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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6번 : [78호/연재-기획] 캐시미르 분쟁의 근본원인 |
글쓴이: 프레드 골드스틴 |
등록: 2002-07-10 00:00:00 |
조회: 3217 |
첨부파일: 캐시미르문제(워커스월드).hwp(41 KB) |
국제노동
캐시미르 분쟁의 근본원인*
프레드 골드스틴(Fred Goldstein)
* 이 글은 ꡔ워커스 월드ꡕ(Workers World) 2002년
6월 20일자에 실린 “Roots of Crisis over Kashmir”의
번역입니다. 출처는 http://www.workers.org/ww/2002/indipak0620.p
hp
미국과 영국의 제국주의는 오랜 기간 자국의 이해에 따라 인도와
파키스탄간의 분쟁을 이용해 왔다. 현재 이슬라마바드와
뉴델리의 반동정권은 부시 행정부의 지원을 받기 위해 특히
캐시미르 지역에서의 분쟁을 두고 서로 경쟁하고 있다.
캐시미르 분쟁의 원인에 대한 확장된 분석과 성찰에 착수하는
것은 지금 가능하다. 1990년 이래―1992년의 바브리 마스히드
모스크의 파괴를 포함하여―지난 10년간 인도에는 바흐라티야
자나타 당이 지도하는 반동적, 반 무슬림 힌두교 부흥운동이
존재해왔다.
또한 CIA와 사우디 아라비아의 지원을 받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패권 역시 존재한다. 파키스탄은 사회주의 아프가니스탄
정부와 쏘련에 대항하는 80억 달러의 반혁명 전쟁의
전초기지였다. 이 세력들은―현재는 많은 부분 미국에 반대하는
세력들이지만―캐시미르에서의 억압적 인도지배에
저항해왔다.
어떤 사람들은 캐시미르에서의 분쟁을 인도가 분할되어
파키스탄이 생겨난 1947을 계기로 설명하려고 하지만, 지난
250여 년의 영국 식민주의의 음모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1947년의
분할과 극심한 종교적 갈등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영국의 동인도회사(British East India Company)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도를 약탈하고 지배하기 위한 영국
동인도회사의 침략전쟁에 대한 분석에서 시작하는 것이
유용하다. 동인도회사(EIC)는 그 기원을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부터 찾을 수 있는데, 영국 의회로부터 인도에서의 독점적
사업에 대한 권한을 부여받았으며 영국의 금융 및 상업의 이해를
대변해 왔다. 동인도회사는 영국 해군을 든든한 후원자로 두고
있었으며 군대를 파병할 권한을 부여받고 있었다. 이러한 것들을
바탕으로 동인도회사는 자국의 투자자들에게 충분한 이윤을
보장하기 위해 인도의 경제를 침식하고 사회적 정치적
관계들에까지 개입했다.
그러나 영국은 군사력만으로는 광활한 인도대륙을 지배할 수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동인도회사는 인도 사회가 수많은
소영주들에 의해 지배되는 수백 개의 주로 분할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 소영주들은 쇠퇴해가는 무굴제국의 이름에 의해
명목적으로만 결합력을 가질 뿐이었다.
영국은 1757년 벵갈을 점령했고 “종적 동맹”(sub ordinate
alliances)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동인도회사는 지역의
소영주들에게 국지적 주권을 부여했고 그들을 동인도회사와
영국의 수하에 두었다. 소영주들은 자신들이 지배하는 지역에서
자율성과 외적에 대한 치안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가능한 한 동인도회사는 힌두교도들에게는 무슬림 지배자를
그리고 무슬림 교도들에게는 힌두 지배자를 배치하려고 해왔다.
그들은 이러한 정책을 100년 이상 수행해 왔으며 그를 통해
인도에 대한 그들의 지배를 확고하게 했다. 이러한 종적 동맹은
영주국가(princely states)라고 알려져 왔다.
1947년 인도가 분할되던 때 550개의 영주국가들는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되었다. 이것은 인도 식민주의자들의 지난
세기간의 분할통치전략의 산물이었다.
영국은 캐시미르를 1846년 팔아버렸다(British sold Kashmir in
1846)
캐시미르는 그러한 종속적인 동맹의 명백하고 구체적인 예이다.
