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이은숙
◎ 작성일:2000.07.30(일)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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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신자유주의적 공세와 한국노동운동
부산대 [효원]교지 원고(1998.5.21)
1. 들어가며
현대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일국경제를 세계경제와 분리시켜 사고할 수 없다. 현시기 한국의 경제위기는 세계자본주의의 과잉축적, 경쟁격화, 불안정성 증대 등의 모순이 반영된 것이자 또한 그 모순이 자기전개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표면상으로 보면, 한국 경제의 위기는 무엇보다도 대기업의 도산 사태를 매개로 하여 찾아왔다. 위기가 표출되게 만든 매개는 당연하게도 국내의 정치경제 구조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국내경제의 위기를 설명하는 것은 위기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위기 극복의 처방에서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게 된다.
지난 2월 6일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을 포함한 노동조합운동 지도부는 자본과 정권이 요구해온 "나라살리기, 경제살리기를 위한 고용조정 제도들 - 정리해고와 근로자파견제 등 - 을 수용한다"는 내용의 '노사정 합의문'에 서명하였다. 그러자마자, 다음날부터 자본과 정부는 성과급 임금체제로의 전환과 연월차 휴가 철폐 등의 노동조건 개악문제를 들고 나왔고, 새정부를 꾸릴 정권인수위는 100대 과제 중 노동 항목에서 '참여과 협력의 생산적 노사관계'를 제시하며 노동자들을 옭죄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사회적 합의' 이후 열린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에서 '합의안' 추인이 거부되었다. 그러나 법제화는 강행되었고 현실의 대량실업사태와 고용불안은 가속화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현시기 한국경제위기의 본질적 원인이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에 있다는 문제인식하에 국내의 정치경제 구조가 97년 하반기 외환·금융위기를 촉발시켰다고 보는 입장에서 지난 2월 '노사정위원회'를 중심으로 노동조합운동 진영의 대응을 평가하고 이후 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2. 1998년 2월의 '노사정위원회 합의'의 배경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을 막론하고 지난 2월의 노사정위원회에서 지도부가 '합의'를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노동조합운동 진영이 그동안 취해온 '경제위기'의 원인에 대한 인식과 그에 따른 노동운동의 대응전략이 짙게 깔려 있다. 이하에서는 노조운동의 경제위기에 대한 원인진단을 중심으로 노사정위원회 합의의 배경을 살펴보자.
97년 하반기부터의 한국경제 위기를 바라보는 노조운동 지도부의 관점은 민주노총이건 한국노총이건 할 것 없이 거의 엇비슷하였다. 즉 경제위기를 초래한 것은 재벌의 족벌경영체제와 관치금융, 정경유착 등 부패구조로 인한 국가신인도 하락이라는 것으로서, 국내적(일국적) 요인을 가장 크게 취급하였다. 그러면서 '위기극복'을 위해서는 재벌구조의 '해체' 혹은 '개혁'이 필요하다고 인식하는 한편으로, 급증하는 실업 및 고용불안정 사태에 대해서는 정리해고제 반대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노동조합운동 진영의 대응은 근본적으로 '사태파악'에서부터 첫단추를 잘못 끼워 결국은 자본의 논리에 빠져버리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먼저 위기의 원인진단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를 국내 경제·정치구조(혹은 재벌체제)의 문제로서 일면적으로 파악하였기 때문에 국내 경제'구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마치 위기가 해소될 것처럼 오해를 불러 일으키거나 혹은 '국민적 내핍'을 통해 '경제회생'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처럼 사고하였다.
