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 <노동대학>에 보내는 제언* 여기에 실린 두편의 글은
‘민주노총 노동대학’ 추진사업과 관련하여 민주노총이 본
연구소에 협조를 구하고, 연구위원으로 있는 김상태 씨가
추진팀과 만남과 논의를 하는 과정에서 판단된 문제인식을
편지와 문제제기서의 형식으로 민주노총에 전달한 글이다.
연구소는 민주노총의 요청에 따라 철학과 정치경제학의
강의기획안을 작성하여 지원한 바 있으나, 강의에는 공식적으로
결합하고 있지 않다. 1기 노동대학 입학식이 지난 11월 4일
있었다. 노동자교육을 고민하고 있는 전국의 활동가들에게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되기 위해 싣게 되었다.
민주노총 <노동대학>에 보내는 제언
제언
현 兄에게
민주노총 노동대학 기획 간담회에 관한 소견
서언
현 형! 노동대학 기획에 대한 설명을 듣고서 나는 기획주체의 좀
더 구체적인 입장과 철학이 제시되어야 한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는가에 대한 현 동지의
대답을 들었었습니다. 나는 그 대답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적당한 방식은 입장과 철학에 대한
사적 의견이라는 형태로라도 의견들이 쌓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이 글은 한 개인의 사견으로서 기획
주체 중 하나인 현 동지에게 제출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 점 충분히 감안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른바 입장과 철학이라는 것
사실은 노동대학이라는 이름 자체가 어렵습니다. 대학의 기원이
무엇이었건 간에 현재의 대학은 결국 부르주아지와 자본주의
체계 내적 존재로서, 바로 거기에 복무하는, 최소한 거기에
포섭되어 있는 존재로서 그 형식과 내용 및 여러 효과와 결과를
함께 내포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운동진영은 최선의 효과를 위해
자본주의적으로 가장 성공한 모델을 선택하곤 합니다. 전술적인
의미에서 당연히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이는 조금만
어긋나면 모든 곳으로부터 거꾸로 덜미를 잡히게 됩니다 제대로
된 노동자 교육을 위해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수행해보려는
노력이 결국 우리 체제 내에서 가장 그럴 듯해 보이는 대학이란
이름으로 모아진다는 것이 이런 예에 속하는 것은 아닐까요?
더구나, 이미 이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현재의 대학이 보이는
관료성, 학벌과 졸업증서라는 전형적인 형식성, 틀에 박힌 타성,
대학이란 독립적 조직과 그것을 관장하거나 그것에 관여하는
대중조직이나 정치조직간의 긴장과 갈등, 이 모두가 나는 한번에
떠오릅니다. 문제는 그런 모순들이 당초 한국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그대로 반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민주노총이라는
사회적 지명도가 있는 조직의 그 지명도에 대한 부담이
대학이라는, 눈에 가장 쉽게 띠는 이름을 선택했다는 혐의도
같은 선상에 있습니다.
나는 이 이야기들이 결코 추상적인 원칙론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글쟁이라는 성격상 젊은 대학생이나 대학원생들을
많이 만나게 되고 여기저기서 세미나 지도를 하다보면 이 모든
것은 당장 손톱 밑에 박히는 가시처럼 아프게 다가옵니다. 그
복잡하고 괴상한 심리적 과정들은 모두가 앞서 말한 자본주의적
모순에서 비롯합니다. 우수한 인력이 선택되고 또 배출된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평가 기준이 아닙니다. 그렇게 따지면
서울대가 제일이겠지만, 그 속의 모든 체제와 사람들이 구석구석
썩어가며 고통받는 것을 보면 이야기는 전혀 다르지요.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일을, 무슨 생각을 더 해야 한다는 것일까요?
여기서는 단 한가지 예만 들기로 하겠습니다.
