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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좌파활동 소개

현장에서 미래를  제60호
김중근

국/제/노/동

호주 좌파활동 소개


김 중 근
호주민사당 활동가






이 글은 간략한 소개를 위한 글이다. 어떤 나라의 전체적인 정치지형은 엄청난 역사적 복잡성을 내포하며, 따라서 어떤 하나의 글로 적절히 다루기는 힘들이다. 그런데 좌파를 포함한 대부분의 남한 사람들에게 호주의 역사와 사회에 대한 상대적으로 빈약한 지식으로 인해 생기는 복합적인 어려움도 있다.
그러므로 이 글의 분석은 주로 호주 좌파정치의 일반적 궤적에 초점을 맞출 것이며, 유감스럽게도 수많은 세부사항이나 뉘앙스, 내적 모순을 다루지는 못한다.


호주 자본주의의 성격
호주는 20세기초 아제국주의 열강의 지위를 점하게 되었다. 이는 기초생산의 영역에서 높은 생산력과 선진적 기술에 기반한 대량생산의 발전에 의해 이루어졌다. 오늘날, 호주의 광업 및 농업독점체들은 1차 산물, 특히 철광석, 석탄, 금, 니켈, 납, 아연, 다이아몬드, 우라늄, 밀, 소고기, 양고기 및 양모 등의 세계시장에서 상당한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 독점체들이 광업, 제련, 광물처리, 지질탐사, 농업생산 등에서 수많은 기술특허를 보유하고 통제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호주의 초국적 광업독점체는 전세계적으로 경쟁력으로 가지고 운영되고 있다.
따라서 호주 독점자본은 반식민지에 대한 초과착취와 불평등교환의 메카니즘을 통해 상상한 초과이윤을 뽑아낼 수 있다. 이런 초과이윤은 국제화된 금융 및 기타 서비스부문을 개발하는 데 이용되어 왔다. 최근 몇십년간, 초과이윤으로 호주의 대자본은 수많은 제조업시장에서도 전세계적 경쟁력(기술적-양적인 면 모두에서)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호주의 제국주의적 역할과 관련시켜 보자면 부차적이며, 호주의 제조업은 남태평양과 동남아시아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

호주 자본주의의 힘을 보여주는 적나라한 사례는 겨우 1,800만이라는 적은 인구와 9백만의 노동력에도 불구하고 1인당 GDP 1만5천불 이상으로 20대 경제강국의 대열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호주의 제국주의적 국가가 남태평양과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능동적 개입주의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이다. 이는 여러 독재정권에 대한 적극적 후원,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파푸아 뉴기니 군에 대한 군사훈련, 중국, 한국, 말레이, 베트남에 대한 직접적 군사침공의 역사 등에서 드러난다.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1965년 미국이 베트남에 대한 군사개입을 하도록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바로 호주정부였다. 게다가 호주군은 양대 제국주의전쟁의 주요 전투에도 참여한 바 있다.


노동귀족
제국주의 열강으로 호주의 지배계급은 1백년 이상 안정적인 노동귀족(평생고용과 임금-노동조건 상의 혜택을 보장받는 상대적으로 특권적인 상층 노동자)과 개량주의 이데올로기를 유지해 올 수 있었다. 그 역사적 배경은 19세기 전기간 동안 노동계급의 힘과 지위 상에서 아주 유리한 조건이었다: 1800년대 초중반에서 1860~90년의 장기호황으로 이어진 노동력 부족. 이런 특이한 호조건 때문에 호주 노동자들은 민주적 권리, 노동조건과 생활수준 상의 상당한 혜택을 상대적으로 쉽게 쟁취할 수 있었다.

1856년 빅토리아 지역의 석공들은 세계 최초로 8시간 노동제를 쟁취한 노동자들이었다. 이에 대해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렇게 썼다,

“8시간 노동제를 쟁취하는 수단으로서 프롤레타리아 휴일을 도입한다는 기발한 생각은 최초에 호주에서 나왔다. 1856년에 그 곳의 노동자들은 완벽한 1일간 작업중단을 선언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날은 8시간 노동제를 위한 시위로 집회와 여흥을 위해 보낸 것이었다. 4월 21일이 이 휴일로 지정되었다. 처음에 호주 노동자들은 그런 휴일을 1856년 한번만 제정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행사가 호주 프롤레타리아 대중들에게 큰 인상을 남기자 매년 행사를 갖기로 결정했다. … 프롤레타리아 휴일이라는 생각은 아주 급속하게 받아들여졌고 곧 호주에서 다른 나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 가장 먼저 호주 노동자들의 모범을 따랐던 것은 미국 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은 1886년 5월 1일을 전면적 파업일로 잡았다.”

더 나아가 빅토리아 노동자들은 1856년 비밀투표권을, 1857년에는 남성 보통선거권을 쟁취했다. 이와 같은 급진민주주의적 투쟁과 노동자투쟁의 성공적 결합은 호주역사의 초기부터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하고 뿌리깊은 환상을 심어주었다. 수많은 노동자들, 특히 상당수의 노동귀족은 혁명에 의하지 않고 상당한 개선을 이룰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더욱이, 제한된 숫자임에도 단결된 행동에서 자신을 힘을 발견하면서 그들은 엘리트주의적 집단주의 의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 결과, 자본가들은 두가지 전술로 대응했다. 먼저, 계급적 역관계의 균형 때문에 그들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따라잡고 높은 생산성을 유지하기 위해 급속한 기술발전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잉여수취의 상대적(절대적이 아닌) 증가가 자본주의의 일반적 특징이지만, 호주에서는 광업과 농업이라는 틈새산업(그 당시 대부분의 다른 나라에서는 후진적이었다)에서 자본주의가 훨씬 더 빨리, 더 일찍 발전했다. 이로 인해 자본가들은 개량주의의 물적 토대를 더욱 안정화시킬 수 있었다.
둘째, 자본가들은 계급적 역관계를 자본측에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서 이민을 이용했다. 특히, 그들은 비백인계 노동자들(중국, 인도, 남태평양)을 수입하여 저임금을 지불하고, 그들이 특권적 노동시장을 보호하려는 백인 노동자들의 공격대상이 되게 하였다. 그리하여 자본가들은 그 시기 식민-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 뿌리깊게 주입된 인종주의를 최대한 이용하여, 백인 노동자들의 분노를 쉽게 눈에 뜨이는 유색 노동자들에게 향하게 하는 한편, 전체적인 임금수준을 하락시키려고 하였다. 인종주의는 백인 노동자들이 유색 이민노동자들을 계속 종속적 상태로 묶어두고, 그리하여 그들의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을 영구화하는 데 일조하는 악영향을 남겼다. 1870년대부터 노동운동은 호주 거주지역에서 비백인계를 배제하는 반동적 캠페인을 전개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노동조합들은 새로 도착한 백인 이주노동자들에게 접근하여 그들을 조직하였다.