영국은 잘 알려져있지 않은 1846년의 암릿사 조약으로 그들이
정복했던 라호르의 주를 힌두 마하라자에 매각함으로써 현재의
캐시미르 주를―지리학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만들어냈다.
캐시미르는 역사적으로 무슬림 제국에 의해 지배되어 오던
영토의 일부로서 무슬림 인구가 다수를 점유하고 있다.
1846년의 암릿사 조약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영국
정부는 캐시미르 지역을 구성하는 인더스 강 유역의 영토의
독립적인 소유를 마하라자 굴랍 씽에 양도한다.” 영국에 의해
토지조사가 이루어졌으며 굴랍 씽은 영국령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굴랍 씽은 영국 정부에 7백 5십만 루페를 지불했으며
영국 정부의 동의가 없을 시 반환은 없을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영국은 주변 주들의 분쟁들을 안정시킬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마하라자는 군대를 보내어 영국군을 보조할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마하라자는 영국의 승인 없이 유럽인이나 미국인을
고용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댓가로 영국은 마하라자 굴랍 씽의
영토를 외적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조력하기로 되어 있었다.
캐시미르가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인도 역사에서 가장 큰
반란이 일어났다. 그것은 15만 영국 식민지 주둔군대 내부의
원주민 병사들의 반란이었는데 그것은 식민주의자들에 의해
경멸적으로 “용병 반란”(Sepoy Mutiny) 우리에게는 “세포이
반란”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역자).
라고 불렸다. 그러나 그것은 영국 통치자들의 무자비함과 인종적
무감각에 대한 저항이었으며 1857년부터 1859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반란에서 인도 군대는 뉴델리와 다른 도시들을 점령했으며
격렬한 항쟁 후에 패배하였다.
이 반란은 반 영국 저항을 내세운 최초의 선언이었으며,
자발적으로―정치적이 아니라―조직되었다. 이후 곧 민족주의
운동이 발흥했는데 이것은 처음에는 온건한, 그리고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운동이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인도인들은 인도
통치에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1885년 인도국민의회(the Indian
National Congress)를 위한 첫 회합이 열렸다.
의회정당의 형성(Formation of Congress Party)
의회는 힌두교 상류계급의 다수파로 구성되었다. 의회 내부에는
무슬림 역시 존재하고 있었지만 무슬림 상류계급의 다른
부분들은 영국의 지원 하에 1906년 무슬림 동맹(the Muslim
League)을 결성했다. 이후 수십년 간 인도의 반식민주의 운동은
의회와 무슬림 동맹 간의 관계에 좌우되게 되었다. 두 조직들의
진보적인 세력들은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의회에는 세속적인
국민적 통합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 많은 진보적 성향의
무슬림들이 있었다.
온건한 부르주아 민족주의자, 개혁주의 운동마저 불만을
표출하자 영국 제국주의자들은 분할정책에 나섰다. 한편으로
그들은 단호하게 비타협을 표방했다. 주 서기인 해밀튼 경은
1899년 4월 14일 인도 총독에게 서신을 보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인도인들이 원하는 것―대의기구 혹은
현존하는 유럽체제의 축소―을 내어줄 수 없다.”
다른 한편, 1909년 영국인들은 분리선거(separate election
rolls)를 실시하였는데 거기서는 투표할 수 있는 1%의
유권자들은 종교에 따라 투표할 수밖에 없었다. 소수를
보호한다는 외관을 가진 분리선거제도는 정치를 종교적 경쟁으로
만들었으며 거기에 진정한 대의제라는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러한 과정은 식민지 지배권력이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충격으로 개혁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던 1919년 더욱
심각해졌다.
1차 대전에서의 영국군 측으로 인도 군대의 강제참전, 식민지
인민들이 식민주의를 전복할 수 있게 지원한 러시아 혁명 그리고
1919년 중국에서의 반제국주의의 고조 등이 인도를
흔들어놓았다. 처음으로 노동조합이 결성되었으며 영국 통치에
저항하는 대규모 운동이 광범위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인도의 공산주의자들은 의회에 의해 지도되는 강고한 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이 지배하는 풍토에 발을 붙일 수 없었다.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는 민중운동의 수장으로서 투쟁에
평화주의적 전술과 온건한 종교이념을 도입하였다. 그의 경제적
방향은 반동적인 것으로서 그것은 부락경제(village
economy)로의 회귀였다.
