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번역
국제여성조사단이 목격한 한국전쟁*1)
1)
1)
들어가며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勃發)한다. 미국은 곧바로 주일 미군을 파병함으로서 한국 전쟁에 개입한다. 동시에 대만 해협을 봉쇄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여 소련이 결석한 상황에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침략자로 결의하고 ‘유엔군’을 조직한다. ‘유엔군’은 16개국의 참가로 이루어졌으나 대부분의 나라는 소부대로 미군이 중심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미군에게 군사 지휘권을 양도하고 대한민국 군은 미군 지휘하에 전투에 참가한다. 당초, 전국(戰局)은 조선인민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여 ‘유엔군’은 부산 끝까지 몰리었다.
그러나 9월의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국(戰局)은 역전되어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 12월에는 중국국경에 까지 이른다. 그러나 전국(戰局)은 중국인민 의용군의 참전으로 재차 바뀌어 51년 봄부터는 양군에 의한 일진일퇴의 상황이 계속된다. 가까스로 휴전이 실현된 것은 53년 7월이었다.
본 논문은 한국전쟁 하의 남북한의 민중, 특히 여성들이 체험한 것을 명확하게 하려는 것이다.
한국전쟁중인 1951년 5월 국제민주여성연맹(Women’s International Democratic Federation)에 의해 세계 17개국의 여성들이 조사단을 조직하여 전쟁중의 한국을 방문하였다. 조사단에 참가한 나라는 유럽, 아시아, 태평양, 아프리카, 미국으로 유엔군에 참가한 나라를 포함한 동서 양 진영의 나라들로 다양한 사상과 신조 그리고 정치적 입장을 가진 여성들이었다. 그녀들은 5월 16일부터 27일에 걸쳐 조사를 수행하고 그 결과를 「한국에 있어서 미군의 잔혹 행위」라는 보고서로 정리했다. 일본어로 번역하면 약 3만 5천자가 되는 문서이다. 이 문서는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 한국의 5개국어로 만들어져 모든 유엔기관과 세계 각 국의 정부, 수천의 개인과 단체에 발송되었다. 또한 24개국어로 번역되어 수천만 부가 발행됨으로서 한국전쟁의 정전(停戰)을 위한 국제여론 형성에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2) 본 논문에서는 위의 여성들의 보고서를 단서로 한국전쟁의 은폐된 측면에 주목하기로 한다.
제1장 국제여성조사단의 한국 방문의 배경
국제여성조사단의 한국 방문은 한국과 세계의 여성들의 연대에 의해 실현되었다. 보고서의 내용을 검토하기에 앞서 일제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되어 한국전쟁이 발발하기까지의 한반도의 정세에 대해 여성운동의 전개를 중심으로 조사단의 한국 방문의 배경을 살펴보는 것으로 한다.
1945년 8월 해방과 동시에 한국 민중은 민주적인 자주 독립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미군 점령에 앞선 9월 6일에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한다. 한국의 여성들은 당초부터 민족운동에 주체적으로 참가하여 각지의 건국준비위원회(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 후는 인민위원회로 개칭)와 연대하여 여성 독자의 조직을 추구하여 민족적이고 민주적인 새로운 여성운동을 시작한다.
서울에는 일제 시대로부터 민족주의 여성운동에 참가했던 정칠성과 유영준 등이 8월 18일에 건국여성동맹을 결성한다. 이를 기초로 하여 같은 해 12월에는 서울에서 전조선 여성단체 대표자회의가 개최되어 여성운동의 전국적 통일 조직인 조선여성동맹이 결성된다. 강령에는 ① 조선 여성의 정치적․경제적 완전해방을 기약한다. ②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의 건설과 발전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활동할 것을 기약한다. ③ 조선 여성의 국제적 연대를 도모하고 평화와 문화의 향상에 노력한다 등의 3항목을 내걸었다. 조선여성동맹은 남과 북의 각계 각층의 광범위한 여성들이 참가하였고 38선 이남만으로도 동맹원은 8만을 넘었다고 한다. 뒤에 살펴볼 북조선민주여성동맹 또한 조선여성동맹의 산하단체였다.3)
38선 이남에 군정을 설치한 미군은 인민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일제시대의 식민지 기구와 친일파를 미군 지배를 위해 이용하였다. 이에 대해 조선여성동맹은 민족의 자주독립을 내걸고 46년 12월에 민족주의 민주전선 결성에 참가하여 미국반대 투쟁을 전개하였다4). 그러나 미소 냉전에 의한 남북 분단 상황이 강화되자 미군정 하의 남한에서는 민족 민주세력이 가혹한 탄압을 받게되었다. 여성운동 또한 남북이 분립되어 조선여성동맹은 전국적 조직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조직명도 조선여성동맹에서 남조선 민주여성동맹으로 개칭해 가게 된다.5)
