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노동운동의 민주적,계급적 발전과 노동해방 주간동향과 초점 > 동향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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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06 19:11:13
박성인
[미래연대] 비정규직 노동자투쟁, 그 새로운 전환을 주목하자!, 2005.10.05.
비정규직 노동자투쟁, 그 새로운 전환을 주목하자!
<미래연대>2005·10·05

들어가며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대략 5년 전쯤의 논쟁이 생각난다. 당시 비정규직 운동은 갓 출발점에 있었고, 활동가들의 투신이 막 시작되려는 찰나였다. 비정규직 운동이 갖는 잠재력에 주목한 우리는 대공장 운동에서 비정규직 분야에 역량을 투입하자고 요구했다. 그러자 많은 타 그룹 동지들이 그것에 대해 정규직 운동을 포기하는 것이며, 사실상 대공장 운동을 청산하는 것이라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에 우리는 몇 가지 근거로 반박했다. 첫째 비정규직 분야에 역량을 투입하는 것은 대공장 운동에서 철수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왜냐하면 비정규직 분야는 이제 대공장의 중요한 한 축을 차지하는 대중적 분야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대공장 운동을 정규직 운동만으로 좁히고, 비정규직 운동은 대공장 바깥의 별도의 운동으로 규정하는 것이 편협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관점이다.

  둘째 정규직 노동자들과의 계급적 협동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논점은 계급적 협동을 위해서라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자주적 운동이 조직되어야 한다는 점에 있다.

  셋째 제한된 역량 하에서 역량 투입의 순서는 상황과 조건에 따라 바뀔 수 있다. 현재의 대공장운동의 조건 하에서는 비정규직 대중투쟁을 먼저 전면화시키고, 여기에 정규직의 건강한 활동가들의 실천을 하나로 결합시켜야 한다. 이를 통해 대공장으로 전투적 투쟁의 분위기, 젊은 노동자들의 활력을 불어넣고, 이후 정규직 노동자들까지 다시 전면적으로 공격받게 되는 시점(즉 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의 기존 권리를 사수하기 위해서라도 전면적으로 투쟁해야 하는 IMF와 같은 대자본의 위기국면)에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대중적 공동투쟁을 전면화시켜 대공장 운동을 재편해야 한다.

  넷째 한국자본주의의 구조적 재편 경향을 과학적으로 탐구할 필요가 있다. IMF를 거치면서 한국자본주의는 격화되는 세계경쟁 속에서 탈출구를 찾기 위해 독점자본을 제외한 나머지 분야에서 착취도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그런데 중소 자본을 비롯한 한국 자본주의 전체의 생존은 바로 이 독점 대자본의 경쟁력 회복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에 중소 자본가들은 이것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 착취도 강화는 저항의 초점을 약화시키기 위한 갖가지 고용 형태와 중층화된 하청 질서를 통해 구체화되고 있다. 화물연대로 이후 표현되었던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의 비중 증대, 대기업에서 확대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중소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불안정하고 열악한 처지 강화 등이 더욱 가시화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한국 독점자본의 계획은 노동운동의 저항능력을 약화시킴을 통해서만 비로소 현실화될 수 있다. 이것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화 전략을 통해, 가령 이들에 대해서는 일정한 권리(임금과 고용)를 보장해주고 그 대신 광범위한 노동대중과의 계급적 연대를 차단하고 개량주의적이고 보수적인 관료적 노동조합 질서로 가두는 일련의 포섭 전략을 통해서 구체화되고 있다. 만약 대기업 정규직 노동운동, 그리고 이것에 주된 바탕을 두고 있는 민주노총이 일시적이고 극히 제한적인 개량의 떡고물을 과감히 거부하고 ‘노동자계급 전체의 구심으로 우뚝 서는 결단을 내리고 이를 바탕으로 노동해방으로 진군’해서 완전한 해방을 이룩하겠다는 결단을 내리지 않는다면, 87년 이래 약 14년 동안 한국노동운동을 이끌어왔던 이 부위는 방대한 계급대중과 고립되어 노동조합주의의 보수적 길을 더욱 분명하게 걷게 될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렇게 되면 계급타협이란 오직 이 부위를 통해서만 일정 기간 구현될 것이며, 나머지 90%의 방대한 노동대중은 더욱 열악한 상황으로 내몰릴 것이다. 최종적으로는 이런 식으로 노동자계급을 분할하는 데 성공한 자본가계급은 적절한 시점 혹은 이런 최소한의 계급타협의 조건마저도 흔들리는 위기의 국면에서는 대기업 정규직 운동까지 완전히 작살낼 것이다. 그 이전에 보장했던 사소한 개량마저도 그 시점에서는 송두리째 거두어들일 것이다. 그렇지만 현재 존재하는 노동해방 경향의 영향력은 이런 흐름을 차단할 수 있는 현실적 힘을 갖추고 있지 못하고, 당분간 갖출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예견되는 퇴행의 물결 앞에서 노동해방 경향은 퇴행 흐름이 상대적으로 느린 곳, 더 나아가서 비록 아직 운동의 물결로 본격적으로 합류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물결이 역류하기 시작하는 지점에 배를 띄울 필요가 있다. 이 지점의 핵심은 일차적으로 대공장 비정규직 노동자 층이고, 다음으로 중소 하청업체와 특수고용직 노동자 층이다. 이 지점에 노동해방운동의 배를 띄우고 이를 바탕으로 전체 물결을 다시 앞으로 이끌 수 있는 힘을 형성해나가야 한다. 여기에 기존 운동의 쓰디쓴 경험으로부터 조합주의적, 개량주의적 길을 거부하고 계급적 협동과 노동해방의 길을 채택한 대기업 정규직 선진 투사들을 결합시켜 조합주의의 길과는 명백히 다른 노동해방의 길을 건설해 들어가야 한다. 대기업 선진투사들은 여러 전투경험과 습득한 노동자 사상을 바탕으로 새롭게 떠오르는 하층 노동자 층을 노동해방의 방향으로 인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면서, 상당 기간 동안 대기업 정규직 운동을 장악한 조합주의적 경향에 맞서 고립을 각오한 선진적 실천을 전개해야 한다. 이 길의 최종적 종착지는 독점기업의 정규직 노동자들을 대중적 계급투쟁에 합류시키면서 노동해방으로 진군하는 것이다.

  이상이 주체적 역량을 객관적으로 타산하면서 동시에 물결의 흐름들을 면밀하게 고찰한 가운데 움켜쥐는 핵심고리로 우리가 5년전에 제시했던 계획의 전반적 윤곽이었다. 이는 말그대로의 의미에서 가장 일반적인 윤곽이었을 뿐 모든 지점에서 통용될 수 있는 기계적인 만병통치약은 아니었다. 예외적인 지점들, 그리고 과도적 지점들은 어느 정도 존재하고 있었지만, 이것들을 모두 열거하는 것이 지금 필요치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5년 전 당시에 우리의 주장에 격렬하게 반대했던 동지들의 상당수는 지금 비정규직 투쟁의 현장에서 때로는 조역으로 때로는 주역으로 마주치고 있다. 그들은 2-3년 전부터 그 실천에서 사실상 우리의 계획을 수용하고 있다. 이것은 5년 전에 우리가 상당히 겸손한 방식으로 제기했던 바로 그 명제 - 각자 노동해방의 원칙을 가지고 실천하자. 객관적 상황의 흐름은 무엇이 올바른지를 증명해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논쟁은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고 하나의 흐름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 가 올바랐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만큼 비정규직 노동운동의 진출이 거셌고 누구도 현실을 보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자신의 존재 의의와 잠재력을 드러내는 데 몇 년 사이에 성공했던 것이다.

  5년 사이에 비정규직 운동이 이룩한 성과 덕분에 이제 우리는 새로운 과제와 마주치고 있다. 문제는 5년여에 걸친 하나의 시기를 정리하면서 다음 시기를 열어젖히기 위한 실천의 과제를 정확히 역사적으로 도출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관념적 분석의 산물이 될 수 없다. 전적으로 이것은 5년여에 걸친 비정규직 노동운동의 실천 그 자체로부터 도출되어야 한다.  

당면 상황에 대한 개괄

  최근 한국에서 주요한 투쟁들의 다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절한 투쟁이다. 올해 투쟁일기만 보더라도 이 점은 분명하다. 하이닉스, 현대자동차 울산, 아산, 전주 비정규직 투쟁, 건설플랜트, 기아 사내하청 투쟁, 지엠 대우차 비정규직 투쟁 등이 펼쳐졌거나 진행 중이고, 덤프연대, 건설운송, 화물연대 등의 특수고용직 노동자 투쟁이 예고되어 있다. 노동조합 관료층의 안정적 지위가 위협받고 그들의 반동적이고 반노동계급적인 본 모습이 여과없이 폭로되고 있는 지점도 바로 이 지점이다.

