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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와 시민운동

현장에서 미래를  제60호
최형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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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운동과 노동자․민중운동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최근처럼 시민운동이 노동운동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때도 드물다. 그 주요한 세력이 노동운동에서 자라나왔지만, 이제는 노동운동에서 자립화되어 갈등과 대립의 진원지로까지 비춰지고 있다. 이러한 원인의 핵심에는 힘의 역관계에서 밀려있는 노동자운동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 옆길로 빠지고 있는 시민운동을 잡아내고, 배치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과 계획을 갖지 않는다면 해결은 요원하다는 점을 이번호 특집 필자들은 강조하고 있다. 동시에 필자들은 현시기 시민운동의 쟁점을 그 역사적 연원에서부터, 이론에서 실천쟁점에 이르기까지 살펴보고 있다.

2000년은 특히 시민조직들의 총선연대 활동, 정부의 복지정책에의 적극적 개입, 아셈 관련 활동 등으로 가히 ‘시민운동의 정치세력화’라 불릴 정도의 해가 될 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여전히 시민조직을 ‘능력있는 정책전문가 집단’으로 사고하면서, 시시때때로 연대하고 있는 노동운동 특히 민주노동조합운동은 관계 재정립을 서둘러야 한다. 이번호 특집은 바로 이러한 의도하에 기획되었다.


한국사회와 시민운동



최 형 익/연구위원







지금부터 약 8년 전, 1993년에 출간된 한 책에서 필자는 한국의 시민운동에 대해 언급할 기회를 가졌었다. 당시는 경실련이 몇 해전에 창립되어 위세 당당했으며, 과거 노동운동의 일부 투사들이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함께, 갓 등장한 김영삼 정권의 ‘개혁 드라이브’에 눈이 휘둥그레져 소위 ‘고백’이라는 고해성사를 통해 앞다투어 시민운동으로 업종전환을 하던, 바로 그러한 때였다. 이러한 사태를 배경으로 쓴 시민운동에 대한 짧은 단상이 8년이 지난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표현 상 일부 미숙한 점과 함께 이론적으로도 보다 정교화시켜야 할 부분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중심내용에 있어서는 당시의 문제의식이 유지되고 있고, 따라서 여전히 유의미하다고 판단되기에 그 당시의 단상을 전제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1993년, 시민운동에 대한 단상

“첫째로, 한국의 시민운동은 국적불분명의, 다시 말해 태생이 불분명하고 족보가 없는 운동이다. 모순이 있는 곳에 운동이 있기 마련이며 따라서 사회운동은 운동이론으로 마련되기 전에 자생적인 수준에서나마 대중적 진출이 있고 그 사회적 모순, 역사적 기원이 근저에 있다. 그런데 시민운동은 소위 시민운동론이라는 형태로 일부 강단 학자들에 의해 먼저 수입된 실천적 함의가 부재한 운동이다. 이들이 주로 의존하는 선진 유럽사회에서도 시민운동론은 그 대안적 의미를 지니지는 못하며 1992년 독일에서 발생한 대규모 파업에서조차 시민운동이 대중적 실천을 주도했다는 소식을 우리는 아직 접한 바 없다. 오히려 여전히 현대의 정치사회에서 진보적 대중운동의 구심에는 노동자 계급과 좌익정당들이 직․간접적인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둘째로, 시민운동은 몰계급성이 자신의 본성이며 이데올로기적 맥락에서 몰계급성은 언제나 부르주아 운동의 자기표현 양식이었다.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시민운동은 국민운동적 함의를 갖고 있었다. 둘을 굳이 구분하자면 전자는 자유주의 좌파, 혹은 진보적 부르주아 운동이라면 후자는 자유주의적 우파를 형성하였다는 것이 차이점일 것이다. 또 그것은 80년대식 민중운동이라는 개념과도 상통한다. 이때 시민이 성숙한 자본주의 사회의 언술이라면 후자는 자본주의 초기의 정치운동 혹은 민주주의 혁명시기의 어법이다. 따라서 부르주아 사회의 발전양상에 따라 이 두 용어는 언제나 호환 가능하고 실제 운동에서조차 어제의 민중민주적 투사들이 오늘날 고해성사를 하고 시민운동론을 들고 나오는 현상은 하나도 놀랄 일이 못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모든 혁명, 사회적 변혁이 민중혁명, 즉 대중적 실천이라는 의미에서 시민운동에는 대중운동의 함의가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성숙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민운동은 마땅히 노동대중의 정치운동, 시민사회의 피억압 계층의 대표자인 노동계급의 운동이 마땅히 그 주도적 위치에 놓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이 별개의 것으로 전자는 새롭게 부상하는 신사회운동으로, 후자는 시대에 뒤떨어진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되는 것은 아직도 최고의 시민계급이 시민권조차 획득하고 향유하지 못하는 한국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미숙함의 반영이다.