한편, 38선 이북에서는 소련의 지지를 얻은 인민위원회가 새로운 사회 건설의 중심이 되어 활동을 전개하였다. 46년에는 토지개혁법, 남녀평등권법, 산업국유화법 등이 공포되는 등의 민주개혁이 진행되어 갔다. 북한에서는 45년 11월에 탄생한 북조선 민주여성동맹(위원장 박정애)이 인민위원회와 강하게 결합되어 지역과 공장을 중심으로 결성 시에 15만인이었던 동맹원이 반년 후에는 60만인, 1년 후에는 100만이 넘는 조직6)으로 발전하여 여성이 주인공으로서 새로운 사회의 건설에 참가하기 위한 통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미국과 소련에 의한 분단의 결과, 분립의 상황은 한층 깊어졌으나 조국의 통일과 민주화를 열망하는 남북의 여성동맹은 정신적․이데올로기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38선을 넘나드는 여성들에 의해 서로 결합되어 있었다. 48년 2월의 남북 연석회의, 49년 2월의 전조선여성대표자 대회 등에도 남으로부터 참가한 여성들이 있었다. 이들 중에는 북에 그대로 남은 여성들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월북하여 좌익세력의 정치 학교에서 공부를 한 남쪽의 여성들도 다수 있었다.7) 남과 북의 여성동맹은 전시중인 51년 국제여성조사단이 방한하기 전에 정식으로 통합되었다. 남북조선여성동맹 합동 중앙위원회에 의해 합동이 선언되고 조직명은 재차 조선여성민주동맹으로 하였다. 당시의 중앙위원장은 박정애, 부위원장은 김영수, 중앙위원에는 월북한 정칠성도 있었다.8)
조선의 여성들은 당초부터 국제여성운동과의 연대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조선여성 동맹이 국제연대를 강령으로 삼은 것은 앞에서 살펴본 대로이다. 조선여성동맹의 결성 직전인 45년 11월 26일부터 12월 1일에 걸쳐 파리에서는 국제여성대회가 개최되어 국제민주여성동맹이 창립되었다. 국제민주여성동맹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반 파시즘 국제연대의 경험을 기반으로 탄생되었다. 여성과 아동의 권리, 세계평화와 민족독립의 수호를 내건 국제조직이다.
북조선 민주여성동맹은 46년 5월 제1회 여성대표자 회의에서 국제민주여성동맹에의 참가를 신청할 것을 결의하고 같은 해 10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국제민주여성동맹 임시대회에서 가입이 채택되었다. 남조선 민주여성동맹은 47년 12월에 가입이 승인되었다9). 48년 12월에 부다페스트에서 개최된 국제민주여성동맹 제2회 대회에서는 조선 대표가 국제민주여성동맹의 집행위원, 이사위원회에 선출되었다. 49년 12월에는 국제민주여성동맹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직후 북경에서 아시아 여성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아시아 14개국 165명의 정식대표와 유럽과 미국, 아프리카로부터의 내빈 30명 등의 참가10)로 이루어졌으며 식민지주의와 투쟁하는 아시아 여성의 연대를 표명하는 역사적인 대회였다.
국제민주여성동맹은 창설 이후 국제 평화를 위한 활동을 중시하여 군사적 긴장이 격화되어 가는 냉전 상황에서 여성의 단결로 새로운 전쟁의 발발을 저지 할 것을 호소하였다. 49년의 세계평화수호 대회의 개최를 시작으로 세계대전 후 국제 평화운동에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국 여성들은 이와 같은 국제민주여성동맹을 통해 북한의 여성들이 새로운 사회건설에 이바지하고 있음을, 남한의 여성이 미군의 점령에 의해 비참한 상태에 있다는 사실, 조선의 전 여성이 분단에 반대하고 통일된 민주주의 독립국가의 건설을 염원하고 있다는 것을 세계에 호소하고 국제적 여성운동과의 우호․단결을 열망했다.11)
그녀들은 조선 여성의 투쟁이 민족 해방과 평화, 그리고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세계의 여성, 특히 식민지 종속에 고통받고 있는 피억압 민족의 여성 운동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는 자각을 갖게되었다. 북경여성회의에 참가한 조선대표의 허정숙은 “새로운 생활 창조와 조국의 통일을 위한 투쟁은 전진하는 조선 여성의 기개를 주위에 울려 퍼트리고 민족의 해방과 독립 그리고 새로운 사회건설을 위해 투쟁하는 아시아의 진보적 여성들에게 희망과 용기와 신념을 갖게 했다. 이는 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적 범위의 진보적 여성 운동을 전진시키는 큰 힘이 되었다12)”라고 여성 회의를 회고했다.