공산주의 당: 진전과 퇴보(Communist Party: gains and
setbacks)
1920년대 후반 인도공산당(CPI)은 노동조합운동과 노동자
조직화에 있어 진전을 거두었다. 1930년대에는 계급통합과
독립을 위한 투쟁에 있어 크게 도약했다. 그러나 2차 대전
기간동안 역사적으로 크게 후퇴했다.
2차 대전 시기는 격렬한 대중봉기의 시기였다. 대중투쟁의
온건한 성향에도 불구하고 의회는 영국의 전쟁에 대해 강하게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영국이 인도의 독립을 약속할 경우
영국을 지원한다는 데에는 동의가 되어 있던 상태였다.
화이트홀(Whitehall)은 운동을 저지했고 의회는 모든 정부에서의
역할로부터 철수했다. 그것은 영국을 철수시키기 위한 “Quit
Indis” 운동의 시작이었다. 1857년 이래 영국 제국주의자들은
1942년까지 최악의 봉기라는 위기상황에 놓였다. 6만명이 넘는
사람들을 투옥했으며 그중에는 순수한 의회 지도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무슬림 동맹은 영국전쟁을 지지했지만 그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쏘비에트 지도부는 인도공산당으로 하여금 전쟁이르
지지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투쟁을 보류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그 이론적 근거는, 영국 제국주의자들이 나치와 싸우고 있었고
독일도 쏘련을 침략하고 있기 때문에 민족적인 투쟁을 보류하는
것이 사회주의를 방어하리라는 것이었다.
이 정책은 프랑스 식민지, 라틴 아메리카 등 영국제국 이외의
사회주의자들의 투쟁에도 유사하게 비극적으로 관철되었다.
모스크바가 계산에 넣지 않았던 것이 있다면 혁명적인 인도가
1917년 이후 세계 혁명의가장 위대한 자산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떤 경우에도 인도공산당은 대중봉기의 시점에서
혁명지도부로 설 수 있는 기회를 잃은 셈이었다.
의회는 교전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순수 민족해방운동의 정신
속에 혁명적 승리보다는 영국의 철수에 대한 협상과 권력의
이양을 처리하는 문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자본주의를
수호하고자 노력하는 부르주아지 병력은 전반적인 지휘하에
있었고 이후 일어난 사건이 증명하듯 그들중 가장 급진적인
세력―네루(Jawaharlal Nehru)에 의해 대표되는―일지라도 영국
식민주의에 의해 새겨진 지방분할을 극복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1940년 라호레 의회, 무슬림 동맹과 그 지도자인 무하마드 알리
지나(Muhammad Ali Jinnah)가 인도 연방에 머무는 것에 대한
이중 경향을 포기하고 무슬림 주 분리를 선언함으로써 주사위는
던져졌다. 비록 이 분열이 영국 제국주의의 묵인 하에
이루어졌지만 그 토대는 힌두 부르주아지들, 특히 종교적인
쇼비니즘을 조장하고 무슬림을 박해하는 우익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인도에서 영국 제국주의자들의 마지막 행동은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분할시기를 언급하는 것이었다. 마지막 총독인
마운트바튼 경(Lord Mountbatten)은 규정을 정했는데 이는
동맹과 의회 모두에서 통과되었다. 그것은, 영국 지배하의
무슬림 다수지역은 파키스탄으로, 힌두 다수지역은 인도로
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550여 개의 영주국가는 각 나라의
통치자의 결정에 따라 선택하게 되었다.
전략적으로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 놓인 캐시미르는 가장 큰
영주국가 중 하나였다. 캐시미르는 무슬림이 70%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힌두 봉건영주인 마하라자 하리 씽(Maharajar Hari
Singh)―1846년 영국으로부터 캐시미르를 산 통치자의 후계자인
씽(Singh)의 후계자인―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씽은 최대의
권력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독립국가로 남는 문제를
쥐고 흔들고 있었다.
