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은 대중의 음악인가?
특집
김 영 한
문화연구 ‘시월’ 연구원
대중음악만큼 대중의 정서와 욕망을 잘 표현하는 텍스트도
드물다. 텔레비전과 라디오로 대표되는 대중매체를 통해
일상적으로 접하는 대중음악은 대중의 삶과 경험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대중음악에는 당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꿈과 희망,
좌절과 고난이 배어있다. 대중음악은 한 시대를 살아가는
대중들의 정서와 생각들을 담아내는 그릇이기도 하지만, 바로
그런 연유로 대중음악은 시대적 상황과 결코 유리될 수 없고, 그
사회의 정치경제적 지배를 받기 마련이다. 1970년대 이후의 우리
대중음악이 걸어온 길을 돌이켜봐도 그러한 굴레와 간섭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는 한국의
대중음악이 대중에 의한, 대중을 위한, 대중의 음악이 되지
못하도록 한 정치경제적 제약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정치적 제약
문화적 실천으로서 노래를 듣고 부른다는 행위는 다양한 사회적
맥락과 닿아 있다. 대중음악이 남녀간의 사랑을 다루는 대신
사회에 대해 얘기하는 순간 거기에는 정치성이 개입해 들어가고,
때에 따라서는 정치적 규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1970년대
우리 대중음악이 그러하였다. 물론 대중음악이 지배권력의
지배이데올로기만을 일방적으로 전파하는 것은 아니다.
대중문화의 한 분야로서 대중음악 또한 사회내의 다양한
세력들간의 다툼이 항상적으로 일어나는 공간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시기 독재권력은 강압적인 물리력을 앞세워
대중음악에 직접적인 통제를 가하는데 주저함이 없었고, 또
당시에는 그러한 시도가 일정 정도 성공을 거두기도 했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저항성 짙은 노래의 정치적
영향력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미니스커트와 장발에 들이댔던
잣대와 가위를 대중음악에도 그대로 적용하였다. 1975년 발표된
가요규제조치로 체제비판적 성격의 노래들은 지하로 들어가게
된다. 유신정권 아래 2백여 곡이 금지곡으로 묶이게 되고,
김민기, 한대수, 신중현 등은 금지가수로 규정지워져 대중
앞에서 사라졌다. 당시 금지곡의 규제사유는 ‘퇴폐분위기
조성’, ‘불신풍조 조장’, ‘군인사기 저하’ 등 애매모호한
기준들이었다. 저항가요의 효시로 널리 알려진 김민기의
<아침이슬> 이 노래는 작곡자의 손을 떠나 대중의 품으로
들어가는 순간 저항적 메시지를 확대재생산 해왔다. 사회적
상황이라는 맥락이 수용자의 텍스트 해독을 일정한 방향으로
견인한 예이다. 낭만적으로 들릴 수도 있었던 이 노래가
암울했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텍스트에 대한 수용자의
‘교섭적’ 내지는 ‘저항적’ 해독을 가능케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 노래를 불렀던 양희은의 얘기는 시사하는 바가
있다. ‘노래는 그 노래를 만들고 부른 사람과 상관없이 그
노래를 듣고 되불러주는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에 그분들이
그렇다고 얘기하면 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도
시위현장에서, 우리 학교 앞에서 최루탄 터지는 가운데 이
노래를 합창하는 걸 보면서 와, 이건 내가 부른 <아침이슬>이
아니구나…’ (인터뷰, 1999)
은 특별한 규제사유도 없이 금지곡으로 묶이게 되었다.