동시에 한국의 여성들은 남북 분단과 봉건제와 제국주의의 지배로부터 새로운 사회건설을 위해 국제적인 이해와 지원을 필요로 하였다. 미국의 냉전 정책은 남북 분단 고착화의 민족적 위기를 가져왔고 남한의 민중 운동은 격렬한 탄압과 우익조직의 테러로 억압되었다. 48년 2월에는 단독선거․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서울에서의 투쟁을 시작으로 남한 전역에서는 반미 구국 민중 운동이 일어나고 제주도에서도 같은 해 4월에 민중 세력이 무장 봉기 하였다. 여성동맹원을 시작으로 많은 여성들도 이와 같은 구국 투쟁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5월에 단독선거는 강행되었고 8월에는 단독정부인 대한민국이 수립되었다. 다음달에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성립되어 한반도는 정통 정부임을 자인하는 2개의 국가로 분단되었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 미국의 후원을 등에 업은 이승만 정권은 민중운동 탄압을 한층 노골화하였고 제주도에서는 미군의 조정 하에 토벌대가 초토화 작전을 전개하여 최소한 3만인의 제주도민이 학살되었다. 무장대 참가자의 가족과 무관계의 사람들도 학대․학살의 대상이 되었고 여성은 토벌대 우익테러 조직에 의해 강간, 성 고문, 강제 결혼 등의 성폭력을 당했다13). 폭력과 학대는 제주도의 동포 살해에 동원될 것을 거부한 병사들의 반란에 대한 진압, 관련이 없는 사람들도 살상된 여수․순천사건, 그리고 지리산 근처의 빨치산 토벌작전 등을 시작으로 남한 각지에서 거듭되었다. 남조선여성민주동맹은 48년에도 단독 선거․단독 정부 반대 성명(3월 16일), 적산 토지를 농민에게 불하하는 미군정부령에 대한 비판 성명(4월 12일), 단독 정부 수립 반대를 주장하는 성명(6월 2일)을 내고 남북 분단 고착화와 남한의 파쇼화에 반대하였지만14) 대한민국-이승만 정권 하에서 활동하는 것은 점점 어렵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49년의 1년 간 국가보안법 등의 법률에 의해 민중운동관계자 11만 8천 6백인이 구속되었다15). 체포․백색테러를 피해 월북하기도 하고 빨치산 투쟁에 합류하는 여성들도 적지 않았다. 한국의 빨치산 투쟁은 49년 8월경부터 본격적으로 조직되어 오대산, 지리산, 태백산을 시작으로 남조선 전역에서 유격 투쟁을 전개했다16). 한국에서는 50년 6월 25일의 한국전쟁 개전(開戰)에 앞서 과대한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한국에서는 반공 테러가 거세져 전쟁 개시로부터 2개월 사이에 수원 이남 전역에서 30만 명 이상의 비무장 민간인이 한국군, 경찰, 우익 테러조직 등에 의해 학살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과거의 좌익인물을 ‘국민보도(國民補導)연맹’이라는 단체에 강제적으로 가입시켰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어 북한이 진군(進軍)에 옴에 따라 그들이 북한의 지원 세력이 되는 것을 두려워해서 그들을 살해하였다.17) 50년 9월에 맥아더가 이승만 정권의 지배를 부활시킨 이후 이승만의 심복들에게 살해당한 사람은 10만을 넘는다고 한다.18) 북한에서는 조선민주주의 여성동맹이 51년 1월에 국제민주여성동맹에 보낸 서간에 의하면 “침략자들”은 북한에 대한 최초의 공격으로부터 군사시설이 아닌 평화로는 읍이나 마을을 목표로 함으로서 처음부터 노인과 여성 그리고 아동을 향해 탄환을 발사했다.19)
미국이 유엔을 이용해서 전면군사 공격을 개시한 상황에서 남북한 민중 세력이 유엔군을 철퇴시키기 위해서는 국제사회로부터의 지원이 절박하게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여성 동맹은 그때까지 거듭되어온 연대 관계를 배경으로 앞의 서간을 국제민주여성동맹에 보내고 미군의 침략을 고발했다. 국제민주여성동맹은 각 국의 여성들에게 조사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제안하여 17 개국의 20명의 여성들이 이에 응해 결집하였다.20)
제2장 국제여성조사단의 보고서
국제여성조사단의 일행은 중국 국경에 인접한 도시 신의주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수도인 평양을 방문한 후 네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황해도, 평안남도, 강원도, 자강도의 각 지방을 조사했다. 황해도에는 호주, 쿠바, 캐나다, 소련, 영국, 중국의 리켄이, 평안남도에는 프랑스, 알제리, 베트남, 덴마크의 대표가, 강원도에는 벨기에, 이태리, 체코의 대표와 중국의 링칭양이, 자강도에는 동독과 서독, 네덜란드의 대표와 중국의 바이랑이 각각 방문하였다. 조사단은 조사를 위해 방문하는 곳에서 자주 울리는 공습경보에 의해 방공호에 대피해야만 했다. 가까운 곳에서 시한폭탄이 터지고 군 비행기의 기총 사격으로 인해 피난하는 등 전화(戰火)속의 시찰이었다. 조사단은 방문한 지역마다 조사내용을 정리하여 최후에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하에서는 세 개의 측면으로부터 내용을 정리하는 것으로 한다.
제1절 폐허(廢墟)
한국에서 조사단이 처음으로 목격한 것은 폭격과 방화에 의해 폐허가 된 읍과 마을로 반공호 속에서 숨을 죽이며 살고 있는 민중의 모습이었다. 최초로 방문한 신의주에서는 17개의 초등학교 중 16개교, 19개의 중학교 중에 12개교가 폭격 받아 파괴되었다. 2개의 시립병원은 적십자 마크가 표시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폭격을 피할 수 없었다. 폭격을 받은 병원의 환자들은 소이탄(燒夷彈)의 투하로 인해 불 타 죽었다.