캐시미르의 가장 대중적인 지도자인 샤이크 압둘라(Sheik
Abdullah)는 네루와 동맹을 맺었던 모든 캐시미르 위원회의
수장인 세속적인 무슬림이었다. 압둘라는 토지개혁에 헌신했으며
땅의 “땅을 농부에게”라는 슬로건을 내걸기까지 했다. 그는
파키스탄에서 무슬림 세력의 영주지배에도 반대했고 또한
마하라자에 의해 대표되는 귀족정치에 대해서도 반대했기 때문에
독립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그는 감옥으로 내던져졌다.
파키스탄인들은 영국의 군용운송수단을 이용하여 캐시미르로
군대를 보냈다. 네루는 마운트배튼과 논의한 끝에 수천의 군대를
공수했다. 자신의 왕좌를 우려한 하리 씽은 인도에 합병되는
것을 수락했다. 샤이크 압둘라는 출옥하여 뉴 델리로 보내졌는데
그곳에서 그는 캐시미르의 자율성 보장과 마지막 결정을
국민투표에 의거할 것을 약속한다는 조건 하에 인도에 합병되는
것에 동의했다.
전쟁은 1948년에 종식되었다. 인도 병력은 영토의 가장 좋은
몫을 얻었다. 그 문제는 미국과 영국에 의해 지배되고 있던 UN에
위탁되었다. 그 어떤 국민투표도 없었다. 의회의 동의를 얻은
자치적인 준비는 점차 침해당했으며 인도 부르주아지들은
캐시미르에 대한 그들의 통제권을 공고히 해 나갔다. 힌두
통치집단은 무슬림 대다수를 통제했다. 샤이크 압둘라는 네루
치하 내내 투옥과 출옥을 반복했다.
캐시미르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 상태(The issue of Kashmir
stands unresolved today)
의회의 부르주아 지도자들 중 가장 진보적인 인물이었던 네루는,
인도를 통합하고 민주적인 통합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그의
역사적 위치에서 캐시미르 양도를 정당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의
통합민족국가는 힌두 다수라는 상황에서 무슬림들 역시 평등하게
대우받는 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막다른 상황에 이르러 봉기가 발생하고 인도 정부는 이의
진압에 나서게 되었다. 반동의 물결이 전 지역을 휩쓸었다.
1947년 인도 부르주아지들이 사실상 점령 캐시미르의 몫을
확보함에 따라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근본주의적 세력들은
합병을 요구하며 전쟁에 가까운 투쟁을 벌였다. 캐시미르인들의
자결을 위한 투쟁은 점점 더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의회에서의 진보적인 국면이 캐시미르인들의 지지를
얻어내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영국 제국주의의 음모에
대항해 인도를 통합하려는 투쟁이 승리하지 못한 이유와
동일하다. 그들은 착취계급인 부르주아지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네루 치하의 인도(India under Nehru)
인도는 세계적인 사회주의 혁명과 민족해방의 물결 속에
놓여있었다. 쏘련은 나치를 패배시켰고 반식민주의 투쟁에서
또한 승리하였다. 중국혁명은 쏘련에서처럼 지주들을 내몰았고,
협동조합에 기초한 계획경제를 시작하였으며 농촌에서의
집단농장화와 산업개발 5개년 계획에 착수했다.
네루의 지도 하에 이도는 “사회주의 지향”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인도 부르주아지들과 지주들이 영국 지배의 유산인
산업과 기반시설의 결핍과 국가자본주의적 방법을 통해 극복하려
하는 외관에 지나지 않았다.
인도의 사적 자본가들은 자본주의적 착취를 온존시키면서
민족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한 세 개의 5개년 계획에 착수했다.
“봄베이 플랜”(Bombay Plan)으로 알려진 첫 번째 것은 1944년
시작되었는데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수정되었다.
인도에서 가장 급박했던 문제는 토지에 관한 것이었다. 몇몇
지주들은 그들이 향유하고 있던 과다한 특권들을 빼앗겼다.
정부는 부유한 봉건지주들의 토지를 강제로 매입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토지의 양을 제한하는 이슈에 대해
지주들은 의회에서 거부권을 행사했다.