따라서 , 19세기 말 노동운동에서 특징적인 형태의 의식은 독특한 유형의 급진민주주의적 민족주의였다(이는 다른 백인계 식민국가들에서도 발견된다). 이는 노동자중심적 계급의식,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 그리고 노동시장과 자본주의산업의 민족적-인종적 보호 등이 결합된 의식이었다. 이런 이데올로기적 결합이 절정에 이른 1890년대에 호주 노동당(ALP, Australian Labor Party)이 결성되었다. 1901년 노동당은 호주의 6개 조계를 단일한 연방제 부르주아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 중요한 지지적 세력이었다. 노동당 강령의 핵심은 백인계 호주(White Australia)의 유지였으며, 이민제한법(백호주의정책)은 노동당이 주도하여 새 연방의회에서 통과시킨 최초의 법률들 중의 하나였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이 급진민주주의적(-인종적) 민족주의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걸쳐 자리잡은 호주의 국가전통과 전통적인 민중문화의 핵심이 되었다는 점이다. 호주의 전통적 시나 노래, 유명한 초기 그림의 대부분은 모두 이런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이런 저런 형태로 표현하고 찬양하고 있다. 본질적으로, 이런 정치적 경향은 호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자유주의적 경향을 이루었으며, 조직적으로는 호주 노동당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이런 급진민주주의적 민족주의의 전통은 모순이 없지 않았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제한적임에도 불구하고, 광범한 노동대중 사이에서 호주가 평등주의적이고 관대한 사회라는 높은 기대수준을 심어놓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국제적 상황, 내부위기, 새로운 노동자 세대의 출현 등의 영향으로 이런 기대는 실제로 노동중심적 민족주의에 깔려있는 편협한 한계나 전제와 충돌했으며, 급진적 반자본주의 정치적 충돌을 야기했다. 이는 양차대전, 러시아혁명, 전세계적 대공황으로 이런 상황이 초래되었다. 이 격정의 시기에, 생디칼리스트 조직인 세계의 산업노동자(IWW, 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가 호주의 노동자들에게 진정한 국제주의(즉, 백인 노동자를 뛰어넘는 국제주의)를 소개했으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1920년, 러시아혁명의 승리와 IWW식 아나코-생디칼리즘의 궁극적 실패로 일군의 혁명가들이 다시 모여 호주공산당(CPA, Communist Party of Australia)을 결성했다.

공산당은 노동계급 사이에서 노동중심적 민족주의에 심각하게 도전하는 최초의 세력이었다. 1930년대 대공황기 실업노동자운동에 대한 개입과정에서 공산당은 광범한 영향력을 획득하였다. 그리고 실업자대중이 2차대전 전쟁경제를 준비하려는 자본주의의 시도로 재고용되면서, 공산당의 영향은 강화되었다. 그들은 곧 전략적 산업별 노조에서 지도부를 장악했던 노동당에게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이 시기 공산당은 중국이나 스페인과 국제연대를 유지했으며, 호주 노동자들 사이에서 보다 항구적인 국제주의 의식을 뿌리내리게 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PA는 다른 나라의 공산당들과 마찬가지로 스탈린주의화 되어 정치적으로 퇴보하였으며, 심지어 노동중심적 민족주의를 자신의 방식대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후퇴와 나란히, 전후 새로운 국제적 상황은 새로운 급진화의 동력을 야기했다.


1960년대 후반의 대중적 급진화
2차대전후, 아시아와 아프리카 전역에서 반식민주의 혁명의 폭발은 국제적 역관계에서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이데올로기적 도전을 받아야 했다. 즉 오직 그들만이, 백인 국가들만이 자치할 역량이 있으며, 따라서 다른 열등한 민족을 지배할 권리가 있다는 논리가 파괴되었다. 인종주의는 아메리카의 자본주의적 노예제에 의해 만들어져 식민주의에 의해 영구화되었었다. 보다 중요하게, 이 이데올로기는 제국주의 국가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자국지상주의-민족주의 의식을 강화하는 데 이용되어 왔었다. 따라서 식민지 민중들의 국제적 반격은 1950년대와 60년대 제국주의의 물질적-이데올로기적 기초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은 제국주의 국가에서 반항적 신세대 청년들의 등장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전후 장기호황이라는 엄청나게 풍요로운 상황에서, 이 젊은이들은 그들의 부모가 세운 지평을 뛰어넘어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문제들에 대해 반항할 수 있었다. 처음에 이들은 반식민주의 혁명들에 동조․연대하였으며, 자기 나라의 인종주의 문제에 대해 각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여성해방, 성적 표현의 자유, 환경보호 등 다른 문제들로 나아갔다. 이런 전체적 과정은 1960년대말과 1970년초 청년들의 대중적 급진화에서 절정에 이르렀으며, 그 주된 동력은 베트남에 대한 제국주의적 개입에 대한 반대투쟁이었다.