통일독일의 경우 정의위원회라는 사회운동단체연합이 제도개선 등 각종 권익투쟁, 시민운동의 주체로 나서고 있는데 그 내부에는 그레고어 기지 현 민주사회당(구 동독 집권당의 후신)의 당수 및 사민당 좌파인사, 노조지도자 등 좌파 정치세력이 그 중심에서 지도부를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남한의 사회주의 정치세력은 현재의 수평적 다원론,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의 쌍두마차론 등 시민운동론적 선동에 수수방관해서는 안되며 적극적으로 투쟁해야 한다. 반대로 노동대중의 정치운동이야말로 시민운동의 전형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와 다른 형태의 시민운동은 적어도 지금과 같은 과도적 시기에 있어서는 중산계급적 이해에 기반한 소부르주아운동의 가면에 다름 아니다.

셋째로, 현재 시민운동이론의 실천적 조직으로서 경실련 등의 성공에 관한 평가이다. 우리는 각종 언론보도 및 자료를 통해 경실련 등 시민운동단체의 성공소식을 잘 알고 있다. 그 중 주종을 이루는 평가 가운데 하나가 마치 경실련이 남한 사회의 객관적 조건의 변화에 부응하여 새롭게 부상하는 운동세력을 제대로 포착하여 사회주의운동을 대체할 수 있는 이론적, 실천적 대안으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말 이러한 평가는 웃기는 얘기가 아닐 수 없으나 어차피 정치운동이 정치적으로 각성된 인간들의 주도적 힘을 통하여 발현된다는 측면에서 볼 때는 일말의 진실이 있다. 경실련의 성공비밀은 어느 정도는 내부에 있다. 그것은 바로 운동주체들의 탁월한(?) 역량이다. 그들은 시작전에 상당한 물질적 기초를, 정책이론적 측면에서 역량을 갖추어 계획적 실천의 모범을 보였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점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현재 경실련 등에 투항한, 불과 일년 전만 해도 노동자정당을 논하던 사람들은 결국 그 내부에서 찬밥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능력은 경실련 등 시민운동 단체가 요구하는 자질에 결코 적합한 실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본성상 소부르주아 운동일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는 역사가 웅변해 주듯이 미래가 없다. 그들이 설사 새롭게 정당적 형태로 정치세력화 한다 할지라도 시민운동은 남한 사회의 부르주아적 통치의 별명인 문민정치를 표방하는 김영삼 정권의 정치적 악세사리로 전락할 것이다. 타락한 천민적(?)남한 자본주의 정치, 경제를 자정하는 정령의 역할이라고나 할까!”1)



‘시민 없는 시민운동’의 사회적 기원

해방이후 한국에서의 사회운동은 줄곧 국민 또는 (반공) 시민운동이었다. 적어도 80년대 전까지는 그랬다. 물론 이러한 언급이 그 이전에는 진보적 민중운동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대중적 형태의 진보적 민중운동은 바로 79~80년 시기의 부마 민중항쟁과 광주민중항쟁을 경과한 이후에야 비로소 가능할 수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한국의 사회운동이 시민운동의 형태를 띤 것은 바로 한국사회가 엄혹한 군부독재 혹은 군사파시즘 체제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적 자유를 그나마 구가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야당지도자들이나 재야세력이라고 불리던 자유부르주아적 공민권 회복을 주도하던 종교․시민운동 지도자들에게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80년대의 학생운동의 경이적 증대가 사회운동의 지형을 일변시켰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사회적 변화의 근저에서 그 폭발을 준비하며 가장 심도 깊은 변화를 경험하고 주도한 이들은 바로 노동자들이었다. 대중적이며 민주적 형태의 노동자운동이 80년대 후반 한국 사회의 민주적 이행기와 거의 때를 같이 하여 해방 이후 반세기만에 분출되어 나왔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일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적어도 한국에 있어서 만큼 노동자 운동이야말로 80년대까지 상층부 중심 자유부르주아적 시민/국민운동 혹은 재야운동이라고 일컬어지는 ‘구사회운동’을 대체하고 나온 ‘신사회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80년대 후반에 새롭게 등장한 노동자 운동을 ‘신사회운동’으로 볼 만한 증거는 충분하다. 그 이전까지 사회운동을 주도하던 재야운동 세력은 직선제나 언론의 자유로 대표되는 정치적 권리가 회복되자마자 곧바로 사회운동의 영역에서 퇴각했다. 이들에게 민주화는 바로 형식적 민주주의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선거 및 의회영역에서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는 입장권만 확보된다면 그 다음 문제는 관심사가 아니었다. 이와 달리 새롭게 등장한 노동자 운동은 민주주의의 질적 확장과 그 심화가 주된 요구사항이었다. 이들은 형식적 민주주의를 넘어서 한국 사회의 사회-경제적 민주화와 함께 그 이전까지 경제성장이라는 미명하에 억압되었던 사회적 권리가 더 이상 유보될 수 없음을 천명하였고, 이를 쟁취하기 위해 힘겨운 투쟁을 벌여 나가기 시작했다.