진정으로 고민해야 될 것 중의 하나는 강사와 교수 그리고
그들이 활동하는 형태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예상되는 문제의
하나는 노동대학에 초빙된 강사와 교수가 자기가 할 수 있는
주제 중 하나를 복강처럼 강의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동대학은 달라야 합니다. 이론을 강의하든 함께 토론을
하든 강사나 교수는 노동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진정한 의미의
강의와 연구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상
노동대학에서만 가능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대학은 우선
교수의 삶이나 가치관이 그가 강의하고 연구하는 학문내용과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학생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대학에서 사적으로 뛰어난 교수는 존재하지만
함께 연구하는 교수는 드뭅니다. 교수 본인이 아무리 진지하고
싶어도 현재의 대학체계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노동대학은
가르치고 배우고 연구하는 형태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지양된
해방된 대안을 창출할 것을 요청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노동대학에 참가하거나
초빙된 강사나 교수 개인의 신념만을 기다려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창조적 가능성은 수많은 조건이 구비된 분위기를 필요로
합니다. 예컨대 바람직하게 성장하는 노동운동 자체도 이미 한
조건이 됩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시작하는 단계에 있어 주체들이 가지는 배려와 의지일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는 효율적인 대학 ― 그 효율이 아무리 좋은 의미라
해도 ― 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하고 실천하는 전혀 다른
대안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고민을 수사적이고 비분강개적인, 또 화려한 이상향의
표현만으로 대신할 순 없습니다. 또 그래서도 안됩니다. 가령 한
개의 그럴듯한 문건으로 정리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어떻게 표현되든 그와 같이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은 충분히
숙고되어야 하는 것이며 그런 고민은 설혹 말하지 않는다 해도
절로 스며나오게 될 것입니다. 또 이는 여기서 그치는 것만도
아닙니다. 이런 근본적 태도는 아마도 우리의 운동현실 모든
곳에 깃들어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교육과정에 대한 몇가지 제언
노동대학의 교육내용은 당면한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여기서는 현 동지 등과 그때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당시 경제 부분에 대해 이야기했으므로 그 부분에 대해
한정해서 말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논의 자체는 교육내용 전반에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1) 전체적인 밑그림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각 부분의 내용들이 서로 다른 강사나 교수에 의해 임의적으로
채워지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교수나 강사는 전체 그림을
이해하고 이전의 교육들이 어떻게 진행되고 또 어떻게 이어져야
하는지 전체 문제제기들 중에 이전 강의로부터 넘어온 건
무엇이고 현재 강의에서 담보되어야 하는 게 어떤 것이지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이해서 요구되는 것은 우선 기획팀의
가안으로서 밑그림이 제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1강 노동의 역사에서 무엇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가’가 2강
이하 상이한 다른 강의와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예측해보는 것입니다. 가령 2)자본주의 바로 알기는
인류역사에서 자본주의가 얼마나 이상한 사회인가를 피부로
느끼는 게 매우 중요한데 1강은 그것을 가능케 합니다. 또 2강은
학생들이 ‘그럼 현대자본주의는 뭐가 다르냐’ ‘ 한국의
특수성은 뭐냐’ ‘대안은 또 어떤 것이냐’고 물었을 때 강사는
대략적인 개괄만 정리하고 자세한 것은 3강의 신자유주의와
관련된 두 장과 ‘노동의 미래를 찾아서’에서 구체적으로
공부하자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체험적으로 느끼는 바인데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강의는 잡담과
공상에서 끝나버리곤 합니다. 마찬가지로 3강은 2강의 이 논의를
담보할 수 있도록 해야하는 것이겠지요. 이러한 밑그림이 없으면
앞서 말했듯 강의는 일반대학의 특강에 불과합니다.
(2) 4개 파트의 강사는 다른 인물로 하되, 특강이나 보강 등이
아니면 각 파트당 한 사람에게 위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경제학에 관해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얘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매 시간마다 강의자가 바뀌면 매우 혼돈스럽게 될
것입니다. 그밖에 여러가지 이유도 있지만 어쨌든 한 파트의
강의는 한 강사의 책임하에 이루어지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3) 사회주의권 곧 소련과 동구가 붕괴한 이후 그 과정이나 의미
그리고 대안에 대해서 이야기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사안들은 대답될 수 없거나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틀에
박힌 원칙론을 들먹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젖혀두어서는 안됩니다. 최소한 논의된 내용들을 충분히
소개하고 강사의 입장정도는 제출될 수 있어야 합니다.
노동자의 일상적 삶, 여타의 내용들
설명회에서 삐삐아줌마 사건을 얘기했었습니다. 신병현
선생님께서는 투쟁현장에서 노동자의 모습과 가정이나 일상적
삶에서의 노동자의 모습에서 괴리를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정말로 중요합니다. 한명의 노동자로서든 활동가로서든
각 개인은 생존해야하고 일상적 관계를 나누어야 하며 가정을
꾸려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시점에서 실제로는 이중적
분열을 체험하며 절망들을 덮어두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인간의 근본적인 이기심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남자와 여자는 자연적으로 규정된 역할과 능력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은 뿌리 깊은 계급이데올로기에 불과합니다.