다른 많은 선진자본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폭넓고 근원적이고 극적인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격변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오늘날의 호주를 이해할 수 없다. 그로 인해 많은 나라에서 사회적, 계급적 대립과 역관계의 균형이 극적으로 변화했다. 오늘날, 미국에서, 그리고 정도는 덜하지만, 호주에서 부르주아적 논평가든 좌파 논평가든 베트남 신드롬의 지속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베트남 신드롬은 과도한 제국주의적 개입에 대한 대중적 제어장치로 기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파열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진행되고 표현되었다. 정치적 급진화 만이 아니라 반문화와 대안적 생활양식 등으로. 그리고 그러한 대중적 불만의 비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광범위한 여러 조직들로 표현되는 모든 종류의 상충적인 이데올로기와 경향, 세계관들이 다 날아갔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호주와 미국에서, 대중적 문화에서 60년대 후반의 지속적 영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좌파경향들 내에서도 이 시대에 대해 상이한 해석이 존재한다.
사회주의자들 외에서, 자유주의 좌파나 급진민주주의 세력들도 급진화된 학생과 청년 노동자 대중들에게 영향을 주려고 경쟁했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를 문제삼아 사람들을 끌어모았으며, 사회주의가 새롭게 등장하는 대중적 사회운동, 예를 들어 환경, 여성, 반인종주의 및 동성애 운동의 요구에 답할 능력이 객관적으로 없다고 비난하였다. 동구권에서 인권침해와 민주주의 부재 외에도, 자유주의 좌파는 산업화의 폐해, 가부장제, 성적 보수주의, 관료주의, 문화적 정체, 연령적 위계제 등을 지적했다. 이런 논리는 특히 1968년 프라하 봄이 진압되면서 설득력을 얻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스탈린주의만이 아니라 사회주의 전체에 대해 그런 비판을 했다는 점이다. 자유주의 좌파에 의하면 해결책은 사회주의혁명이 아니라 급진적 민주화와 문화변혁이다. 물론, 그런 해결책의 계급적 내용을 전혀 밝히지 않았고, 자본주의 고수라는 자신의 입장을 모든 종류의 급진적 수사로 위장했다.
간단히 말해, 대중적 급진화 그 자체는 날카로운 계급적대를 내포했다. 그 자체로서 격변은 대중적 반자본주의 투쟁의 주체적 동인이자 하나의 장이 되었다. 한편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영향력을 얻고 정치적 지도력을 획득하기 위해 투쟁하고, 다른 한편에서 부르주아 정치의 틀과 직접적으로 대치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적 좌파 전체는 대화를 하게 되었다. 혁명적 정당들은 자본주의의 억압의 다양하고 복합적인 형태와 그 표현들을 다시 한번 보지 않을 수 없었고, 새로운 대중투쟁전선과 관련된 자신들의 강령과 선전, 전략과 전술을 수정하고 그것을 자본주의 체제의 전복과 결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많은 영역에서 맑스주의적 계급분석과 전략을 후기 독점자본주의의 사회현실에 보다 구체적이고 전면적으로, 역동적으로 적용하게 되었다.

같은 시기에, 사회주의는 프랑스에서 1968년 5~6월혁명, 베트남-쿠바혁명의 진행과 도덕적 권위, 프라하봉기의 지도부에 의한 완전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위한 노력 등의 형태로 공세에 나섰다. 1960년대 후반 많은 시위에서 체 게바라와 호치민의 포스터를 들고 행진하는 것이 유행이었고, 시위하면서 "호 호 호치민, 과감히 투쟁하자, 과감히 승리하자!"가 구호였다.

그러나 호주에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혁명가들과 반사회주의적 자유주의자들 간의 분리가 그다지 명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회주의의 개량적 변종들인 사회민주주의와 스탈린주의가 사회주의변혁에 대한 엄청난 립서비스로 좌파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CPA는 혁명적 자기혁신 대신에, 유로코뮤니즘의 형태로 좌파 사회민주주의로 전환함으로써 1960년대 후반의 격변에 대응했다. 다른 말로, 그들은 자유주의의 압력 앞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후퇴했으며, 그것을 스탈린주의로부터의 진일보, 신좌파적 혁신으로 포장했다.

CPA는 그 자체로서 1960년대 운동에서 더욱 영향력 있는 정치세력이 되었고, 새로운 급진주의자들을 더욱더 자신의 대열에 끌어들였다. 이런 역관계의 변화로 양대 자본주의정당의 하나인 ALP는 밀려나지 않기 위해 대응했다. 그러자, 당시 고프 휘틀램(Gough Whitlam)의 휘하에 있던 지배분파였던 ALP 우파는 선견지명을 가지고 재빨리 유럽스타일 사회민주주의의 외피를 쓰고서, 1890년대식 노동중심적 민족주의를 지속함으로써 대중적 급진화라는 새로운 상황에서 당 자체를 무기력하게 만들 위험을 가진 당내 전통적 좌파의 역할을 빼앗았다.
이 신좌파 노동당은 대중운동에서 결정적인 주도권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그것을 1972년 총선에서 노동당 승리를 위한 선거캠페인으로 이용했다. 자신의 개량주의-의회주의에 갇혀 있던 CPA는 자신보다 커 크고 힘있는 사회민주주의 형제인 노동당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그 밑으로 들어갔다. 이 유로코뮤니스트들의 지지는 좌파의 ALP에 대한 신뢰를 심어주는 것으로 끝났을 뿐이다. 그후에 CPA는 양당간의 차이가 점점 더 없어지자, 특히 양당이 신자유주의의 영향아래 더욱더 우경화되면서, 활동가들을 직접 노동당에 파견함으로써 노동당의 전달벨트가 되었다.
이런 과정의 결과, 노동당은 1972년 정권을 잡았다(20년만에 처음으로). 집권 후 동일한 역학으로 노동당은 투쟁의 외피를 쓰면서 동시에 대중운동을 제도화하기 시작했다. 즉, ALP는 동요하면서, 한편으로 대중운동을 품으려고 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진정한 개혁을 수행하도록 대중운동의 압력을 받았다: 베트남으로부터의 철군. 강제입대의 금지, 무료 대학교육의 도입, 원주민에게 토지권의 부여(원주민 농업노동자들의 호주역사상 최장기 파업 후에), 사회보장수당의 확대, 백호주의 정책의 포기. 이와 같이 동요하는 입장의 산물로 수많은 상징적 개혁조치들이 취해졌다.
이런 모순의 해결은 1974~75년 전후 장기호황의 종식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 유례없는 호황은 휘틀램의 케인주의적 개혁프로그램에 물질적 여지를 제공했었다. 그러나 호황이 끝나자, 좌파로서 대대적 압력은 급하게 된 지배계급의 요구와 충돌하게 되었고, 노동당에게 부드럽게, 부드럽게라는 포섭전술을 이용할 사치를 허용하지 않았다. 1975년 11월, 당시 야당이던 자유당, 자본가 계급내 보수진영의 당의 압력으로 합헌적인 쿠데타(의회의 해산과 선출되지 않은 총독에 의한 선출된 정부의 해산)로 ALP정부는 실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ALP는 총력투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근본적으로 의회주의적인 ALP는 권력을 탈환하기 위한 비의회적(대중적) 수단이 결정적인 자본의 정치적 위기를 가져올 것임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그런 방법에 호소하지 않기 위해 책략을 꾸몄다.