1987~89년의 민주주의로의 이행공간에서, 시기적으로는 ‘3당 합당’이 있기 전까지 민주화 과정의 가장 큰 수혜자는 당시 제1야당인 평민당과 김대중 총재였다. 물론 노동자 계급도 일정하게 수혜를 입었다. 88년 총선에서 만일 노동자 계급을 위시한 대도시에 거주하는 서민대중이 평민당에게 투표하지 않았다면 평민당은 결코 제1야당의 지위를 확보할 수 없었다. 돌이켜 보면, 이때만큼 노동자 운동을 포함한 다기한 민중운동 세력이 공식적인 제도권 정당과 사이 좋은 관계, 공개적이고도 노골적인 지지와 정서적 유대를 향유해본 적은 없었을 것이다.

노동법도 여소야대 구조에 힘입어 다소 전향적으로 개정됐다. 지배계급이 노태우의 거부권 행사라는 궁색한 방법을 동원하고 나설 정도였으니 말이다. 임금인상이나 단일 사업장내에서 노조인정을 포함한 노동조건이 이 시기만큼 획기적으로 개선된 예란 아마 그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노동자 운동만 해도 그렇다. 노동자 파업투쟁이 발생한지 2년도 채 안된 1989년경에 이미 민주적 노동조합운동의 전국조직 건설이 일정에 올랐을 정도이니 그 발전속도는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볼 때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빨랐다.

노동자를 포함한 민중들에게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거의 처음으로 주어진 호시절을 독점자본을 위시한 지배계급이 그냥 두고 볼 리 없었다. 민중들의 행복은 그들에게는 고통이었으며, 따라서 이러한 행복이 계속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만도 그들에게는 하나의 사회-경제적 공포로 다가왔을 일이다. 3당 합당은 그래서 이루어졌다. 때를 같이하여 지배세력은 총공세를 폈다. 공안정국을 조성하고, 노동자-학생운동을 다시 폭력적으로 짓누르기 시작하는 등 한국사회의 반동적 재편을 서둘렀다.

야당에 대한 탄압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제1야당이었던 평민당의 김대중 총재는 서경원 방북사건으로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이는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수모와 치욕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미 재판이 끝나고 형이 확정된 문제를 10년이 지난 2000년에 재론하여 검찰이 재조사를 펼치고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의 억울한 과거사에 대해 ‘면소’(免訴) 해주려는 해프닝이 벌어진 것, 그리고 90년대 초반 공안정국의 주역이었던 정형근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법적 처리를 강행하려한 사실은 공안정국 당시에 맺힌 한이 어느 정도였는가는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당시 안기부와 검찰 등 억압적 권력기관이 주도한 공안탄압은 야당과 사회운동 모두를 포함한 정치적 반대세력에게 초법적인 공권력 사용을 통해 공포를 조성함으로써 순치와 고립을 목표로 한 고도의 정치전술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제1야당 총재에 대한 탄압이 그 정도였으니 여타 민중, 사회운동 영역에 대한 탄압은 어떠했겠는가. 특히 노동자 운동에 공안탄압이 집중되었다.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이후 3년이 조금 넘는 시기 동안 구속된 노동운동 관련 시국사범은 노동단체 구성원 197명을 합쳐 모두 1,736명이나 되었다. 노동자들의 구속자는 해가 거듭될수록 증가하여 1991년 7개월 동안에는 하루 평균 1.8인에 이르렀다. 이러한 규모의 숫자는 5공 하의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나 남부 유럽 등 70~80년대 민주적 개방을 경험한 나라에서도 노동운동에 대한 이 정도의 탄압은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2)

하지만, 공안정국 전술은 폭력이 수반된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단기적으로는 매우 저렴하고 효율적인 방법이었으나, 장기적으로는 상당한 비용이 드는 방법이었다. 결국 공안정국은 ‘강경대 군 타살사건’이라는 예기치 않은, 그러나 그러한 탄압정책에 내재한 사건의 발발로 노태우 등 군부파시즘 잔재세력의 정치적 몰락을 가져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안정국이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다고 결론짓는 것은 단견이 아닐 수 없다. 공안정국은 두 가지의 중요한 권력자원을 지배계급에게 마련해 주었다. 하나는 과거 자유부르주아적 시민운동세력이 주도한 반독재투쟁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던 언론을 전면 보수-반동화하여 새로운 권력진지로 확보해 준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민중운동세력의 일각을 허물어서 이른바 시민운동이라고 하는 중간계급 주도의 사회운동 영역을 확보하게 해준 것이다. 이 두 가지 사태는 동전의 양면이며, 노동자 운동을 위시한 진보적 사회운동의 급진화와 사회혁명에 대한 유산계급의 공포를 반영한다. 사실상 이때부터 시민운동은 보수언론의 그 비싼 지면배려와 부양 없이는 단 하루도 그 존재근거를 발견할 수 없는 밀월관계를 맺게 되었고, 그 대가로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갖게 되었다.