취약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비정규직 투쟁이 갖는 취약성 또한 분명해지고 있다. 울산건설플랜트 노조 투쟁정리과정, 현자 아산과 전주의 울산과의 공동 투쟁 회피, 지엠과 동희오토 등에서 나타나고 있는 노동조합 지도부의 투쟁회피 경향, 일부 특수고용직 노동조합 상층부의 비노동자적 분위기 등등은 그 취약성의 단적인 예이다. 물론 기아 사내하청 노조, 현자 울산 공장 노조를 비롯한 일부 노동조합들에서는 노동자의 원칙을 움켜쥔 간부층이 헌신적으로 투쟁을 밀어올리고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고찰할 때 특징적인 양상은 비정규직 노동자대중의 아래로부터의 자발성과 투쟁의지, 잠재력에 비한 “지도부의 취약성”이다.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대중적 물결을 받아 안고 이끌기에는 단련된 지도자들이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아직 노동자 민주주의를 통해 자기 통제력을 발휘하기에는 경험이 부족하고 자신감이 충분하지 않은 초기 단계를 거치고 있다는 점, 젊은 예비 활동가들이 막 운동에 눈을 뜨고 있지만 중간 지도부로 우뚝 서기에는 경험이 부족하고 훈련되지 못했다는 점, 그 빈틈을 뚫고 기회주의적, 조합주의적 상층 간부들이 점차 고개를 치켜들고 있다는 점들이 현재의 특징적인 약점들이다. 이런 취약성은 거세게 솟구치기 시작하는 비정규직 투쟁들이 87년 노동자 대투쟁처럼 직선적인 방식으로 진군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어느 정도 굳건한 지도자 층이 있는 경우에도 그들을 뒷받침할 중간 활동가 층의 부재 때문에 중요하고 결정적인 국면에서는 충분히 도약하지 못하고 발걸음이 멈춰버리는 일들도 일어나고 있다.
  이런 취약성은 투쟁전술과 조직적 측면에서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투쟁은 아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힘을 남김없이 쏟아붓는 대담하고도 공세적인 대중파업 양상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으며, 조직적 측면에서도 정규직 노조나 민주노총 단위에서 고착화되고 있는 관료화된 형식이 부분적으로 도입되고 있다. 총회민주주의는 충분히 살아 숨쉬지 못하고 있으며 기계적이고 형식적이며 위계적인 질서가 자리잡는 경우도 많다. 투쟁의 요구와 정신에서도 아직 단사나 업종의 테두리를 뛰어넘는 대중운동은 거의 조직되지 못하고 있다.

잠재력

  이런 명백한 객관적 취약성을 검토할 때, 오히려 의문이 드는 부분은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한국 비정규직 노동운동이 현재 보여주는 역동성과 전반적인 전진 추세가 어떻게 가능했는가일 것이다. 우선적으로, 단결하여 투쟁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대중의 열악한 상황, 그리고 이 상황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샘솟는 단결투쟁 의지를 꼽아야 할 것이다. 대중의 염원과 의지를 반영할 수 있는 최소한의 활동가들만으로도 비정규직 투쟁은 모든 곳에서 분출할 수 있는 충분한 폭발력을 갖고 있음이 입증되고 있다. 세계 자본주의, 그리고 그 한 고리인 한국자본주의의 모순이 응집된 핵심고리가 바로 그 지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폭발력이 순간적인 열정이나 활동가들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대중들을 절벽으로 밀어붙이는 자본주의의 첨예해지고 있는 객관적 모순에서 비롯되고 있는 한, 비정규직 대중의 끊임없는 진출은 의심할 바 없는 객관적 추세가 될 것이다. 이는 주체적 역량에서의 객관적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 투쟁은 더욱 저변화되고, 초기 부대의 순간적인 퇴각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활력으로 솟구칠 것임을 예고한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조의 예를 들자면, 노동조합의 운명이 위태로운 국면 국면마다 전선을 지탱하고 퇴각을 저지했던 가장 중요한 동력은 대중들의 아래로부터의 결단이었다. 세신 조합원들의 고공 농성, 5공장 농성투쟁단, 류기혁 열사 등 고비 고비마다 노동조합을 아래로부터 떠받쳤던 힘들은 소수 활동가들의 목적의식적 결단과 노동조합의 계획된 전술의 산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의 자생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노동조합을 사수하기 위해 대중들이 고비마다에서 스스로 내린 결단의 산물이었다. 방대한 대중들로부터 솟구쳐 전선을 지탱하는 결단과 희생, 헌신 등의 자생적 요소가 빠진 운동의 전진은 결코 기대할 수 없다. 물론 이 자생적 요소는 활동가들의 목적의식성과 결합할 때만 꺾이지 않고 제 길을 찾으면서 승리의 요소로 승화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대중의 자생적 활력과 에너지가 운동의 객관적 추동력이라는 점, 그리고 거대한 운동은 오직 이 자생적 힘을 토대로 해서만 제 길을 개척할 수 있다는 점을 조금이라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대중들의 아래로부터의 결단과 능동성이 투쟁의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운동, 그래서 투쟁의 하루 하루가 대중들의 아래로부터의 행동에 의해 변화무쌍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운동은 관료제에 의해 장악당한 박제화된 운동 혹은 대중의 에너지가 당장에는 발휘될 수 없는, 정체되어 있거나 퇴행하는 운동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운동의 초기 단계에서 이 자생적 에너지의 분출은 운동의 전진을 보장하는 가장 중요한 토대로 작동한다. 여러 치명적인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 운동이 상당 기간 동안 노동운동 앞에 풍부한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다음으로는 비록 노동조합 관료제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노동조합 관료제의 통제와 영향력 때문에 도처에서 심각한 약점을 드러내며 비틀거리고 있지만, 비정규직 노동운동이 아직 관료제의 영향력으로부터 상당히 자유롭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대중들의 아래로부터의 전투적 잠재력과 이것이 결합할 때, 소수의 의식적 활동가들이 투쟁 국면에서 상당히 주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

  이것은 대기업 정규직 운동에 만연해 있고 상당히 고착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전면적인 투쟁의 국면이 열리기 전까지는 거의 위협받지 않는 노동조합 관료제가 비정규직 운동에서는 상당히 수세적이게 만들고 있고, 나아가서 관료제로부터 상당히 독립적인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형성될 수 있는 여지를 확대시키고 있다. 울산건설플랜트 노조의 폭력가두투쟁, 류기혁 열사투쟁 국면에서 전비연이 울산에서 조직한 연대집회 등은 그 단적인 예다.

  게다가 한국에서의 관료제는 이제 노년기를 향해 치닫고 있다. 이 노년기의 특징은 관료제가 제한된 파업, 시위 등도 동원할 수 없을 만큼 대중들의 투쟁력과 완전히 분리되어 버리는 것이다. 반면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연대투쟁력을 극대화시킬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그리하여 관료제가 필연적으로 탄생시킨 ‘공백’을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대중들이 스스로 메우면서 관료제로부터 자유로운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전국적 차원에서 탄생할 수 있는 여지가 점점 확대되고 있다. 전비연은 이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전국적 차원에서 꼴을 갖추는 ‘잠재적 그릇’으로 당분간 기능할 것이며, 또한 반드시 기능해야 할 것이다.

관료제로부터 독립적인 아래로부터의 운동

  상황을 어떻게 고찰하든 다음은 분명하다. 만약 노동조합 관료제의 필연적인 종착역이 대중투쟁의 아래로부터의 활력을 거세하고 노동조합을 단지 ‘사무실 기구’로, ‘교섭기구’로 전락시키는 것이라면, 이 관료제의 안착화와 함께 필연적으로 부상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관료제에 의지하지 않고 아》觀壙痼?대중적 활력과 에너지를 흡수 통합 발전시킬 수 있는 ‘새로운’ 대중투쟁기구다. 이것은 ‘아래로부터의 대중적 결집’, ‘노동조합 민주주의’를 통하지 않고서는 형성될 수도, 제대로 발전할 수도 없는데, 노동조합 관료제가 노쇠화 경향을 뚜렷이 보이는 현 시점에서는 그것 없이는 노동대중의 전투적 활력과 연대의지를 바탕으로 노동운동을 밀어나갈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다.