둘째, 이러한 논리는 필연적으로 '자본의 비효율성'을 문제삼음으로써 '자본의 효율성'을 제고해야 한다는 대안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것은 '비효율적인 자본을 효율적인 자본으로' 만들어야 된다는 것으로 귀결되며, 그 효율을 위해서 '노동시장 유연화'가 필요하다는 자본의 논리에 대응할 수 없게 된다. 그런 점에서 바로 현시기 자본에게 가장 필요한 주장이 다름 아닌 '재벌 개혁'일 수 있는 것이다. 재벌구조의 개혁문제는 그것이 경제·정치·사회 전반에 걸친 노동자계급의 통제력이 확보되지 않는 한 '신자유주의적' 축적위기 극복전략에 그대로 편입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재벌은 현시기의 세계 자본주의가 당면하고 있는 과잉축적 위기를 돌파하려는 자본의 이해와 부합되지 못하는 '비효율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총자본에 의한 '개혁'의 대상이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총자본에게 재벌개혁의 필요성을 준 것은 바로 재벌에 의해 주도되고 장악되어 있는 한국경제의 위기인 것이다. 즉 재벌'개혁'은 '자본을 효율화'시킨다는 '자본의 합리화 운동'이다. 이것은 자본이 자신의 필요에 의하여 수행하고 있는 '자본의 자체개혁 프로그램'이다. 이것은 또한 자본이 '노동시장 유연화'를 요구하는 것과 동일한 맥락에서 '자본의 유연화'를 스스로 추진하고 있는 것이며, 그 본질은 '신자유주의적' 축적논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사정위원회 국면에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모두 자본과 정부가 동일한 '신자유주의적' 맥락에서 추진하고 있는 자본합리화 프로그램인 '재벌구조 개혁'과 '노동시장 유연화'(정리해고 및 노동자 파견제 등)에 대하여 모순적인 대응을 하였던 것이다. 즉 '노동시장 유연화'에 대해서는 반대하면서 소위 재벌'개혁'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멀리 갈 것도 없이 '효율화된 자본'(이것은 총자본·정권이 추진하는 '재벌개혁'의 목표)이 현시기에 가장 절실하게 요구하는 것이 바로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에 의하여, '노동시장 유연화' 반대라고 하는 노동자의 요구는 자체모순에 빠지게 되고, 결국은 '경제회생을 위해서는 재벌이 개혁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정리해고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을 노동자가 스스로 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바로 '노사정위'의 '합의문'이 나오게 된 배경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앞서 지적하였듯이, '경제회생을 위해 재벌 개혁 필요'라는 프로그램은, IMF와 김대중정권의 한국경제 위기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처방' 그 자체이며, 이것이 IMF에 의해 주장되고 있는 '재벌해체'의 본질이다. 그리고 자본분파들 일각(비재벌분파)에서 'IMF에 의해 그동안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고 IMF 프로그램을 환영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지금의 재벌구조가 갖고 있는 병폐들에 대하여 자본이 스스로 '개혁'한다는 것을 노동자와 민중은 굳이 말릴 필요도 없지만 그것을 노동자와 민중이 앞장서서 요구하는 것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효율화된 자본'이 노동시장 유연화를 요구했다면 받아들였을 것이라는 말인가?
한편 한국노총의 경우, 경제기반의 붕괴를 우려하면서 단순 경기부양과 대책만으로 위기극복이 안되기 때문에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극복을 해야 한다고 정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는 경제위기의 본질은 간과한 채 현상의 수습에 급급하여 노동자계급뿐만 아니라 민중 전체가 자본의 논리에 투항해야 한다는 주장과 다름 없다. 그 논리에서는 마치 노동자가 자본축적운동을 주도할 수 있는 듯이, '국민적 합의'로 현시기의 '위기'(그것은 자본운동이 스스로 초래하는 '자본의 모순'이라는 본질을 가지고 있다)를 극복할 수 있는 듯이, 혼동하였다. 이는, '자본의 논리'가 보편적인 진리로서 강요되고 통용되면서 자본이 주인행세를 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노동자와 민중의 생존권을 자본에 저당잡힌 채 고통을 전담할 수밖에 없게 되는 논리이다.
이상에서 노조운동이 입각하고 있는 위기에 대한 인식들에 대하여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았다. 다음으로는 좀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노조운동의 98년도 투쟁방향과 '노사정위원회 합의' 문제를 간략히 검토해 보겠다.
3. 노조운동진영의 98년 투쟁방침과 '노사정위원회 합의'
98년도를 맞이하면서 변화된 정세에 대응하기 위한 노조운동의 움직임도 긴박하게 돌아갔다. 가장 큰 변화는 무엇보다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후보가 당선되었다는 사실과 IMF관리체제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김대중씨는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인 97년 12월26일 한국노총의 박인상 위원장에게 노사정협의회 구성을 제안하고 이어 12월 27일에는 민주노총의 배석범 위원장직무대행에게 노사정협의회 참여를 요청했다. 그리고 98년 1월 15일, 민주노총을 포함하여 11인 노사정위원회가 발족되었고, '노사정 고통분담을 위한 국민협약' 제정에 합의, '고용조정문제'를 본격 논의하기로 하여, 2월 6일 노사정위 10차 기초위 및 6차 전체회의가 열려 철야협상 끝에 2월 7일 노사정이 9개항에 합의하였다고 발표되었다. 주지하다시피 그 9개항이란 정리해고 즉각 시행, 노조 정치활동 보장, 근로자파견제 도입, 실업대책 재원 5조원 마련, 교원노조 99년 7월 허용, 공무원 직장협의회 99년 1월 허용, 의료보험 일원화 확대추진, 실업자 초기업노조 가입 인정, 재벌개혁 등이다.
