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점/검
노동시간 단축운동 항로 제대로 잡아가고 있나?
긴급점검
이 은 숙
연구기획실장
노동시간 단축을 둘러싸고 근래 몇 년간 진행되고 있는 노동자
투쟁과 논의들의 연장선에서 올 하반기부터는 법제화 가능성이
열리는 듯했다. 정부 쪽에서도 9월에 노동시간 단축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어 현실감이 덧붙여지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자본측은 경제단체장 선언 형식으로 경제위기가 재발할
가능성이 있다면서 노동시간 단축 논의 자체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노동시간 단축 법제화 가능성은 다시 불투명한
상태에 빠질 공산이 커졌다. 그런데 문제는 법제화의 시기에
있는 것 같지 않다는 데 있다. 노동시간 단축의 필요성과 그
요구가 지향하는 목표 자체가 경제위기 재발 가능성을 걸고
나오는 자본측에 의하여 훼손되거나 왜곡될 가능성이 증대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노동시간 단축 법제화 논의가 노사정위원회
틀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 그 가능성을 훨씬 높여놓고 있다.
더욱이 7월 정부 쪽에서 발표된 노동시간 단축과 관련한 보고서
한국노동연구원, ꡔ근로시간 단축의 쟁점과 과제 -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근로시간 단축 도입방안과
정책과제ꡕ, 2000.7.28.
에서부터 지난 11월 민주노총이 주최한 정책토론회 민주노총,
「노동시간 단축의 쟁점」 정책토론회,
2000.11.29.
에 이르기까지 현재의 논의지형을 들여다보면 그러한 우려는
더욱 커진다. 노동시장 유연화를 필두로 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지속됨으로써 노동자 투쟁이 계속되고 있는 지금
시기에 노동시간 단축운동은 무엇보다도 구조조정에 대한 투쟁의
맥락에서 그 의미를 획득할 수 있어야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II
현재 노동시간 단축 관련 논의에서 핵심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정부 및 자본측에서 주로 연간 단위를 기준으로 노동시간 단축
논의를 붙여가는 점과 적용범위와 시기에서 단계적으로 추진할
것을 주장하고 있는 점이다. 연간노동시간을 기준으로 하는 것은
노동시간 기획에서 사용자에게 더 높은 수준에서 더 많은
유연성과 재량권을 부여함으로써 노동시간 단축의 실질적인
결과가 노동자의 자유로이 처분할 시간 확대와 일없는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데로 귀결될 수 없게 만들
소지를 대폭 확장시킨다. 또한 단계적으로 추진한다는 것은
노동자 내부의 분할과 차별화를 심화시킬 것이라는 점에서
노동시간 단축의 의미를 크게 훼손하게 된다. 이 두 가지 점은
노동시간 단축의 방향과 목표를 지금 추진되고 있는 구조조정의
연장선에 묶어둘 수 있는 주요한 장치이다.
당초 현실에서 노동자들이 공감하고 요구했던 노동시간 단축의
필요성과 목표는 노동조건의 개선 즉 실업문제 해소를 포함하여
전반적으로 노동자와 민중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데에
있었음은 당연하다. 노동시간 단축이 만일 자본측이 필요로 하는
노동자의 시간‘유연화’와 임금‘절감’으로 귀결될 것이라면
노동조건 악화는 필연이고 따라서 노동자의 요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초과노동시간과 관련한 논란도 계속되고 있는데, 정부와 관변
그리고 자본측의 입장은 장시간 노동이 원천적으로 인건비를
줄이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자본측에 의하여 주어진 문제라는
점을 은폐하면서 그로 인해 실질적으로 임금보전을 위하여
초과노동시간을 감내하고 있는 노동자의 일반적인 현실을
호도하고 있다.
III
이처럼 정부 및 자본측의 노동시간 단축과 관련한 정책 방향은
무엇보다도 노동시간을 노동시장 유연화 및 구조조정과
연계시킴으로써 구조조정 반대투쟁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노동시간 단축운동을 자본의 경쟁력 논리에 재편입시키려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결국 노동시간을 단축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대해 자본측의 요구에 맞춰 새로이 기획하자는 것
이상이 아니다.