  앞으로 전개될 한 시대는 노동조합 관료제로부터 자유로운 이 기구를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아래로부터 건설해나가고 이것을 바탕으로 전투적이고 계급적인 투쟁을 실질적으로 조직해나가는 한 시대로 기록될 것이다. 이 시대가 완결된 후, 아래로부터의 힘들을 노동조합 공식 체계(가령 민주노총과 산별연맹의 공식 체계) 장악으로까지 확대시켜 민주노총을 재탄생시키는 전망을 열 것이냐, 아니면 공식 노동조합과는 구별되는 아래로부터의 대중투쟁체를 통해 노동자 투쟁을 실질적으로 지도하고 통합시켜 나갈 것이냐는 물론 전술적 판단의 영역에 놓여 있다. 그러나 어떤 길이든 다음은 분명하다: “아래로부터의 대중투쟁을 통해 연결되고 확장되면서 하나로 통합되는 투쟁전선이 앞으로 노동운동의 운명을 결정지어나가야 한다! 노동조합 관료제에 의지하고, 그 한 자리(왼쪽의 한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노동운동의 운명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는 모든 환상은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물론 비정규직 운동이 관료제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며, 앞에서 언급한 독립적 전망이 반드시 현실화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도 없다. (87년과 비교할 때) 몇 가지 장애물을 우리는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 현재의 비정규직 운동은 노동조합 관료제가 붕괴한 자리에서 떠오르는 것이 아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때에는 한국노총으로 상징되는 노동조합 관료제는 완전히 신망을 잃었고, 오히려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반면 2005년 지금의 노동조합 관료제는 훨씬 탄탄한 기반을 갖추고 있다. 민주노총의 상층 체계가 바로 그것이다. 비정규직 대중들은 이 관료제에 문제의식을 점차 키워나가고는 있지만, 그로부터 독립적인 아래로부터의 운동의 필요성을 완전히 자각하고 있지는 않다. 이것은 상당한 전투 경험의 축적, 자신감의 고양, 운동의 폭과 깊이가 단사, 업종을 뛰어넘어 계급적으로 확장되는 것, 전국적인 흐름을 조직할 수 있는 의식적 활동가 층의 충분한 형성 등의 일련의 성장을 통해서만 비로소 길이 닦일 수 있다.  
  이런 현실 때문에 노동조합 관료제는 지금 비정규직 투쟁에 대해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우선 투쟁의 중요한 국면 국면마다 ‘교섭을 창구’로 노동조합 관료제(지역본부, 연맹 산별 관료)는 개입하면서 투쟁을 중도파탄시키고 있다. 예컨대 민주노총의 경우 비정규직 법안을 둘러싼 공방전에 ‘노사정위’를 매개로 개입해서 투쟁의 전국적 고리를 파괴하려 애쓰고 있다. 다음으로 노동조합 관료제는 막 대중들로부터 솟구쳤기에 대중적 연결고리를 잃지 않은 비정규직 간부 속으로 관료적 습성을 불어넣고 있다.

  둘째, 이미 대규모 정규직 노동조합이 바로 옆에서 존재하고 있는 대기업 비정규직 운동의 경우에는 노동조합 상층에서 대중들에 이르기까지 관료제의 영향력이 일상적으로 스며들고 있다. 정규직 대노동조합에 안착화된 상층 간부들의 관료적 분위기와 대리주의적 습성, 대중들의 수동적 분위기는 각각의 수준에서 바로 옆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일상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 영향력은 거의 매일 같이 행사되는 것이고, 또한 단지 상층부에서만이 아니라 하층 대중들에게까지 미치는 것이라 상당히 강력하다.

  대기업 비정규직 운동이 해야 할 일은 정확히 그것의 반대, 즉 노동조합 민주주의를 안착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대중들의 능동적 에너지에 기초한 살아 있는 전투조직을 확립하는 것이고, 이를 수단으로 바로 옆의 정규직 대중과 활동가들을 자극함으로써 노동조합 관료제를 대기업 운동에서 추방하는 거점이자 자극제로 기능하는 것이다. 결국 대기업 비정규직 운동의 향배는 이미 상당히 안착화되고 있는 정규직 노조의 관료제가 비정규직 운동까지 삼켜버리면서 동화시킬 것이냐, 아니면 부정적인 영향력을 과감히 돌파하면서 정규직 노조의 관료제를 타격하는 강력한 추진력으로 설 수 있을 만큼 비정규직 운동이 독립적이고 주도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느냐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상황은 오직 관료제와 노동자 민주주의, 개량주의 관료집단과 노동해방 투사들 사이의 전투를 통해서만 판가름날 것이다. 이것은 정규직 운동이나 비정규직 운동이나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기본 원칙이다. 현?정규직 운동과 비정규직 운동이 다른 점은 양자 사이의 역관계에 있다. 정규직 운동은 이 역관계가 관료집단의 편으로 확연히 기울어져 있고 대중들이 관료집단의 통제력 하에 대부분 장악되어 있다면, 비정규직 운동은 관료집단이 아직 충분히 자리잡지 못했고 활동가들이 노쇠하지 않았으며 대중들의 전투의지와 능동성, 자발성이 소진되지 않았기에(오히려 아직까지는 성장하고 있기에) 양자 사이의 역관계는 아직 어느 한 편으로 확연히 기울지 않았다. 의식적 투사들이 노동조합의 주도권을 쥐고 투쟁을 전개하는 곳에서는 역관계가 투사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상황도 발생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 노동자 대중의 투쟁력을 매장시키며 생존하고 있는 노동조합 관료제에 맞선 반격의 일차적 교두보가 있다. 우리는 이 교두보를 지속적으로 확장시켜야 하고, 이것이 어느 정도의 힘에 도달했을 때 민주노총의 거대한 대중부위를 자극하고 관료제를 뒤흔드는 전면적인 실천을 일정에 올려 관료제로부터 자유로운 진정한 대중운동을 건설해 들어가야 한다. 노동해방 투사들은 이 교두보의 선봉에 서서, 이 교두보의 전진과 함께 하면서 이 거대한 작업을 진두지휘함으로써 대중운동의 주도권을 거머쥐어야 한다.

  이와 관련 현 시점에서 일정에 올려야 할 기본 작업은 “비정규직 노동자들, 나아가서 투쟁사업장들과 정규직 투사들”을 아우르는 아래로부터의 대중적 투쟁조직의 모태를 작더라도 가시화시키는 것이다. 민주노총의 관료제가 급속히 노쇠하면서 형식적인 수준에서라도 대중들을 동원할 수 있는 힘까지도 상실해가고 있음이 평범한 대중의 눈에도 점차 분명해지고 있는 현 시점, 반면 비정규직 투쟁이 점차 본격화되고 투쟁사업장들 사이의 아래로부터의 연대가 자생적으로 활성화되기 시작하고 있는 현 시점은 관료제로부터 독립적인 대중적 투쟁기구를 아래로부터 조직해나갈 수 있는 객관적 여건이 풍부하게 자라나고 있는 시점이다. 민주노총의 관료제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음을 점차 직감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투쟁을 위해서는 적극적인 연대투쟁망이 필요하다고 확신하고 있는 투쟁하는 대중들은 민주노총의 공식 체계로부터 독립적인 대중적 투쟁기구를 두려움 없이 붙잡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점차 발전시키고 있다. 1년 전만 하더라도, 공식 관료기구의 지원에 대한 기대 그리고 연대망을 조직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투쟁경험 때문에 시기상조로 치부할 수 있었던 과업을 이제는 ‘현실의 일정’에 올려야 한다.

  아래로부터 조직되는 이 대중투쟁기구는 만약 투쟁의 선두에 선 사업장 노동자들의 적극적인 결의와 주도권 하에 시도된다면,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새로운 구심으로 빠르게 전진할 수 있다. 이를 매개로 우리는 관료제에 맞서고, 투쟁하는 대중의 열망을 전국적으로 집중시킬 수 있는 “일차적 교두보”를 조직할 수 있을 것이다. 내부 집행력의 취약성 등의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가장 적극적으로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상징적 대표체라는 점 때문에 현재로는 그런 작업의 선두에 설 수 있는 유일한 기구인 전비연의 적극적인 주도력, 그리고 투쟁사업장 연석회의와 같은 새로운 기구의 조직화 등이 적극 시도될 필요가 있다.  

과제들

  객관적 상황은 “대중들의 아래로부터의 열망과 결의의 성장, 그에 비한 활동가들의 위로부터의 지도력의 취약성”으로 우선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과제는 당면 상황에 대한 객관적 분석으로부터 도출되어야 한다. 객관적 과제는 “활동가들의 목적의식적 지도력의 체계적 고양”, 그리고 이것을 통해 “아래로부터의 대중적 잠재력을 온전하게 발휘할 수 있는 대중적 투쟁형태와 투쟁조직을 대중들의 손에 쥐어주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고려해야 할 객관적 상황은 “관료주의와 개량주의가 막 탄생한 이 운동을 자기 영향력 하에 포섭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점, 나아가서 “비정규직 운동의 일부 상층부에 관료주의와 개량주의가 어느 정도 자리잡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관료주의와 개량주의에 맞선 전투가 이제 비정규직 운동에서도 더 이상 미뤄둘 수 없는 사활적인 과제로 부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상황은 서로 맞물리고 있다. 의식적인 활동가 층의 부족이라는 현실이 비정규직 운동의 지도부에 관료적이고 개량주의적인 요소가 침투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역으로 관료적이고 개량주의적인 요소들은 대중운동의 활력과 잠재력을 가로막으면서 운동의 전진을 봉쇄하고 있다. 과제 또한 맞물릴 수밖에 없다. “개량적이고 관료주의적인 요소에 맞서 과감히 투點玖庸?대중들의 잠재력을 해방시킬 수 있는 의식적 활동가 층의 배양”이 맞물리는 핵심 지점이다.

운동의 방향성

  우선 운동의 방향성 문제를 고찰해야 한다. 개량주의와 관료주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운동을 가정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만약 자생적인 측면에만 운동을 완전히 방치해버린다면 비정규직 운동 또한 개량주의와 관료주의의 늪으로 끌려들어갈 수밖에 없다. 개량주의와 관료주의는 본질적으로 볼 때, 노동자계급의 완전한 해방이라는 전망, 즉 노동해방의 전망을 결여한 운동이 취하게 되는 필연적인 방향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필연적 논리를 87년 전후로 탄생했던 역동적인 전투적 운동이 쇠락해가는 18년의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이미 경험한 바 있다.