노사정위원회 합의내용 중 현시기에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고용조정' 관련사항들이었고, 정리해고 및 파견노동 등 96년말~97년초 총파업투쟁으로 막아내고 있던 자본의 요구가 전면 도입되게 되었던 점이다. 이로써 현시기 우리나라 노동자를 가장 수세에 빠뜨리고 있는 '고용문제'에 대한 노동조합운동의 대응은 법 테두리 안에서 법에 정해진 '요건'에 대해서만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처지에 몰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각 노총은 '변화된 정세'에 대응하여 어떠한 정책방침을 가지고 있었을까?
민주노총은 97년 12월 하순의 시점에서 ⸁ 재벌체제 개혁(족벌경영 척결과 경영의 투명성 제고, 노동자참여, 감사제) ⸂ 고용안정, 생활안정(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고용유지·창출, 직업훈련·고용보험 확충, 임금채권보장기금 신설) ⸃ 참여의 제도화(정책참가, 경영참가 -> 노사정 3자기구 상설화로 중앙협정 체결, 산업별 협약, 지역그룹별 논의, 종업원지주제 확대, 우리사주조합 운영 등) ⸄ ILO기준에 따른 노동법 개정(교사, 공무원 노조와 실업해고자 조합원 자격 인정, 전임자 임금지급 등) ⸅ 경제파탄 책임자 처벌과 미국의 IMF 부당개입 중단 등을 5대투쟁방침으로 제출하였다. 민주노총은 그밖에도 산업별 교섭 요구안으로 임금인상과 최저임금 명시, 정리해고시 노사합의, 비정규직 채용시 노사합의, 노사공동 직훈위원회, 참여의 제도화, 사회개혁(의료, 언론, 건설 등 민주화) -> 중앙+산별교섭으로 제시하고 기타 사항으로 사용자의 임금동결, 삭감, 미지급, 인원감축 등에 대해선 즉각 교섭과 노사협의회 요구, 기업사정이 극도로 어려우면 일방성에 대해 엄중히 경고하되 협조. 단 보상을 요구(주식지급 등), 경영상태의 면밀한 검토와 노조 중심의 현장장악력 강화, 경영참가의 실질적 확보계기로 삼을 것을 제안하였다. 민주노총은 또 한국노총과 공조(중앙교섭), 민주단체연대, 국제연대, 부도사업장 고용특위구성 등 연대활동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민주노총의 위와 같은 투쟁방향에는 다음과 같은 인식이 뒷받침되어 있다. 즉 "재벌개혁·고용안정에 대한 제도개선과 노사정 사회적 협약을 공세적으로 제기한다"(민주노총 97년 12월 중앙위원회)는 것이다. 여기서 '공세적'이라는 것의 내용은 "국가부도상태에서 제기되는 대량해고·고용불안 문제로만 수세적으로 접근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이 기회에 한국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인 재벌체제를 해체하고 노동자의 입장에서 한국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실질적 계기로 경제민주화를 쟁취할 수 있도록 공세적으로 접근하여야 한다. 따라서 재벌해체와 고용안정에 대한 정책적 대안을 분명히 제시해야 한다. 현재의 국가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사회적 참여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자신감과 조합원의 총력투쟁 결의를 배경으로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면서 "일부 시민단체에서는 고통분담에 주력"하고 있지만 "민주노총에서는 경제위기·경제파탄 주범 책임소재 규명을 요구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나타나고 있는 문제 중 두 가지가 극히 중요하다.