아닌게 아니라 이 이데올로기의 형성에 대해서 많은 비판이 있어
왔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너무 이론적이고 현실로부터 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인간성과 그것이 제대로 실현할 수
있는 현실적 조건을 마음속에 그려낼 수 있어야 합니다. 또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 자신의 일상을 달리 만들어 가야하고
무엇보다 그 속에서 행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활동가의 진정한 능력중의 하나는 삶과 활동을 새롭게
창출해내는 것 자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명회에서
언급되었던 노동자문화에 대한 강조는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는 결코 난해한 문화이론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노동대학에서 새롭게 연구되고 창출되어야 하는 내용이며 나아가
교육내용에서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것입니다. 가령 신념과
소신을 지닌 활동가를 언급했었는데 그러기 위해서도 이 부분은
필수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2000. 7. 3.)
총론을 위하여 2000. 8. 30. 민주노총 노동대학 8차 집행위에
제출.
이 소고는 민주노총 노동대학의 의미와 목표, 그 위상과 이것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들에 대한 총체적 상을 모색하는 단상입니다.
이것이 필요한 이유는 교육연구팀의 작업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전제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간의 집행위원회
자료들은 이 점에 대해 거의 정리한 바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연구팀의 기조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심각한 장애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연구팀의 한
단상으로 검토되기를 소망합니다.
1. 무엇이 요구되고 있는가?
‘역사, 정치경제학 등 노동대학 교육과정에 따른 체계적인
학습을 통해 노동자 의식으로 단련된 민주노조운동의 미래를
열어갈 새일꾼을 양성한다.’ ‘그리고 노동조합 이론 및 실무에
관한 기본교육은 민주노총 노동대학에서가 아니라, 민주노총
산하 조직인 연맹, 민주노총 지역본부에서 담보해나가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하 조직에서 담보되지 못할 경우는
이후 민주노총에서 노동대학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기초교육과정을 개설해야 한다.’
이것은 3차 집행위원회 회의자료에 나온 노동대학 목표와
특징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후로도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이
규정들은 노동대학 준비팀이 노동대학에 대해서 어떤 의미와
상을 부여하고 있는지 개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분명히 이는
연맹이나 지역, 단위노조의 교육사업과는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먼저 고민해야 할 것은 이 다른 성격을 위하여
실제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일 것이다.
1)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공교육기관이나 대학 다른 한편
지역이나 단위노조에서 수행하는 교육사업 집행단위나 구조와
다른 모습이어야 한다. ‘노동자 의식으로 단련된 새 일꾼’을
양성하는 새로운 교육기관 그 자체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는
전혀 새롭게 창조되어야 하는 무엇이다.
2) 성격상 이는 대학을 총체적으로 관장하는 집행팀의 강력한
조직을 요구한다. 이름이 무엇으로 불리든 이 조직은 전
학사행정과 교육과정을 꿰고 있어야 한다. 이것도 노동대학
자체와 마찬가지로 새롭게 창출되어야 하는 것이다.
3) 이런 성격의 대학은 교육과정과 강의전반에 걸친 유기적
통일성과 연관성을 담보해야 한다. 그것이 되지 않으면 이는
기존의 단기교육이 좀 더 확장된 것에 다름이 아니다.
4) 노동대학은 지식이나 기술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다. 학생의
삶과 세계관의 근원에서 차라리 ‘인간적 승부’라고 부를만한
비적대적 투쟁을 수행하는 곳이다. 이는 어떤 교육으로도
그것만으로는 단번에 획득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교육이
진행되는 일체의 분위기와 조건이 이런 투쟁을 느끼게 해야
한다. 성과나 결과가 어떠하건 노동대학으로서는 단지 그렇게
해야 할 뿐이며, 이것이 삶과 생각 속에 그냥 스며들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5) 참으로 쉽고도 현실적이며 수준 높으면서도 본질적인 내용을
포괄해낼 수 있는 교육방법을 창출해야 한다.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이 목표는 그러나 그것을 실제로 해낼 수 있는가에
중점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목표가 분명해야 하며
어떻게든 그리고 접근해 가려고 애를 쓰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한마디로 말해서 체제내부에서 체제를 넘어선 모델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21세기 한국노동운동이 처한
절대절명의 명제이다. 열정과 신념과 확신은 잦아들고, 삶은
피곤하며, 대안과 전망이 불투명한 이 시점에서 참으로 필요한
것은 각자가 처한 그 자리로부터 대안을 스스로 창출하는
것이다.