또한 17개의 교회 중에서 남은 것은 2개뿐이었다. 어느 교회는 폭격을 받아 25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한다. 주민의 대부분은 반공호 속 과 부서진 건물 속에 텐트를 치거나 깨진 기와로 만든 오두막집에서 살았다.
대 공습으로 소이탄이 투하되었기 때문에 불을 끄기 위해 도로에 나온 사람들은 재차 저공 비행에 의해 기총 사격이 행해졌기 때문에 피해는 확대되고, 시는 불바다가 되었다.
이와 같이 낮은 곳에서 발사되는 기총 사격을 피하려고 했던 사람들과 가족을 불 속에서 구하려고 했던 다수의 사람들도 총격을 받아 살해되었다고 한다.21)
평양에서도 피난자는 방공호와 동굴을 개조한 피난소와 폭격당했던 건물의 남은 벽 안쪽에 몸을 피하고 있었다. 4개의 조로 나뉜 조사단원이 4시간 가까이 시의 이곳 저것을 방문했지만 4시간 가까이 누구도 사방의 벽이 있는 집은 한 채도 보지 못했다.22) 유명한 불사연명사(佛寺延明寺)의 잔해를 목격한 조사단은 넓은 전원 안에 있던 절의 위치로부터 보아 이 절이 폭격 당한 것은 미 폭격기의 실수였다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박물관은 파괴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지만 보물은 약탈당했다.23)
이와 같은 상황은 다른 곳에서도 거의 흡사했다. 조사단이 신의주에서 평양으로 가는 길에 통과한 남시, 정주, 안주, 순주, 순안은 읍과 군이 거의 파괴되었고 대부분의 마을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24) 4조로 나뉘어 방문했던 다른 지역도 상황은 거의 흡사했다. 황해도로 간 그룹은 안악, 신천을 시작으로 가는 곳마다 파괴된 도시와 불에 탄 마을을 목격했다.25) 평안남도의 남포를 방문한 그룹은 모든 집들이 완전하게 파괴되어 있었다고 보고하였다. 폭격의 결과 마을도 집도 흔적이 없어지고 일대가 무덤으로 변해버린 지역도 있었다.26) 강원도 문천과 원산을 향하던 그룹이 통과한 강동, 산동 등의 지역은 대부분 불타 없어졌다.27)
개주, 희천을 통해 자강도의 강계와 만포를 방문한 그룹은 평양에서 개천으로 가는 도중에 거의 완전히 파괴된 4개의 작은 읍과 불타 없어진 마을과 농가의 모습을 보았다. 가는 곳마다 폭격을 받지 않은 곳은 하나도 없었다.28) 만포는 목재와 섬유의 경공업이 중심인 지역이었지만 폐허가 되어 있었다. 재난을 입은 사람들의 머리 위에 폭격이 쏟아져 지하호와 폐허의 주인이 350명 이상 살해되었다고 한다. 조사단은 여기에서도 폭격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피난소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29)
읍에서 읍으로 마을에서 마을이 잇달아 파괴되어 있었다. 비군사 목표의 무차별 파괴는 1907년 헤이그 조약에 위반하는 전쟁 범죄이다. 비군사적인 공공건축물과 사원, 교회. 미술건조물, 교육․연구시설, 역사 유산, 병원 등은 국제법에 의해 군사공격으로부터 보호받고 있었다. 그러나 조사단이 목격한 “폭격을 당한 읍과 마을의 대다수는 군사목표라고는 할 수 없는 곳이었고 공업 중심지도 아니었다.”30) 병원과 학교, 절과 교회, 시장과 주택은 실수로 폭격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폭격을 받아 파괴된 것이 분명했다. 어느 지역의 병원은 적십자 마크가 표시되어 있었음에도 폭격을 받았다. 조사단은 각지에서 적십자 마크가 보이는 병원의 잔해를 목격했다. 수많은 환자와 간호부, 의사가 폭격을 받아 살해된 것이다. 기독교 신자들은 미국인이 교회를 폭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하여 교회와 그 주위에 피난하고 있었으나 그 기대는 어긋났다.
조사단은 각지에서 기독교인이 실망과 분노로 폭격 당한 경험을 호소하는 것을 들었다. 학교도 초등․중학교, 대학의 각종 학교가 어느 곳에서나 폭격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주민들의 생활에 관련된 이와 같은 제 시설이 끊임없이 공격당해 파괴되어 “잿더미가 된 읍. 살아 남은 주민이 방공호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마을조차 폭격은 끊이지 않았다”.