영국에 의해 인도에 심어진 200여 년간의 분할을 극복하는 단
하나의 방법은 인도의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종교, 언어, 민족에
관계없이 계급적으로 호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도의
지배계급에게 있어서―그들의 사회주의적 수사(rhetoric)와 초기
중국과 쏘련에 대한 우호적인 관계에도 불구하고―그를 실행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정치적인 변화만 가져올 수
있었을 뿐 사회혁명을 수행한 것은 아니었다.
부르주아 학자들은 단결이 실패한 근본적 원인에 대해 인도의
사회적, 정치적 복잡함을 이유로 제시할 것이다. 확실히 인도는
극단적으로 복잡한 사회구성체이다. 인도에서는 17개의 언어가
중심적으로 사용되며 백만명 이상이 사용하는 35개 언어가
존재한다. 또한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종교가 존재하는
국가이기도 하다. 힌두교, 이슬람교, 시크교(Sikhism),
자이나교(Jainism, 불교 및 브라만교와 비슷한 교리를 가진
종교), 기독교, 유대교 등등. 인도는 수많은 민족적, 언어적
집단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게다가 지독한 신분제도인 카스트
하에 놓여있었으며 수천의 계급으로 갈라져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복잡한 사회적 요인에도 불구하고 결국
인도의 문제는 계급 착취와 사적 소유라는 것이었다. 모든
유산계급들은 제국주의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계급적
착취관계라는 것을 가려줄 종교 혹은 이념적 미발달이라는
가리개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것은 인도사회가 한편으로는
노동자와 농민들의 노동의 축적 위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지배계급이 사회적 잉여를 전유한다는 것 위에서 유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쏘련에서 가능했던 것이 인도에서는 불가능했는가(Why
Bolsheviks could but India couldn't)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은 짜르 전제라는 것으로 압축되는
거대한 민족적, 언어적, 종교적 복합성에 직면하였다. 그것은
과연 “민족들의 감옥”(prison house of nations)이라고
불릴만한 것이었다. 혁명 초기 러시아에는 200여 개의 구별되는
언어집단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레닌 하의 볼셰비키 정부는 짜르에 의해 억압받던 모든
인민들에게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은 그들의 자결권을
보장한다고 선언했다. 인민들은 쏘비에트 유니온을 떠날 것인지
아니면 그에 결합할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피억압민족들이 혁명을 거부하여 쏘련이 축소될 가능성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사실 많은 민족 집단들은 짜르에 의해 억압당하고 러시아 군대에
의해 박해받던 무슬림들이었다. 그들은 러시아 정교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볼셰비키는 1918년 무슬림 공산주의자
협의회를 소집하였다. 그것은 무슬림들에게 볼셰비키의 연대를
보여주고 그들이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틀 안에서
안주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그것이야말로 국제주의적인
것이었다.
어째서 볼셰비키는 러시아인이 다수를 점하는 상황에서
피억압인민들을 세속적인 쏘비에트로 흡수하며 민족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는가? 반면 왜 인도의 부르주아지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는가? 그것은 볼셰비키가 단지 짜르 전제를 해체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착취계급인 자본가들과 지주들을 몰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모든 민족적, 언어적, 인종적,
문화적 성격에 관계없이 자결권을 부여하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한 마디로 볼셰비키는 피억압인민들의 구체적인
민족적 문제에 직면하여 모든 분할과 반목을 극복해내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착취의 철폐를 사명으로 하는 혁명적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착취하는 자와 착취당하는 자의
구분에는 관심이 없었다.
쏘련에서의 민족간의 반목이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은 자본주의적
요소들이 제도들에 나타나기 시작하면서였는데, 그러한 후퇴는
결국 쏘련을 붕괴시키게 되는 데로 나아갔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귀중한 것이다. 그것은 인도나
파키스탄같은 억압받는 국가에서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민족들 및
국가들의 억압자가 된 미국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민족문제의
계급적인 이해는, 제국주의 억압에 대한 투쟁이 필연적으로
노동자와 피억압인민들을 단결시키는 데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투쟁과 계급착취의 종식이
연결되지 않을 때 해방은 성취될 수 없다는 것 역시 보여주고
있다. 한/노/정/연
<번역:
편집기획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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