노래말에 대한 정치적 규제는 이른바 ‘건전가요’의 등장으로
보다 적극적인 모습을 띤다. 건전가요는 10월유신으로 열린
제4공화국의 산물이었다. 유신정권의 박정희는 스스로
<새마을노래>를 만드는 등 건전가요 작곡과 보급에 열정을
보였다. 정통성이 결여된 정치권력은 대중음악을 이데올로기적
기구로 적극 활용하면서 모든 음반에 건전가요 한 곡씩
수록하도록 하였다. 이렇듯 대중음악의 사회적 영향력을
체제수호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경향은 1980년대 들어서 더욱
교묘해졌다. ‘국풍81’로 대중음악의 정치성을 실험한
정치권력은 급기야 <아, 대한민국>을 통해 암울한 시대상황과는
달리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유토피아적 환상을
역설했다. 그러나 건전가요를 통해 대중의 의식을 조작하려던
정권의 불순한 의도는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1987년 6월 시민항쟁을 거치면서 사회모순과 체제비판을 주요한
내용으로 하는 저항가요와 노동가요는 ‘민중가요’라는 이름을
얻게 되면서 대중 곁으로 한발짝 더 다가갔다. 정치적 격변기를
맞아 민중가요는 이전 보다 더 열린 공간에서 대중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 시기의 민중가요는 대중의 정치적 경험을
조직해내면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부른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가 대중가요 인기순위 4위까지
뛰어오를 수 있었던 배경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당시에 나온 노래들이 모두 음악적으로 좋은 노래라고 보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많은 대중들이 들어주고 사랑해주었다.
돌이켜보면 이 시기는 ‘노래운동에 프리미엄을 얹어주었던
때’였다. 1980년대와는 전혀 다른 정치적 상황을 맞은
1990년대의 민중음악은 그 영향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 만세를 부를 때 다가오는 감동과 떨림이
1990년대는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조차도 그 가사가
시대착오적인 느낌을 받게 되는 상황’이 온 것이다 (안치환
인터뷰, 1999). 천편일률적인 사박자 리듬과 여과되지 않은
직설적인 가사를 대중들은 외면하게 되었다. 변화된 시대적
상황에서 성공적으로 자기변신을 하지 못한 운동가요가 대중의
정서와 시대적 요구에 능동적으로 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의 노래운동이 민주화 운동의 지형에 남긴
영향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후 문민정부의 등장과 함께 대중음악에 대한 정권의 직접적
통제는 많이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 노래에 대한 정치적
규제도구로 비난받았던 음반의 사전심의는 1996년에 이르러
위헌판결을 받게 된다. 대중음악에 대한 사전심의 폐지는 가수
정태춘 등 대중음악인이 정치권력과 맞서 쟁취해낸 대단히
중요한 문화적 성과로 평가된다. 정부당국에 의한 음반의
사전심의가 폐지된 이후 음반에 대한 심의는 방송사의 자율에
맡겨짐에 따라, 특정 음반의 방송여부는 이른바 국가에 의한
검열적 심의에서 방송사 자율심의로 넘겨졌다. 통상적으로 한
달에 800여 신곡이 심의를 받게 되는데, 방송보류 및
부적격판정을 받는 노래의 비율은 8-10%에 달한다. 보류는 한 두
부분 고쳐서 재심의를 받아 통과될 가능성이 많은 노래에
대해서, 부적격은 쉽게 고쳐서 재심의를 받을 수 없을 정도로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음반에 대해 내리는 판정이다.
음반심의가 방송사로 이관됨에 따라 신장된 표현의 자유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징후들이 나타나면서 청소년의 호기심을
유발하는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가사들이 사회문제가 되기도
한다. 심의의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방송사에 의한 가요심의는
몇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심의에 대한 신뢰성 문제이다.
대중음악 전문가와 수용자가 배제된 채 방송인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심의가 정작 음악을 즐기는 청소년의 기호와
취향, 정서와 문화를 제대로 읽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다.