크고 작은 마을뿐만 아니라 산 속의 작은 농가까지도 폭격을 받았다. 곡물의 수확기 직전의 50년 가을 미군은 고의적으로 마을의 논과 밭을 소이탄으로 불태워 버렸다. 그 후로도 농촌으로의 공격은 계속되어 산림과 논과 밭, 과수원이 폭격과 방화로 파괴되고 가축이 살해되었다. 또한 들에서 일을 하고 있던 농민까지도 폭격과 기총 사격 당했다. 조사단은 낮에 논에 나가 있으면 미군기에 겨냥되어 기총 사격을 받아 죽게 됨으로 농민들이 밤에 논에 나가 일 하는 것을 목격했다. 자강도에서도 산과 논․밭이 불태워지고 가축이 살해되었다. 이로 인해 민중은 농사를 지울 수 가 없게 되어 기아에 허덕이게 되었다.
같은 곳을 방문한 조사단은 불에 타서 검게된 산 과 타고 있는 여섯 개의 산을 목격했다. 평양과 개천 사이의 화재와 희천과 개천사이의 화재는 조사단의 눈앞에서 일어났다. 양쪽 모두 비행기의 소음이 들렸고 불이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31) 강원도 문처군의 농촌에서는 산림과 논과 밭 그리고 마을에 떨어진 미군의 소이탄으로 광범위한 지역이 타버렸다. 그 결과 농민은 기총 사격을 피해 밤밖에 경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봄의 농사는 예년보다 빨리 끝났다고 한다. 조사단은 ‘산림과 농작물은 소이탄으로 폭격 당했고 과수는 잘라져 쓰러지고 들에서 가축을 사용해 일하고 있던 농민은 낮게 날고 있던 비행기로부터 기총 사격을 당해 살해되었다. 이로 인해 한국의 민중 전체가 기아의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32) 조사단은 이것이 식량, 식량 저장과 식량 공장의 체계적인 파괴에 의해 조선민중을 절멸시키려는 작전임을 확신했다.
조사단은 폐허를 돌아보고 피해 상황을 조사하고 여성동맹과 인민위원회의 멤버로부터의 보고, 일반의 주민들의 증언을 청취했다.
조사단은 각지에서 주민을 그 대상으로 하는 기총 사격에 대해서 반복해서 들었다. 예를 들면 신의주의 장윤자는 아버지와 남편은 소이탄의 폭격으로 불타던 집의 불을 끄기 위해서 물을 가져오려고 하던 중 저공 비행기의 총격으로 살해되었다고 했다. 김인달도 딸과 3명의 손자가 살해당했다고 증언했다. 그녀의 딸은 불타고 있는 집으로부터 아이를 구하려고 하던 중 사살되었고 손자들은 불타고 있는 집으로부터 도망치던 중 사살 당했다.33) 같은 내용의 증언을 조사단은 방문한 곳마다 듣게 되지만 조사단 자체도 평양 체재 중에 시가와 군사목표로부터 많이 떨어져 있는 농촌에서 기총 사격을 받아 방공호에 피난하는 경험을 하였다34). 원산에서는 폭격과 기총 사격에 의한 사살이 계속되어 조사단 체재중 세 번의 공격경보에 의해 그녀들도 산 속의 반공호에 대피해야만 했다. 춘천리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사람들은 골짜기와 동굴을 파서 살고 있었고 “마을이 전부 동굴”의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미군 비행기로부터 기관총 사격을 받을 것을 두려워해서 동굴의 입구를 목기의 망으로 위장하고 있었다.35)
폭격은 소이탄과 함께 석유 폭탄, 시한 폭탄 등 대량 살육 용기가 사용되었다. 조사단은 산속을 걸으면서 건물의 잔해 속에 흩어져 있던 다수의 비행기용 기관총의 파편과 케이스 등을 발견하고 신병기가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끊이지 않는 폭격과 기관총 사격, 소이탄에 의한 화재, 시한폭탄의 폭발 때문에 구출 작업은 방해를 받았다. 시한폭탄은 투하되고 나서 수일간 일정치 않는 시간에 폭발하기 때문에 주민은 폭격을 당한 사람의 구출과 건물의 복구를 원했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그 결과 생매장된 무수한 사람들은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었다.36)
제2절 점령과 학살
조사단은 방문한 각지에서 미군이 점령 중에 행한 잔혹 행위의 증언과 만나게 된다. 미군이 감옥으로 사용한 건물, 남아있는 고문 도구, 우물과 웅덩이 속에 버려진 살해된 사체, 많은 사람들의 신체에 남아있는 고문의 흔적을 눈으로 목격하였다. 그리고 각지의 인민위원회와 여성동맹의 공식보고를 청취하였다. 또한 방문했던 곳의 많은 사람들의 증언에 귀를 기울였다. 조사단의 차는 조사 도중 마을의 주민들에 의해 세워졌고 마을사람들은 미군으로부터 받은 고통의 예를 자세하게 증언하였다. 조사단이 와있는 것을 알고 자신과 가족의 수난을 말하기 위해 온 사람들도 많았다. 먼 곳으로부터 조사단을 만나러 온 사람들 중에는 50대 여성들의 무리와 고아 시설에서 살고있는 아동도 있었다. 너무 흥분해 울면서 조사 단원의 손과 옷에 매달리는 여성들도 있었다. 조사단을 에워싸고 이야기를 들을 것을 요구하고 고문의 의한 상처를 보이거나, 학대받은 사실과 가까운 친척이 살해되었음을 증언하였다.
