성공한 우파
발라뒤르 정부는 실업을 타개한다는 기본구도 아래 최저임금
이하로 기업들에게 신규고용을 가능케 하는 사실상의 사회임금
인하정책(CIP : Contrat d'insertion profssionnelle - 직업진입
계약)을 제안하였다. 장차 일정한 교육을 이수한 기술자격증
소지자들은 지금까지와 달리 기술자나 간부의 위치가 아닌
현장노동자 위치에서 직업생활을 시작함에 따라 CIP는
기술노동자들의 임금인하를 정형화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이러한 임금인하가 일반화되는 위험을 내포한 권위적 조치로
간주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1967년 개인적인 생산능력과 분리된
임금의 사회화를 이룬 최저임금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
따라서 CIP와 가장 직접적으로 관련있는 기술계 학생 뿐 아니라
일반 학생들에게 이 제안은 자신들을 평가절하하는 조치로
인식되었으며 지체없이 철회투쟁에 나섰다.
학생들에 의하여 시작된 반 CIP 투쟁은 고교생, 학부모,
불완전고용 노동자 그리고 실업자들이 합류함으로써 급속히
프랑스 전 사회영역으로 확산되었다. 프랑스 전역을 뒤덮는
35일에 걸친 총체적 투쟁에 의하여 일정한 교육(BAC +2년)을
이수한 젊은이들을 기업들이 일정기간 동안 (1년) 임노동자를
위한 단체협약으로 보장된 최저임금의 80%에 해당하는 임금으로
고용케하는 소위 CIP라 명명한 임금인하 조치는 철회되었다.
프랑스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실업위기 - 프랑스의 실업율은
활동인구의 13%에 이르고 있으며 더우기 악성적인 구조적
장기실업이 상당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 를 사회임금 인하를
통하여 돌파하려던 발라뒤르 정부의 시도는 프랑스 국민에게
철저히 거부된 것이다.
순식간에 프랑스의 거의 모든 도시의 거리를 격렬한 투쟁의
장소로 전환시킨 反 CIP 운동은 투쟁의 규모와 조직에 있어서
기존의 임금운동과 구분되는 몇가지 주요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우선 反 CIP 운동은 직접적으로 임금문제에 대한 생산적
임노동의 전통적 형식, 즉 노조에 의하여 지배되지 않은 최초의
비물질 노동의 대규모 사회적 동원이었다. 또한 프랑스에서
최근에 이루어진 일련의 거대한 투쟁들(1986년의 철도와 대학,
1988년의
●
국제 노동동향
간호사 그리고 1990년 고교생들의 투쟁)과는 달리, 이 운동은
최소한의 운동유형으로서 각 운동 단위조직들 간의 연합과 같은
어떠한 명확한 운동의 대표형식도 거부된 철저한 ‘침묵의
투쟁’이었다. 일련의 투쟁과정에서 실질적으로 反 CIP 운동을
주도하고 대표하는 주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제도화된
조직의 대표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기존의 전통적
운동정형과는 전적으로 상이한 운동이었다. 또 한편으로 이
운동은 프랑스 젊은이들이 자신들을 사회적으로 평가절하하려는
그 어떤 사상에도 단호히 저항하는 투쟁능력과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를 사회적으로 명확히 인식시키는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러한 두가지 측면을 투쟁의 촉발과
확산 그리고 법안파기의 각 전환과정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CIP의 탄생과 소멸 과정
3월 17일 프랑스 전국에서 CIP에 반대하는 고교생, 대학생
그리고 노조 등 20만 이상이 CIP의 철회와 고용의 권리를
주장하며 프랑스 전국에서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의 투쟁에
프랑스의 대표적 노조들(CGT, CFDT, FO 등)과 학부모들이 정부의
조치를 비난하며 시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함으로써 운동은 급속히
대규모로 확산되었다. 단숨에 자발적 노학연대 투쟁이 이루어진
것이다. 특히 오늘날 프랑스에서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의 하나로
부각되고 있는, 주로 도시외곽에 거주하며 자신들의 열악한
환경과 사회적 차별에 끊임없이 저항해 온 외국태생 이주민
2세들이 자발적으로 참가함에 따라 반 CIP 운동은 빠르게
급진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대규모화하고 과격화된 반 CIP 운동은 초기부터 시위대와
공권력의 물리적 충돌로 치달았으며 이미 200여명이 시위 초기에
입건되었다. 3월 18일 발라뒤르 정부는 그들이 지난 일년간 인적
물적 법적인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실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 왔으며 CIP는 분명히 젊은이들에게 일자리와 수입을
보장해 준다고 설득하였다. 그러나 노동자와 학생들의 철회를
위한 저항을 잠재우기는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격렬한 반대에
직면한 발라뒤르 정부가 새로이 수정안을 제시하며 이를
관철시키려는 완강한 태도를 견지하자 철회투쟁은 점점
과격화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시위대와 공권력의 잦은 충돌로
수백명이 체포되고 낭뜨에서는 10여명이 6개월 형에 처해졌으며
리용에서는 가장 과격한 시위가 벌어졌다.