1990년대 초반은 한국 사회에 다소간의 민주적 공민권만 회복된 채 매우 불안정하고, 형식적으로는 의회민주주의라는 외피를 걸친 ‘의사 민주주의(facade democracy)’이며, 실제로는 이완된 파시즘이라는 억압권력의 작동이 그대로 유지되던 바로 그러한 때였다. 시민운동의 효시라 할 수 있는 경실련은 바로 이 시기에 태어났다. 정말 아니러니컬 하지 않은가. 자유 민주주의가 안착되고 노동조합 등 구사회운동의 보수화와 현실안주적 성격에 반발하여 나타난 후기자본주의 서방세계의 ‘초현대적’ 시민운동이 한국에서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재생한지 10년도 못된 시점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지 채 5년도 안된 노동자 운동을 구사회 계급운동으로 치부하며, 그것도 가장 반동적인 3당 합당 및 공안정국과 거의 때를 같이 하여 태어났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치고는 대단한 우연이 아닐 수 없다.3)

한국에서 시민운동의 등장이 지닌 정치적 함의와 그 시대적 배경의 부조응과 역설은 뒤로 제껴둔 채, 때아닌 시민사회/시민운동 논쟁이 가열됐다. 이제 학자들은 한국이 얼마나 비민주적인 국가였으며, 억압적 사회였는가, 지난 시기 개발독재의 근대화 과정에서 민중들이 흘린 피와 땀, 눈물과 고통이 얼마이며, 따라서 어째서 그들의 사회-경제적 권리가 더 이상 유보될 수 없으며, 옹호되어야 하는가를 설파하기보다는 한국의 민주화가 얼마나 괄목할 만큼 진척되고 있으며, 서구 사회의 그것에 접근하였는가를, 아니 얼마나 닮아가고 있는 가를 설명하기에 바빴다. 그래야만 자본주의사회라는 사회-경제적 규정성과 자본의 이윤수취와 경제적 착취를 통한 사회계급적 관점에서 작동하는 노동자-민중 정치가 시대착오적인 80년대식 정치로 기각될 수 있었다. 또 그래야만 사회계급적 영역과는 별도의 시민사회라는 자율적 영역과 거기서 작동하는 시민운동이라는 새로운 사회운동의 영역이 논리적으로 확보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92-3년에 등장한 시민사회론과 이에 입각한 시민운동론이 그 각론에서 약간의 차이점이 발견될 수 있을지 몰라도 상술한 문제의식을 일반적으로 담고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주장들은 한국 사회의 현실을 감안할 때 대단한 강심장이 아니면 제기될 수 없는 것이었다. 서구 사회에서 래디컬한 신사회운동 또는 시민운동은 긍정적 의미에서건, 부정적 의미에서건 1960년대 말과 70년대 초반에 전개된 일련의 정치-사회적 위기, 곧 68혁명을 토양으로 자라난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회복된지 5년도 채 안된 시점에서 등장한 시민운동은 서구 사회의 오랜 민주화 투쟁과 계급투쟁과정을 관념적으로 극복했다. 이러한 사회내적, 역사적 토대 부재야말로 한국의 시민운동을 ‘시민 없는 시민운동’으로 규정케 하는 또 다른 이유이다.