일제로부터의 해방 후 새로운 한국사회의 건설을 위해 활동해온 다수의 남녀가 미군의 점령 하에 무참하게 학살되었다. 북한인민군, 노동당, 인민위원회의 멤버, 여성동맹과 농민조합, 소비조합 등의 민주적 대중단체의 관계자를 시작으로 그 가족과 친척, 이웃들은 유아와 태아마저도 잔혹 행위의 대상이 되었다. 변정례는 활동적인 농민이었기 때문에 체포되어 두 살짜리 아이를 업은 채 손과 발이 묶여지고 아이도 총검으로 찔렀다. 그녀가 “김일성과 공화국 만세”를 외치자 혀를 짤라내고 생매장 시켰다.37) 어느 노동당원 여성은 목이 잘리고 그녀의 남편은 살해되어 강에 버려졌다. 네 살 짜리 딸은 생매장되어 살해되었다. 열 두 살 짜리 딸은 살아 남아 고아시설에 수용되었다.38) 남편의 활동을 “이유”로 체포, 고문, 학살당한 여성도 적지 않았다. 어느 농민조합 지도자의 부인은 남편이 살해되자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도망치려고 했을 때 체포되었다. 어린아이는 지면에 내팽겨쳐져 밟혀 살해되었다.39) 개천의 빨치산 전사의 부인 이화실은 임신 중이었으나 미군은 이화실의 왼팔과 왼쪽 다리를 자르고 자궁을 들어내어 태아를 빼내는 고문으로 살해하고 네 명의 아이들은 불태워 죽였다.40)
특정의 활동가와 가까운 사람만이 희생되었던 것은 아니다. 일반 주민의 대한 체포, 폭행, 고문, 살인이 자의적으로 행해졌다. 100 가구밖에 집이 없는 마을에서 90가족이 살해되었다고 한다.41) 무차별 주민학살이 행해지고 있었다. 강원도 문천군 만성리 주위의 마을들은 미군이 불을 질러 도망가지 못하고 있던 약 500명의 주민이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그 중 54명은 살해되고 78명은 원산으로 보내져 소식이 끊겼다. 투옥된 여성은 모두 구타를 당했고 그 중의 20명은 폭행을 당했다.42) 만성리에서부터 4km 떨어져 있는 구민촌에서도 미군은 마을의 노인, 여성, 아이들을 방공호 속에 넣고 수류탄을 던지거나 도끼로 머리를 깨거나 생매장하는 방식으로 학살을 자행했다.43) 이상의 예는 특수한 사례가 아니고 미군이 점령했던 각 곳에서 일어났다.
집단 학살의 흔적은 조사단이 방문한 각지에 확실하게 남아 있었다. 황해도를 방문한 조사단은 안악시에서 노동당원이 아닌 농민과 노동자가 감금되어 있던 옥사와 집단 학살이 행해진 장소를 시찰하고 옥사에 남아있는 혈흔과 고문도구, 집단적인 학살의 흔적을 목격하고 수난자 본인과 유족들로부터 증언을 듣고 증언자의 신체에 남아있는 고문의 상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감방은 어디든지 만원으로 한사람 한사람이 앉아있을 여유조차 없었고, 먹을 음식은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모친과 함께 투옥되어 울고있던 어린아이가 총검으로 찔려 죽기까지 했다.44) 미군은 체포한 사람들을 매일 철봉으로 때리고 빨갛게 구운 바늘을 손톱에 집어넣는 등의 고문을 자행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신체장애자가 되었다. 또한 미군은 고문에서 죽지 않은 사람들(아이들을 포함해)을 우물에 던져버리거나 웅덩이 속에 생매장하는 등으로 학살했다. 안악에서는 12개의 언덕이 생매장을 위해 사용되었고, 조사단은 그 중의 하나를 방문했다. 언덕의 주위에 크고 작은 웅덩이가 20여 개 있었고 미군이 사라진 후에 웅덩이를 파헤쳐 보니 손과 다리가 묶인 채 외상이 없는 남녀의 사체가 발견되었다. 소수의 사체만 있는 웅덩이도 있었지만 4-500명의 사체가 발견된 웅덩이도 있었고, 어린아이만 묻혀 있는 웅덩이도 있었다.45)