첫째, '애국주의', 그 본질로서의 '국가경쟁력' 강화와 '자본주의의 합리화'이다. 먼저 '현재의 국가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라고 되어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국가위기의 내용은 현실의 '경제위기'이며 실은 '자본의 위기'를 본질로 하고 있다. 경제위기에 대한 민주노총의 기본인식에 대해서는 앞에서 살펴본 대로 일국적 시야에 머물러 있어 세계자본주의의 초국적 자본운동이 일국에 가하는 영향력과 연관성에 대한 고려가 빠져 있는 결정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곧바로 '내핍'과 '국가회생'이 연관되게 되며, 이 때문에 '고통분담논리'에 빠지지 않겠다고 표명하고 있음에도 거기에 빠질 수밖에 없는, 즉 노동자와 민중의 희생(고통전담)을 전제로 하는 경제회생을 사고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세계자본주의의 경쟁격화, 통합성 강화와 불안정성 증대로 인하여 일국자본주의의 '회생'이라는 것이 세계자본주의의 상황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고 현재처럼 세계자본주의가 만성적 축적위기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는 경기순환의 부침이 심하여 항상적으로 '위기'라고 자본이 주장할 수 있기 때문에(우리나라 자본은 80년대 후반부터 위기론을 제기하고 있었다.) 그처럼 불확정적이고 불확실한 경제상황이 '언제' '어떻게' 회생가능할 지 예측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일국적 '회생'을 예측하여 자본의 논리와 똑같이 불특정기간 동안 노동자와 민중에게 내핍을 요구하게 된다. 결국 '국가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자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것은, 뒤집어놓고 보면 현재의 국내외 정세조건에 비추어 볼 때 자본에 협력하여 국가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내용의 '국가경쟁력 강화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애국주의'로 수렴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둘째, 무엇이 '공세적' 제안이라는 것인가? 위와 같은 정세인식과 대응논리에 입각하여 '경제민주주의'(그 실제 내용은 사실 '족벌경영 척결과 경영의 투명성 제고, 노동자참여, 감사제' 등등으로 제시되어 있을 뿐이다)를 확립하는 것이 공세적인가? 김대중정권에 의해 집권 전부터 '국민통합을 통한 위기극복'을 위해 강조되어온 '경제파탄 주범 책임소재 규명'이 공세적인 것인가?
노동자와 민중의 생존권도 방어되지 못하고 있는 '수세적'인 상황에서 '공세적으로' '노사정 사회협약을 제기한다'는 것이 갖는 현시기의 함의는 무엇인가? '재벌체제를 해체'하고 노동자의 '사회적 참여'를 제도화하는 '경제민주주의'를 '쟁취'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일단 효율적인 자본에 의하여 국가경제를 회생시켜야 한다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더욱이 '효율적인 자본'은 '노동시장 유연화' 내지는 '구조조정을 위한 인력유동성 제고방안'을 요구하는데 '고용안정' 요구가 거기에서 가당키나 할까? 그리하여 결국, 내용상 자본의 논리를 반복하는, 즉 자본분파 중 '재벌' 분파의 '비효율성'을 걷어낸 상태의 '효율적 자본주의'가 목표인가? 그것은 자본이 추구하는 자체개혁과 같은 것이 아닌가?
만일 현시기에 '공세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노동자와 민중의 생존권 보장 요구일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경제위기는 자본주의의 본질적 모순에 의한 과잉축적의 위기를 반영하고 있으며, 과잉축적은 자본의 재생산에 필요한 이윤율 수준을 보장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하므로 현재 자본에게 가장 치명적인 요구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자계급의 임금인상 및 고용보장 요구를 틀어막기 위해 그렇게도 열심히 위기론을 유포해왔던 것이며, 위기가 현상했을 때는 더욱더 그 위기의 원인이 노동자계급의 '무분별한 임금인상'에 있었다고 몰아대는 것이다.
한편 한국노총은, 각 경제주체의 신뢰회복과 고통분담에 의한 위기타개가 필요하며 기업단위의 대응은 실효성이 없으므로 경제구조개혁과 고용안정은 중앙차원의 노사정협약으로 확보되어야 한다는 기조 아래 '경제위기 상황에 대한 솔직한 공개- 책임자 처벌 및 공개사과- 사회협약기구 구성- 내용상 각 경제주체 공통분담- 협약체결- 이행 점검'의 과정을 제안하고 있다. 한국노총의 사회적 협약 요구안은 ⸁ 정부사용자의 솔선수범한 공무원 임금동결, 정부기구 축소와 행정개혁(공무원 30% 감축, 통폐합 등), 거시경제정책, 재정조세정책(근소세경감, 생필품특소세폐지, 사치품특소세 인상, 금융소득 종합과세 확대), 금융정책(정책금융폐지, 금융자율화보장) ⸂ 경영투명성(경영참가법 제정, 기업이사회에 노동자대표참가), 소유경영분리(소액주주, 전문경영인 임기제), 재무구조개선(상호지급보증제도 폐지, 부동산 처분, 재벌회장 재산 처분), ⸃ 고용정책(보험적용 확대, 공공직업안정망 확충), 임금정책(정부의 개입금지, 정부투자기관 예산편성지침의 임금인상율 폐지), 실업대책(실업구제기금 3조원추가, 실직자 생활안정지원), 직업훈련대책(실직자 직훈의무화), 사회보장 확대(시간제, 일용직 등 비정규직 사회보험적용, 운영기구 통합), ⸄ 노사교섭(산별교섭 유도), 참여 사항(노사정 상설 정책협의기구), ⸅ 시민, 소비자의 역할(과소비추방운동, 저축증대, 소비절약운동지원), ⸆ 노동조합의 역할 : 임금자제/ 단협개정요구 자제/ 노사관계 안정 협조/ 생산성향상 노력/ 품질개선, 원가절감 노력 등이다.