결과적으로 1990년대 초반에 불어닥친 시민사회논쟁은 한국의 사회과학 시계와 서구의 사회과학 시계를 거의 동시대의 것으로 만들어 주는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그 이유는 서구에서도 시민사회/시민운동론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1980년대에 들어서야 가능했기 때문이다. 시민사회/시민운동론을 만국 공통어요 동-서양 모두에 보편타당한 언술로 자리매김함으로써, 그러한 시민운동이 가정하고 있는 논거 역시 거의 동일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특징으로 시민사회/시민운동론은 공히 근대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핵심적인 사회-경제적 규정성으로서 자본의 지배와 그에 따른 다기한 형태의 착취구조를 ‘경제적 본질주의’로 기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좀더 학술적으로 말하자면, 시민사회론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비판을 더 이상 진전시키지 않는다. 또 그래야만 노동자 운동을 구사회운동으로, 근대적 사유와 사회구조에 포획된 운동으로 비판하고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의 지배’라는 정치경제적 현실을 기각한 채 ‘영향력의 정치’와 ‘자기제한’적 운동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시민운동은 실제의 정치적 현실에서는 현실의 정치사회적 지배세력과 상당히 해피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한국에서는 더 더욱 그랬다. 지하철 노동자들의 파업을 시민의 발을 볼모로 한 집단 이기주의의 발로로 규정하는 시민운동은 관변단체가 아니고서는 아마도 전 세계에 한국의 시민운동단체들이 거의 유일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특히 한국에서 지배세력과의 밀월관계, 그리고 자본의 지배에서 벗어난 시민사회라는 환상을 깨뜨린 사태는 예상보다 일찍 찾아왔다. 그것은 지구적 차원에서 전개되는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기획의 보편화 과정과 반동적 공세 때문이다. 시민사회론자들이 가정하는 지구적 시민사회란 결국 신자유주의적 시민사회임이 밝혀지고 있다. 관념적으로 기각된 자본지배라는 단단한 현실이 자본운동의 결과로 그 실존을 입증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역설적인 사태전개인가!



신자유주의와 시민운동

자본의 새로운 지배형태를 신자유주의로 규정하고 비판하고 나선 것은 노동자-민중운동 세력이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론-현실적 규정을 확보함으로써, 이에 대한 저항과 국제적 연대를 모색하는 돌파구를 열게 한 것은 좌파, 또는 맑시즘적 사회과학의 귀중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1990년대 중반까지 부르주아 사회과학계 내에서 자본의 새로운 운동양식과 지배양태를 신자유주의로 규정하는 것을 거부해왔다는 사실이 이를 더욱 잘 반증해준다. 우익 이론가인 공병호 전 자유기업센터 소장 역시 신자유주의를 아무런 역사적, 학술적 근거도 없는 좌파가 만들어낸 허구적 담론이라고 일갈한 바 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는 지금 현재 거의 보통명사화가 되어 가고 있지 않은가.

신자유주의가 전 지구적인 규모로 확산되고 그 지배권을 넓혀감에 따라 한국 사회 역시 그 가시권 안에 들게 되었다. 한국에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이에 입각한 사회개혁은 김영삼 정권의 이른바 ‘세계화’ 전략과 함께 OECD 멤버로 정식 가입하는 계기를 통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김영삼 정권의 신자유주의 개혁은 예상치 못한 노동자들의 노동법 개정에 반대하는 총파업투쟁으로 좌초되었다. 노동자-민중의 정치적 진출에 결국 지배계급은 금융위기와 IMF 사태라는 한국을 초유의 사회-경제적 위기로 몰아 넣는 극약처방을 단행함으로써 그나마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단행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자임하고 나선 것이 바로 김대중 정권이다.

김대중 정권의 등장과 IMF-신자유주의 개혁이 본격화됨에 따라 시민운동진영은 딜레마에 처하게 되었다.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반대할 것인가, 찬성할 것인가, 만일 반대한다면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추진하는 김대중 국민의 정부와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되어야 할 것인가 등등. 이러한 딜레마의 일단은 시민운동의 대표적 이론가라 할 수 있는 조희연 교수의 정세진단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 조희연 교수에 따르면, 김대중 국민의 정부의 등장과 IMF-신자유주의 개혁이라는 새로운 상황은 ‘진보적 사회운동’에게 다음과 같은 3중의 과제를 제기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개발독재 유제를 청산하는 구(舊) 자유주의적 개혁,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사회-경제적 민주화의 과제, 그리고 일반민주주의의 문제로 제기되는 “이른바 ‘신좌파’적 이슈영역에서 진보적 운동의 확충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4)

“이런 전제 위에서 볼 때, 김대중 정부의 개혁에는 일종의 이중적 전선이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먼저 개혁의 경제적 성격을 둘러싼 전선을 들 수 있다. 이것은 김대중 정부가 한편으로는 세계체제적인 수준에서의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압력을 받고 있으며(그것을 배경으로 하여 ‘시장주의적 개혁’을 강제하려는 대자본 등의 압력), 다른 한편에서는 아래로부터의 민중적 압력(반신자유주의적 압력)을 받고 있는 데서 비롯된다. 경제정책 기조 상에 있어 신자유주의적인 흐름과 그에 반대하여 민중적 복지를 관철하려는 흐름간의 대립이다”5)

“그런 점에서 김대중 정부의 개혁은 2차 대전 이후의 사회민주주의적 진보에 대항하는 신보수주의와는 달리 ‘구(舊) 자유주의’적 개혁을 둘러싼 전선 위에 위치하고 있다. 19세기에 존재하였던 구자유주의는 이전의 중상주의적인 전근대적인 경제질서에 대한 개혁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동시에 그것은 경제질서의 자본주의적 정착과 합리화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김대중 정부의 개혁과제는 일종의 ‘신중상주의적인 개발독재적 예외국가’ 하에서 왜곡된 시장질서에 대한 민주적 개혁의 과제를 가지고 있다.”6)