쿠데타는 집권한 노동-공산 동맹이 폭로될 수 있는, 즉 부르주아 국가를 통해 노동계급과 민중의 이해를 실현할 수 없음을 증명할 객관적 조건을 효과적으로 제거했다. 사실, 쿠데타는 노동자대중과 사회운동의 눈으로 보기에 노동당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그리하여, ALP와 CPA의 좌파에 대한 헤게모니는 1980년대까지 별달리 도전받지 않았다. 1983년 노동당은 깊은 경제위기 상황에서 다시 정권을 잡았다(유로코뮤니스트들의 지원으로). 쿠데타로 집권한 자유당 정부는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을 효과적으로 도입할 수 없었으며, 지속적으로 친노동당 노동대중들의 투쟁과 저항에 직면했다. 자유당 체제를 약화시킨 두가지 투쟁은 주35시간을 위한 금속노동자들의 대중행동(38시간의 타협으로 끝남)과 환경파괴적 프랭클린댐 프로젝트의 대중적 봉쇄투쟁(전국적 연대행동의 지원을 받음)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말과 1980년대초의 투쟁들은 새로운 대중투쟁 지향적, 비의회적 정치운동의 창출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자신의 열망을 1972-75년의 집권기간 이래 자본주의 국가권력에 의해 아직은 적절히 검증되거나 폭로되지 않은 노동당으로 연결시켰다. 간단히 마래, 새롭게 급진화된 세대의 노동자들과 청년들은 여전히 자신의 구체적 경험을 통해 노동당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만 하는 처지에 있었다.


사회적 합의의 시대 1983~1996년
그런 환상을 버리는 데는 1983년과 1996년간의 노동당 집권시기 동안의 복합적인 상황과 모순으로 인해 오랜 시간이 걸렸다.

ALP체제의 핵심은 임금소득협약(Accord on Prices and Incomes)이었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정부와 자본가, 호주노총(ACTU, Australian Council of Trade Unions) 간의 사회적 합의였다. 그것은 그 당시 대처와 레이건에 의해 시행되고 있던 야만적 통화주의정책에 대한 유일한 노동계급적 대안으로 환영받았다.

협약 하에서 호주 노동자들은 물가와의 전쟁 우선의 야만적 통화주의적 접근에 대한 인간적 대안을 약속받았다. 협약으로, 실업과 인플레이션을 줄이는 데 우선하기 위해 부문적 우선 순위나 노동자와 자본가의 요구는 자제되어야 한다. 협약의 정책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 본질적 특징을 갖는다:

· 협약은 정부에 의해 강제되기보다는 당사자들 간에 합의되어야 한다.
· 협약은 물가, 임금, 비임금 수입, 과세 및 사회적 임금, 즉 기본적 서비스의 제공 외에 직접적 수입으로 주민의 생활수준에 영향을 주는 정부지출 등을 포함할 정도로 포괄적이어야 한다.
· 협약은 기본적 경제목표 외에도 소득의 균등한 재분배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물가소득협약, 1983)

그러나 협약 원문에 따르더라도, 물가와 소득을 규제하는 메카니즘은 아주 일방적이다. 물가에 대해서는 어떠한 규제도 없으며, 단지 대기업이 설정한 가격에 대한 조사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경우도 기업측이 비용을 부담시키거나 가격변동을 지연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한편 임금은 규제되지만, 단지 사탕으로 임금연동제를 약속할 뿐이다. 노동조합의 어떤 요구도 ALP 정부와 경제정책에 관한 협의하에 제기되어야 한다. 실질임금의 하락은 없을 것이라고 되풀이하여 약속한다.
저소득자에 대한 세금부담을 완화하고, 과세회피업종(부자와 기업들의 오래 특권)을 폐지하고, 간접과세를 줄이는 등 세제를 개혁하겠다는 약속들이 이루어졌다. 협약은 또한 사회보장수당을 인상하고 사회임금을 개선함으로써 저소득자에 대해 임금정의룰 실현하여 빈곤을 제거하겠다고 약속하지만, 이 모든 것은 정부가 인플레이션을 야기하지 않으면서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데 성공할 때만 가능해질 것이다.

협약 그 자체는 스웨덴식 사회민주주의를 실현한다는 약속들로 가득차 있으며, CPA는 “계획과 전략상의 필요에 대한 환영할만한 대응”이라고 환호했다. 더욱이, CPA는 협약에 대한 좌파적 비판자들을 경제주의라고 비난하였다. 협약의 반대자들은 개별그룹의 노동자들이 편협한 자기이해만을 따르도록 선동하고 투쟁의 정치․계급적 차원을 무시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사실 이 협약의 작성자 중의 하나가 바로 CPA의 지도자이자 그당시 금속노조 사무차장이었던 로리 카마이클(Laurie Carmichael)이었다. 그들을 제외한 드믄 좌파가 사회적 합의에 반대했다.