  게다가 87년 당시보다 제도적, 이데올로기적, 문화적으로 훨씬 더 잘 정비된 자본주의 체제, 그리고 이 자본주의 체제가 거느리고 있는 개량적 노동조합 관료제를 고려할 때, 87년 당시 운동보다 지금의 비정규직 운동이 직면하고 있는 위험성은 더 크다. 이 위험성의 핵심부에는 87년 운동이 폭발적인 승리를 바탕으로 자신감 있게 전진했던 것에 비해 지금의 비정규직 운동은 훨씬 더 어려운 조건들에 맞서면서 당분간 한발 한발 전진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 놓여 있다. 이것은 전투적 투쟁을 겁내면서 갖가지 관료적 장치를 통해 대중들의 투쟁의지를 왜곡시키고 일정한 수위 내에 통제하려는 보수적 경향이 노동조합 상층부에 빠르게 자리잡을 위험성을 보여준다. 개량의 부스러기에 마취되기 때문이 아니라 갖가지 강력한 탄압 앞에 위축되기 때문에 교섭주의, 수동성, 개량주의 등의 질병들이 오히려 확대될 소지가 있는 것이다. 개량주의란 개량의 부스러기에 마취되어서 발생하기도 하지만, 자본주의의 강력한 탄압 앞에 느끼는 엄청난 공포감과 낙담으로부터 등장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1세기 초입부의 비정규직 운동은 대중들의 투쟁의지를 한 점 남김없이 동원하는 강력한 투쟁력, 광범위한 비정규직 대중을 하나의 계급적 대열로 통합시키는 강력한 연대투쟁력을 통하지 않고서는 대중들의 절박한 요구를 결코 충족시킬 수 없다. 문제는 이런 힘들이 충분히 조직되기 전까지, 강력한 탄압을 견디고 개량주의적 감언이설을 격퇴하면서 운동을 확대시킬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이것은 전면적인 전투와 단사와 업종주의를 뛰어넘는 계급적 실천을 겁내지 않고, 오히려 바로 거기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운동인 “노동해방운동”의 대의 하에 비정규직 운동의 선진층이 얼마나 결집하느냐에 근본적으로 좌우될 수밖에 없다.  

  방향성 문제는 시기상조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 협소한 운동의 토대, 충분한 투쟁경험을 축적하지 못한 초기 단계의 선진 대중들, 열악한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터져나오는 투쟁 등은 시기상조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기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방향성 문제는 이제 물러설 수 없는 중차대한 화두가 되고 있다.

  우선 여러 비정규직 노조들에서 투쟁을 자본주의 법률이 보장하는 ‘테두리 내’에서만 전개하려는 합법주의, 투쟁과 단결의 확대보다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성과를 확보하는 데만 관심을 두는 조합주의, 대중의 아래로부터의 투쟁력의 확대보다는 교섭을 통한 실리 확보에만 주력하는 교섭주의, 단사에만 관심이 사로잡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계급적 과제에는 무관심한 단사주의 등의 독버섯들이 이미 자라나고 있고, 무시 못 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다음으로 전혀 활동가 층이 존재하지 않거나, 그 영향력이 아주 미약한 곳에서는 어용 경향이 상층부에서 주도권을 확립하고 있는 경우도 점차 빈번해지고 있다. 이것은 아래로부터의 투쟁의지를 거의 완전히 매장시키면서 노동조합을 향한 대중적 열망을 제거해버리고 있다. 심지어는 (특수고용직의 일부에서 보여지듯이) 소자본가적 경향이 노동조합 상층부에 걸터앉아 진정한 노동자대중의 요구를 왜곡시키면서 노동조합을 소자본가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한 압력판 정도로 활용하려는 일도 일어나고 있다. 비정규직 운동이 저변화되면 될수록, 빈약한 활동가 층이 만들어내는 이런 약점은 더욱 부각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노동조합 민주주의를 봉쇄하면서 노동조합을 소수 상층 간부들만의 것으로 둔갑시키고, 노동조합의 형식적 위계질서를 극단적으로 존중하면서 대중들의 아래로부터의 통제력과 자주적 결정권을 제거하는 경향도 등장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정확히 말하자면 조합주의, 즉 개량주의의 산물이다. 비록 이런 경향이 의식적 차원에서 명료하게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더라도, 그 객관적 성격은 그것 말고는 다르게 정의될 수 없다. 이런 경향은 한편으로는 성장하는 비정규직 운동을 포섭하기 위한 자본과 정부, 관료집단의 회유와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에 의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 운동이 완전히 성장하기 전에 제압하려는 강력한 탄압들에 의해서 점차 더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이는 비정규직 운동의 방향성을 둘러싼 치열한 전투가 이제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과제로 점차 부상하고 있으며, 노동해방 경향이 이 과제에 응답하기 위한 대중적 실천에 시급히 착수해야 할 필요성을 보여준다.  

  이것은 전투적 의지를 갖고 있는 예비 활동가 층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 이데올로기적 영향력 행사의 절박한 필요성을 제기한다. 물론 이것들은 추상적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당면의 투쟁 하나 하나를 매개로 하는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또한 그들이 획득하는 객관적 투쟁경험과 연동되는 방식으로 차분하게 진행해야 한다.

활동가 층의 육성

  방향성을 확립하는 것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는 과업은 활동가 층의 배양이다. 운동이 점차 저변화되면서 운동에 합류하는 비정규직 대중의 수가 늘어나는 것은 운동의 가능성을 증폭시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취약성’도 증폭시킨다. 왜냐하면 새롭게 합류하는 초보 대중들의 다수는 후진적 요소들을 함께 노동조합 속으로 가져오기 때문이다. 만약 대중적 요소의 증대에 걸맞는 “중간적 요소”(기층 활동가)들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다면, 대중들의 운동에의 대대적인 참여는 더욱 많은 대중들을 노동운동의 대의 하에 결집시키는 유효하고 소중한 계기로 작동한다. 반면 “중간적 요소”들이 충분히 존재하고 있지 않다면, 어느 정도 존재하더라도 충분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을 만큼 질적으로 취약하다면, 운동의 대중화는 질적 하락의 위험성을 내포한다. 투쟁에 대한 두려움, 수동성, 대리주의적 기대 등이 노동조합 내부에 성장할 수 있다. 또한 기회주의적 지도자들이 더욱 영향력을 확대할 수도 있다. 이 문제는 비정규직 운동의 대중화에 따라 더욱 중요한 문제로 대두될 것이다.

  해결책은 간단하다. 운동 속으로 지속적으로 유입될 방대한 비정규직 대중에 대한 선진적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중간층”을 노동조합 속에서 미리 충분히 배양하는 것이다. 아울러 운동에 새롭게 유입되는 대중적 요소들 중에서 “중간층”을 빠르게 창출할 수 있는 수단들, 프로그램들을 미리 체계적으로 준비해놓는 것이다. 노동조합운동의 방향성, 투쟁전술, 자본주의의 착취적 본질과 모순, 노동해방의 대안, 정치투쟁의 필요성, 노동조합 민주주의 등에 대해 체계적이고 압축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고 이것을 미루지 말고 실현해야 하며, 하나하나의 실천과 투쟁, 노동조합 결정사항 등을 둘러싼 풍부한 토론과 논의의 과정을 열어내야 한다.

  실천과 평가, 계획 등을 두고 이뤄지는 일상적인 토론과 논의를 교육과 밀접히 연동시키는 과정을 통해서만 “중간층”을 효과적으로 배출할 수 있다. 그리고 중간층의 배출을 통해서만 대기업 비정규직 노조처럼 거대한 대중적 기구를 효과적으로 작동시킬 수 있고, 대리주의적 실천 혹은 소수 핵심 간부들의 선도적 실천을 넘어서서 대중 파업을 비롯한 대중적 투쟁을 열어젖힐 수 있다. 또한 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투쟁의 계기들을 일상적으로 붙잡아내면서 크고 작은 일상 투쟁들을 다양하게 조직할 수 있다.

  ‘중간층’(기층 활동가)의 형성은 ‘대리주의적 한계’의 극복과 연결시키면 더욱 중요해진다. 수백 수천명의 대중들을 포괄하고 있지만, 지도자들의 수는 상층부의 몇 명으로 한정되어 있고 중간층은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다면, 객관적 상황에 대한 판단(이 판단은 전투의 시점과 형태, 수위를 판단하는 데서 결정적인 의미를 갖기에 지도력의 중요한 원천이다)을 그르칠 가능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대리주의가 불가피하게 자라날 수밖에 없다. 물론 여기서 발생하는 대리주의는 ‘관료집단’에서 발견되는 대리주의와는 질적으로 구별된다. 관료집단이 드러내는 대리주의는 대중들에 대한 책임성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중들의 자주적 참여를 박탈하면서 ‘타협과 굴종’을 통해 만사를 처리하려는 관료집단의 본성을 반영한다.