조희연 교수의 논거를 그대로 따르자면, 현재의 국면에서 진보적 사회운동은 서구사회에서 자유부르주아가 주도했던 자유주의 운동-일반 민주주의적 신사회운동-민중민주주의적 반신자유주의 운동을 모두 전개해야 할 판이다. 하지만, 이러한 세 가지의 운동적 과제는 그 역사성에 있어서 만큼이나 이론 내적으로도 상당한 모순관계에 있다. 조희연 교수의 경우는 이 세 가지 사안에 숨겨진 모순과 상호 적대적 관계를 시민운동의 과제로 나열함으로써 사실상 봉합하는 해결양식을 취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나열적 봉합에도 불구하고, 일정하게 조희연 교수의 핵심적 문제의식을 읽어 낼 수 있는 언급이 발견된다. 그것은 김대중 정권의 성격에 대한 조희연 교수의 규정이다. 그에 따르면, 김대중 정부의 정책기조를 일반적으로 신자유주의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거시적 규정성으로만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중범위적 수준에서의 계급적, 사회적 투쟁의 효과에 따라 김대중 정부의 정책기조의 편차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글로벌한 차원에서 신자유주의적 압력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의 존재맥락과 서구 신자유주의 정부의 존재맥락의 차이가 강조될 필요가 있다. 즉 탈(脫) 복지국가화의 맥락에서 제기되는 신자유주의와 반(反) 개발독재화의 맥락에서 제기되는 신자유주의는 다르고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계급본질론적, 결과론적 측면에서 신자유주의 정권이라는 것은 맞다.”7)

그러나 내 생각은 이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 김대중 정권을 신자유주의 정권, 그것도 지구상에 몇 안되는 가장 급진적인 신자유주의적 정권으로 규정하는 것은 계급본질론적 측면도 아니며, 결과론적 측면도 아닌 비할 데 없이 구체적이며 정확한 규정이다. 지금 한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사태의 핵심은 ‘총성없는 칠레화’, 곧 ‘신자유주의적 벨벳 혁명’인 것이다. 조희연 교수는 사회운동세력은 수구세력에 대항하는 구자유주의적 개혁투쟁과 신자유주의적 시장개혁에 반대하는 민중민주주의 투쟁이라는 이중전선에 위치하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김대중 정부의 집권으로 구자유주의적 개혁이 신자유주의적 방식으로 실현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도대체 현실에 있어서 어떻게 자유주의적 개혁에 찬성하면서도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이 구분될 수 있는 지 이해하기 힘들다.

이 대목에서 송호근, 신영복 교수의 낙천낙선운동과 시민운동에 대한 평가를 소개하고자 한다. 여기서 내 주장을 강변하기보다 비교적 비당파적이며 중립적(?) 인사의 말을 인용하는 이유는 이러한 인용이 시민운동의 딜레마와 함께, 낙천낙선운동과 같은 자유주의 운동과 반신자유주의적 민중민주주의적 투쟁의 양립이 불가능하다는 필자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송호근 교수가 시민운동에 대해 그간 상당히 우호적인 인사였음을 먼저 지적하자. 물론 송호근 교수 역시 그 어떤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의 속성상 어느 하나에 ‘베팅’하지 않고서는 정확히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는 딜레마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민주주의라는 두 가지 기획에 내재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인용으로는 충분히 경청할만한 가치가 있다.


“중․후진국의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성취하자마자 시장개방을 통해 선진자본과의 무한경쟁상태로 돌입해야 함을 깨닫는다. 시장개방과 지유무역의 단기적 결과는 극단적인 사회분절과 계층갈등이며 어렵사리 유지해 온 사회안전망의 전면적인 축소로 나타난다. 이 경우 국가가 선택할 여지는 현저하게 좁아지며 그런 만큼 민주주의는 위태로워진다 … 시민파워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자아내는 상충적 결과를 두고 딜레마에 직면한다 … 한국의 시민운동도 이런 딜레마에 갇혀 있는가? 한국의 시민운동은 민주화 이후 권력을 견제하고 개혁정치의 성공을 위해 범시민적 지혜를 모아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경제난국의 와중에서 비판의 방향을 잃고 제 몫을 못한다는 느낌도 든다. 민주적 명분에 집착하면 경제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일 것이다.”8)