93년 총선의 패배로 인하여, 그의 임기 중 두번째 발라뒤르
정부와 동거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미테랑 대통령은 제 91차
유네스코 회의 개막 연설을 통해 실업위기는 임금인하나
사회보장 제도의 축소에 의하여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고
발라뒤르 정부의 무모한 고집를 비판하였다. 운동은 가일층
확산되었으며 학생들은 중재나 타협없는 CIP의 무조건 철회를
요구하였다.
정부는 이에 이데올로기 공세로 맞섰다. 3월 24일 두명의 알제리
학생이 시위 중 구속되고 재판없이 추방되었다. 25일은 운동의
완전한 전환점이 되었다. 빠리와 리용에서 3만여명의 고교생과
대학생들이 CIP 철회와 추방된 두 알제리 학생의 송환을
요구하며 거리를 메웠고 전국의 모든 중·소 도시에서 반 CIP,
반 인종차별을 부르짖으며 거리로 나섰다. 다수의 도시에서
시위는 일상화되었고 시위대들은 장애물을 이용하여 철도역과
고속도로를 점거하였다. 처음으로 시위가 수도 빠리의 중심적
역할에 의해 이끌리지 않는 전국적 사회동원이 이루어졌다.
이날의 대규모 사회적 동원은 발라뒤르 정부의 단호함을 사실상
산산조각 내었다.
86년과 90년에 이어 또 한번 통치의 예술이 무력하고 공허한
테크닉임이 드러났다. 반 CIP 운동은 문제는 ‘고용을 대가로
임금인하’라는 교환의 문제가 아니라 생산적 행위의 사회적
제원에 상응하는 수입의 분배 문제임을 명확히 보여 주었다.
이틀 후인 27일 발라뒤르 총리는 학생들과 대화할 의지를
표명하였고 다음날 6개 고교생와 대학생 조직의 대표들을
접견하였다. 3월 31일 CIP는 완전히 폐기되었고 젊은이의 고용
촉진을 위하여 기업을 지원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지도부 없이
진행된 무정형 노학연대 투쟁의 완전한 승리였다.
운동이 진행되는 가운데 미국 일본 등 외국언론들은
사회보장제도에 의하여 의료혜택과 실업수당 및 여타 정부
보조금을 지급할 뿐 아니라, 단지 한정된 기간 동안
최저임금(韓貨로 80만원 수준)의 80%의 임금을 지급토록하여
고용을 촉진하고 실업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정부의 조치에
저항하는 프랑스 젊은이들을 자국 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비교하며 “배부른 자의 반란”이라고 매도하였다. 이들은 CIP는
단지 상징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CIP의 일반적
상징성은 도시거리로의 진출이 폭발의 순간을 향해 긴장을
표출하는 순간에 사라졌다. 그로부터 운동은 사회화된 임금을
수호하기 위한 단순한 임금투쟁도 학생운동도 아니었다.
물론 반 CIP 운동은 최저임금 인하의 일반화에 대한 전면적
거부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 운동에 참여한 수십만의
학생들에게 사실 최저임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CIP는 오늘날
프랑스 젊은이들에게 팽배해진 미래의 불확실성이라는 공포에
대한 대상없는 증오를 폭발시키는 계기였다. 운동기간을 통틀어
공권력과 격렬히 충돌하며 철저히 파괴의 일상화로 운동을
이끌어 간 현실은 이를 잘 반증한다.
