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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원인을 외면한 환경운동의 타락

현장에서 미래를  제60호
채만수


특집 : 시민운동과 노동자․민중운동




채만수/부소장

근본원인을 외면한 환경운동의 타락






내가 아는 한 사람은 ‘환경운동’ 하면, 아니, ‘한국의 환경운동’ 하면, 그렇게 냉소적일 수가 없을 만큼 더 없이 냉소적이다. 그렇다고 그가 환경 문제에 대해서 무관심하다거나, 혹은 ‘환경운동’의 개인적․경제적 피해자인 것은 결코 아니다. 거꾸로 그는 누구 못지 않게 환경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많고, 또 실제로도 몇 년 전까지는 환경운동의, 적극적인 참가자는 아니었지만, 참가자였고, 또 적극적인 후원자였다. 그러한 그가 ‘환경운동’ 하면 그토록 냉소적인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다름 아니라 그가 한국 환경운동의 일반적 경향과 그 내막을 비교적 소상하게 알기 때문이고, 그의 결벽한 성격이 그 경향과 내막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털어 논 바에 의하면, 환경운동에 몸으로 참여하고 경제적으로 후원하면서 그는 평소에도 무언가 석연치 않은 움직임에 마음 한 구석에 편치 못했는데, 지난 1992년 리오(Rio) 국제환경회의를 즈음한 움직임에 그만 기가 질렸다는 것이다.
그 때는 다름 아니라 두산의 낙동강 페놀 대량 방출 사건으로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히고, 분노하고, 그리하여 환경운동 단체들뿐만 아니라 환경 문제에 조그만 관심이라도 있는 사람이면 두산의 그러한 살인적 행위를 규탄한 지 얼마 지나지 때였다. 그런데 다른 때도 아닌 바로 그때에 환경운동의 리더라는 사람들이 브라질 리오데자네이로의 국제환경회의에 가는데, 다름 아닌 바로 그 두산의 재정 후원을 받아서 가더라는 것이다. 그의 말인 즉, 그러니 그가 더 이상 그들과 상종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최근에 몇몇 환경운동 리더들의 불미스러운 사건들도 있어서 이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이끄는 환경운동의 성격에 대해서 많은 의구심을 가지고 있겠지만, 실제로 그 사람을 그토록 냉소적이게 많든 그 사건이야말로 오늘날 한국 환경운동의 성격을 여실히 반영하고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는 누구누구라고 이름만 대면 모르는 이가 거의 없을 정도로 몇몇 환경운동의 지도자들은 높은 명망을 누리고 있다. 어떤 이는 국민적 연예인이라고 할 만큼 텔레비전 등 각종 대중매체의 각종 프로그램에도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 쓰레기라고도 할 만큼 타락하고 위선적이고 야심 많은 수많은 정치인, 정치 지망생들의 명함에서 무슨 무슨 환경단체의 지도위원이니 자문위원이니 운영위원이니 하는 직함을 보는 것도 드문 일이 아니다. 그만큼 환경운동은 오늘날 대중적인 명분과 인기가 있는 운동인 것이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불과 얼마 전까지도 환경운동은 극히 낯설었고, 어떤 면에서는 정치적으로 위험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실제로 70년대 중반까지도 환경운동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할 수 없었다. 외국의 여러 신문 등이 한강의 심각한 오염 상태 등에 대해서 보도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 한강 물을 식수로 마시며 살아 갈 수밖에 없는 서울 시민은 누구도 그 한강의 오염 문제를 사회적으로 제기하고 나설 수가 없었다. 한강의 오염,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의 공해 문제였는데, 그것을 제기한다는 것은 ‘경제건설과 성장을 위해서 매진해야 한다’는 국가적 지상명령에 해를 끼치는, 일종의 국가 보안 사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것이 70년대 말엽에 이르러 그 오염이 그것을 더 이상은 은폐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해지자 어쩔 수 없이 정부가 문제를 공론화하고 나섰던 것인데, 한국의 환경운동도 대략 그 즈음에 ‘공해 추방운동’으로서 출범했다. 그리고 갈수록 환경 문제가 심각해지고, 이에 대한 인식이 차츰 확대되면서 그에 대처하는 운동도 ‘환경운동’으로서 자리를 잡아갔다. 그리고 특히 90년대에 들어와 소위 ‘시민운동’의 발흥도 있고 해서, 그 시민운동의 커다란 흐름의 하나로 정착했다.