이 사회적 합의의 최종적인 구체적 결과는 저절로 드러난다.
· 노동조합 가입율의 감소 1981년 51%에서 1992년 39.6%. 1992년 파업손실일수는 30년만에 최저수준으로 떨어졌다;
· 국민소득에서 임금의 비율이 합의 초기 7년간 74%에서 63.3%로 하락했다. 이윤의 비율은 26%에서 36.7%로 증가했다. 이는 약 4천억달러(1996년 호주달러)가 임금에서 이윤으로 이전되었음을 나타낸다;
· 집중화된 임금결정의 종식. 과거 임금과 노동조건은 산업별로 협의되었고 가장 전투적 업종인 금속노동자들의 투쟁으로 결정되었었다. 상대적인 임금정의의 체제하에서 금속의 성과가 다른 산업으로 전파되었다. 단체협약(award, 집중화된 임금-단체협상)은 노사관계법정에 의해 강제되었다;
· 먼저 이중임금체계로, 그리고 나서 1990년 기업별 협상체로의 대체(개별기업 수준에서 임금과 조건에 대한 협상)
· 사회복지, 의료, 교육, 육아, 주거 등에서의 상당한 수당삭감.

본질적으로, 협약을 통해 노동조합운동은 바로 그 지도자들에 의해 감시와 규제를 받았다. 개별 조합이 협약을 깨려고 하는 경우, 이들은 노동조합운동 내에서 정면공격과 공작의 이중공격을 받았다. 예를 들어, 1989년 조종사들이 전국적 파업을 했을 때, 노동당 정부는 항공산업의 불문율의 선포, 대체인력의 투입 및 공군에 의한 파업파괴를 지지했다. 보다 중요하게, 조종사들은 노동계급을 희생시켜 추가적인 특권을 얻으려고 하는 이기적인 중산층 전문직으로라고 다른 노동조합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고립당했다.

비슷한 방식, 협약에 반대했던 전투적 활동가들도 거시경제정책을 이해하지 못하고 노동계급 전체의 이해와 무관하게 행동하는 근시안적 말썽꾸러기라고 심하게 비난받고 손가락질 받으며 따돌림받았다. 사실 핵심적 논리는 경제위기 시에는 어떤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이었다: 경제를 개혁하여 호주의 국제경쟁력을 회복하거나(그러면 결국 고용증가와 조건향상의 이득을 얻는다) 아니면 과거의 방식을 고수하여 배를 침몰시키거나 양자택일하라는 논리다. 이런 공격 하에서, 그리고 급진세력의 상대적 취약성 때문에, 많은 현장 노동자들은 이데올로기적으로 굴종과 정치적 순화에 길들여졌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축적된 전투적 투쟁의 경험을 상실했다.


1980~90년대 좌파의 재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합의에 대한 반대를 조직하려는 단호한 시도는 이루어졌다. 1984년, 민주사회당(DSP, Democratic Socialist Party: 그 당시에는 제4인터내셔널 호주지부였던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반협약 투사들을 다시 결집시키기 위해 호주사회당(SPA, the Socialist Party of Australia)과 제휴하여 사회권 캠페인(Social Rights Campaign)을 전개하였다. 그에 이어 반격캠페인(Fightback Campaign)도 조직하였다. 그러나 결국 이런 노력은 노동조합에 대한 노동당의 강압적 지배를 제거하지는 못했다.

SPA는 1971년 CPA가 유로코뮤니즘으로 전환하는 것에 반대하여, 전통 스탈린주의를 옹호하여 CPA에서 이탈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협약의 핵심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세력이 SPA와 제휴하길 거부했었다면 분파성을 고집한 행동이었다. 더욱이, DSP는 1979년 니카라과혁명의 영향하에 트로츠키주의에서 이탈하여 전술상의 유연성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노동당에서 대한 초기의 이중적 분석, 따라서 모든 투쟁의 영역에서 노동당에 대한 일관된 반대도 포함된다. DSP는 베트남 반전투쟁의 투사들에 의해 1972년 건설되었다. 이 투쟁에서 DSP는 CPA의 탈동원전략에 대한 성공적 반대를 조직하였고, 1970년대 내내 CPA와 ALP의 운동에 대한 개량주의적 영향력에 대한 작지만 강력한 저항집단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ALP좌파와의 대대적 정치적 단절을 위한 기회가 생긴 것은 협약의 지배하에 있던 노동조합 외부에서였다. 그 당시 이 기회는 노동조합에 대한 협약의 압박을 외부로부터 깨뜨릴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 레이건과 대처에 의해 시작된 2차냉전에 반대하여 새로운 반핵운동이 전세계적으로 일어났다. 호주에서 이것은 우라늄 광산에 반대하는 운동에 반영되었다. 이 운동은 ALP로 하여금 집권이전에 무광산 정책을 취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이 광범한 대중운동은 급진적-자유주의적 좌파 뿐 아니라, 평화, 환경 및 노동조합운동을 한데 묶었다.
그리하여 1984년 신자유주의 논리의 압박 하에서 ALP가 집권하면서, 기존의 무광산입장을 뒤집어 3광산정책으로 선회하자 주요한 정치적 격변이 일어났다. 이 격변은 ALP의 대열 내부에 깊이 영향을 주었다. 투쟁의 구체적 성과는 ALP의 배신에 반대하여 새로운 대중정치세력인 비핵당(NDP, Nuclear Disarmament Party)의 결성이었다. 전체적 성격이나 구성은 복합적이지만, 이 당은 ALP에 대한 공개적이고 직접적으로 반대하는 좌파세력들의 대대적 재편이었다. NDP는 그 자체로 혁명가들이 대중을 전취할 수 있는 반자본주의 정치운동으로 더욱 급진화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DSP는 NDP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원칙적으로 대중투쟁지향적 노선을 추구하는 좌파진영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1985년 자유주의적 평화주의자들이 막후에서 DSP에 대한 공작을 꾸며 좌파가 당을 강화할 기회를 갖기 전에 대규모로 탈당하여, 결국 NDP를 와해시켰다.

그런데 1986년 직후부터, CPA는 사회적 협약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전략의 부재, 당원의 감소, 방향성의 상실로 인해, CPA는 새로운 사회주의적 재편(new socialist regroupment) 프로젝트를 받아들여, DSP와 함께 신좌파당(New Left Party)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그러나 CPA는 과거의 정치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1987년 협상에서 철수하였다.