노동자 개개인의 삶과 가정의 건사, 활동가와 간부들의 자기영역
내에서 대안의 창출, 기타 예술인, 선생님 등 모두에게 바로
이점이 요구되고 있다. 어떤 것도 당위와 도덕으로 달성될 수는
없다.
운동이 현재의 삶을 풍요롭고 행복하며 살만하게 하고 있지
않다면 그걸 왜 해야 하는가?
노동대학과 그 준비팀도 이와 똑같은 조건에 처야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따라서 대안적 모델로서 노동대학의 총체적 상과
총론은 그 추상성에도 불구하고 가장 선두에서 기다리고 있는
과제이다.
2. 가장 쉬운 것부터 - 노동대학의 교육내용과 과정의 모색
1) 우리는 대체로 고등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아왔다. 그래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배웠는가?
교육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교사가 그것을 학생에게 알려주는
것이라는 통상적 견해는 현실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거의 완전한
헛소리에 불과했다.
시험과 성적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단순한 지적내용을 선생님에게
배우지 않았다. 스스로가 벼락치기를 하여 공부했을 뿐이다.
학교수업을 잘 들으면 성적이 좋아진다는 얘기는 예나 지금이나
송두리째 거짓말이다. 그렇다면 사는 방법과 지혜와 인생관을
배웠는가? 물론 그것은 더 어림없는 얘기다. 우리는 우리의
체험을 통해서 이것을 안다. 그럼 도대체 무엇을 배웠는가? 전혀
없다는 것인가? 아니다 있다.
그것은 선생님들과 학교조직이라는 대상들을 체험하고
관찰했다는 사실이다. 그게 좋은 것이었는지 나쁜 것이었는지는
지금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정말로 배운 것은 그
대상들을 보고 체험했다는 사실이다. 어린 학생들이 그 관찰과
체험 속에서 알아내는 것은 숱한 형태의 생존전략이었다.
모범생이 될 것인가, 마구 개길 것인가, 공부를 잘 하는 게
좋은가 친구들에게 인기있는 것이 좋은가... 그게 정말로 우리가
배운 것이다. 이것은 교육에 대해서 근본적인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교사가 교육을 하다는 것은 무엇보다 자기자신의 삶을
학생들에게 구경시켜주고 체험케 하는 데 있다. 진정한 교사가
위대한 이유는 시선의 지옥이라 불리는 타자의 눈길들 앞에서
자기 삶을 기꺼이 벗어내 주는데 있다. 따라서 몸과 마음과 삶이
교사가 아닌자는 절대로 교사일수 없다. 그가 바로 사이비
교사이다. 교육이 신성하다고 할 때 그 신성함은 이 내어줌에
있다.
‘보시오, 나는 이렇게 살고 이렇게 말하고 이런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내 인생을 걸고 옳다고 믿습니다. 이런
구경거리가 당신의 삶에 하나의 자료이며 참고이며 체험으로서
유용하길 바랄 뿐입니다. 물론 선택의 몫은 당신의
것입니다.’
따라서 교육이야말로 집요한 침묵이다. 그렇게 많이 말하고
행동하고 때리고 욕하고 싸우는 참으로 시끄러운 진짜 침묵이다.
정녕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한편 노동대학에서의 교사상은 이와 다른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월급과 조직으로 교사를 때려잡는 자본주의 체제가
잃어버린 것이다.
이상적으로 말해서 노동대학의 강사는 땀을 뻘뻘 흘리며
떠들면서도 이 집요한 침묵을 전 강의와 토론과정에서
수행해내야 한다. ‘인간적 승부’라 부를만한 비적대적
투쟁이라는 바로 이 침묵을 매개로 한 삶 자체의 투쟁이다.