대중음악의 주 수용층이라고 할 수 있는 청소년의 눈높이가
아니라 기성세대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기대어 심의가
이루어지지 않는가에 대한 우려가 현실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청소년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는 방어적
심의에서 벗어나 심의의 객관성과 신뢰성을 제고해야 한다는
문제제기는 적절하다고 본다. 둘째, 방송사의 심의기준이 명확치
않다는 비판이다. 방송사의 자율심의에 맡겨지다 보니 동일한
대중가요가 어떤 방송사의 심의는 통과하는데, 다른 방송사의
심의는 통과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는 방송사의
심의기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심의위원들이
대중음악을 바라보는 시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방송사간의
이중잣대를 수용자들이 이해하기 힘들어함은 당연하다고 봐야할
것이다. 심의에 대한 논란을 불식시키기 위한 한 방안으로
방송사의 심의기준을 음악생산자와 수용자에게 공개하는 문제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할 시점에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대중음악에 대한 권력의 통제가 과거에 비해 적어도
가시적으로 많이 줄어든 상황이다. 그러나 대중음악에 대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통제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하기는 아직
이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정치권력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방송사 내부의 종사자들에게 내면화되어 있고, 때에 따라서는
대리전을 치르기도 한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한 예로 최근
급속도로 진전된 화해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북한의
대중음악에 대한 대중의 접근은 쉽지 않은 상황인데,
공중파방송은 저작권의 이유를 들어 여전히 북한가요의 방송을
금하고 있다. 북한은 국제 저작권 협약(베른 조약)에 가입되어
있지도 않은데 말이다. 앞으로 시대적 상황이 달라지면
북한가요에 대한 접근이 쉬워지겠지만 깨어있는 대중들의 관심과
요구가 그 시기를 앞당길 수 있음은 물론이다.
경제적 제약들
1990년대 들어 대중음악에 대한 정치적 규제가 많이 줄어든 반면
시장의 제약이 보다 노골적으로 표면화하게 된다. 다른
문화산업과 마찬가지로 대중음악 또한 이윤극대화라는 자본의
논리를 철저히 따르고 있다. 최대이윤은 대량생산이 담보해 줄
수 있으며, 대량생산의 전제조건으로서 대량소비가 필수적이다.
대량소비를 가능케하는 기제로서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최근 대중음악, 특히 청소년 대상 음악시장에서 등장하고
있는 ‘스타시스템’이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시작되었던 스타를
통한 이윤창출 방식이 대중음악에도 그대로 적용되기에
이르렀다. 스타는 실패의 우려를 최소화하는 안전판이다. 소수의
스타에 의존한 음반생산은 수용자들에게 편식을 강요하고,
결과적으로 다수의 실험적이고 창조적인 언더그라운드
아티스트의 출현을 가로막는 장애가 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우리의 인디음악은 외국에 비해 매우 열악한 형편에
처해 있어서 더욱 문제가 되고 있다. 외국의 경우 주류음악의
외곽과 언더그라운드에서 실험성 짙은 얼터너티브 음악들이
‘대중음악의 저수지’ 역할을 하면서 언제든지 주류음악으로
편입될 길이 열려 있음에 비해, 우리는 주류음악/인디음악의
이분법적 구분이 너무도 뚜렷하고, 그 벽을 뛰어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대중음악은 이제 더 이상 리듬, 멜로디, 노래말의 텍스트로
머물지 않게 되었다. 텔레비전의 등장으로 이미 시작되었던
시각적 즐거움이 최근에 와서는 더욱 강조되는 추세에 있다.
수용자는 가수의 노래를 들으면서 정서적인 만족만을 얻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즐거움도 함께 향유한다고 한다. 가수의 독특한
의상과 캐릭터, 율동이 보는 즐거움을 더하게 됨에 따라 이미지
창출이 대중음악의 성공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대두되었다. 과거에 노래를 잘하는 사람들이 가수가 되었다면,
이제는 노래실력이 전부가 아닌 시대가 온 것이다. 노래실력에
미모와 춤이 겸비되어야 하며, 때로는 노래실력은 떨어지더라도
각 멤버에게 특정한 이미지를 부여하고, 그 이미지를
확대재생산함으로써 대중에게 어필하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간혹 인기정상을 달리고 있는 댄스그룹이 라이브음악에서 유난히
약한 모습을 보이거나, 공개방송에서 립싱크만을 고집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가창력보다 볼거리 중심의 옷차림과 댄스가
소비자에게 어필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따라서 스타는 이미지와
상징을 시장에서 팔고, 대중은 이를 구매하고, 소비를 통해서
즐거움을 얻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음악성은 부차적이 된다.