  반면 건강한 비정규직 노조에서 나타나는 대리주의는 중간층의 부재에 따라 모든 사안들에서 소수 간부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책임성으로부터 비롯된다. 크고 작은 모든 투쟁에 대해 소수 간부들이 직접 지휘하고 전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상황, 뒤집어서 말하자면 중간층 기층간부들에 의해 뒷받침되는 견고한 대중투쟁을 통해 국면을 돌파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결국 대중들에게 가해지는 피해를 최소화하고 크고 작은 투쟁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소수 간부들의 헌신성과 결단, 희생만이 당장 채택가능한 대안으로 부상하게 된다. 이들은 일상적으로 터져나오는 투쟁들을 뒤좇느라 중간층 간부들을 양성하는 장기적 과업(그러나 대중투쟁을 만들어내는 데서는 결정적인 과업)에 매진할 수가 없고, 이것은 대중투쟁의 여지를 좁혀 다시 대리주의적 책임성을 강화하는 고리가 확대되게 된다. 대중투쟁의 기회는 중간층의 부족에 의해 날라가버리거나 패배로 끝나기 쉽고, 이것은 소수 핵심 간부들의 헌신적 선도 투쟁의 필요성을 오히려 증폭시킨다.

  어느 정도 불가피하고, 또한 그 의도가 대단히 선하지만 이것도 분명 대리주의다. 그리고 대리주의의 가장 큰 약점은 대중들의 자주적 진출과 책임성을 희석화시킨다는 점에 있다. 중간층 간부들의 부재 때문에 대중투쟁에 대한 자신감을 갖지 못한 대중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저러한 공격 앞에 직면한다. 또한 그들은 자신을 덮치는 열악한 상황을 당장 개선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스스로의 대중투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그들은 소수 간부들의 헌신성과 책임성에 기대할 수밖에 없고, 심지어는 그것을 요청하기조차 한다. 최선의 경우, 그들은 주체적인 투쟁에 나서기도 한다. 그러나 대중투쟁의 엄호를 받지 못하기에 그들의 투쟁은 고립되고 그 결과 최악의 상황을 모면해야 할 필요성이 다시 전면에 부각된다. 이것은 다시 소수 지도자들에게 압력을 가하게 되고, 이들은 끊임없이 선도적 결단과 희생을 통해 당장 임박한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소수 지도자들이 영웅적인 결단으로 실천하는 경우, 이들의 희생을 대가로 당장에는 상황이 극복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결단을 통해 투쟁하는 대중들의 자신감은 보호될 수 있고, 대중과 핵심 지도자들 사이의 신뢰와 존경은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기서의 투쟁의 일차적 주체는 하나로 단결하여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상황을 돌파해나가는 대중들이 아니라 소수의 헌신적 지도자들이다. 지도자와 대중 사이의 소중한 신뢰는 사수될 수 있지만, 대중들 사이의 자주적 결합과 대중적 자신감은 충분히 증폭되지 못한다. 대중들은 자신과 주변 동료들을 먼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위를 쳐다보는 데 익숙해진다. 투쟁의 과정에서 새로운 활동가 층이 역동적으로 배출되는 일도 드물게만 일어난다. 게다가 소수 지도자들이 희생적 투쟁을 통해 날라가면, 노동조합은 비틀거리면서 위기 상태에 빠져든다.     이런 대리주의적 실천은 “중간층”을 배양하지 못한 채, 계속 확대되고 있는 대중들, 그리고 이 대중들의 다양한 부위에서 자생적으로 터져나오는 투쟁들과 마주치게 되는 헌신적 지도자들이 직면하게 되는 딜레마다. 이는 “지도자들의 준비 정도에 비해 대중들의 아래로부터의 진출이 훨씬 클 때 일어나는 부조화”가 객관적으로 만들어내는 불가피한 약점을 반영한다. 그 의도는 대단히 선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객관적 상황에 직면한 지도자들이 불행을 피할 길은 없다. 혁명, 파업 등등에서 항상 대중들의 본격적 진출에 앞서 충분하게 준비해놓지 못한 혁명집단, 지도자들 모두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바로 그렇기에 대중들이 솟구쳐 올라오는 시기 ‘이전’에 충분한 준비를 해놓고 있는가가 결정적인 중요성을 차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해방 운동가들이 항상 준비된 상태에서 상황을 맞이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피하고 싶지만, 허락된 시간이 너무나 짧다면 반면 대중적 진출은 지속적으로 빠르게 일어난다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다. 비록 패배가 불가피하더라도 대중의 선두에서 최선을 다해 투쟁하면서 패배를 맞이하는 것이다. 똑같은 패배라도 투쟁을 통해 겪는 패배는 투쟁해보지도 않고 백기투항하는 것에 비해 미래를 위한 자산을 백배 이상 남겨주기 때문이다. 중간층을 양성하는 데서도 이것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만약 성장하는 운동이라면 일시적인 패배 앞에서도 이것이 알려준 교훈을 먹고 더 진전된 투쟁을 향해 일어나는 예비 활동가 층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 때 패배가 예견됨에도 불구하고 대중을 책임지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는 지도자들의 모습을 통해서 이후 중간층이 배양될 수 있는 강력한 토대 - 대중에 대한 책임성과 비타협적 실천 의지 - 가 형성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점이 분명해져야 한다. 하나는 최상의 지도자들은 패배에 저항하기 위해 사전에 최선의 준비를 다할 수 있어야 한다는 측면이다. 그 점에서 중간층 활동가들을 배양하기 위한 노동조합의 일상적 활동의 중요성은 거듭 강조되어야 한다. 이것은 뒤로 미룰 문제가 아니라 대중화가 진전되면 될수록 더욱 중요해지는 사활적인 과제로 간주해야 하며, 매일 매일의 실천을 통해 실제로 추구되어야 한다. 다른 하나는 만약 하나의 시기가 패배로 막을 내렸다면, 이 패배의 과정에서 질서정연한 퇴각을 주도하면서 즉각 중간층 활동가들의 양성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측면이다. 밀물이 썰물로 바뀌는 상황에서는 대중의 다수는 일시적으로라도 방향성을 상실하며 가라앉고 만다. 이 퇴각의 시기에는 오직 선진적 대중부위만이 반격하려는 의사를 갖게 되는데, 바로 이들을 질서정연한 대오로 조직하면서 과거의 경험을 흡수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활동가 층으로 육성하는 과업이 전면에 부상한다. 이 과업에 성공함으로써 대중의 물결을 밀물로 되바꾸는 다음의 국면이 제대로 열릴 수 있고, 단호한 대중투쟁의 새로운 시기를 열어낼 수 있다.    

젊은 층 중심의 전투적 운동 건설하기

  활력있는 중간층 활동가들을 대량 배출하는 통로는 전적으로 젊은 노동자들이다. 소수의 성숙한 지도자 층(응집적 요소)은 수많은 투쟁 경험을 통해 단련되고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통찰력을 획득한 노장들로부터 탄생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대중들과 직접 만나고 현장전투를 책임지는 중간층 활동가들이 노장들로부터 탄생하는 경우는 전체적으로 볼 때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중간층을 양성하는 데서 노동해방 지도자들이 가장 주목해야 하는 층은 젊은 노동자 층이다.

  그런데 전투적이고 역동적인 젊은 노동자 층은 노동조합 투쟁이 전면화되고 최정점으로 치닫는 순간이 아니라면, 심지어는 최정점의 순간에서조차 노동조합 기구, 체계를 통해서는 충분하게 대변되지 못한다. 노동조합 기구는 후진층 대중까지 포함하는 다수의 의지에 종속되는 경향이 강하고, 또한 투쟁의 국면이 급작스럽게 상승하면서 단 며칠, 아니 단 몇 시간 동안에 질적 도약이 이뤄지는 상황에서 그 이전에 선거를 통해 이미 구성되어 있는 노동조합 기구(가령 대의원)는 이 질적 도약을 온전하게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대중들 속에 내재한 전투적 의지를 보다 철저하게 반영하고, 대중 속에서 보다 전투적인 부위의 영향력에 기초해 운영되며, 투쟁의 도약기에 대중들의 정서와 분위기의 급진화를 온전하게 반영하는 기구는 일반적인 노동조합 기구와는 별도로 조직되어야 한다. 혁명적 시기에 그런 기구는 소비에트, 레테, 노동자 평의회로 표현된다. 일상적 시기에 그런 기구는 “선봉대” 등의 기구로 구체화되어야 한다. 선봉대와 같은 보다 전투적인 기구를 통해서, 혁명적 시기의 소비에트 유형의 기구를 밀어올릴 수 있는 사전 경험을 젊은 투사들에게 제공해야 하며, 일상적 시기에도 노동조합과 투쟁, 파업을 더 왼쪽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대중적 진지를 건설해야 한다.

  자발적 투쟁결의에 입각해 조직되고, 투쟁하고자 하는 적극적이고 전투적인 조합원대중의 의지만을 주로 반영하며, 일상적 노동조합에서 번성하는 다양한 위계질서와 형식들을 가급적 배제하면서 총회민주주의와 토론, 전투의 이해에 입각해 운영되는 선봉대라면 이것은 그 의의에 가장 잘 부합할 수 있다. 이 선봉대는 노동조합 투쟁의 선두에 서는 전투기구일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보다 더 왼쪽에서 전투성을 대표하고 선진적 압력을 행사하는 투쟁기구가 될 수 있다. 노동조합의 공식 체계에서는 단지 평조합원으로서의 제한된 영향력만을 발휘할 수 있고, 대소위원 등의 기층 간부가 되더라도 수동적인 늙은 층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젊은 노동자들이 여과 없이 전투성을 발휘하고 서로 자극하면서 뻗어나갈 수 있으며, 전투의 현장에서 누가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가가 주도력의 기준을 형성하는 선봉대는 중간층 활동가 양성에서 필수적인 기구이다. 이런 방식으로 선봉대를 조직하고 비정규직 운동의 가장 중요한 일상적 기구 중 하나로 정착화시키는 일련의 실천들이 요청되고 있다.

