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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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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20 21:05: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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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us |
[너부리] 좌파(Left), 남겨진 것(lef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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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Left), 남겨진 것(left)| 잡기장 2006년 03월 16일 21:19 |( -_-)-b
leeus님의 [복수노조시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에 관련된 글.
이 글은 딱히 '복수노조 허용'에 관련된 것이라기 보다는 '민주노조'(상층부의)운동에 겁나게 불만많은 너부리의 너불너불 너부림.
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가 쓴 <사회변혁과 헤게모니>(1989)의, 내가 본 핵심을 풀어보자면 이렇다. 헤게모니란, 민주적 정치형태들은 비민주적인/독재적 정치형태들을 끊임없이 홀리며(haunt), 비민주적 정치체들이 배제했던 것들을 다시금 다시금 되돌아 오게 함으로써 (헤게모니가) 구성된다. 배제된, 민주적인 것들의 귀환(return)은 민주주의 자체의 기본적인 전제들의 확장과 절합을 강제하는 한에서, 이러한 홀림(haunting)은 그 사회의 전반적 민주화에 정치적으로 효과적이다. (우리 사회에서 '민주세력'들이 끊임없이 독재정권들을 홀렸던 것처럼.)
<사회변혁과 헤게모니> 이후의 저작들에서 라클라우가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민주적 정치형태의 형성은 필연적으로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불완전성이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민주성, 민주주의 자체란 끝없는 열망의 과정으로서, 완전히 달성된 민주주의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이른다.
다시 말하자면, 민주주의란 그 완성을 향해 경주하지만 결코 완성되지 않는 '이상'(ideal)으로 남으며, 바로 그 이상성(ideality)이 보다 민주적인, 즉 그 '완성'에 도달하도록 경주하도록 하는 역설적 동력이라는 것.
헤게모니란 권력이 사회 관계들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 이해를 형성하고 우리가 권력의 그러한 전술과 은밀한 권력관계들에 동의하(고 그것들을 재생산하)는 방식들을 조정하도록(orchestrate) 작동하는 방식들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권력은 안정적이거나 정태적이지 않다. 권력은 일상 생활 내부에 있는 다양한 접속점(junctures)에서 다시 만들어진다. 권력은 희박하나마 우리의 상식(common sense) 감각을 구성해내며, 한 문화의 우세적인 인식틀들(epistemes)로 둔갑되어 통용된다.
그렇다고 이런 권력의 헤게모니질이 일방적인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런 자본, 지배권력의 발빠르고 겁나게 미세한 움직임에 대응하는, '민주노동'진영이나 소위 '좌파'진영의 대항 헤게모니 형성 능력은 겁나게 회의적이다.
게다가, 사회 변혁(transformation)이란 단지 어떤 명분을 지지하는 집회 군중의 수에 의해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노총의 의식은 딱 이 수준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미리 알아서 기는 (총)파업만을 일삼을 뿐이다. 투쟁이란 이기기 위해서(쟁취!지 저지!가 아니다) 하는 것이고, 이기기 위해서는, 투쟁전에 미리 이겨놓고 투쟁에 돌입하는 것이, 손자병법은 물론이요 싸구려 무협들에도 나오는 투쟁술이다.
민주노총에 발을 담근적이 없는 '외부'에서 보기에도 전혀 민주적이지 않은 민주노총의 저지!투쟁은, 최장집 선생 말마따나, "에너지에 비해 실속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본과 권력을 규범으로 설정한 다음, 금을 그어놓고서 '여기서부텀 우리 영역이니깐 니네 들어오지 마' 하는 식이다. 즉, 자기들 써클 내부의 권력을 지키는 것이 급선무가 된 듯하고, 자본, 지배와 싸워 더 큰 세력/권력을 형성하는데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외부인의 눈으로 보자면).
이런 점에서 민주노총 지도부는 (여전히 막강한 정치력에도 불구하고. 자잘한 시민운동단체들과도 비교해보라) 민주노총이 형성되었던 초기 과정들에 보였던, 그라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운동의 구심점으로서의 근본적 의미를 알아서 잘 훼손하고 있다. 민주노총 앞으로 몇년이나 더 살까?
사회변혁에 대한 언급으로 다시 돌아가자면, 변혁이란 일상의 사회 관계들이 다시 설명절합되고, 정상이 아니어서 파격적인(anomalous) 혹은 전복적인(subversive) 실천들이 열어놓은 방식들을 통해서 새로운 지평이 열림시롱 변혁이 일어난다.
이런 점에서 지금 여기 정규직 마초지상주의 노조운동은 여성, 소수자, 온갖 사회적 약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열라 억압적이고 청맹과니이며 장님이다. 이 점은 90년대 이후 노동운동들로부터 수많은 시민사회 운동들이 '이탈'하여 형성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잘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조운동들은 시민사회 운동들과의 연계지점도 찾지 못하는 바보멍텅구리 욕심쟁이일뿐만 아니라, 시민사회 운동들의 여러 연대 투쟁 제안에도 자기들 힘만 자랑함시롱 꿈쩍 않는다.)
지금 여기 노조운동은 (그것이 초기가졌던) '정치적 보편성'을 말끔히 상실했으며, 그 '민주성'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이런 부분적 실패가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실패로 부터 배울수 있다.unlearn 뿐 아니라, 민주노총이 걸어온 역사적 궤적(과 시민사회 운동들의 형성)은 우리가 전에는 질문하지 못했고, 역사적 정황상 질문할 수도 없었던 그런 류의 질문들에 우리를 활짝 개방시키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새로운 대안들의 실행과, '문제해결'의 열쇠는 우리가 어떻게 이런 질문들을 형성하고 제기하느냐에 따라 상당히 좌우될 것이다.
우리를 몰아부치는 질문들이 무엇이냐고? 그것은 각자 무슨 패를 가질 것인가 하는 욕망과, 그 욕망들이 새로이 여는 열망의 공간들에 따라 형성될 것이다.
자신이 제기하는 질문들과 더불어, 이 질문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열망과 필히 연결되어야 할 터이다. (여기서 열망이란, 부분적으로 모여서 전망이 없어, 전망이없어 하는 신세한탄이나 하는 무능력대신에, 작은 것부터라도 기획하고 실험해보는 능력으로서 열망이다.)
나로서는, 민주노총 지도부식이 아닌, 새로운 정치적인 것, 정치활동의 가능성과 헤게모니 투쟁을 구성하는 투쟁들 사이를 지식인으로서 왔다갔다 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의 열망들에) 통약불가능한 차이들이 있다고 연대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차이들을 억압불가능한 것으로 볼때, 연대의 가능성들은 뚫리고 열린다.
민주노총, 넓게 보아 범좌파(Left)는 역사의 흔적으로 남겨진(left) 것이 될 수도 있다. 살아남아 발전할 궁리들 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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