일반산업에서와 마찬가지로 음반산업에서도 생산비용이 크게
증가하고 있는 것이 추세이지만, 특정 장르에 국한된 불균등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대두된다. 즉, 10대
위주의 댄스음악의 생산비용이 크게 증가하고 있는 반면,
성인음악의 생산비는 정체되거나 떨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10대 댄스그룹이 음반 하나를 출시하기 위해서는 최소 1억원의
비용이 소요되고, 뮤직비디오까지 제작할 경우 제작비는 더욱 더
늘어나게 된다. 홍보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뮤직비디오 제작에
편당 수억원의 지출도 마다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비해
성인가요 음반의 제작비는 평균 5천만원 정도에 불과하다.
그것도 자작곡이나 기성곡을 쓰고, 컴퓨터 음원을 사용하여
제작하면 천만원 이하로도 제작이 가능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음반이 부실해지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기성세대가 즐기는
음악적 장르에 대한 빈약한 투자는 불가피하게 음악적 질의
저하를 불러온다. 따라서 대중의 관심을 끌기 어려워지게 되고,
수익기반이 없는 성인가요는 더욱 침체하게되어 음반제작에
재투자가 어려워지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트로트음반의 경우
시장에서 손익분기점을 맞추는 경우는 10% 미만이다. 어떤
음반이 팔리고 어떤 음반이 팔리지 않을지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안정을 중요시하는 보수적 전략을 세울 수밖에 없다. 또한
대중음악은 사용가치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수요의 불확실성에
대한 대처를 위해 필연적으로 히트한 음악의 아류를 낳는다.
표절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식의
유사품의 남발은 결국 ‘장르피로’와 시장포화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창의적 실험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더욱이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인해 외국의 곡들을 부분적으로
인용해서 노래를 만드는 일이 예전에 비해 훨씬 쉬워졌다.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을 발표해도 듣는 사람이 없다면, 또
대중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아티스트들의 사기는 당연히 저하된다.
문화상품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을 위해서는 생산자에서
소비자에게로 문화상품이 전달되는 매개과정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음반산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통의
구조를 파악하고 이를 개선하는 일이 급선무이다. 국내
제작사에서 생산된 음반은 도매상과 중간도매상을 거쳐
소매상으로 가게되고 최종소비자에게 판매된다. 물론 백화점이나
서점을 통해서도 직접 유통되거나, 인터넷이나 통신판매 등
직접판매 방식도 있지만 현재까지는 극히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다. 음반유통의 흐름을 장악하고 있는 도매상들은 이윤
극대화를 위해 제작사에 대해 독점적 권리를 누리고 있다.
전국음반도매상협의회는 회원사 이외의 도매상에 음반을
공급하는 제작사에 대해 불매운동 위협 등으로 압력을 행사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하루에 쏟아져 나오는 20종 이상의 음반
중에서 단지 5종 이내만이 소매상에 전달될 뿐 나머지 음반은
도매상의 창고에 있다가 전량 제작사에 반품되고 있는 상황이다.
인기 있는 음반의 경우 제작사에 선금을 주고서라도 확보하지만,
그 외 대중이 찾지 않는 음반은 뜯지도 않고 반품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비자 선택의 기회는 그만큼
줄어든다. 이러한 전근대적 유통구조 하에서 소비자의 다양한
기호와 취향에 부응하는 새롭고 신선한 음악, 기존의 틀을 깨는
음반이 소비자에게 도달하기는 무척 어렵다고 봐야할 것이다.