요컨대, 시민운동은 결코 슈퍼맨이 하는 운동도 계급중립적인 운동도 아니다. 결국,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변혁이냐 아니면 신자유주의냐 라는 두 가지 길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이러한 딜레마 앞에서 시민운동은 조희연 교수가 위에서 지적한 진보적 사회운동의 세가지 과제 가운데, 구자유주의적 개혁을 실현하는 길을 주로 택해왔으며, 낙천낙선 운동 또한 그러한 노선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선택이 신영복 교수의 날카로운 지적처럼 한국 사회에서 보다 절실한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핵심적 과제를 결과적으로 주변화시키는 사태를 초래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IMF상황에 대한 국민주의적 대응, 세대교체론, 낙천낙선 시민운동 등 최근의 현안들이 과연 무엇을 우회하고 있으며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를 직시하는 일이다. 그것이 갖는 부분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사회의 진정한 민주적 변혁을 주변화 하거나 유보, 우회하는 정치적 우민화에 기여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미성년자 매매춘 단속이 광범한 지지를 받고 있는 최근의 상황이 어떤 점에서 매우 상징적 성격을 보여준다. 미성년자 매매춘이 매매춘 그 자체를 대속(代贖)하고 있기 때문이다.”9)



신자유주의 시대, 진보적 사회운동의 과제

나는 지금까지 ‘시민 없는 시민운동’의 사회적 기원을 중심으로 한국에서의 시민운동의 성격과 현주소를 일별 해 보고자 했다. 한국 사회 민주화 요구와 시민운동 탄생 시점의 부조응이 이른바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 초래된 핵심 원인이며, 이러한 원인의 자명한 결과로써 이후에도 사회-경제적 민주화라는 실질적 민주화의 과제를 지엽적이고 말단적인 문제로 주변화 하는 사태를 초래했다. 그러다 보니 시민운동은 모든 정치-사회영역을 초월할 수 있다고 믿고, 그런 한에서 모든 것을 하려는 식의 이중적 의미에서의 ‘슈퍼 운동’으로 자기를 규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시민운동은 자기 위치를 찾아야 한다. 민중민주주의적 과제를 해결하는 문제의식을 지니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진보적 시민운동의 본령이랄 수 있는 일반민주주의적 과제의 해결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운동세력은 집권세력을 포함한 지배세력에 대한 독자성을 명백히 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실용적으로 접근할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물음은 사회운동의 존립 이유를 묻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본인들은 아니라 해도 한국의 시민운동은 공식문서에서 규정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가장 잘 정치화되어 있는 자유주의 운동세력이자 진보적 사회운동의 본령에서 벗어난 집권층의 외곽운동조직, 곧 ‘친정부적 비정부조직’(Pro-Go-Ngo)으로 규정될 것이다.

물론 지금의 정치현실 속에서 그 사회적 기원만을 문제삼아 시민운동에게 비판을 집중하는 것은 온당하지도 현실적이지도 못하다. 비판은 부정이지 긍정 및 회복, 곧 무엇인가 실제하는 사태를 건설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빛과 어둠의 관계로도 설명될 수 있다. 시민운동을 단지 비판만 하는 것은 시민운동의 존재를 통해서 민중운동의 존재를 위치 지우려는 행위와 같다고 하겠다.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의 관계가 매번 이렇게 설정될 경우, 민중운동은 자기 긍정성을 지니지 못한 채, 시민운동이라는 빛이 존재해야 그 존재 가치가 있는 그림자의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예컨대, 매년 반복되는 선거정치와 노동자 정치운동에 대해, 그리고 현재의 이른바 ‘통일정국’,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남북한 모두를 포괄하는 ‘한반도 정치’에 자신 있게 대응할 만한 독자적 기획이 있는가. 우리는 반대만을 조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노동자-민중운동 세력에게 ‘반신자유주의’라는 원칙의 확인과 총파업의 깃발만 있을 뿐, 그것을 현실화 할 수 있는 독자적인 정치 전술 및 이론적, 물질적 토대는 여전히 부재한 게 현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신자유주의 반대’ 라는 깃발만을 흔들기에는 어딘지 허전하고 모자란, 그리고 너무 원칙적이기에 공허한 느낌을 감출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무엇무엇’에 반대하는 이른바 ‘반(反)’자 돌림 투쟁, 운동들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사회의 진정한 민주적 변혁을 주변화 하거나 유보, 우회하는 정치적 우민화에 기여”하는 그러한 류(類)의 시민운동에 대한 비판이라는 과제는 여전히 중요하긴 하지만, 그러한 비판이 그 자체로 민중운동에게 분별정립 할 수 있는 계기를 자동적으로 부여해 주는 것은 아니다. 민중운동세력은 독자적인 정치적 기획과 실천을 가져야 하며, 그럴 때만이 시민운동과의 적절한 관계설정 및 그 진보적 부분과의 공세적 연대관계를 주도적으로 구축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할 경우, 민중운동의 당면과제라 할 수 있는 민주변혁의 임무를 여전히 시민운동이 관할하고 대속(代贖)하도록 할 수밖에 없다. 민중민주주의 세력이 빛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한/노/정/연


1) 최형익, 「현대사회주의 정치이론의 제문제」, ꡔ과학과 사상ꡕ, 253-255쪽.