운동의 주관화
反 CIP 투쟁의 초기단계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조직은 두말
할 나위 없이 고교생과 대학생 연맹(Fidl과 Unef) 그리고
기술대학 연합이었다. 그러나 운동이 확산되고 가담자들이
다양화되어 운동이 강력하게 부상함에 따라 이러한 대표기구
형식은 점차 부차적인 것이 되었으며, 그렇다고 시위에 참여한
대표성을 갖춘 다른 조직들이 이 운동을 주도하는 대표로 자임한
것도 아니었다. 3월 25일을 기점으로 운동의 모든 대표적 형식은
운동에 가담한 이러한 대표자 조직들이 운동을 주도할 위치를
확보하기도 전에 대표자적 권위를 상실하였다.
이미 90년 학생운동에서 선보인 바 있었던 코코(G. Cocco)가
소위 “운동의 주관화 과정”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운동양상이었다. 이러한 주관화 과정은 운동에 관한 어느 조직의
주도적 헤게모니도, 운동의 구현과 결합의 장소로서 한 국가의
수도라는 공간적․상징적․정치적 중심성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반대로 주관화의 시․공간적인 형성은 날마다
자신들이 내포한 모든 다양성 속에서 대립적 사회적 주관성의
구현조건을 확산한다. 한마디로 주관화는 운동의 중앙 지도부나
고정된 주제를 지니지 않는 운동형식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反 CIP 투쟁은 운동에 참여한 사회의 다른 파트너들과
불안정한 무형의 연합형태를 형성한 채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주관화 과정으로 전화된 운동양상하에서 각 시위대들은 완전히
비조직적이고 돌발적인 방식으로 공권력에 적극 대항하였다.
빠리 리용 낭뜨등 프랑스의 주요 도시에서 시위대와 공권력이
격돌하는 가운데 인근 상가가 약탈되고 공공기물과 길가에
주차된 자동차들이 불에 타는 사건들에 의해서 하루의 시위가
마감되는 것이 만성적이고 일상적인 현실이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위는 이들 소위 “파괴자”로 불리는 그룹에 의해
주도되는 경향으로 발전되어 갔다.
정부는 전통적 방식대로 학생과 파괴자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파하면서 즉각적으로 인종차별적 이데올로기 공세로
전환했다. 내무장관 샤를 빠스꽈(Ch. Pasqua)는 "약탈과 폭력을
유발하는 외곽도시의 폭도들에 의하여 방해될 수 없는” 시위할
권리와 법치국가의 질서를 보장해야 한다는 태도를 취했다. 두
알제리 학생을 추방하면서 그는 폭력이 흑인·아랍인 등 외국인
출신에 의해 유발되며 지극히 한정된 운동 구성원만이 이러한
폭력에 관련되어 있다는 메시지를 확산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운동을 분열시키려는 이러한 이데올로기 공세는 공허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소위 이들 “파괴자”는 대부분이 자신들과
같이 공부했던 옛 학우들이었으며 또한 학생들은 경제위기와
새로운 생산양식이 어느날 자신들을 “파괴자”와 똑같은
상황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었다.
더우기 이미 제도권의 노조조직들조차도 감히 시위행렬을
주도하는 이러한 과격하고 폭력적 행위를 분명하고 단호하게
비난할 수 없을만큼 구속자 석방, 反 인종차별, 反 CIP에 대한
시위 참여자의 완전한 교감이 확산되어 있었다.
무형식․무대표 투쟁으로서 반 CIP 운동은 의회로 가기
위해 수십만 명의 학생들이 빠리에 집결했던 86년의 대규모
학생시위와 너무나 상이했다. 86년 학생운동은 학생연맹이라는
제도화된 조직에 의하여 주도되었으며, 이 조직이 정부의 협상
파트너였다. 매스미디어는 마치 스포츠 경기의 스타를 만드는
것처럼 운동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도록 운동의 지도부를
창출하여 이들을 빠르게 희화화함으로써 운동을 약화시키는
테크닉을 구사했던 것이다.