더욱이 노동시간 단축이 단계적으로 실시될 경우 그러한
노동시간 단축의 1차적인 혜택을 받을 공산이 큰 대규모 혹은
공공부문 사업장의 조직된 노동자들을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 및
비정규직 노동자와 지금보다 더 분할시킬 것이다. 노동자 상층에
귀족을 만들어 그들로 하여금 같은 노동자를 지배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자본측에게 가장 효율적인 노사관계 전략이 된다는
것은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시도되고 있는 자본의 지배전략이다. 당연히 그 결과는
노동자계급 내부의 양극화 심화이고 노동조합 운동의 관료화와
왜소화, 그로 인한 노동조건의 전반적 악화이다. 그럼으로써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추진된 노동시간 단축이 오히려 전체
노동자계급 차원에서 보면 전반적인 노동조건 하락을 초래하고,
때문에 노동시간 단축의 취지로 강조되고 있는 ‘삶의 질 향상’
등과는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으며, 보다 결정적으로는
노동자간 연대의 가능성이 그로 인해 차단된다는 점이
핵심적으로 문제이다.
자본측이 노동시간 단축에 새삼 반대입장을 밝힘으로써
노동자운동이 보다 분명하게 자기 요구를 정립하지 않는 한
중립자적 외양을 강조하고 있는 정부가 이전보다 더
자본편향적인 정책을 구사할 가능성은 높아졌다. 경제상황과
관계없이 항상 자본측은 노동시간 단축이 없는 상태에서 임금 및
생산성과 노동시간을 연계시키는 데 더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그들의 속성인 반면, 정부는 노동자계급 대중이 더 이상
굴종적이지 않은 현재의 노사관계 상황에서 중립자적인 외양을
써야 하는 데다가 구조조정 압박 때문에 노동시간 단축문제를
구조조정 추진의 맥락과 어떻게든 연계시키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정반대로 노동자에게 노동시간 단축의 필요성은 여전히
동일한데, 주요하게는 경제위기와 함께 급속히 증대하고 있는
고용에서의 불안정성과 비정규직의 확대, 만성화되고 있는
고실업, 이로 인한 노동조건의 악화에 대응하려는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노동시간 단축운동은 그러한 상황을
심화시키면서 전개되고 있는 구조조정에 대한 반대투쟁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즉 노동시간 단축이 의미가 있으려면 여전히
실업 및 비정규직 노동자를 양산하고 있는 구조조정과 노동시장
유연화가 전체 노동자와 민중의 노동과 삶의 조건을 심각하게
악화시키고 있는 상황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실질적인 내용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은 자본의 위기 논리 및 경쟁력강화
목표와는 무관하게, 오히려 그러한 상황으로 인해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는 삶의 현실을 주체적으로 타개해 나가고자 하는
운동이다.
IV
이와 같이 볼 때, 노동시간 단축의 목표 및 방향과 관련하여
노동자계급운동이 검토할 첫 번째 과제는 현시기 ‘구조조정’의
성격을 분명히 하고 대응하는 것이다. 대중적으로 노동시간
단축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민주노총은 올 연초 3대 과제의
하나로 법정 노동시간을 40시간으로 단축하고, 연간 2000시간
노동 쟁취와 휴일․휴가 확대를 요구하면서 그 목표와
관련하여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 축소를 통한 삶의 질 확보’와
‘사람 자르기식 구조조정에서 고용창출(유지형)․민주적
구조조정’(「민주노총 3대 요구안 해설」,
2000.3)을 위해서 라고 제시한 바 있다. ‘삶의 질 확보’는
그렇다고 해도 ‘고용창출(유지형)․민주적 구조조정’을
위해서 라는 것은 삶의 질 확보조차 담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현시기에 노동자계급에게 요구되고 있는 노동시간 단축의 필요성
혹은 목표와 정면으로 배치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유는
구조조정의 계급적 성격 자체가 이미 민주적일 수 없는 그리고
고용창출 혹은 고용유지적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민주적 구조조정’ 혹은 ‘고용창출(유지형) 구조조정’은 그
말들 자체가 현시기 형용모순이다. ‘민주적 구조조정’ 혹은
‘고용창출(유지형) 구조조정’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일종의
‘정책적 대안의식의 과잉’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들은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주체가 노동자계급이 되었을 경우에나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간 경쟁이 국경을 넘어 극도로
격화되어 있는 현시기의 한국에서 ‘구조조정’은 이미 ‘사람
자르기’를 자기논리로 전제하여 정리해고제와 변형시간제 및
파견노동제 등을 기초로 진행되고 있다. 만일 ‘민주적
구조조정’을 목표로 해야 한다면 정리해고제와 변형시간제 및
파견노동제 등 노동시간 유연화를 위한 법제도적 장치들이 우선
폐지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노동시간 단축운동은 구조조정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구조조정의 법제도적인 장치들을 폐지해 나가는 연장선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노동시간
단축은 ‘민주적 구조조정’이건 무슨무슨 구조조정이건
구조조정을 위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와 민중의 삶 자체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노동시간 단축운동은 오히려 현시기의 구조조정
그 자체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반대투쟁인 것이다. 노동자계급이
노동자와 민중의 삶 자체를 위해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하고
투쟁함으로써 국가와 자본이 구조조정의 방향을 바꾸지 않을 수
없도록 강제하는 것은 현시기 노동시간 단축운동의 또 하나의
목표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노동시간 단축의 방향 및 목표와 관련하여 노동자계급운동이
고려할 또 하나의 핵심 지점은 변형노동시간제 문제이다.