그에 뒤이어 1988년 DSP와 SPA간에 통합협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다음해 이 협상은 베이징에서 일어난 천안문 학살로 결렬되었다: 중국 관료주의자들의 행동에 대한 SPA의 공공연한 옹호로 근본적인 원칙상의 차이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런 정치적 상황과 더불어, 1986년 ALP 정부가 무료대학교육을 폐지하고 수업료를 부분적으로 도입하자, 학생운동이 극적으로 등장했다. 이 때 DSP와 CPA는 좌파연합의 형태로 ALP 학생회에 반대하는 좌익 반대파를 조직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이 때에도, 신좌파당 논의의 결렬과 연결해, CPA는 결국 당의 통제 아래 관료적 전국학생회연합을 건설하여 운동을 제도화했던 ALP에 굴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LP의 지배력은 노동운동만큼 확실하지 않았고, 청년층의 내적 동력과 학생대중의 급속한 교체는 끊임없는 불만의 재생을 의미했다.
1980년대 후반의 이런 상황은 부분적으로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에 의해 야기된 국제좌파의 점증하는 유동과 불확실성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이 와중에서 어떤 진로를 택할지 결정하기는 어려웠다. 소련내의 동요가 사회주의적 민주화의 전망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이였지만, 궁극적으로 역관계는 수많은 스탈린주의적 관료주의자들의 연고자본주의(crony capitalism)로의 전향 덕분에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에게 유리하게 변했다. 1989-90년 마침내 동구권이 붕괴하자, 국제좌파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호주에서 이런 위기의 가장 적나라한 조직적 사례가 1991년 CPA의 공식적 해산결정이었다. 1980년대 내내 CPA내에서 심화된 절망감은 이미 연이은 사퇴로 이어졌지만, 마지막 조종소리와 함께 상당수의 핵심적 급진활동가, 사회주의자, 좌파지식인들이 자유주의로의 전향의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러자 지배계급은 대대적인 이데올로기적 공세를 벌였다. 사실, 수많은 과거 사회주의자였던 배신자들이 이 공세에 열광적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형태로, 좌파내에 지적 퇴행이 스며들었다.
결과적으로, 사회운동과 노동운동에서 정치적 힘의 균형은 극적으로 자유주의자들에게 기울었다. ALP는 우선회 속에서, 신자유주의적 의회파와 경제민족주의적 노동조합 관료파 사이에서 분열(scissoring)을 강화했다. ALP정부는 사회적 합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공세를 강화하고 세련화했다. 이의 가장 완전한 완벽한 모습은 노동당 총리인 폴 키팅이 호주의 민족적 정체성을 다문화-공화주의-포퓰리즘-민족주의로 재정리한 것이었다. 사회운동에 참여했던 수많은 ALP활동가들은 더욱 노골적으로 부르주아 자유주의적으로 변했고, 남아있던 휘틀램식 사민주의의 모든 가식을 던져버렸다. 열심히 활동했던 사회주의자들도 점차 자유주의자가 되었고, SPA도 예외는 아니다.

이와 같은 사회주의 정치의 위기로 인해, 1960년대 후반 급진화에 뿌리를 두고, 운동에 항상 등장하면서도 그 당시까지 별로 영향력을 가지 못했던 전통적 급진 자유주의자들이 위세를 얻게 되었다. 궁극적으로, 이와 같은 노골적 자유주의로(유로코뮤니스트와 사민주의자들의 위장 자유주의와 대립되는)의 경사는 수많은 혼란에 빠진 사회주의자들을 끌어들인 녹색당의 등장에서 정치적으로 표현되었다. 사실, 1990년대 내내, 새로 급진화된 수많은 사람들이 녹색당 주위로 몰렸다. 상당 부분, 이것은 생태위기에 대한 점증하는 각성 때문이기도 한데, 이 생태위기는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급진화 과정의 중심적 특징이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사회주의 노선을 방어할 책임이 DSP의 어깨 위에 맡겨졌다(더불어 사회주의적 대의를 분파주의적 전술로 자주 오염시키는 ISO[국제사회주의자]와 같은 파편화된 분파들과 함께).

DSP의 지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 DSP는 청년조직 Resistance를 통하여, 급진화되는 청년들을 조직하여 사회주의로 획득하기 위해 활동했다. 이는 사회주의의 전위를 재창출하는 것 뿐만 아니라, 모든 민중부분에서 투쟁의 보다 광범한 투쟁의 재생을 촉발하는 데 결정적이다.
· DSP는 생생한 이데올로기적 논쟁을 유지하고, 지속적으로 실천투쟁의 과정에서 사회주의 원칙의 구체적 유효성과 중요성을 입증하려고 노력했다. 이를 위한 핵심적 수단은 DSP의 당기관지 <직접행동>(Direct Action)을 대신하여 1991년부터 발행되는 폭넓은 활동가신문 이다. 이는 이데올로기적 혼란의 와중에 전국적 수준에서 지속적 논쟁과 교육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전술적 결정이었다.
· 위의 두가지 수단을 이용하여, DSP는 사회운동 내에서 대안적 사회주의적 중심축을 구축하기 위하여, 원칙적인 좌파세력과 활동가들을 결합시키기 재구축하기 위하여 지배적인 자유주의 경향에 대한 투쟁에 적극 결합해 왔다.
· DSP는 주로 최대 노조인 지역사회공공노조(CPSU)에서 ALP에 대한 게릴라전을 계속함으로써 노동조합 내의 전투적 활동가들을 재조직하고 확대하려고 노력했다. 이 사업의 주된 측면은 기존의 지도부가 신자유주의적 공세에 적절히 투쟁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실질적으로 그런 지도부를 대체할 수 있도록 현장노동자연합(rank-and-file alliances)의 조직화였다. 또다른 측면은 노동조합과 사회운동 간의 관계를 정립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이었다. 이것은 노동조합내에서, 또 사회운동에 직접 참여하는 많은 노동자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전체적인 정치적 조건 때문에 1990년대 사회주의 세력이 크게 확장하기는 어려웠다. 좌파와 운동진영 내에서 레드콤플렉스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계속 표현되었다. 한가지 지배적 표현형태는 운동지상주의(movementism), 즉 개별 사회운동 수준에서는 열심히 활동하지만, 정치조직이나 당에 대해서는 회의와 의심을 갖는 경우이다. 달리 말해서, ALP에 대한 환상은 없어졌지만, 그것이 전략적 가능성에 대한 비관과 불확실성, 지역화되고 직접적인 관심사로의 후퇴로 대체되었다. 이것이 프티 부르주아적 녹색당이 관심의 중심이 되었던 또다른 이유이다: 녹색당은 각 그룹의 지역자치의 불가침성, 지역민주주의, 당원 개인의 정치적 선택(활동과 정치적 입장의 선택), 합의에 의한 의사결정과정에 기반하고 있다.
DSP의 소규모성으로 인해 단기간에 이런 상황을 역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1990년대 내내 당의 성과와 성공은 개별적 개입의 수준에 머물렀고, 많은 성과는 끊임없이 제휴와 연합의 대상을 바꿈으로써 얻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원을 몇몇 전략적 토대에 집중함으로써, 이런 성과는 진보진영 내에서 DSP 위상의 점진적 향상으로 축적되었다.

