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김 상 태
연구위원/문화비평가
조선일보와 그 아이들
칼럼
지난 8월 3일자 <한겨레 21> 표지 이야기 “문화권력이여,
장난치지 말라” 라는 기사는 다음 문장으로 시작된다.
“작가 황석영(58)씨는 지난 7월 20일 <한겨레>에 기고한
‘동인문학상 후보작을 거부한다’를 통해 자신의 작품 <오래된
정원>이 조선일보사가 주관하는 동인문학상 심사대상이 되는
일을 거부한다고 밝혔다.”
문학이니 소설이니 하는 것들은 요즘 같은 미디어 시대에
귀퉁이의 도토리 장난 같은 것이라 일반인에겐 별무 신통한 게
없는 기사인지도 모르겠다. 사실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기사가 코미디 1번지보다 훨씬 웃기는 사건이란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기회가 되는 한 이 프로는 구경해 보고 가는 게 좋다.
웃다보면 거기에서 웅크리고 있는 진짜 쥐새끼를 발견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조선일보사는 87년부터 ‘동인문학상’이라는 문학상을 운영해
왔다고 한다. 이것을 지난 6월 4일에 개편했는데 상금을 2천 만
원에서 5천 만 원으로 대거 증폭하고 계속해서 1억까지 상승시킬
것이며 차후로 단행본 작품집과 장편․대하소설까지
심사대상으로 하여 심사위원단을 종신직으로 위촉하는데 박완서
김주영 이청준 이문열 유종호 등등 7명을 선정했다고 한다. 한편
이 시스템은 아주 흥미롭고 의미심장한 기획을 집행했다.
‘지면을 통한 공개’라는 심사방식이 그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6월 6일, 7월 13일 지면을 통해 1차, 2차 독회 내용을 간추린
심사평을 게재했다. 그리고 그 내용이라는 것들이 다음과 같다.
한강씨의 <내 여자의 열매>에 대해 ― 공연한 겉멋이 보인다…
그의 성숙을 기다리기로 하자. ― 탈락판정
성석제씨의 <홀림>에 대해 ― 한 두 작품은 홀렸으나 책
전체로는 홀리지 못했다. 자기 입심에 자기가 홀려 있는 게
아닌지 ― 탈락판정
황석영씨의 <오래된 정원> ― 사실 확인에서 오류가 있다.
예컨대 80년대 지하에 순수 정치조직이 30-40개 있었다고 한
부분들이다. 그런 조직은 없었다. 조직의 전망도 보이지 않았다.
현실에 없기에 문제가 된다는 것. 바로 그것이 문제가 된다.
하나의 허구가 사실들을 비틀어 놓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세계 비전이 하나도 없다. ― 잔류판정.
이게 <한겨레 21>의 대략적 요약인데 세인들은 바빠서 잘
모르겠지만 나는 글도 끄적여 보고 별로 볼품도 없지만 책도
출판해 봤던 터라 이런 짓거리가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지
맨살에 면도칼 그어지는 것보다 극명하게 안다.
예를 들어 나는 ‘옥이 이모’와 ‘서울의 달’을 쓴 드라마
작가 김운경씨를 90년대 이후 최고의 작가라 믿는 사람이다.
그가 순수문학가는 아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에 비추면
이문열의 소설들은 그야말로 똥걸레나 다름없다. 모든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제쳐두고 순수하게 미학적 예술적 입장에서
나는 양심을 걸고 그렇게 믿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게
옳은가 그른가가 아니다. 중요한 건 그런 똥걸레가 내 작품을
놓고 위에서 말한 식으로 짖어대고 있다면 듣는 내 입장이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그들 개개인이 그렇게 심사평처럼 느끼고 말하고 쓴다는 거야
아무래도 상관없다. 짖어대는 대로 두면 되는데 어차피 문학적
예술적 이념적 적대관계라면 피차 도리 없는 것이다. 그런데
몇천 만 원 짜리 문학상 심사위원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면 이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다. 내가 그 몇 천 만
원과 그에 따른 명예, 그밖에 그들이 가진 권력에 아부하지 않는
한 이건 절대로 안된다.
물론 앞에서 평을 받는 작가들이 그들의 권위를 인정한다면
상황이 다르겠지만 아무리 봐도 이런 짓거리는 너무 심하다.
조선일보가 바로 이런 일을 했다. 그렇다면 분명히 입장이 달라
보이는 황석영씨는 어떠했을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
심사위원 전체는 물론 조선일보 자체가 황석영씨의 그릇을
따라가기는 어림도 없다. 두말할 것도 없이 문학적인 입장에서
그렇다. 이문열이라고? 꼬마애가 대학원생 논문을
심사한다고?
물론 황석영씨의 심사거부 이유는 기분 문제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일보의 문화계에 대한 바람직하지 않은 영향력
강화 움직임이라는 것, 또 동인문학상 자체의 비문학적이고
몰상식한 운영방식에 대한 문제제기가 핵심이다. 당연한
얘기라서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러므로 사적인 얘기를
좀더 해야겠다.