노동시간 단축은 만일 주40시간 노동을 확보하고자 할 경우, 1일
8시간, 주 5일 근무제 등으로 1일 노동시간 개념이 명시될
필요가 있다. 1일 노동시간의 개념을 버리고 주당 노동시간
내지는 연간 노동시간을 앞세우는 것은 각종의 변형노동시간제를
채택하면서 노동자․민중의 삶과는 무관하게 생산성을
추구하는 자본의 ‘노동력 유연화’ 그 중에서도 노동시간
유연화를 용인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노동시간 단축의 효과가
노동자와 민중의 삶의 조건 향상으로 이어지지 않고 자본측에
귀속되는 잉여노동의 비대화로 이어지는 지름길이다. 지금
시기에 필요한 것은 노동시간의 단순한 길이를 줄이는 것만이
아니라 노동자 1인당 노동의 경감이다. 이를 위해서는 1일
노동시간 규정을 엄격화함으로써 노동시간 단축이
변형노동시간제로 인하여 훼손될 수 없도록 강제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세번째로, 노동시간 단축운동은 비정규직 노동자와 미조직노동자
그리고 뿐만 아니라 비고용 노동자까지도 포괄하여 전체
노동자계급의 노동조건 향상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된다.
현재까지는 생산력 발전의 성과가 오로지 자본측 일방으로
귀속되고 있고 그 결과 사회적 부의 양극화가 심화되어 왔다.
사회적 생산력 발전의 결과가 자본측 일방으로가 아니라
노동시간 단축과 생활임금의 보장을 통하여 노동자와 민중에게
귀속되는 통로를 형성함으로써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회관계를
모색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과잉축적 모순의 심화에 따라
자본측의 자본축적의 위기는 가속화되고 있으며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은 그와 동일한 맥락에서 노동자계급에게
끊임없이 유동화될 것을 강요하고 있다. 자본측이 조직되지 않은
부문이나 비고용노동자 혹은 비정규직 노동자를 조직된 부문이나
고용노동자 혹은 정규직 노동자를 끊임없이 분할하고 노동자간
구직경쟁을 조장하면서 생산성과 이윤을 추구하기 때문에,
노동시간 단축운동은 조직된 노동자 내지는 대규모 혹은
공공부문 사업장의 정규직 노동자에게만 귀착되는 운동으로
왜소화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노동시간 단축운동의 방향에서
‘단계적’ 적용을 반대해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요컨대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실질적으로 노동자와 민중의 삶이
윤택해지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생산력 발전의 성과가 전체
노동자 1인당 노동 양의 경감을 통하여 사회화되는 과정으로서의
노동시간 단축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노동시간 단축운동이 궤도에 오르게 된다면 노사정
조합주의 방식으로 법제화되기 어렵다손 치더라도 노동시간
단축의 본 뜻이라고 할 수 있는 노동자와 민중의 생활조건
향상에는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 계급
대중의 삶 속에서 실제로 생활임금을 기초로 한 1인당 노동의
경감과 함께 일할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는 비고용 노동자에게
일할 권리를 부여할 수 없는 노동시간 단축이 어떤 의의를 가질
수 있겠는가? (2000.12.10.)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