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이은숙
◎ 작성일:2000.07.30(일)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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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임단투 평가
인하대신문 1997.10.30
지난 10월26일 서울의 올림픽 펜싱경기장에서는 '국민승리21' 출범식이 있었고, 그 산하에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을 대통령 후보로 하는 선거운동본부가 꾸려졌다. 바야흐로 12월의 대통령선거가 노동자·민중에게까지도 구체적인 일정으로 제시된 셈이다. 동시에, 올해의 임단투 전선은 완연하게, 다가올 대선을 둘러싼 전선으로 이동되었다.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 라고 하는 노동운동의 가장 덩치 큰 과제 앞에서 임단투는 너무나 작고 부문 이기주의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음직한 시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의 가장 튼튼한 밑받침돌이 되는 것은 다름 아닌 노동자·민중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권투쟁일 것이다.
임단투는 기본적으로 노동조건을 개선해 나가기 위한 노동자계급의 가장 대중적인 투쟁이자 노동자의 삶의 기초를 확보하는 생존투쟁이다. 노동자 전체의 생활향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목표하는 경제적인 요구투쟁인 임단투는, 그러나 항상 자본의 이해와 대립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자본의 이윤을 추구하는 생리 때문이며, 바로 이로 인해 정치적인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노동자를 부리는 자본 쪽의 입장에서는 노동조건 개선이나 임금인상은 언제나 생산에서 비용이 증대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따라서 자본은 자신의 필요(이를테면 임금을 올려주지 않을 경우에는 파업이 일어난다든지 해서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가게 된다든지, 아니면 임금을 조금 올려주고 더 많은 노동을 시켜서 임금인상분보다 훨씬 많은 이윤을 뽑아내려 한다든지 하는 그러한 필요)가 생기기 전에는 임금인상이건 노동조건 개선이건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자본의 이해관계와 논리가 그러하기 때문에 그러한 논리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의 사회관계 속에서는, 그래서 임단투라고 하는 경제적 요구투쟁이 정치적인 성격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노동자의 임단투는 여전히 매우 중요하고 , 또한 특히 올해의 임단투는 더욱 중요했다고 볼 수 있다. 올 임단투는 우선 지난 겨울의 총파업투쟁 및 노동법 개악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이 형성된 정세조건의 규정을 받았다. 즉 올 임단투는 예년과 달리, 총파업으로 투쟁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악된 노동법하에서, 자본측의 공세(특히 노동시장 유연화와 구조조정을 축으로 한 신자유주의적 공세)를 방어할 수 있는, 그리고 자본측의 양보를 끌어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 했다는 정세적 요구를 받고 있었다. 이에 따라 올 임단투는 총파업투쟁의 연장에서 전국적 전선을 형성해야 할 과제를 가지고 있었고, 더욱이 노동법이 '재개악'이라고 간주되면서 이미 전국적 전선은 형성된 가운데 시작되었다. 두 번째로, 올 임단투는 조직적 과제로서 민주노조운동의 내적인 강화와 조직정비(산업별노조건설)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대과제 및 12월 대선을 앞두고 더욱 활발하게 제기된 노동자 정치세력화 추진이라고 하는 올해의 노동운동 정세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 임단투는 전체적으로 보아 전국적인 전선형성과 집중성을 보여주기 보다는 사업장 단위의 원심력이 더욱 크게 작용하여 각개분투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지난해 연말부터의 예전보다 강화된 '경제위기론' 속에서, 예상대로 자본측의 단체협약 개악기도 및 임금동결 공세가 이어졌다. 연초부터 한보철강과 삼미특수강의 부도에 이어 기아자동차에 이르기까지 30대 재벌그룹 산하의 대기업들이 잇달아 도산위기에 직면하는 등 '실물적 현상'이 마치 '경제위기'의 증거처럼 드러나게 되자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일자리에 대한 불안감은 크게 확대되었고, 이러한 불안감은 노동법에 새로이 추가도입된 '정리해고제' 때문에 더욱 고조되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치러진 임단투에서 자본측은 노동자들에게 '임금인상 보다는 고용보장'이라는 논리를 들어 설득하고자 하였고, 일부 노조에서는 이러한 논리의 연장에서 임금동결 선언 혹은 사용자와 무교섭으로 백지위임하여 타결하는 양상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올해 뿐만 아니라 이전에도 이러한 임금동결선언 및 백지위임 무교섭타결도 간혹 있었지만 올해는 그 수가 급증하여, 지난 6월까지 422개 사업장에서 임금을 동결하였고 186개 사업장에서 백지위임을 포함한 무교섭 타결이 이루어졌다고 노동부가 발표했다. 노동부는 이와 같은 현상을 "노동법 개정의 성과"라고 평가했다. 노동법 개정의 성과라는 것이 바로 고용불안'감'을 현실화시킨 것이라고 하면 그 평가는 정확한 것이라 할 것이다.