최근 두가지 주요투쟁에서 DSP의 지도적 역할은 오랜 진지전의 누적적 성과를 입증했다.
첫번째는 호주정권이 인도네시아 독재와의 반동적 군사동맹을 (일시적으로) 단절하고 인도네시아가 조정하는 학살을 종식시키기 위해 동티모르에 군대를 파병하도록 했던 1999년 8~9월의 대중동원이다.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에서 호주 제국주의의 역할은 1975년이래 자본주의 양당의 아킬레스건이었다. 특히 1991년 호주에서 대중적 분노를 촉발한 딜리학살 이후, 동티모르 연대운동은 진보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되었다. DSP는 1990년대 내내 이 사업영역을 중요한 기본사업으로 배치하였다. 특히, 동티모르투쟁, 인도네시아 민주화투쟁과 호주민중운동의 3자연대관계를 확립하려고 힘썼다. 호주 제국주의의 역할 때문에, 인도네시아 민주화운동의 명백한 성공과 동티모르의 상황은 1995~99년 시기에 호주 국내정치 상의 핵심적인 부분이 되었다.
두번째는 1997년 새로 결성된 인종주의적 극우정당인 한민족당(One Nation Party)에 대한 중고생들의 전국적 동원(동맹휴업 형태)이었다. 이 극우정당은 1996년 집권한 보수 자유당의 우익이다. 이 청년투쟁은 전국적 반인종주의 투쟁의 선봉이었다. Resistance와 DSP에 대한 부르주아 언론의 선정주의적 위협캠페인에 맞서, 수천명의 십대들이 학교에서 나와 거리로 나섰다. 이는 한민족당의 급속한 쇠퇴에 일조했다. 불행히도, 자유당 정권은 그후 보다 기만적인 이데올로기적 위장 속에 한민족당의 수많은 정책을 채택했다. 우익 내부에 백호민족주의의 발현은 일부 노동대중과의 결합을 추구하고 있다. 이것은 초기 노동운동과 노동당의 이데올로기적 핵심이었던 급진적 노동중심적 민족주의 전통에 호소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자유당이 1996년 ALP의 협약체제를 대체하자, 처음에는 노동당이 더 이상 집권당이 아니기 때문에 노동조합 관료주의로부터 보다 확고한 지도부를 기대했었다. 더욱이, 보수주의자들은 노동계급에 대한 정면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ALP가 힘으로 수행했던 노동자권리, 조직, 연대, 생활수준 등에 대한 침해를 이용했다. 그러나 노조 관료주의가 계속 무기력하다는 징조는 1996년 8월 19일 드러났다. 이 날 캔버라에서 열린 노동자집회는 자연발생적으로 연방의회로 행진하였고 정문을 공격했다. 이에 대응하여, ALP가 지배하는 노총지도부는 그런 행동을 격렬히 비난했다. 더욱이, CPSU 지도부는 공공부문 노동자 4만명의 대규모 정리해고에 대한 대정권 투쟁을 조직하기를 거부했다. 특히 이에 대항해 DSP가 수행한 현장의 반대투쟁에도 불구하고 투쟁을 거부했던 것이다.

그러나 진짜 시험은 1998년 4월에 왔다. 투쟁은 패트릭하역회사, 정부 및 전국농민연맹(NFF, 농업재벌의 연합체로, 농산물 수출로 인해 항만운영에 각별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의 삼자동맹에 의해 호주 항만노조(MUA)에게 강요되었다. 회사측은 전국적으로 2천명의 노동자를 해고하고 그들을 NFF의 업체가 운영하는 인력으로 대체하려고 시도했다. 이 투쟁은 1980년대이래 처음으로 진정한 전국적 노동자투쟁으로 전화했지만, 협약체제 하에서 노동운동을 지배했던 무기력상태를 증명하기도 했다. 투쟁은 다른 노동조합의 노동대중, 사회운동, 노동대중의 광범한 연대를 한데 모으는 대규모 피켓투쟁으로 발전했다. 여러 작업장에서 연대파업이 일어났고, 파업위협도 연이었다. 5월 6일 멜버른의 10만명 시위와 작업중지 이후, 보수정부는 수세적이었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 초조해 했다. 그래서 회사측은 마침내 노동자들을 재고용하고, 파산의 위험 운운하면서도 협상을 계속하기로 합의했다.