그런데 이렇게 이른바 시민운동으로서 자리 잡은 환경운동은, 그 화려한 활동상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시민운동으로서의 명백한 한계, 소시민 운동으로서의 계급적 성격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오늘날 환경운동의 지도자들을 연예인적인 명망가로 만들면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환경운동에 대해서 의구심과 냉소를 갖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 환경운동 단체들이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전개하는 환경 문제에 관한 캠페인을 보자면, 환경 문제는 ‘경제 개발’이나 ‘공업화’에 수반하는 문제이고, 그것을 유발하는 개별 기업의 개별적인 행위나 국가 및 기타 공공단체의 개별 프로젝트의 문제이며, 심지어 대중의 시민의식의 부족의 문제이다. 따라서 기업 및 공공단체 등의 개별적인 프로젝트에 구체적으로 대응하고, 대중이 그렇게 대응하도록 그리고 또 대중 자신이 무분별한 소비나 쓰레기 배출․투척 등으로 공해를 유발하지 않도록 캠페인하는 것이 환경 문제에 대한 적절한 대응, 적절한 운동으로 된다.
실제로 지금 환경운동은 그렇게 전개되고 있다. 그리하여 기업이 반환경적인 프로젝트를 세우지 않도록 사전에 효과적으로 계도하고, 그 기업 정책 결정에 참여하기 위해서 환경운동의 최핵심 지도자가 재벌기업의 사외이사로 된다고 하는 일도, 그러한 타락도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그들의 운동과 대중 캠페인에는 환경 문제의 원인은 개별 기업이나 공공단체의 개별적 프로젝트나 행위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그리고 개인으로서의 대중의 행위와 의식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이윤 생산에 기초한 사회체제의 문제, 자본주의적 생산체제의 문제라는 점이 철저히 외면되고 있다. 아니, 보다 절실하게 말하면, 철저히 은폐되고 있다.
그리하여 지금 환경운동 및 그 지도자들은 환경 문제를 그것이 마치 비계급적인 문제고, 개별 기업이나 공공단체의 개별적인, 따라서 우연적인 문제인 것처럼 대중에게 제시함으로써, 대중이 그 진정한 원인을 파악하고 그리하여 적절한 대응과 투쟁을 마련하는 것을 방해하는 데에, 따라서 (독점)자본의 이익에, 봉사하고 있다.
재벌 등 독점자본이 ‘환경운동에 동참한다’는 위선적 미명하에 환경운동 단체와 일부 지도자를 때로는 공공연하게, 그리고 때로는 은밀하게, 지원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다름 아니라, 한편에서는 개별 자본․기업으로서의 자신들의 반환경적 행위와 프로젝트에 대한 환경운동의 예상되는 투쟁을 사전에 봉쇄․무력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어서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현재의 환경운동의 그러한 친자본적 성격에 대한 보상이기도 한 것이다.

지금까지 환경운동 단체들이 투쟁과 규탄의 대상으로 삼아 왔던 많은 개별적인 사건, 환경 파괴 행위들이 개별 기업․자본과 단체들의 자본가적 탐욕과 음흉한 결탁에 의해서 저질러지고 있다고 하는 점은, 의심의 여지없이, 기존의 환경운동도 인정하고 있고, 그래서 그렇게 규탄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의 운동에서 무어가 문제란 말인가?
우선, 그러한 탐욕과 결탁이 단지 우연적이고 자의적인 듯이, 그리하여 그 개별적 행위 하나하나를 규탄하고, 그 행위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지불하게 하면, 그러한 운동과 투쟁을 확대해가다 보면, 환경 문제는 해결될 것처럼 기존의 운동이 사고하고, 행동하고, 선전하는 점이다. 그러한 탐욕과 결탁은 사실은 자본주의적 이윤 생산과 경쟁에 의해서 강제되고 있어서, 자본주의적 생산이 지속되는 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필연적이라는 점을 그들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거나,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적 생산이 환경 파괴적인 것은 환경 파괴적인 것으로 돌출되고 그리하여 이른바 환경운동의 규탄 대상이 되고 있는 사건들만이 아니다. 사실은 자본주의적 생산 그 자체가 환경 파괴적으로 진행되고 있고, 그렇게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점 역시 지금의 환경운동은 철저히 외면하고 있거나 은폐하고 있다.
기업에서는 엄청난 양의 생산시설과 기자재가 단지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즉 자본주의적 시장 경쟁에 불리하다는 이유만으로 계속적으로 폐기돼가고 있고, 그럴 수밖에 없다. 대중은 멀쩡한 의복이나 주택 등등의 사실상 거의 모든 종류의 생활자료를 끊임없이 폐기하고 교체하도록 독점자본이 대중매체를 동원하여 조성하는 대중문화에 단단히 사로잡혀 있다. 대부분 대중의 스포츠, 취미생활조차 자본의 이윤과 축적에 봉사하도록 개발, 붐이 조성되고, 그것들 역시 거의 예외 없이 환경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속성상 도시로의 인구 집중이 강화되고 있고, 그 자체 환경 파괴적이다. 언뜻 몰계급적인 것처럼 보이는, 예컨대 교통량이 증대와 그에 따른 자연 파괴적 교통 기반시설의 폭발적 증설도 사실은 자본주의적 생산에 의해서 유발되고 있는 것이다. 등등.

한편 환경 파괴나 공해의 영향은 보편적인 것처럼, 즉 몰계급적인 것처럼,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고, 대개의 경우 그렇게 선전된다. 그러나 그것도 명백히 사실이 아니다. 대자본가를 포함한 자본가 계급 역시 그 악영향을 면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노동자 민중에게 훨씬 더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노동자 민중에게는 그 악영향을 차단하고 경감시킬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언뜻 그 영향이 가장 보편적일 것 같은 대기 오염을 예로 들어 보자. 노동자 민중에게는 그렇게 오염된 공기를 항상 들이마시지 않을 방법이 없지만, 부유한 자본가들은 다르다. 공기 청정기가 설치된 집안, 공기 청정기가 설치된 사무실, 그리고 공기 청정기가 설치된 고급 승용차 안에서 그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면 그만이다.

환경 문제는 이렇게 계급적인데도, 많은 경우 그것은, 그리고 환경운동은 마치 몰계급적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그리하여 그것은 마치 (소)시민의 운동 영역이라는 듯이 노동자 계급 운동은 그것을 방치하고 있다. 당연히 잘못이다.
노동운동은 마땅히 자신의 운동을 환경운동에까지 확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그 환경운동은 기존의 소부르주아적 환경운동과 그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주도되고 그에 봉사하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노동자 계급 자신의 세계관이 반영되고 해방을 향한 자신의 본래적 운동과 결합한, 그러한 운동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한/노/정/연

2000-11-1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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