그것을 수행해 낼 수 있는 교사상이 어떠해야 하는가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노동대학이 자본주의 사회의 일반
교육기관과 달라야 한다고 했을 때, 이러한 교사상을 피부로
느끼고 모색하는 것이 관건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현실적 조건이 여기에 부흥하기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노동대학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교사들을 발굴하고 그런 교사들을 만들어내고 그런 교사가
되도록 올바르게 강제하고 이러한 모델이 하나의 분위기와
그럼으로 우리 운동에 울려퍼지게 해야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노동대학으로부터 도대체 무엇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
2) 다음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강의와 토론의 방법이다. ‘쉽고
현실적이며 수준 높으면서도 본질적인 강의’는 어떻게
가능한가?
첫째 이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모델이다. 둘째 그것을 가능케
하려는 하는 교사상이 바로 1)의 교사상이다. 수백시간을
고뇌해야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한시간을 유쾌하게, 모든
삶의 눈을 반짝거리게 하며 떠들 수 있는 것이다. 시끄럽고
집요한 침묵의 전형적인 예다.
학생들은 듣는 순간에는 몰라도 이 침묵의 비밀을 영원히 느끼게
된다. 우리의 기억에 아름답게 남아있는 어린시절이 선생들이란
바로 이 비밀의 인지 외에 다름 아니었다.
이것도 하나의 이상이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이상이다. 보다
탤런트, 지식인 또는 지식 탤런트라고 할 수 있는 ‘김용욱’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쉽기 위해서 수준 높고 본질적이며
현실적인 것을 모두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것은 이념적 내용의
차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 태도, 그 헛소리, 그 교만한,
그 얄팍함, 그 상업성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망가진
교육과정을 되찾는 것도 다름 아닌 노동대학만의 몫이다. 다시
한번 성과나 결과에 상관없이 이 이상을 위해 끝없이 고민하고
접근해 갈 뿐이다.
토론과정도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 알면서 잘 모르는 게 있다.
말과 대화라는 것이 얼마나 은밀하면서도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논리는 욕망과 불순한 의지에 종속되기 일수이며 더욱 나쁜 것은
말하는 주체가 스스로 그것을 모르기 쉽다는 것이다. 수많은
심리적 비틀림들이 얽히는 토론의 함정에서 그것을 제대로
건사하는 것은 어지간한 훈련과 기술, 인품을 훌쩍 뛰어넘는다.
한시간에 머무르는 토론을 위해 교사의 수백시간에 걸친 고뇌가
뒤따르기는 마찬가지이며 역시 틀림없는 시끄러운 침묵의 한
예이다.
3. 근본주의
민주노총의 대중조직이다. 견해의 차이와 모든 정차가 함께
공존할 수 있다. 그러나 최소한 공유하는 것이 있다. 노동대학의
학생들이 극복대안을 단지 모색하거나 주어 듣는 곳이 아니다.
그곳은 학생들이 삶을 뿌리째 이해하는 곳이다. 어떤
과목에서든지 자본주의 체제의 극복이 명백하게 제시되어야
하며, 그것은 교육전체의 지반이자 지붕이다.
어쩌면 이점은 충분히 공유되었으나, 그 방법이 문제라고 말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소비에트와 동구는 무너졌고 전위당과
혁명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끔직한 피와 살육과 착취로
얼룩졌다고 하는 스탈린주의의 악몽과 작위와 억압으로 생생한
볼세비즘의 기억도 아직 역력하다. 자본의 기세등등 하고 우리는
갑자기 답을 모르는 수험생처럼 되었다.
귀가 얇아지고 사람살이란 예나 지금이나 여기나 저기나 다
똑같은 거라는 암시들에 시달린다.
그러나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이 배웠는가, 생태와 환경, 그람시와
알튀세르, 문화와 사회심리,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린 맑스나
레닌보다 백배도 넘게 알고 있다.
우리는 절망속에서 풍부함을 배워야 할 이유가 있다. 세계를
변화시킨다는 것이 더 끈질기고 미세하고 일상적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러니 뭔가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 그 한가운데는
체제의 성격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가 정말로 아름답고 평화롭게
생각하는 것들은 그 체제가 다 뺏어갔다. 돈만 있으면 땅도 안
밟고 살 수 있는 이 체제, 대문밖만 나가면 살기 어리고 바쁜
시선속에 섞여 허겁지겁 쫓기는 이유, 질투, 열등감, 구토 그
모두가 이 체제말고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이 별 수 없는 인간의 조건이라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인식의 결론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피로하고 꺾여진 마음의
결론이다.