그 이후, 대중투쟁의 인상적 고양에도 불구하고, MUA 지도부는 단지 항만노동자들만을 포괄한다는 전망을 가지고 협상에 임했다. 그리하여, 일어난 일은 MUA가 회사를 파산에서 구하는 일이었다! 최종적 결과는 정리해고, 비정규직 확대 및 아웃소싱이었고, 이는 회사측이 원래 강요하려고 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런 타협안에 대한 현장의 반대를 조직하려는 정력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략상의 문제(즉, 이번 투쟁을 파산한 기업을 노동자들이 통제하기 위한 투쟁으로 발전시킬 필요성)에 직면하여 투쟁을 조직하는 데 실패했다. 협약시대에 일반화된 패배에 이어, 이번의 실패는 여전히 취약한 투쟁동력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의 전투적 활동가들은 투쟁의 과정에서 훨씬 더 커다란 영향력을 얻었다. 이는 1998년 6월 MUA 선거에서 드러났다. 그들은 타협주의자들을 몰아내지는 못했지만, 여러 주 지부에서 주요 지도부의 자리를 차지했고, 아슬아슬하게 패하기도 했다.
그러나 커다란 진보가 이루어진 것은 MUA의 외부였다. 특히, MUA투쟁을 통해, 과거부터 활동력을 갖고 있었던 빅토리아의 몇몇 전투적 좌파노조들은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이는 5월 6일 멜버른 동원에서도 증명되었다. 이 투쟁에 전면에서 나섰던 두 노조는 호주제조업노조(AMWU, 특히 금속분과) 빅토리아 지부와 건설임업광업에너지노조(CFMEU) 건설분과였다. 빅토리아 건설노동자들은 그 이후는 두 자리수의 임금인상과 주36시간제를 쟁취했다. 전투적 조합주의를 부활시키려는 빅토리아 AMWU의 노력은 ‘노동자 먼저’(Workers First)가 이끌었는데, 이 팀은 계급투쟁적 활동가들의 모임으로 MUA투쟁 이후 1999년 5월말 빅토리아지부 공식 지도부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들은 그 이후는 수많은 지역별 승리를 확보했고 올해 기업별 협상을 철회하고 산업별 임금-단체협상을 복원하며 36시간제를 획득하기 위한 공세로서 ‘캠페인 2000’을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빅토리아 CFMEU와 AMWU는 또한 임금과 노동조건을 뛰어넘는 투쟁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99년 CFMEU는 멜버른에서 열린 대규모 동티모르 연대시위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AMWU는 환경운동 및 기타 사회운동 좌파와의 연대를 추구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런 상황발전의 하이라이트는 이들 노동조합이 전투적 환경운동과 나란히, DSP가 이끄는 부문연합 S11연합의 깃발아래 9월 11-13일 멜버른에서 세계경제포럼(WEF) 봉쇄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이다. 3일간 2만대오의 봉쇄투쟁은 이제 시애틀, 프라하와 더불어, 전지구적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새로운 전세계적 운동의 대열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가운데, 멜버른 S11은 봉쇄투쟁의 성공과 상이한 운동의 통일에 결정적 역할을 한 DSP의 중심적 역할이란 면에서 예외적이다.
더욱이, 노동운동의 공식지도부의 적대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봉쇄투쟁은 성공적이었다. ALP가 지배적인 빅토리아 지역본부(VTHC)의 지도부는 공식적으로 노동조합들에게 참여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이는 관료들이 빅토리아 노동당 주정부를 당혹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AMWU와 CFMEU는 이를 무시하고, 봉쇄투쟁을 승인하고 동원함으로써 원칙적인 정치적 독립성을 과시하였다. 이들의 힘은 개량주의자들의 전술적 패배에 결정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S11투쟁은 ALP와 노동조합 관료주의에 대한 대중적 좌익반대파를 건설하는 향후 투쟁에서 중요한 투쟁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전반적 상황이 전국적으로 다른 노동조합까지 얼마나 일반화될 수 있는가, 그리고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 제도권 좌파로부터 노동계급전위의 대중정치적 발전을 가져오는 것, 즉 비의회주의적 노동계급 대중정치조직을 창출하는 것에 얼마나 근접했는지를 말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현재, 급진좌파는 대중운동의 차원에서 중요한 세력이지만, 대안적 정치틀을 결정적으로 제기하고 이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획득할 단계에는 아직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는 여전히, 상당한 정도로 제도권 좌파의 좌파, 즉 상당한 정도로 1990년대의 정치적 불확실성, 침울과 회의에 편승하는 녹생당과 같은 초자유주의적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대안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여전히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경쟁력 있는 대안은 없으며, 따라서 암묵적으로 그것은 부르주아 정치가들에게 맡겨두는 게 낫다는 생각도 있다. 어떠한 개입의 개념도 부르주아 의회정치인들에 대한 전술적 압력으로 제한된다. 한가지 인기 있는 방법은 진보적 후보를 부르주아 선거에 출마시켜 나쁜놈들이 정직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또다른 방법은 양당간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연방상원에 녹색당 상원의원을 선출하는 것이었다. 이 모든 방법은 편협한 방어적 형태의 대안정치에 다름 아니며, 진보진영을 괴롭히는 정치적 근시안성과 전략적 확신의 결여를 드러낼 뿐이다. 간단히 말해서, 여전히 대중운동과 혁명적 정치전략 간에 아무런 유기적 연관도 없다.

물론, 근본적으로 이는 최근에 일어났던 구좌파의 몰락, 사회주의정치의 위기, 그리고 노동계급의 협약식 탈동원화 등의 유산 때문이다. 대중적 직접-참여민주주의의 구체적 경험, 투쟁의 발전과정에서 노동대중 직접행동의 힘, 대중운동이 정치적 요구를 획득하고 대안적 대중토론과 논쟁의 장을 구축할 잠재력 등의 꾸준한 축적과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규모 파업물결, 대대적 공장점거, 또는 지속적 시민불복종 대중행동 등의 축적도 없었다. 이것이 바로 S11투쟁이 아주 중대한 투쟁인 이유이다: 그것은 과거에 비슷한 행동을 방해했던 바로 세력에 대한 직접적 반대에서 그런 힘을 증명한 투쟁이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객관적 위기가 불가피하게 신자유주의와 노동운동, 호주노동당, 및 노동조합 관료주의 내의 신자유주의적 대리인들에 대한 더욱더 공개적인 투쟁을 열어젖힐 것이기 때문에 지속적 진보의 전망이 있다. 이런 점에서, 과거 몇 년간의 누적된 교훈과 경험은 향후 투쟁의 강력한 토대를 이룰 것이다. 게다가, 중요한 역할은 제도화된 자유주의세력의 통제 밖에 있는 자연발생적 사회․환경적 대중투쟁의 지속적 재생에 의해 수행될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의 규율과 조직이 노동운동과 결합되면, 그런 투쟁은 계급투쟁에서 중요한 부대를 이룰 것이다. 이는 3일간의 S11 봉쇄투쟁에서 일시적이지만 훌륭하게 입증되었다. 한/노/정/연

2000-11-1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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