사실 노동자들은 이런 사태를 이미 노동법 개정을 위한 총파업투쟁을 예고하고 실행하면서 알고 있었고, 총파업 이후에도 또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민주노총이건 한국노총이건 노동관계법의 '무효화' 내지 '불복종' 운동을 선언하면서 이를 임단투와 연계하여 대응해나가겠다고 선언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선언이 구체적인 투쟁과정에서 현실화되지 못하고, 동결선언 등의 현상을 포함하여 올 임단투가 전체적으로 노동법 개악 이후의 자본측 공세에 대해 전국적인 응집력을 발휘하며 대응할 수 없었던 데는 복합적인 요인이 게재되어 있다. 즉 지난해의 '신노사관계 구상'과 '노사관계 개혁위원회'(노개위) 활동과정에서부터 총파업투쟁과정, 그리고 임단투 그 자체의 과정의 여러 가지 주객관적 상황이 복잡하게 작용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간략하게 임단투과정에서 나타난 양상만을 중심으로 전국적 전선의 부재와 '밀린 임단투'라는 현실을 평가해 볼 수밖에 없겠다. 우선 첫째로, 총파업 마무리단계에서 투쟁의 진이 점차 빠지는 가운데, 임단투 시기가 지연되었던 점을 들 수 있다. 예년에 비해 두세달 정도의 지연현상을 보여주었다. 다음으로, 총파업 때의 밑으로부터의 응집력과 투쟁력이 임단투에서 또다시 발휘되려면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하였다. 특히 총파업의 결과가 노동자들이 가장 강력하게 반발하였던 정리해고제 등의 도입과 노조활동에 대한 제약 강화조항들의 대폭 도입으로 투쟁의 성과를 올바로 해석할 수 있는 소지를 극도로 제약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총파업 그 자체가 엄청난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장 노동자들의 상실감이 컸다는 점을 고려할 때, 전국 중앙 차원에서의 총파업 이후 임단투 준비는 중요성을 더하는 것이었다. 민주노총에서도 이러한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전국집중적인 투쟁을 준비하고자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으로 제시된 중심적 전술은 '교섭권 위임'이었을 뿐이다. 임단투에 대한 전술의 단조로움이 그렇게 나타났던 반면, 그에 비해 민주노총은 '사회개혁투쟁'에 대해 더많은 고려를 두었던 것 같다. 교섭권 위임전술 제시하면서 민주노총은, 연맹별 응집력을 높이고 산별노조의 토대를 구축하며 전국전선 형성으로 연결하고자 목표했지만 이것들은 교섭권 위임전술에 담기 어려운 목표였다. 기업별 노조체계에서의 교섭권 위임전술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별 노조체계에서 이 전술이 위력을 발휘할 수 있으려면 단위노조와 상급단체 혹은 최상급단체와의 결합력이 산별노조 못지 않게 강력해야만 한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아직 신규조직이나 마찬가지이며, 일부 연맹(병원노련이나 공익노련-구전문노련)은 이 전술운용에 익숙하였지만 어떤 연맹의 경우에는 교섭권 위임이라는 방식을 처음 채택하는 곳도 많았기 때문에 민주노총 전체 차원에서 이 전술을 통해 거둘 수 있는 성과라는 것이 거의 없었다. 결국 교섭권 위임전술은 전국 전선의 형성에 기여하지 못했고, 시기 집중 조차 담보되기 어려웠던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7월 초중순에 100여개 사업장에서 파업, 조정신청, 쟁의행위 결의 등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투쟁 내용이 상이하여 시기집중의 내용이 거의 의미를 갖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 사업장에서의 중심적 투쟁들이 효과적으로 조직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민주노총이 7월 초중순을 '총력투쟁' 시기로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총력투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임단투는 결국 사업장 각개 약진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사회개혁투쟁, 재벌개혁투쟁,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등등의 민주노총이 상당히 관심을 기울였던 사안들 역시 임단투와 괴리되거나 혹은 임단투를 역규정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삼미특수강의 포항제철 인수과정에서 '정리해고'된 노동자들의 투쟁이 1백여일을 넘기면서 계속되고 있었고, 한국타이어 덕부진흥 한국후꼬꾸 등 개별사업장에서 자본측에 의한 야만적인 테러가 계속되는 상황이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연대 및 공동투쟁은 조직되지 못하였다. 올 임단투과정에서 가장 중심적인 이슈로 제기된 것이 '고용안정 및 보장' 요구(민주노총 임단투 사업장 중 18.8%인 175개 사업장에서 요구하여 요구내용별 순위로 1위)였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고용보장 요구투쟁과 결합되지 못하였던 것은 현재의 노조운동 상황을 상당부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하튼 97 임단투는 이제 노동운동에 많은 과제를 남긴채 거의 마무리되었다. 여전히 중요하게 남겨진 가장 큰 문제는 '고용문제'이다. 노동시간의 단축과 생활임금 보장, 그리고 비정규직·외국인노동자와의 차별 철폐 등 기본적 과제가 새삼 강조되고 준비되어야 할 때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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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10] 97년 임단투 평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