따라서 우리는 샅샅이 살펴야 한다. 왜 노동자가, 노동대학의
학생이 이 단순한 근본주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그 일상의
삶과 그 일상의 고뇌와 그 일상의 주입된 이데올로기의 모든
부분에서 검토해 들어가 짚은 곳으로부터 그것을 들추어내어 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내어야 한다. 되건 안되건 노동대학이
하지 않는다면 그 누가 할 수 있는 것인지를 우리는 전혀 알 수
없게 된다.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면 그저 할 수밖에 없다.
노동대학은 이 원론적인 근본중의에서 한발자국도 뒤로 물러갈
수 없다.
4. 조직
그러므로 노동대학은 만들어놓으면 굴러가는 타성일 수가 없다.
당연히 자본주의 사회의 다른 대학처럼 관료적 조직일 수도
없다. 결국 노동대학은 이 조직을 처음부터 끝까지 담보하는
어떤 주체, 어떤 위원회를 항시적으로 요구한다. 실은 여기가
시작이다. 그것은 지금 준비팀이라 불릴 수도 있다. 어떤 일도
올바르게 조직된 사람들로부터 출발하며 올바르게 조직된
두사람은 2배가 아니라 20배의 힘으로 확장되고 그게 세사람이며
삼십배가 아니라 300배의 증폭된다. 하나마나한 얘기다.
올바르게 조직된 사람들을 위해서 운동은 모든 신명을
바쳐왔으며 고뇌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대학은 그 이름만으로 이 원론을 다시 출발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도 현실적인 문제이다. 당장 인력의 부족에
의한 시달림부터 역량의 부재로 골머리 싸매고 있지 않은가,
나아가 앞의 제 사안들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필요조건이다. 교사와 교육내용의 상, 근본주의, 비적대적
투쟁의 분위기, 이 모든 것을 개별강사가 창출하다는 것은
애시당초 말이 안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조직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운동에 헌신하고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한 학자나 교수,
교육전문가, 그 밖의 지식의 그룹을 생각할 수 있다. 왜냐면
이렇지 않고서는 기초적인 교과과정이 내용조차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느 누가 함부로 역사, 철학, 정치경제학을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실천의 문제라는 말을 다시 곱씹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학자나 지식인이 왜 바보인 줄 알고 있다.
지식은 답을 내는 필요조건이 아니다. 지금 틀에 박힌 얘기를
하는게 아니다. 속된 말로 정치는 사람장사라고 한다. 그것은
활동 속에 깊고 폭넓게 체험된 지혜를 강조하는 말이다.
노동대학을 관장할 조직의 구성원에게 먼저 요구되는 것이
지혜의 능력이다. 나머지는?
나머지는 지금부터 만들어가야 한다. 필요하다면 필요한만큼
공부해야 된다. 그 필요한 공부를 위해 대학을 다시 다니거나
석사과정을 밟아야 하는 걸까? 절대 그렇지 않다. 지식도 하나의
기능이다. 체조선수가 소뇌와 대뇌피질이 운동력이 커진
것이라면 지식은 전두엽이 커진 것이다. 전문성은 평생
요구되지만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기능은 필요한 만큼 하는
대로 획득된다. 비록 프로기사가 되려면 십수년을 해도 안되지만
바둑계를 움직이고 먹여 살리는 건 실제로 프로들이 아닌 건
당연한 사실일 것이다.
그러므로 난감을 느끼는 것은 지식의 부재가 아니라 의지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다. 핵심은 노동대학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분명히 하는데 있다. 그게 분명하다면 이 조직은 무조건
건설되어야 한다. 적어도 목표 하나만은 분명해야 한다.
그리하여 노동대학의 운영은 자본가 체제를 확실히 넘어선다.
위원회의 상시적인 고민, 생동감 있고 속도 있으며 민주적인
행정의 운영, 정치와 실무의 진정한 통일이 여기에 있다.
5. 맺음말
그밖에도 고민해야 할 여러 가지 규정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노동대학은 하나의 기능에 멈춰서는 안된다. 그것은 모든
측면에서 대안이어야 한다. 이것이 아니면 교과과정 커리큘럼
내용 하나도 정립될 수 없다. 총론의 필요성은 절대적이다.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