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이은숙
◎ 작성일:2000.08.17(목)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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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
'등춥지 않고 배고프지 않는' 사회를 위한 소설
노동전선 1998. 12월호 원고
추운 겨울이 왔다
겨울은 없는 사람들에게 특히 괴롭다. 없는 사람에게는 여름이 최고다. 물만 먹어도 조금은 견딜 수 있고 하늘 땅 사이가 몸 뉠 곳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등따숩고 배부를 수 있는 장판과 먹거 리가 없을 때, 날씨마저 을씨년스럽고 매양 얼음판이 깔려 있는 겨울은 그야말로 쥐약이다. 눈이라도 오게되면 더 큰일이다. 철없는 아이들이 첫눈을 즐거워라 할 때, 아이들을 뭐랄 수도 없고 그저 막막 하게 초점을 잃은 눈길로 하늘을 보며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하느님을 원망할 뿐이다. 되지도 않는 소설 쓰고 있는 느낌이 없는 건 아니다. 원래 문장발도 없고 어울리지도 않기는 하지만 98년 들어 특 히 5월부터 급격하게 늘어난 대량실업, 그리고 그에 따라 고용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임금 삭감과 언제 '정리'될 지 알 수 없는 일자리에 대한 불안이 노동자·민중이라 이름할 수 있는 '없는 사람들'을 짓누르면서 겨울이 왔다는 그 사실 때문에, 시작이 이렇게 되었다. IMF관리체제 이후 없는 사람들로서 스스로를 실감하면서는 실지로 처음 맞는 겨울인 셈이다. 98년초부터 정부쪽에서 수차례 의 수정을 거치면서 내놓은 실업대책들이란 게 실업자 1인당 약 4개월뿐이 버틸 수 없는 수준이었기 에 이 겨울이 더 막막하고 춥다. 없는 사람들, 그 다른 이름인 노동자·민중은 겨울을 이렇게밖에 맞 을 수 없었을까. 98년을 돌아보자. 97년을 돌아보자. 그리고 나아가서는 그냥 없는 사람들이었다가, 함 께 모여서 우리는 똑같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한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던 80년대 중반부터의 '없는 우리들'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자.
그리고 99년을 준비하자
노동시간 단축운동을 제안하면서 우리가 말했던 것은, (1) 대량실업사태와 고용불안정의 배경과 본 질적 원인이 애시당초 정부나 자본쪽에서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만들어온 것이었다는 점, (2) 그리고 그러면서도 그들이 그 사실을 부인하거나 숨기면서 그 짓거리를 반복하고 있다는 점, (3) 그래서 그들 이 내놓는 '대책'이라는 것이 결코 대책이 될 수 없다는 점, (4) 그런 점에서, 누구나 다 쓰는 말이기 는 하지만 우리가 쓰지 못할 이유가 없기에 쓴다면, '획기적인 발상 전환'이 대량실업대책에 대해서 뿐 아니라 사회구조 전반에 걸쳐 필요한데, (5) 그것은 다른 게 아니라 국민의 절대다수인 노동자·민 중이 배고프지 않고 등춥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고, 그렇게 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 다는 것이었다. 위와 같은 이야기들을 개념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 (1) 자본주의 체제 의 구조적 모순으로서의 '과잉축적' 경향과 '상대적 과잉인구'의 대량생산, (2)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 까지의 식민지쟁탈전, 30년대 대공황 이후에는 '케인즈주의', 70년대 중반 이후 불황 속에서는 '신보수 주의', 80년대를 거치면서 장기구조적 불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형성된 거대초국적자본 주도로 전개된 자본의 지구화(Globalization) 속에서는 '신자유주의', (3)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노동시장 '유연화', 등등, (4) 자본의 '경쟁'의 원리를 노동자의 '연대'의 원리로 전환, 자본의 '경쟁'원리에 의한 '기업경쟁 력 강화 -> 국가경쟁력 강화' 논리가 결국은 '자본의 위기'를 한층 심화·확대시키고 그 과정에서 노 동자·민중을 갉아먹어(상대적 과잉인구의 양산 현상도 그 한가지 양태이다) 오면서 급기야 인류의 삶을 파괴(그리고 그 기반이 되는 생태, 환경의 파괴)하는 데로 이어지므로 그 핵심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자본의 '더 많은 이윤 추구를 위한 경쟁' 그리고 지금까지의 이루어온 '눈부신' 생산력발전의 성 과를 '과잉축적'이 되게 만들어왔던 그 자본의 경쟁원리를 폐기하고, 노동자의 '연대'원리에 입각하여 생산력 발전의 성과를 '사회화'함으로써 '희망'의 원리로 대체, (5) 생산력 발전의 성과를 과잉축적(그 뒷면이랄 수 있는 실업자·반실업자 곧 상대적 과잉인구 양산)으로 계속 가져갈 게 아니라, 노동시간 을 대폭(계산상으로는 지금의 실질노동시간을 절반 가까이로 줄일 수 있는 생산력 수준임) 단축함으 로써 실업자·반실업자를 포함하여 전체 일하는 사람들 곧 없는 사람들 곧 노동자·민중의 1인당 노 동시간을 경감하고, 그러면서도 노동자·민중의 생활임금(그 사회의 표준적인 삶을 보장하는 표준생계 비)을 보장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설혹 일거에 달성될 수 없고 멀고도 험한 길이라고 해도 그렇게 되 도록 하는 힘(노동자·민중의 계급적·정치적 단결)을 만들어 나가는 차원에서 그 요구를 제기하고, 모든 사실들의 본질을 꿰뚫어 바라보고, 삶과 투쟁을 조직하는 것, 그래야만 그 과정에서 자본의 양보 를 띠끌만큼이라도 끌어낼 수 있다는 점 등이다.