연대성과 정치투쟁

  이번에는 연대성과 관련해 논의해보자. ‘연대성’의 확대는 노동자계급대중의 힘을 온전하게 동원하기 위한 필수적 조건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아무리 거대하더라도 단사 노동자, 업종 노동자의 힘만으로는 제대로 대항할 수 없다. 법률적,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억압들이 자본가 정부를 매개로 행사되며 자본가 단체들은 하나로 결집해 대응하기 때문이다. 연대성의 확대, 그리고 그 연장에서 이룩되는 악법과 정부의 탄압에 맞선 정치투쟁의 강화는 모든 노동자들에게 사활적인 과제다. 이러한 연대성과 정치투쟁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더욱 절박하다.  

  우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의 권리를 제약하는 온갖 악법들이 기다리고 있다. 이 악법들에 갇힌다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기 투쟁력을 온존하게 발휘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심지어는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조직화의 권리조차 유린당한다. 그런데 악법들의 배후에는 이 악법을 빌미로 구속, 수배, 손배, 경찰 투입 등의 탄압의 고삐를 쥐고 있는 정부 기구들이 버티고 서 있다.

  다음으로 하나의 현장 내에서도 다양한 업체들로 쪼개져 있고, 또한 2, 3차 하청으로 이어지는 중층화된 사슬에 묶여 있을 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손쉽게 대체될 수 있는 단순 노동자들로 구성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폭넓은 연대를 조직하지 않고서는 자기 힘을 온전하게 동원할 수 없다. 노동조직 상의 지위에서 대동맥에 해당하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자기 힘만으로도 어느 정도 자본과 정부를 위협할 수 있는 반면 수많은 소동맥들, 모세혈관들을 구성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업체와 단사, 지역을 뛰어넘는 포괄적인 연대투쟁을 통해서만 거대한 힘을 온전하게 발휘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비정규직 노동자운동을 더욱 대중화시키는 데서도 계급적 연대투쟁과 이 투쟁을 통해 확립되는 노동자계급 정신은 대단히 중요하다. 직장의 불안정성에 항상 마주치게 되고, 여기저기 사업장을 떠도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은 단사, 지역, 업종을 가로지르면서 노동운동의 씨앗들을 널리 퍼뜨리는 데서 대단히 유리한 조건이다. 자본과 정부의 공세에 의해 하나의 투쟁대오가 깨지더라도 노동자 의식에 바탕을 둔 전진만 이룩된다면, 운동의 기초는 업체, 단사와 지역을 뛰어넘어 오히려 더 멀리 확장될 수 있다. 노동자 의식으로 무장한 활동가 층을 양성하기 위해서도 연대성과 정치투쟁을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노동해방 의식까지는 언급하지 않더라도, 노동자다운 시야와 관점을 기본적으로 갖춘 활동가가 양성되기 위해서는 계급적 연대투쟁과 정치투쟁의 경험이 반드시 필요하다.

  현재 한국 비정규직 운동은 연대성의 씨앗들을 점차 축적하면서 현실에서 발아시키는 출발점에 서 있다. 비정규직 투쟁사업장들 사이의 교류와 연대는 조금씩 활성화되고 있지만, 아직 다수 대중들의 연결고리는 성숙하지 않았다. 연대성을 고취하는 적극적인 선전 선동, 특히 공동의 투쟁요구의 대중적 확장이 선결적 과제이고, 이것을 바탕으로 비정규직 공동투쟁의 전통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특히 정부의 억압과 법률적 공격에 맞선 공동투쟁의 필요성이 절실하다.

  이와 관련 임박한 중차대한 계기는 비정규직 법안 개악과 관련된 공동투쟁이다. 그런데 이 공동투쟁은 노동조합 관료제의 판에 박힌 듯한 투쟁일정을 좇아서는, 그리고 노동조합 관료제의 행보에 의존해서는 제대로 현실화될 수 없다. 이 공동투쟁은 실제 비정규직 투쟁의 성장과 연결짓는 방식을 통해서만, 그리고 노동자의 자기 투쟁력에 의지하는 대담한 방식을 통해서만 실제로 조직될 수 있고 참된 의의를 확보할 수 있다. 가령 “불법파견 철폐, 정규직화”를 내건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공동 투쟁,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의 노동자성 인정, 단결과 투쟁의 자유 쟁취”를 내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공동 투쟁을 발전시키면서 이를 “비정규직 노동자 권리 확대를 위한 보호입법 쟁취투쟁”으로 승화시키는 대담한 투쟁전망이 계획되어야 한다.
  이러한 공동의 정치투쟁은 당면에 현실 투쟁의 적극적 계기로 작용하고 있는 ‘불파철폐 투쟁’이 가질 수 있는 합법주의적 약점을 중화시키기 위한 적극적 수단으로도 중요하다. 또한 비정규직 투쟁의 두 축인 대공장 사내 하청 투쟁과 기타 특수고용직 투쟁을 실제로 하나로 결합시키면서, 비정규직 운동을 계급적 연대성의 토대 위로 올려 놓을 수 있는 일차적 관문이다.

미래에 대한 전망

  만약 자본주의가 스스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객관적 모순에 의해서만 붕괴한다면 상황은 아주 간단할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이 객관적 모순을 인식하고 이것의 극복을 통해서 자신의 해방을 달성할 수 있을 만큼의 의식성과 전투력을 발전시킨 주체 세력, 다름 아닌 자신의 역사적 임무를 자각한 성숙한 노동자계급에 의해서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 있다.

  만약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역사적 임무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아직 취약하다면 상황은 정반대로 전개된다. 자본주의의 모순은 격화되지만 이것은 역사적 전환점으로 기록되지 못하고, 오히려 노동자계급을 갈가리 찢고 서로 대립시키면서 절벽 밑으로 몰아붙인다. 공포에 사로잡힌 노동자계급은 원자화되고 갈팡질팡하면서 자본주의의 모순의 희생양으로 전락하고 만다. 자본주의 체제는 오직 그와 같은 방식으로만 생존할 수 있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이것은 한국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도 진실이다. 막 탄생해서 자신의 힘을 결집하기 시작하는 한국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흐름을 한국 자본주의가 그냥 방치할 리는 없다. 오히려 노동자들의 진출 앞에서 그들은 이것을 저지하고, 최소한 그것을 자기 통제력 하에 놓기 위한 수천가지의 수단들을 더욱 맹렬하게 동원할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자주적 진출 이전에는 적합했지만 변화된 지금의 상황에서는 적절히 손봐야하는 비정규직 관련 법률들의 재정비, 그리고 이 법률을 등에 업고 더욱 철저하게 자행될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정부의 공격 등의 탄압만이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운동을 조합주의의 궤도 내로 유도하면서 그 잠재력을 소진시키고 노동조합 관료제를 통해 대중적 투쟁의지를 질식시키는 등의 온건화 정책이 함께 구사될 것이다.

온건화 정책에 대항하기 - 노조관료제에 맞선 노동자계급의 단결

  후자의 온건화 정책은 마치 대기업 단사에서 자본가들이 적용하는 정책을 본 뜬 것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먼저 대기업 단사에서 자본가들의 정책의 핵심을 검토해야 한다. 대기업 단사에서 자본가들이 동원하는 통제 정책의 핵심은 관료화되고 개량화된 정규직 노조들을 2중대로 활용하는 것이다. 이른바 상호신뢰, 공동투쟁이라는 허울좋은 명분 아래 기회주의적인 관료적 정규직 집행부들은 비정규직 투쟁을 자신이 허용할 수 있는 온건한 범위(다른 말로 하면 관료적 집행부 뒤에 버티고 있는 대자본이 허용할 수 있는 범위) 내로 제한하고 있다. 이 통제선을 뛰어넘는 순간, 정규직 집행부는 거의 구사대와 같은 행동(가령 대체인력 투입 허용)을 서슴지 않으면서 비정규직 투쟁을 방치하면서 고립시키고 있다.

  실상을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것은 자본에 맞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전투적 투쟁을 중단하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투쟁을 중단하고 정규직 집행부(사실은 배후에 있는 대자본)가 허용하는 소심한 범위 내에서만 투쟁하는 척하고, 결국 정규직 노조의 합의결과를 받아먹거나 교섭을 통해 확보하는 사소한 개량(처우개선)에만 머물라는 것이다. 이 통제선을 뛰어넘으면 자본과 정부의 무차별한 공세 앞에서도 정규직 노조는 침묵할 것이며, 사실상의 파업 파괴에 다름 아닌 정규직의 생산 가동, 심지어는 대체 인력 투입까지도 허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을 통해 막 탄생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자주적 투쟁기운이 쓰라린 패배를 맛보면서 가라앉게 만들고, 비정규직 노조 내의 타협적 부위(이들은 정규직과의 공동투쟁이라는 투쟁 속에서의 단결의 원칙을 정규직의 관료적 집행부와 보폭을 맞추는 타협으로 바꿔치기해버리고 있다)를 강화하면서 전투적 부위를 극좌 모험주의자, 분열주의자로 매도해 고립시키고 있다.