신천시에서는 동굴과 창고가 대량학살을 위해 사용되었다. 어느 동굴에서는 38명의 여성과 아이들이 총살되었고 다른 동굴에서는 104명이 온몸에 휘발유를 뒤집어 쓴 채 불타죽거나 질식사하였다. 그리고 큰 동굴에서는 미군이 마을을 떠날 때 건물에 구속되어 있던 479명을 휘발유를 뿌려 불태워 죽이고 천명 가까이 기관총으로 사살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조사단은 동굴의 벽에 남아있는 혈흔과 굴의 안쪽이 탄 흔적과 뼈의 잔해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조사단이 가는 곳마다 인간의 살이 썩는 악취를 느낄 수 있었다. 신천의 거리에서 떨어진 산 속에 있는 창고에서는 3백명의 여성이 산채로 태워졌고, 그녀들이 데리고 온 아이들은 굶어 죽거나 얼어죽었다. 조사단은 동굴과 창고의 주위에서 친척이 살해당한 다수의 주민을 만났다. 양영덕은 남편과 자식 5명을 미군에게 살해당했다. 2살짜리 아이는 미군에게 밟혀 창자가 밖으로 나와 사망했다고 한다. 그녀는 아이들은 창고에 감금되어 있었으나 폭행 목적의 미군에게 밖으로 끌려나가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희생자들은 창고 옆 산 속에 2개의 웅덩이에 매장되었다. 70명의 아이들과 약 200인의 여성의 사체가 매장되어있는 웅덩이를 발견하였으나 모두 검게 그을려 있었다. 근처에 있던 아이들의 전용 감방 또한 폭격으로 파괴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학살에 대해 주민들은 종종 미군으로부터 폭격은 있었지만 학살은 범죄의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46)
평안남도의 남포에서는 점령군에게 1051명이 학살되고 그중 반 이상이 여성과 아이들이었다. 신주지방에서는 점령군에게 1561명이 살해되었다. 그 중 1384명은 사살(454명은 8세 이하의 유아)되었고 그밖에는 교살되거나 생매장되었으며 맞아 죽거나 타 죽었다.47) 주민들은 미군이 사라진 후 묻혀 있던 사체를 찾았다. 형제가 손을 등뒤로 묶이고 앉은 자세로 매장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 탁복동은 같이 매장되어 있던 눈을 뜨고 있는 사체, 아이를 업은 채 살해된 여성 등 그 모습이 너무나 끔찍하였기 때문에 볼 수가 없었다 다고 증언했다. 사람들이 매장되어 있던 장소는 7개였다. 웅덩이는 길이가 80m에 이르고 사체를 이단으로 쌓을 수 있었지만 그것 이상으로 깊게 묻혀 있었다. 조사단 일행은 이와 같은 묘를 방문하여 신원 불명의 시체로부터 손이 등뒤로 묶여져 있었고 머리의 몇 군데가 깨져있는 것을 확인하고 머리카락, 신발, 그 밖의 옷을 발견했다. 직모(直毛)의 흑발과 옷으로부터 희생자가 한국 농민이었다는 것은 틀림없었다.48)
주민학살은 미군이 점령지를 퇴거해 가는 과정에서 더욱 흉폭하게 행해졌다. 방화, 약탈, 파괴의 철퇴 과정에서 특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피난민 학살이다. 점령하고 있던 각 곳에서 미군은 원자폭탄투하의 협박과 중국인민 의용군에 대해 악선전을 유포하고 주민이 남으로 피난하게끔 선동하였다. 그러나 이를 믿고 피난하려고 한 수천, 수만의 사람들은 미군의 기관총과 폭격에 의해 살해되었다. 난포에 있는 제분 공장주는 미군의 선전에 현혹되어 해주로 도망쳤지만 그를 포함한 피난민 수 천명은 미군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증언했다.49) 어느 목사의 증언의 의하면 배를 타고 남으로 피난하려고 했던 천 오백 여명이 미군의 기관총 사격을 받고,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여 찬미가를 부르기 시작한 기독교인들을 포함해 270명이 살해되었다고 증언했다.50)
조사단은 각지의 조사를 끝내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미국 군과 이승만군이 일시적으로 점령했던 지역에서는 점령 기간 중에 수천만의 시민, 노인으로부터 아동에 이르기까지 가족의 전부가 고문당하고 살해되고 불태워지거나 생매장되었다. 그밖에 수천 수만 명은 다투듯이 감옥 안에서 배고픔과 추위에 죽어갔다. 이상의 사람들은 어떠한 죄도 없고 조사도 재판도 판결도 받지 않고 수감되었던 것이다. 한국 민중에서 자행한 고문과 학살은 히틀러 나치가 일시 점령했던 유럽에서 자행된 것보다 더욱 가혹한 것이었다.”51)
번역: 박선영, 해외연구원
* 본 논문의 출처는 여성․전쟁․인권 학회지 편집위원회『여성․전쟁․인권』3(2000년).
** 후지메 유키는 현재 오사카 외국어대학 조교수로 재직중이며 전공은 여성사이다.
1)モニカ․フェルトン「私が見た朝鮮」平野義太郞․畑中政春編『アジアはかく訴えるーアジア太平洋地域平和會議の記錄』1953年、113頁.