가장 현실적인 것은 가장 원칙적인 것이다
그래서 '노동시간단축·생활임금 보장' 요구는, 결코 '원리는 맞지만 현실에는 맞지 않은 요구' 혹은 '현실성 없는 원칙' 따위로 이야기될 수 없는, 여전히 지금당장 제기할 수밖에 없는 우리앞의 과제라 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비록 장기적으로 확보될 수밖에는 없겠지만 장기적으로라도 확보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요구내용이 담고 있는 큰 틀에서의 맥락과 줄거리를 확실히 해야 하며, 그런 선상에서 노동자계급의 대중조직(각급 수준의 노동조합)과, 노동자계급의 정치운동에서의 정책과 투쟁이 조직되 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노동시간 단축' 논의들이 다양한 수준과 다기한 차원에서 일고 있는 것 자체는 바람 직하달 수 있으나, 뭔가 다른 의도를 가지고(이를테면 자본의 논리 관철을 위한 계기로 삼아서) 노동 시간 단축문제를 고려하면서 그 실천적 함의(자본편향성과 노동자계급 기만)를 숨기거나, 혹은 마치 노동자계급을 위해서인 것처럼 포장되는 것을 철저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거기에서 나오는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특히 두 가지의 기만적인 논리들이 있다. 그 두가지는 '노동 시간단축시 임금삭감은 불가피'가 하나요, '임금 및 노동시간 유연화'가 다른 하나이다. 이 둘은 표현만 다르지 원래는 한몸이다. 그리고 전자는 벌써부터 나와 있는 것이고 요새도 지속되고 있는 흔한 논의 이고 그래서 노동자들도 많이 경계하는 편이면서도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논의이고 쟁점이라면 쟁점 이랄 수 있는데, 실질적으로 더 문제는 후자이다. 그것은 전자 속에 싹을 두고 있고 또아리를 틀고 있 는 것으로서, 요새 노동시간 변형과 연봉제 등으로 자본측이 야금야금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측이 저런 것을 주장하는 것은 자본의 입장에서 볼 때 어찌보면 당연하고 우리가 금방 알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 쳐도, 식자들의 입을 통해 그것도 노동운동 안에서 저런 얘기가 나올 때는 혼돈스럽기 그지없다. 많이 배워가지고 유식하기도 하고 언변도 유창해서 뭐가 똥이고 뭐가 똥이 아 닌지가 구별도 안되게 쫙쫙 싸대면 없는 우리들은 정말 햇갈린다.
유식하고도 풍부한, 그래서 그럴 듯한 사기와 기만
사기와 기만은 대개 다음과 같은 식으로 시작된다.
첫째, '현실성이 있어야 한다' '현실성 없는 최선보다는 현실성 있는 차선이 낫다' 운운.
둘째, '이쪽에서도 뭔가 내어 놓아야 저쪽에서도 내놓는 게 있다' '대화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운운.
그래서 들여다 보면 그 유식하고도 풍부한 글발과 유창한 언변들로 어떤 때는 은연 중에 또 어떤 때는 노골적으로 노동자쪽의 양보를 선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선동은 달콤하고도 그럴 듯하다. 이 때 한스러운 것은 못배운 것일 뿐이다. 그리고, 유식하고도 풍부한 글발과 유창한 언변도 갖추지 못하 고 '유식·유창'에 '대드는 것'이 자랑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죄도 아니다. 유식·유창은 하나의 권력이고 그것은 우선 '있는 자들'의 것이며, 그 속에서 훈련되는 것이다. '없는 자들'인 우리는 우리 식으로 살아간다. 우선은 뭐가 사기인지를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우리는 강력하다. 노동자·민 중이 겪고 있는 현실이 그것을 사기와 기만이라고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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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12/ '등춥지 않고 배고프지 않는' 사회를 위한 소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