  이 점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예는 현자비정규직 노조 불파투쟁에 대해 이상욱 집행부가 취한 일관된 행보였다. 비정규직 노조의 자주적 투쟁을 고립시키고 매도하기, 정규직 노조 집행부가 상정한 온건한 투쟁일정과 투쟁전술에 비정규직 노조가 순응하고 이것의 테두리를 절대 벗어나지 않도록 통제하려 하기,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 집행부의 관료집단과 자본 사이의 교섭을 통해 확보된 보잘 것 없는 개량에만 머물게 만들기 등의 갖가지 술책이 등장했다. 이것을 거부하면서 현자 비정규직 노조가 자주적인 독자 파업의 깃발을 들었을 때, 아무런 죄의식 없이 라인을 돌리면서 파업 파괴 행위를 하고, 심지어는 대체 인력 투입까지 허용함으로써 독자 투쟁의 위력을 10분의 1로 축소시켰던 것이 바로 이상욱 집행부였다.

  이를 통해 이상욱 집행부의 배후에 있는 현대자본이 노렸던 바는 아주 분명하다. 정규직 노조 집행부를 통해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정규직 노동자들을 분할하고, 이 분할을 통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전투적 투쟁을 고립시키면서 와해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예견된 패배를 통해 비정규직 노동자들 속으로 낙담과 사기저하 분위기를 불어넣으면서, 정규직 노조집행부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만 실천하고, 정규직 노조 집행부가 자본과 협상해서 얻어낸 범위 내에서만 획득하는 아주 온순하고 자발적인 활력과 凰忖봉?상실한 허약한 노조로 비정규직 노조를 추락시키는 것이다. 그 연장에서 전투파들의 영향력을 제거하면서 온건파들의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정확히 현대자본이 바라는 핵심이다.

  정규직 대중들을 무기력 상태로 내몰면서 이제까지 길들이고 통제했던 가장 강력한 수단인 노동조합 관료기구의 힘을 현대자본은 이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적용하고 있다. 핵심은 간단하다. 투쟁과 단결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쟁취할 수 있는 자신감을 도려내버리는 것이며, 대중들 스스로의 자주적 힘에 의지하지 않고 관료기구의 심장부인 교섭기구를 통해 확보하는 사소한 개량의 부스러기에만 만족하면서 수동주의의 늪에 갇히도록 몰아붙이는 것이다. 87년 이래 약 10여년의 공방전을 통해서야 비로소 안착화시킬 수 있었던 노동조합 관료기구들을 통해서 이제 막 탄생하고 있는 젊은 비정규직 노동운동을 초기부터 길들이고 통제하려 발악하고 있는 것이다. 자동차 업종 사내하청 노조를 지금 휘감고 있는 모든 위기와 문제점들은 바로 그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바로 그것이 지금 자동차 대자본이 가장 효과적으로 동원하고 있는 통제장치다.  

  이 통제장치를 무너뜨리는 힘은 두 측면에서 함께 성장해야 한다. 하나는 정규직 노조 집행부를 매개로 작동하는 관료제의 통제에 맞서 자주성과 전투성을 수호하는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독자적인 힘을 동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초기 국면에서 여러 심각한 어려움을 가져다줄지라도, 그것 말고는 비정규직 노동운동이 전투적 방향으로, 노동해방의 방향으로 전진하면서 비정규직 대중의 힘을 제대로 흡수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다. 다른 하나는 수적으로는 아직 작을지라도 정규직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연대이다. 이 연대는 당연히 “정규직 노조의 관료집단에 맞선 공동투쟁”으로 집약되어야 한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바는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투쟁의 전진인데, 이는 현자비정규직 투쟁의 난관과 비교해서 평가할 때 더 정확히 볼 수 있다. 현자비정규직 노조의 올해 불파투쟁의 핵심 관건은 현자 정규직 노조가 대체 인력 투입과 관리자의 파업 파괴 행위를 막아줄 수 있느냐였다. 만약 대체 인력 투입을 차단했다면, 대체 인력 투입에 맞서 처절히 항쟁하다가 급기야 해고되기에 이른 5공장 농성단의 어려움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5공장 투쟁은 직선적으로 전진해 독자 파업의 선봉대로 솟구쳤을 것이다. 만약 대체 인력 투입 차단이라는 최소한의 행동이라도 수행했다면, 2000여 명으로 확대된 비정규직 노조의 조직력은 능히 독자 파업을 밀어붙이면서 상황을 주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기아 비정규직 노조의 투쟁 상황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대체 인력 투입 금지라는 최소한의 행동이라도 기아 정규직 집행부가 지금까지는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기아 비정규직 노조 파업은 대중 파업으로 전진하면서 자본을 위협하고 있다. 만약 현자 이상욱 집행부처럼 대체 인력 투입을 사실상 허용했다면 기아 라인은 멈추지 않았을 것이고, 이것은 비정규직 노조 투쟁의 기세를 지금보다 10분의 1로 축소시켰을 것이 분명하다. 독자 파업의 위력이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중들의 자신감 있는 전진은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본질적으로 볼 때 현자 이상욱 집행부와 기아 정규직 집행부 사이의 차이는 아주 크다고는 볼 수 없다. 기본적인 행동에서 그들 사이의 공통점은 (독자 투쟁에 대해서는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며 투쟁의 수위를 낮출 것을 끊임없이 종용하며, 정규직 노조 집행부의 연대방기에 대한 어떤 비판에 대해서도 사과하도록 강요하는 등의 행동에서 확인되듯이) 사실 지배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차이는 왜 발생하는 것인가? 그것은 현자 정규직 활동가들에 비해 기아 화성 현장의 정규직 활동가들이 훨씬 더 많은 숫자로, 훨씬 더 강력한 행동으로 비정규직 투쟁을 엄호하면서 집행부를 압박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해졌다.

  이런 차이는 관리자들의 파업 파괴 행위에 맞선 투쟁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경비와 정규직 관리자들의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폭력적 공격에 맞서 현자에서는 윤성근 동지를 비롯한 극소수 몇 명만이 실제 방어 행동에 돌입했던 반면, 기아에서는 현장 제조직 활동가, 선봉대 등 100여명에 가까운 정규직 활동가 동지들이 헌신적인 방어 행동에 참가하고 있고, 9월 28일 투쟁에서는 수백명의 평조합원들이 용역 깡패 투입 기도에 맞서 추가로 전선에 합류했다. 이것은 관료집단과 관리자들에 맞선 또 하나의 강력한 저지선이다.

  만약 기아에서 용역깡패들과 관?湄湧?비정규직 거점을 침탈해서 파업을 와해시키려 했다면, 비정규직 거점 사수의 맨 앞에 포진한 이 100-200명의 정규직 동지들을 우선적으로 밟고 넘어가야 했다. 수자나 무장된 정도를 고려하면 그것은 아주 어려운 것은 아니었고, 최소한 절대 불가능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 것인가? 정규직 활동가들의 대대적인 부상 사태는 정규직 조합원들을 강력하게 자극했을 것이며, 어느 정도 보호해온 현장권력을 사수하기 위해서라도 투쟁에 나서야만 한다는 점을 다수의 정규직 조합원들은 직감했을 것이다. 이것은 라인 차원에서 간헐적으로 진행된 투쟁을 제외하면 수년동안 기아 화성 공장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역동적인 현장투쟁의 신호탄이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화성 공장 조합원들의 분위기는 현자에 비해 비정규직 독자 투쟁에 대해 훨씬 더 우호적이고, 자신감도 강하다. 역으로 아직 연약한 초기 단계의 비정규직 노조의 대담한 독자 파업의 효과는 정규직 조합원들이 자신의 투쟁 기억과 전통을 되살리면서 대담하게 치고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확대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비정규직 거점 침탈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훨씬 컸을 것이고 상당히 위험했다는 점을 현대기아 자본은 고려해야만 했다. 이것은 그 동안 공들여 쌓아온 협조적 분위기, 그리고 관리자 체계의 통제력을 일순간에 허물어뜨릴 수 있었다. 바로 이것이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노조의 주체적 힘이라는 기둥과 더불어 이번 기아 화성 비정규직 대중 파업을 떠받치고 있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기둥이다. 동일한 이유가 기아 정규직 관료들이 “대체 근로”를 허용하지 못하도록 아래로부터 밀어붙이고 있다. 현자와 기아 사이의 차이는 관료집단의 차이가 아니라 바로 이 아래로부터 밀어붙이는 힘의 차이다.