덧붙여서 생각해볼 문제는 외국직배사들의 국내가요
시장진출이다. 그동안 팝음악과 클래식에 치중해 온 외국의
메이저 직배사들이 90년대 중반부터 대중가요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이들의 시도가 아직까지 큰 성공을 거두고 있지는
못하지만 앞으로의 상황은 낙관을 불허한다. 외국 직배사가
유통망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대중음악도 결코
안전지대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문화상품으로서 음반은 쓰면
없어지는 공산품이 아니라 문화적 가치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문화적 정체성과 문화제국주의의 폐해에 대한 우려가 자연스럽게
제기된다. 음반을 통한 음악의 청취는 단순히 물건을 사서 쓰는
경제적 행위를 넘어서 소비자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문화적
실천행위이기 때문이다.
대중음악의 유통을 담당한 도소매상의 역할을 살펴보았는데,
대중음악의 매개과정이 이러한 유통업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님은
물론이다. 방송사 음악프로그램 프로듀서를 비롯해서
레코드가게 주인, 라디오 채널 선택권을 갖고 있는 버스기사와
옷가게 주인, 음악다방 DJ 등 다양한 사람들이 매개자로서
매개과정에 개입한다. 생일을 맞은 친구에게 음반을 사주는 행위
또한 매개과정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대중음악의 매개과정은
복합적이고 중층적이다. 하지만 매개자로서 라디오와 텔레비전
등 대중매체는 영향력 면에서 다른 매개자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대중의 음반구매에 있어서 대중매체의 역할이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방송에 많이 등장하는 노래는 자연히
수용자의 귀에 익숙해지고 그 결과 구매력을 자극하게 된다.
시청률 경쟁과 광고판매에 매달린다는 숱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텔레비전 가요순위 프로그램은 여전히 인기프로그램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이들이 발표하는 순위에 가요시장의 판도는
크게 영향을 받는다. 심심찮게 등장했던 음반회사, 가수매니저와
방송사 PD간의 뒷거래는 대중매체가 음반소비에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설명해준다. 방송사
사무실이 가수 매니저들의 주요한 로비 무대가 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텔레비전의 위력을 실감하고 있는 가수들은
텔레비전에 얼굴을 내미는 일을 우선 과제로 삼게 되고, 이를
위해 치열한 로비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최근에 들어서는
그동안 라디오와 텔레비전 출연을 자제했던 가수들마저도
심심찮게 브라운관을 통해서 만날 수 있다. 여기서 문화생산과
소비를 중개하는 대중매체에 종사하는 방송 프로듀서의 역할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문화산업의 일방통행에 제동을 걸고,
건강한 양질의 음악을 대중에게 전달할 책임을 방송종사자들은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지난 1996년 한국방송공사 라디오2국
프로듀서들이 ‘좋은 노래 발굴모임’을 만든 것은 의미있는
작업이었다. 이들은 한 주간에 발표된 신곡을 함께 듣고 투표를
통해 ‘금주의 좋은 노래’로 선정하고 프로그램을 통해서 자주
방송하였다. 그 결과 자본력과 홍보가 부족해도 좋은 노래를
만들 경우, 문화산업의 제약요인을 넘어서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이 모임은 선곡의 대한
프로듀서의 자율성을 침해할 수도 있다는 다소 애매모호한
이유로 결국 1년을 넘지 못하고 해체되었다.
대중매체에 대한 대중가수들의 의존성 그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문제는 텔레비전이 일부 댄스그룹의 독무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부모들의 소득증가로 구매력이 증대된 10대들은
음반시장의 최대 고객으로 부상하였고,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워크맨과 CDP의 구입을 그리 어렵지 않게 만들었다.