2)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당시에는 초등학생이었지만 이제는 훌쩍 커서 대학생이 된 울산 노동자의 한 아들은 이렇게 술회한다. “아버지는 술을 드시면 ‘노동자는 너무 약하고 작은 존재다’라는 말을 늘 하셨다. 가끔 아버지 친구분들은 ‘너희 아버지가 하는 일은 너무 힘들다. 하루 종일 공기도 잘 안통하는 배 안에서 유독 가스 마셔가며 일하고 있지’라며 탄식하듯 아버지의 열악한 작업여건을 나에게 들려주시기도 했다. 그러한 하나하나의 말속에서 난 노동자의 자식이라는 것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노동자의 슬픔이라는 것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는 작은 목소리가 이제는 큰 합창이 되어 그들이 더 이상 소외받지 않는 사회를 이루는 원동력이 된다는 자각까지 하게 되었다. 정부나 매스컴에서는 노동자를 경제발전의 주체, 산업역군이라는 미사여구로 치장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들이 노동자를 위한 마음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경제위기의 주범은 무능한 공직자와 파렴치한 기업인들이었지만, 가장 아프고 추운 시간을 가져야 했던 이들은 정작 가장 약한 노동자라는 존재였다. 너무나 불합리한 상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이 사회는 더 이상의 발전을 꾀하기 힘들 것이다” 장종진, 「노동자 장원기의 슬픔」, 백승종 엮음, ꡔ아버지, 난 누구예요ꡕ, 궁리, 2000, 51-52쪽.


3) 한국 시민운동의 효시라 할 수 있는 경실련은 1989년 7월에 비정치적 시민운동을 표방하면서 창립하였다. 그러나 1989년 벽두부터 그해 7월까지 엄청난 공안탄압이 자행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별로 없다. 그 해 3월 파업중인 현대중공업에 70개 중대 9,000명의 육, 해, 공 경찰병력이 투입되어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폭력진압으로 파업중인 노동자들을 해산시켰으며, 4월 3일에는 문익환 목사방북을 계기로 공안합수본부가 설치되어 재야 민중운동 단체에 대한 일제검색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0년 1월22일, 3당 합당이 있었다. 민중운동에 대한 공안탄압과 시민운동이 태동하는 당시 정세의 구체적 내용으로는 김구현, ꡔ한국에서 시민운동단체의 성장과 쇠퇴: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사례ꡕ, 서울대학교 정치학박사학위 논문, 1999, 71-79쪽 참조.


4) 조희연, 「김대중 정부의 구조적 성격과 변화전망」,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편, ꡔ현장과 이론2: 콜로키움 발표논문집ꡕ, 현장에서미래를, 2000, 106쪽. 조희연 교수가 진보정당운동을 포함한 사회운동세력에게 주문하는 내용은 너무 포괄적이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제기하고자 하는지가 분명치 않다. 이러한 문제는 진보정당운동에 대한 조희연 교수의 다음과 같은 주문사항에도 잘 나타나 있다. “첫째의 문제가 진보정당운동이 계급적 프로젝트이면서 동시에 국민적 프로젝트가 될 수 있느냐의 문제라고 한다면, 둘째의 문제는 진보정당운동이 계급적 프로젝트이면서 동시에 시민적 프로젝트이자 이른바 ‘탈근대적’ 프로젝트가 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조희연, 「민주주의 이행과 제도정치․민중정치․시민정치」, ꡔ경제와 사회ꡕ 제46호, 2000, 193쪽. 내가 보기에 진보정당에게 계급적 프로젝트이면서 동시에 국민적 프로젝트이며, 게다가 시민적, 탈근대적 프로젝트를 실현하는 정치조직이 될 수 있겠는가 하고 묻는 것은 사실상 실현 불가능성을 전제로 하는 문제제기로 여겨진다.


5) 조희연, 「김대중 정부의 구조적 성격과 변화전망」,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편, ꡔ현장과 이론2: 콜로키움 발표논문집ꡕ, 현장에서미래를, 2000, 94쪽.


6) 같은 책, 96쪽.


7) 같은 책, 94-95쪽.


8) 송호근, ‘시민운동, 어디에 서있나’, ꡔ동아일보ꡕ 2000년10월11일, 6면.


9) 신영복, 「강물과 시간ꡕ, ꡔ진보평론ꡕ 현장에서미래를, 2000, 제3호, 199쪽.


2000-11-1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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