  이상의 비교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대중 투쟁과 정규직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연대가 하나로 맞물리게 될 때 발휘할 수 있는 거대한 잠재력의 일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만약 비정규직 노조의 대담한 독자 파업의 추진이 없었다면 이 잠재력은 소진되고 말았을 것이다. 역으로 정규직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연대가 없었더라도 이 잠재력은 아주 조금만 발휘되었을 것이다. “비정규직 노조의 자주적이고 대담한 독립성(물론 정규직 관료체계의 통제로부터의 독립성)”, “정규직의 계급적인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연대성”은 지금 대공장 비정규직 운동을 전진시키고 정규직 노동조합 관료제에 대항한 투쟁을 열어가는 사활적인 두 축이다.  

  이 두 축이 어느 정도라도 맞물려 돌아가면서 상황에 대한 주도권이 투쟁하는 노동자들 편으로 넘어온 기아에서 전진의 길을 전체 노동자들 앞에 더 확실히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것은 최근 3-4년 동안 진행되어온 1기 비정규직 노동운동, 그리고 대기업 정규직 활동가들의 계급적 실천이 거둔 최초의 열매로 기록될 것이다. 9월말 현재, 이제 다시 더 강력한 결단력으로 대담하게 다음의 발걸음을 내딛어야 할 주체는 기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그것은 주 1회 부분 파업 정도가 아니라 요구의 완전 쟁취를 향해 전면파업에 과감하게 돌입하는 행동으로 구체화될 필요가 있다. 지금 상황은 허를 찔린 기아현대 자본이 뾰족한 수 없이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는 아주 유리한 상황이다. 이 상황을 놓치지 말고 대담한 전면파업으로 진군하고 이를 통해 확보한 확고한 승리를 토대로 이어질 방어전투를 더 유리한 위치에서 맞이하면서 더 전면적인 투쟁의 시기를 준비해나가야 한다고 우리는 믿는다.  

  대공장에서 발생하고 있는 상황은 연맹, 민주노총 차원에서도 기본적으로 재현될 것이다. 정부와 자본은 탄압만이 아니라 상급단체의 관료체계를 활용해서 비정규직 투쟁을 제어하려 애쓸 것이다. 상급단체는 투쟁의 조직화 측면에서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지만, 투쟁요구와 투쟁전술의 수위를 하강시키고 결정적인 국면에서 교섭라인을 동원해 투쟁을 정리해버리는 데서는 적극 개입할 것이다. 이는 활동가 층이 미약하게만 존재하는 곳에서, 특히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처럼 다양한 지역과 분야에 흩어져 있는 노동자들과 관계된 노조들에서 상당히 활개를 칠 것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노동조합 관료제의 영향력으로부터 독립적이고 노동대중의 아래로부터의 통제력이 발휘될 수 있는 “노동조합 민주주의”를 굳건하게 확립하는 것이다.

노동자 민주주의

  87년 노동자 대투쟁 시기에 투쟁하는 대중들의 본능들로부터 탄생했던 “총회민주주의의 전통”을 확립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87년 당시는 “지금의 상황”에 비한다면 활동가들이 너무나 충분하게 존재했다. 인노련과 서노련 등에는 2000여의 활동가들이 그 이전의 수년간의 투쟁을 거치면서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87년 당시에도 운동으로 합류하는 “거대한 대중들의 수자”에 비한다면 (특히 활동가 층이 인천과 서울에 비해서는 협소했던 울산에서는) 활동가들의 수자는 충분한 것이 아니라 부족했다. 이때 투쟁 속에서 솟구친 거대한 대중들의 물결은 활동가들의 부재를 “총회 민주주의”를 통해 메우고자 하는 결단으로 이어졌다.

  “총회”는 가장 주요한 결정들이 내려지고, 우유부단한 간부들, 대표자들을 수시로 교체하는 강력한 통제장치였으며, 교섭의 전체 과정이 대중들 앞에 보고되고, 투쟁전술과 요구안이 확정되는 유일한 무대였다. “총회 민주주의”의 확립 없이는 대중들의 주도권과 통제력이 발휘되고, 갖가지 관료 장치의 싹들이 산산이 부서지는 역동적인 운동은 도저히 실현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총회 민주주의” 없이는 갖가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도 대중들이 투쟁의 주체로 일어나고 노동조합을 주도할 수 있는 실제 능력을 키우며, 자신들 ‘내부’로부터 활동가 층을 배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총회 민주주의의 쇠퇴와 정확히 비례해서 노동조합 관료제는 자리잡았고, 더 정확히 말해서 총회 민주주의를 야금야금 제거함으로써만 관료제는 민주노조운동 내에서 주도권을 형성할 수 있었다.

  물론 “총회 민주주의”가 본연의 의의를 충분히 다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 형식을 대중들이 능동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의식적 활동가 층의 존재가 사활적으로 중요하다. 총회 민주주의 활성화와 함께 의식적인 활동가 층의 존재는 노동조합 관료제와 맞서는 데 가장 중요한 기둥이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에서는 활동가 층이 대단히 협소한 가운데 문제를 풀어야만 한다. 이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극소수의 활동가들이 노동조합 관료제와 맞서 투쟁할 수 있는 결정적인 수단이자 예비 활동가 층을 대량으로 배출해내는 가장 중요한 토대가 바로 총회 민주주의라는 점이다.

  우리는 모든 곳에서 총회 민주주의의 전통을 정열적으로 세워내고 그것을 비정규직 노동운동을 밀어가는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기필코 확립해야 한다. 이것만으로도 연맹과 민주노총의 관료 체계의 영향력을 제거할 수 있는 소중한 토대가 마련될 것이다. 활동가 층이 대단히 제한적인 상황에서 대중들은 불가피하게 갖가지 심각한 시행착오를 거치겠지만 총회 민주주의의 도움으로 그들은 관료들의 형편없는 본질을 깨닫고 상황을 주도할 수 있는 능력을 점차 배워나갈 것이다. 특히 한국의 관료 체계가 단지 교섭의 거간꾼으로만 기능하기 시작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대중들 앞에 권위를 내세우고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입증할 만한 것을 관료 체계는 거의 갖지 못하고 있다. 이런 시기에 총회 민주주의는 비록 막 무대에 뛰어든 투쟁하는 노동자들이라도 객관적 상황을 이해하고 주도권을 자기 손에 움켜쥐어야 할 필요성을 자각하는 데서 대단히 유용한 역할을 다할 수 있다.  

마치면서

  현재 한국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제1의 물결을 거치고 있다. 이 물결을 통해, 잠들어 있는 상태에서 무자비하게 착취당해왔던 광범위한 비정규직 노동자대중이 이곳저곳에서 운동에 합류하면서 투쟁의 날개를 펴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제1의 물결은 대중들의 자생적 분출에 비한 지도력의 취약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또한 노동조합 관료제가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총회 민주주의를 비롯한 노동조합 민주주의를 가로막고, 그 결과 대중들의 역동성은 제한적으로만 발휘되고 있다. 당연히 여러 패배들이 제1의 물결을 휘감을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격화되는 객관적 모순에서 생명력을 끌어내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운동은 이로부터 교훈을 끌어내면서 더 격렬하고 전면적인 제2의 물결을 향해 행군할 것이다. 이것의 토대는 노동해방 노선으로 무장한 지도자들, 대중들 속에서 탄생한 중간 활동가들, 총회 민주주의를 비롯한 노동자 민주주의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한 대중들이다. 바로 이것이 제1의 물결을 통해 탄생시켜야 할 가장 소중한 성과들이다. 오직 이 성과들을 바탕으로 해서만 비정규직 노동운동은 제2의 87년을 열어내는 결정적인 힘을 확보할 수 있다. 밑바닥 하층 노동자들을 주력 부대로 한 제2의 노동자 대투쟁은 87년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수의 노동자계급대중의 힘을 끌어낼 것이며, 더 거대한 도약을 예고할 것이다.

  현재 한국 비정규직 노동운동의 각 부분은 서로 다른 발전단계를 거치고 있다. 최선두의 물결이었던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운동은 제1의 물결의 결과를 바탕으로 제2의 물결을 준비하는 과정을 당분간 거칠 것이다. 최선두의 다른 한 축인 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운동은 현대차 비정규직 투쟁보다 더 멀리 전진할 것이며, 당장에는 전진의 물결 속에서 제2의 물결을 준비할 수 있는 유리한 기회를 붙잡게 될 것이다. 다른 부위에서는 너무나 부족한 활동가 층 때문에 현대차에서보다 더 낮은 단계에서 패배와 마주치면서 제2의 물결을 준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장하는 상승기의 노동운동 일반이 그러하듯이, 일시적인 패배에도 불구하고 제1의 물결이 제2의 물결로 전환되는 흐름은 상당히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투쟁의 교훈을 흡수하고 운동의 전진을 위한 핵심 과제들을 도출하면서, 그것을 향해 힘을 집중해 진군을 촉진해야 한다. 그렇다면 비정규직 대중들은 지금보다 몇 배 강력한 단호하고도 의식적인 투쟁으로 화답하면서 진군의 길을 활짝 열어젖힐 것이다.



   [노동해방실천연대] 한국노총과 통합하겠다?, <해방>4호, 2005.09.

박성인
2005/10/06

   10.05. 전국공무원노조(위원장 김영길), ‘총액인건비제 저지, 특별법 반대 등을 위한 공무원노조 하반기 투쟁 선포’

박성인
2005/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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