하드웨어에는 당연히 카세트테이프와 CD 등의 소프트웨어가
따르게 마련이다. 10대 고객을 잡기 위한 음반제작사와
유통업자, 그리고 청소년들이 창출해내는 광고시장을 잡기 위한
방송의 공모적 협조체제가 갖추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대량생산, 대량유통되는 음반산업은 이윤 극대화라는
경제적 이해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에 사회적 다수의 취향은
주변화하기 마련이다. 10대의 댄스음악이 전 장르를 통합해버린
1990년대 이후의 대중음악 시장은 특히 기성세대의 취향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는 실정이다. 댄스음악이 모든 음악장르를
포섭해 버린 시장 상황에서 기성세대가 즐기는 트로트, 발라드,
포크음악의 설자리는 점점 좁아졌다. 최근 일부 방송사에서
성인들을 위한 트로트 음악을 편성하고 있기는 하지만,
성인음악의 활성화를 가시적으로 기대하기는 어렵고 다만
댄스음악의 위력을 확인시켜줄 소도구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제 개별 프로그램으로 들어가 보더라도 창조적 실험과 다양한
취향의 반영을 어렵게 하는 여러가지 제약요인들을 발견할 수
있다. 특정한 프로그램에서 방송되는 노래들은 일정정도
범주화되어 있다. 각 프로그램의 성격에 맞는 음악을 방송하는
불문율이 있게 마련이다. 프로듀서들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성인대상 프로그램에서는 트로트가 주류를 이루고,
청소년 프로그램에서는 랩댄스음악과 록음악, 청소년 취향의
발라드 이외의 음악이 방송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장르가
대중의 기호를 결정한다고 볼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은
댄스음악 방송입니다’라는 광고를 하지 않아도 댄스음악을 주로
방송하는 프로그램에 트로트음악을 신청곡으로 보내봐야 방송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결국 대중은 개별 프로그램을 장르로
특화해 인식하게 되고, 그러한 장르구분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따라서 편성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라디오의 황금시대라고 할 수
있는 심야시간대는 방송사를 불문하고 대부분 청소년
프로그램으로 채워져 있어서 기성세대의 음악적 취향은 충족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시간적인 제약 또한 언급을 요하는 부분이다. 기본적으로
대중음악을 방송하는 프로그램의 수는 정해져 있고, 한
프로그램에서 방송되는 노래의 수도 제한되어 있다. 음반이
대중매체를 통해 방송되는 행위는 바로 시간을 얻기 위한 싸움에
다름 아니다. 라디오의 경우, 노래 한 곡을 방송하는 소요되는
시간 3분 20초를 광고주에게 팔면 3백만원 안팎의 광고수익을
올릴 수 있다. 기본적으로 상업 라디오방송의 경우 프로그램의
구성은 판매된 광고시간에 따라 유동적으로 이루어진다. 각
프로그램은 밀도와 흡입력을 높이기 위해서 전체를 이루는 부분
코너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렇게 코너를 세분화함에 따라
프로그램은 시간적 제약을 받는다. 각 코너마다 주어진 시간이
있고 그나마 광고 때문에 실제로 방송되는 시간은 더욱 줄어들기
때문에 다소 긴 노래를 방송하기 어려워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러한 제약은 어느덧 불문율처럼 되어 음악 프로그램의
프로듀서가 4분이 넘는 노래를 방송하기는 여간 망설여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반드시 그러하지는 않겠지만 실험성과 창의성을
담은 다소 긴 노래들은 그만큼 방송될 기회를 잃게 되는 것이다.