운동의 주관화 과정은 운동의 대표자를 내세우기 위해 정부가
펼친 갖가지 노력들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권력은 어떠한
이데올로기적 무기도 운동의 내부에 침투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가능성도 없이 무조건적인 굴복만을 강요받았다. 매스컴들 역시
86년 그들이 성공한 방식대로 운동에 대한 자신들의 목소리를
운동 지도부의 언어를 이용하여 결합하려는 시도나 또는
미디어에 의해 창출된 이러한 지도부를 관리하려 시도했으나
모두 좌초되었다. 94년 운동은 글자 그대로 철저한 ‘익명’의
운동이었다. 한달여에 걸친 투쟁은 운동과 분리된 어떠한
조직형태나 조직의 리더를 만들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운동의
이름으로 개인적으로 견해를 표명하거나 정치권력의 언어로
운동의 정당성 여부를 규정하려는 시도는 단호히 거부되었다.
대표없는 대표조직은 권력의 언어와 더불어 운동의 대열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가 없었다. 오히려 투쟁에 관한 텔레비젼
보도는 단지 운동의 메시지와 방향을 전달하는 운동의
프로그램일 뿐이었다. 미디어들은 과거처럼 운동조직 대표들의
정치적 언어속에 자신들의 관점을 결합할 수도 없고 운동 내부의
수직적 명령체계를 규정할 수도 없는 가운데 단순히 운동의
슬로건만을 녹화 방송으로 강요하는 운동의 새로운 형식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직 CIP의 즉각적 철회 요구와
구속된 시위 참가자와의 완전한 연대성의 선언만이 미디어
전파를 탈 수 있었다.
반 CIP 운동을 특징짓는 이같은 운동의 대표자 형식의 완전
결여는 모든 제도적 조직형식 밖에서 운동의 역량과 자율성 간의
非 매개적 동질성을 형성한 요소였다. 운동 주관화의 이러한
조형성․유연성은 반 CIP 투쟁의 폭발적 힘과 과격화의
원천이었다. 운동의 이러한 특성은 정치계와 이들의 중재에 대해
철저히 적대적이고 완전히 분리된 운동임을 명확히 입증시켰다.
요컨데 CIP로 유발된 갈등의 해소과정은 마치 투쟁이 완전히
상이한 두 논리에 의하여 뒷받침되는 것처럼 모든 것은 아무런
토론도 중재도 협상도 없이 해결되었다. 대표의 결여는
역설적으로 운동의 지속성과 과격화를 보장했다. 운동의 유일한
대표는 각 도시의 거리일 뿐이었다. 결국 협상파트너 없는 운동
앞에서 정부의 무조건적 굴복만이 운동의 끝이었다.
3월 투쟁은 무엇을 남겼는가?
3월 투쟁은 시위에 참여한 모든 조직의 대표성을 거부했다.
왜냐하면 이러한 운동의 대표성이 미디어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름지워 짐으로써 운동의 방향을 정치적 언어로 둔갑시킬
개연성을 내포한 대표체계가 갖는 함정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다. 3월 운동은 아무것도 양보함이 없이 대표성의 틀
밖에서 더 나아가 反 대표적 운동의 표현형식을 찾았고 이러한
표현양식이 발산하는 강력한 힘을 경험했음을 모두가 인정한다.
그것은 과거 운동과의 상징적 단절이었으며 조직 대표성에 의한
게임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것이었다. 정치체계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 그것은 바로 3월 운동이 보여준 이같은 조직의
대표성에 대한 총체적인 거부였다.
정부의 굴복과 함께 운동도 사라졌다. 정확히 말한다면 사라진
것은 운동이 아니다. 단지 도시 중심부로의 예외적인 대규모
진출과 3월 운동 이후 그 특수한 제원을 재발견했던 주관화
과정의 시·공간적인 형성이 중지되었을 뿐이다. 3월
운동과정에서 우리가 본 것은 권력과 정치계의 손에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기껏해야 그들의 손에는
수백여명의 체포된 시위대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3월 운동이 계급운동에 남긴 것을 규정하기는 훨씬 어렵다. 아주
중요하고 분명한 사실 가운데 하나는 3월 운동이 노동자운동의
일반적 형식과 완전하게 단절했다는 점이다. 사실 정치적
사건으로서 다양한 명칭들(“노동자 계급”, “혁명”,
“공산주의” 등)의 전통적 효과는 3월 운동의 대규모적
형성과정에서 실제 아무런 역할도 발휘하지 못했다. 3월 운동은
모든 투쟁이 결집되기 위하여 넘어서야만 하는 일종의 기본적인
새로운 운동형식을 제시했다. 말하자면 3월 운동은
post-공산주의의 진정한 첫번째 운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