위와 같은 한국노총의 위기인식과 타개책으로서의 '사회적 협약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방식으로 제목을 고쳐붙일 수 있다.
첫째, '신자유주의'(①②⑥). '국민주의·애국주의'(③⑤). '조합주의(corporatism)'(①②③④).
둘째, '작고 효율적인 정부'(①④) '효율적 기업'(②) '협조적 노조'(⑥) '적극적 노동시장정책'(③) '기타'(⑤). 이것을 첫 번째와 결합시키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강한 신자유주의적 약한 사회민주주의적 애국주의'.
위와 같은 기조와 방침하에서 운동하고 있는 한국노총이 '고용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총력투쟁을 전개'한다는 '투쟁원칙'을 표명하고 있는 점, '최우선목표'가 '고용안정'이라는 것은, "임금교섭 위주에서 고용안정 교섭으로 전환. 고용안정 전제로 임금인상 자제. 노동시간 단축운동 전개. 부실·도산기업의 체불임금과 퇴직금 확보방안 강구. 생산성 향상에 역점. 노동력 질 제고를 위한 교육훈련 투자확대와 노조의 관심·참여도 제고"를 내용으로 한다. 이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실질임금삭감 '투쟁'. 둘째, 고용불안가속화 '투쟁'.
첫째와 관련하여. 한국노총이 IMF관리체제하에서 물가앙등이 이어지고 있고 실질적으로 자본의 임금삭감 기도가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임금인상요구는 자제하자는 것은 실질임금삭감투쟁을 벌이자는 말과 똑같은 것으로서, 노동조합으로서의 존재의의를 어디서 찾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조합원, 나아가 노동자대중 속에 자신의 존재의의가 있다고 한다면 이와 같은 방침은 있을 수 없을 것이며, 나아가 자본의 극악한 경쟁원리가 세계적으로 공황 가능성을 높이고 있는 이때, 피노키오를 유인했던 피리소리처럼 노동자를 몰고가는 피리꾼 역할을 자임하는 것과 다름 없을 것이다.
둘째와 관련하여. 생산성향상운동은 고용불안을 악화시킨다. 자본이 요구하는 생산성 향상은 결코 '고용확대'를 주목표로 하지 않는다. 비용절감 이윤확대가 목표일 뿐이다. 만일 지금현재 고용되어 있는 노동자의 고용안정을 위해 생산성 협조를 한다면 그것은 고용노동자의 임금삭감효과뿐만 아니라 실업노동자의 일자리축소효과를 갖게 될 것이다. 또한 고용노동자 위주의 이와 같은 정책은 경기회복(팽창)기에는 일정한 고용보장 효과를 가질 수도 있겠지만 침체(불황)기에는 고용노동자 자신들이 일자리에서 방출당하게 될 뿐이다. 그럼으로써 상대적과잉인구를 양산하여 노동시장'유연화'를 가속화시킬 것이다. 노동자에게 고용불안이란 '노동시장 유연화'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때, 그렇다면 한국노총은 '노동시장 유연화'를 찬성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정리해고도 찬성하고 있었는가?