시간의 제약과 더불어 그동안 성인가요의 문제점으로
반복적으로 거론되어 온 판에 박힌 가사내용도 생각해 볼 여지를
제공한다. 물론 수용자는 가사보다는 멜로디나 리듬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겠지만, 노래말 텍스트에 국한해서
얘기하자면 천편일률적인 사랑노래들이 성인가요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대중음악의 가사분석이
노래를 듣고 부르는 실천행위를 탈맥락화하는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오늘날 성인가요의 주제를 살펴보면 사랑, 이별, 재회,
눈물 등이 주로 등장하는 ‘사랑타령’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대중음악의 영원한 주제인 사랑은 비단 성인음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댄스, 발라드 등 다른 음악장르에서도
‘사랑타령’은 빈번히 등장하고 있으며, 개인주의가 가속화함에
따라 이러한 경향은 앞으로 더욱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대중음악을 대중의 품으로
대중문화의 생산을 통제하고 있는 자본가들에게 건강한
대중문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들은 관심은 건강한 문화가
아니라 이윤을 가져다주는 문화상품인 것이다. 정치권력 또한
건강한 대중음악문화 창달에 기여하기보다는 정치적 이해에 의해
대중음악을 규제하는 데 앞장 서 왔음을 보았다. 대중음악의
생산자로서 작곡가, 연주자, 가수의 역할도 여전히 제한적이다.
이들 또한 자본이 정한 틀 내에서만 자신들의 음악성을 실험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예외적인 상황이 전혀 없지는 않다. 한
여론조사에서 지난 100년간 우리 사회 최고의 문화상품으로
등장한 ‘서태지’와 같은 걸출한 아티스트의 등장은 기존의
자본의 이해에 따른 생산-유통-소비 네트워크에 일격을 가했다.
그러나 예외는 예외일 따름이다. 서태지 이후 등장한
댄스그룹들이 자본과 방송사의 상업성의 자장에 너무도 쉽게
포섭된 과정은 문화생산자가 이니시어티브를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결국 대중음악을 대중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매개과정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대중매체와 최종 소비자인
수용자의 역할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다. 문화적 텍스트에 대한
수용자의 능동적 해독을 강조하는 일련의 연구들은 그러한
기대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음악적 의미생산에 있어서
소비영역을 중요시하는 연구들은 기존의 문화산업론이
대량생산-대량소비라는 일괴암적 분석에 빠져 있다고 비판하면서
소비가 이루어지는 다양한 사회적 맥락과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나아가, 깨어있는 ‘능동적 수용자’의 저항적 해독이
정치권력과 자본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는 문화산업에 제동을 걸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주고자 하는 것이다.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이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많다. 미디(MIDI)를 이용해
아마추어들도 어렵지 않게 음악을 만들 수 있게 되었으며,
자신이 만든 음악을 MP3 파일을 통해 자유롭게 인터넷에 올리는
일이 가능해졌다. 또한 출시된 음악도 인터넷에 파일로 올려
누구나 쉽게 다운로드 받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수용자가 더
이상 수용자로 머물지 않고 생산자와 유통매개자의 영역까지
넘나들고 있는 상황이 온라인에서 벌어지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한 자본의 대응도 만만치 않다. 국제음반산업연맹은 지난해
서울대 등 국내 26개 대학에 공문을 보내 대학 홈페이지에
떠있는 MP3 파일을 삭제할 것을 요구했는가하면, 무단으로
음악파일을 인터넷에 올리고 있는 개인에 대해서도 저작권법과
손해배상 청구를 운운하면서 위협하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서 강조해야할 점은 수용자의 능동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
인하여 개개인의 문화상품 소비가 의미화작용의 ‘기호학적
민주주의’로 치닫지 않도록 경계해야한다는 것이다. 대중은
파편화되어 있어서 실천적으로 조직하지 못하면 가시적인 성과를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중매체로 하여금 친수용자 환경을
만들도록 끊임없이 압력을 행사하는 일 또한 수용자의 과제이다.
일례로 시민단체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대한 모니터활동이 일정
정도 성과를 내는 것처럼 대중음악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적절히
개입해 들어가는 방안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겠다. 그와 더불어
방송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역할 또한 중요하다. 문화산업이
조작하는 대중의 정서와 취향을 일방적으로 재현할 것이 아니라
대중의 건강한 정서와 기호를 읽어내는 노력과 이를 매개하기
위한 실천적 노력이 따라야 할 것이다.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