<한겨레 21>의 같은 지면에는 강준만씨의 투고도 섞여 있었다.
그에 대해서 내가 아는 바라고는 그가 안티조선을 주장하고
좌파, 진보적 지식인을 비판하며 손호철 교수를 심하게 욕했다는
사실 정도이다. 굳이 덧 부친다면 그의 대표작인 ‘김대중
죽이기’와 몇 꼭지의 글을 읽어보았는데 그가 어지간히도 글을
못쓴다는 인상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건 또 뭔가? 이
소동에 그가 개입하는 건 당연해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이야말로
코메디 1번지의 백미이다.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신화의 벽을 깰 수가 없다. 그러나
마지막 한 방울의 물이 잔을 넘치게 하는 법이다. 나는
황석영씨가 그 마지막 한 방울의 물일 수도 있다는 기대를 갖고
있다. 나는 그의 고귀한 뜻에 동참하는 물일 수도 있다는 기대를
갖고 있다. 나는 그의 고귀한 뜻에 동참하는 분들이 많이 나올
것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고귀한 뜻? 그건 그렇다 치자. 이 문장을 보면 황석영은 마지막
한 방울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넘치게 하는 나머지 꽉 차 있는
물은 누가 채웠다는 얘긴가? 강준만인가? 그는 그렇게 답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문장을 읽고 있노라면 뒤꼭지가 가렵게
웃기는 걸 어쩔 수가 없다. 강준만씨는 목숨을 걸고 대의에
가득찬 전쟁터에 가는 비장한 전사요 희생자라는 거다. 글을
못쓰는 자의 첫 번째 요소가 이처럼 남은 다 아는데 저 혼자만
모르는 슬픈 비장함이다. 이 사람은 아무래도 좀 바보같다.
‘나는 <조선일보>를 상대로 기고와 인터뷰를 하는 좌파, 진보적
지식인들이 좀더 정직해 지기를 바란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강준만씨가 도대체 언제 봤다고 좌파
지식인들의 정직성을 문제 삼는가이다. 좌파 지식인들 중
부정직한 사람들이 있는가는 모르겠다. 설사 그렇다 한들
강준만씨가 이렇게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나는
강준만씨에게
‘그는 DJ의 직접적 간접적 사주를 받은 것 같이 행동하며
조선일보를 비판하면서 조선일보를 등에 업고 인기를 얻으려는
장사꾼이다. 그는 좀더 정직해져야 한다’고 절대 말하지
않는다. 난 그를 모를 뿐 아니라 그가 취한 대 조선일보 전술에
대해 관여한 바도 따라서 별로 아는 바도 없기 때문이다. 입장
바꾸면 마찬가지다. 그가 한국의 진보운동과 노동운동에 대해
무슨 관련이 있기에 ‘정직’따위를 운운하는 걸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언사라면 좌파, 진보적 지식인이 방법적 원칙적
오류를 가지고 있다 정도일 것이다. 어쩌자고 정직이란 말을
쓰는 건지 그저 황당할 따름이다. 그가 지금 가지고 있는
재산이란 내가 보기엔 대중적 인기와 집권 정부의 보이지 않는
배려뿐이다. ― 그가 아무리 DJ정부를 욕한다 한들 그건 반증이
전혀 못된다 ― 둘 다 때로 중요한 것이지만 대체로는 열흘 짜리
사꾸라 꽃만치나 허망한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게 뭔지도
모르고 취해 있는 탤런트 지식인의 자기 도취이이다. 이러니
이것 저것 못가리고 혼자 난리다. 그래서 이 사건은 코메디
1번지이다.
자 다시 생각해보자. 조선일보의 흥망과 성쇠는 한 가지
요소로만 설명될 수 없는 복잡한 것이다. 특히 자본주의적
유통과 생산구조 안에서 대중적 여론과 인기라는 건 더욱 알 수
없고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그 최종심급에 있어서
결과를 밀고 나가는 것은 누가 뭐래도 노동운동을 포함한
민중운동의 실천적 전진이다. 우리는 조선일보를 문제삼을 때
강준만 식의 전략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강준만 식만이
유일한 대안이라면 우리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그뿐이라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으며, 그렇게 해서 뭐가 된다해도
역시 쓸모 없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사태에 웅크린 예의 쥐새끼는 이제 명백해진다.
조선일보의 패권은 대소지간에 어디선가 위기를 맞고 있다.
그것은 80년대를 지나 90년대를 거쳐간 계급 역관계를 그 바탕에
깔고 있다. 여기에 여러 껄떡쇠들이 먹이를 놓고 들러붙었다.
조선일보 ― 한겨레 21 ― 강준만(자칭 자유주의자)이 그들이다.
이것은 시민운동단체들과 보수정당간의 줄다리기와 그 맥을 함께
한다. 그리고 이들 모두 좌파나 진보세력을 비비꼬고 앉아 있다.
이게 사태의 핵심이다. 전부다 조선일보의 아이들이었던 것이다.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