만일 한국노총이 자본이 주장하는 '노동시장 안정'(자본측은 '노동시장 안정'을 주장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반실업자층으로 분류될 수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넘실대고 언제든지 자본이 원하면 해고하고 자본이 필요하면 골라서 데려다 쓸 수 있는 '유연한' 노동시장이 '안정적으로', 즉 실업자 폭동이나 노동자 파업이 없는 '안정된 노동시장'을 말한다)을 원하는 것이라면 노동시간단축운동과 관련해서도 단축시간분의 임금을 삭감할 수도 있다는 의사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으며 그런 상태에서 '노조의 참여도 제고'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정책방침을 가지고 있었던 노조운동 진영이 '노사정위'에 '참가'를 결정했다면 그 결과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노사정' 협의기구에의 '참가'는 필연적으로 '경제위기' 상황, 더 정확하게는 '경제위기를 이용한 정부와 자본의 국가주의(애국주의)적 설득'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하물며 양 노총은 모두 '참가'에 적극적 기조를 가지고 있었다. 양 노총 모두 '정책참가'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노총은 '경제파탄주범 김영삼 대통령 탄핵, 재벌·전경련·재경원·한나라당 해체' '경제 5적 수사' '고용안정' 등의 요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노·사·정의 사회적 협약을 쟁취해내야 한다"는 방침을 가지고 있었고, 한국노총도 '참가형 노사관계 구축'을 목표하고 '경제구조개혁과 고용안정은 중앙 차원의 노사정협약으로 확보되어야 한다'는 기조하에 '노사정 상설 정책협의기구'를 사고하고 있었다.
민주노총이 '대중투쟁을 기본으로' 하고, '들러리합의'는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었다고 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이미 경제위기에 대한 시각과 그 위기극복에 관한 대응관이,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자본과 정부의 그것과 별다른 차별성을 갖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사정위'에서의 협의가 가져올 결과는 예정되어 있었다. 즉 '재벌체제 개혁'과 '노동시장 유연화'가 그것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이 두 가지는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전략에서 필수적인 것이었을 뿐이다.
4. 현시기 노동조합운동의 과제
이상에서 우리는 노동조합운동의 경제위기에 대한 시각과 대응기조에 대하여 각 노총의 투쟁방향을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간략한 평가를 덧붙였다. 노조운동이 수세적으로 접근해서는 안되고' '공세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민주노총이나 '고용안정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한국노총이나 현실에서 전개되고 있는 경제위기를 일국적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으며, 특히 심각한 노동권 침탈과 생존권 위기에 직면해 있는 노동자의 처지에서 출발한다고 보기 어려운 입장을 취하여왔음을 알 수 있었다. 2월 노사정위에서의 '타협' 이후 즉시 소집된 민주노총대의원대회에서 '노사정위 합의문' 추인문제는 논란 끝에 '부결'되었고, 1기 지도부가 전원 사퇴하는 데로 나아갔다. 전민중의 이해를 심각하게 훼손하였다는 하부대중으로부터의 비판은 민주노총 제2기 지도부 선거과정에서 '노사정위원회 합의'에 나섰던 지도부를 거부하고, '내부 혁신'을 요구하는 흐름 속에서 민주노총 대의원들은 1기 지도부의 사업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후보진영을 새로운 집행부로 선출하였던 것이다.
노동조합운동은 지금 대단히 어려운 국면에 처해 있다. 지난 12월부터 시작된 'IMF 관리체제'가 본격적인 '효력'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정부·자본의 '신자유주의적 축적구조 재편'이 본격화하면서 노동자와 민중의 생존기반이 와해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공기업 민영화, 외자유치를 위한 적대적 M&A 허용, 금융구조 조정 등 본격적인 초국적 자본의 공세(IMF 이행조건들의 핵심)가 98년 중에 추진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를 위해 정부는 소위 제2기 노사정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노동측을 설득하고 있는 중이지만, 현실적으로 약 350만명에 달하는 실업자(구직을 포기한 실망실업자 포함)를 내고 있는 IMF 프로그램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상태가 자본의 논리를 그대로 대변하는 '노사정위'에의 참가를 허용치 않고 있다.
노조운동 진영은 지금 경제위기를 이용한 위와 같은 자본의 공세, 그 중에서도 이데올로기적, 현실적 '유연화' 공세에 대응하여 노동자·민중의 생존권을 방어하는 대응력을 시급히 회복해 내야 하는 절대절명의 과제를 가지고 있다. 노동자의 단결력이 기반되지 않는 '참가'는 오히려 노동자운동의 대응력을 약화시키게 된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노조운동은 '노동자·민중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펼쳐 나감으로써 노동자·민중의 생존권을 방어해나가야 할 것이다. 이를 도외시하고 '사회개혁'을 앞세우다가 '자본과 함께 하는 운동'이 되지 않도록 경계할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87년 이후 발전해온 노조운동 내부의 민주주의적 관행을 복원·발전시켜내는 것과 함께, 자본의 논리에 침윤 당하지 않고 철저하게 노동자의 상태와 처지에 입각한 대응에 나서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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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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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5]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공세와 한국노동운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