2)ユージェニー․コットン「平和と婦人子どもの利益とをまもる婦人の行動の成果を總括と見とおし」世界婦人大會代表報告會中央準備會編『平和と幸福のためにー世界婦人大會報告․決議集ー』五月書房、1954年、49ー53頁
3)宋連玉「朝鮮婦人總同盟ー8․15解放直後の女性運動ー」『朝鮮民族運動史硏究』第2號、1985年、63ー102頁 및 高峻石『朝鮮革命運動史第3卷統一への胎動と朝鮮革命』社會評論社、1984年、30ー33頁、高峻石감수․文國柱편저『朝鮮社會運動史辭典』社會評論社、1981年、194ー195頁、374ー375頁。『アリランの女』田畑書店, 1974年, 119頁。
4) 앞의 글, 『アリランの女』128ー130頁。
5) 개칭의 일시와 장소에 대해서 高峻石씨는 46년 4월의 확대중앙위원회라고 하고(앞의 글 統一 への胎動と朝鮮革命』33頁), 宋延玉씨는 46년 12월 26일의 일주년기념식전을 지난 47년 2월 11일의 제2차 대회라고 하고 있다(앞의 글, 「朝鮮婦人總同盟」, 90頁。
6) 山下正子『炎の女性ー金正淑女史の生涯とその業績ー』雄山閣出版,1990年, 83頁。
7) 앞의 글, 『炎の女性』134ー136頁、139頁、141ー149頁、151ー152頁、李泰著/安字植譯『南部軍ー知られざる朝鮮戰爭ー』平凡社、1991年、282頁등.
8) 合同의 일시와 장소에 대해서는 文國柱씨는 51년 4월 20-21일의 양쪽 동맹합동 중앙위 원회에 의해 합동 선언이 발표되었다고 하고(앞의 글 『朝鮮社會運動史辭典』374-375 頁), 宋連玉씨는 51년 1월의 양쪽 동맹의 합동중앙위원회라고 한다(앞의글 「朝鮮婦人總同盟」92頁。
9) 앞의 글, 「朝鮮婦人總同盟」90頁。
10) 宋慶齡著/中國硏究所編譯『新中國のために奮鬪する』ハト書房、1952年、170頁。
11) 앞의 글, 『炎の女性』167ー173頁。
12) 앞의 글, 『炎の女性』162頁、165ー168頁、171頁。
13) 국제 심포지움「濟州道シンポジウム報告書」1999年4月3日。여성의 체험에 대해서는 특히 吳金淑「4․3を通じてみる女性の人權侵害事例」(178-193頁)、金成禮「國家暴力と女性體驗」(114ー135頁)참조.
14) 앞의 글, 「朝鮮婦人總同盟」91 頁。
15) 朴元淳「冷戰時期のアジアにおける人權侵害とその賠償問題」國際シンポジウム「東アジアの冷戰と國家テロリズム」日本事務局編集發行『東アジアの冷戰と國家テルリズムー臺灣シンポジウム報告集ー』1997년 11월 30일,222頁。
16) 앞의 글, 『南部軍』에서는 저자의 부대에 참가하고 있던 2명을 시작으로 조선전쟁이 발발하기 이전부터의 고참 빨치산, 평양으로부터 파견되어 경상남도의 유격대에 가담한 문화공작 요원, 오빠를 보도연맹 사건으로 잃은 간호병, 여순반란 사건과 보도연맹 사건으로 가족을 살해당한 빨치산부대장 등 다수의 여성들이 회상되고 있다.
17) 앞의 글, 「冷戰時期のアジアにおける人權侵害とその賠償問題」223頁。
18) J․ハリデイ、B․ カミングス著/淸水知久譯『朝鮮戰爭』,岩波書店,1990년,162頁。
19) 앞의 글, 『平和と幸福のために』49頁。
20) 앞의 50頁。
21) 앞의 글,「報告書」205ー208頁。
22) 앞의 213ー214頁。
23) 앞의 211ー212頁。
24) 앞의 208頁。
25) 앞의 215ー231頁。
26) 앞의 233頁、240頁。
27) 앞의 241頁。
28) 앞의 252頁。
29) 앞의 261ー262頁。
30) 앞의 ‘結論’ 263頁。
31) 앞의 252ー253頁。
32) 앞의「結論」263頁。
33) 앞의 206ー208頁。
34) 앞의 212頁。
35) 앞의 245ー246頁。
36) 앞의 209ー213頁、246頁。
37) 앞의 글, 「報告書」, 변정례의 어머니와 김련의 증언, 227頁。
38) 앞의 글, 살아남은 딸 ․김성애(12세)의 증언, 219頁。
39) 앞의 글, 본인․김윤숙의 증언, 257頁。
40) 앞의 글, 평안남도 인민위원회 위원장, 김병우의 증언, 255頁。
41) 앞의 글, 황해도․책서리에서 사는 김지혜의 증언, 230頁。
42) 앞의 글, 농민․김송류의 증언, 242頁。
43) 앞의 242ー243頁。
44) 앞의 글, 같은 감옥에 있던 옥분전의 증언, 220頁。옥분전(16세)은 부모가 목이 짤려 강에 버려졌고 자신도 투옥되었다.
45) 앞의 글, 안악에 대해서는 216ー219頁。
46) 앞의 글, 신천에 대해서는 222ー226頁。
47) 앞의 글, 232ー233頁。
48) 앞의 237ー239頁。
49) 앞의 235頁。
50) 앞의 235ー236頁。
51) 앞의 글, 264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