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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1번 : [24호/연재-기획] (종속적)국가독점자본주의와 민주주의,사회주의
글쓴이: 김세균 등록: 1997-08-01 00:00:00 조회: 1622


(종속적)1)국가독점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사회주의

김 세 균 / 소장






1. (종속적) 국독자란?


현 시기의 한국사회는 그 사회경제적 성격과 발전단계에 있어  ‘종속적 국가독점자본주의(이하 종속적 국독자)’로 규정될 수 있다.2) 이때 종속적 국독자 일반은 (1) 독점자본의 운동이 경제 전체의 운동에 대해 지배적인 규정력을 행사하며, (2)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보장하는 국가의 가장 일반적인 기능인, 국가에 의한 사법체계의 강권적 보장에 의해 보호되는 가운데 독점자본 운동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사적 자본주의의 시장적 경제조절 메커니즘’과 (시장적 경제조절 메커니즘을 보완하는) ‘국가적 경제조절 메커니즘’이 자본주의의 재생산과 자본축적을 위한 ‘단일의 경제조절 메커니즘’으로 융합되어 있으며, (3) 세계자본주의적 연관에서 제국주의적 독점자본 운동에 구조적으로 종속되어 있음으로 해서 자국에서 생산된 잉여가치의 일부가 항상적으로 제국주의 독점자본에게로 유출되는 구조를 지닌 자본주의체제라는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 이때 (1)과 (2)는 국독자 일반에 해당되는 규정이라면, (3)은 종속적 국독자가 지닌 고유한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규정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점들이 지적될 수 있다.


첫째, ‘시장적 경제조절 메커니즘과 국가적 경제조절 메커니즘의 단일의 경제조절 메커니즘으로의 융합’은 독점자본의 경제적 지배가 만들어내는 경제의 불균형성과 불안정성의 증대 및 경제위기에의 항상적이고 만성적인 노출 등으로 말미암아 자본주의 발전의 불가피한 일반적인 경향성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경제는 아무리 국가적 경제개입과 계획경제적 요소가 도입된다고 할지라도 기본적으로는 시장경제체제의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국가적 경제조절은 어디까지나 시장적 경제조절을 보완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 점에서 이 융합은 국가적․정치적 경제조절의 우위가 아니라 시장적 경제조절의 우위 하에서 이루어지며, 또한 그런 만큼 가치법칙의 작동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법칙의 작동을 변형시키는 데에 기여한다. 그리고 그 융합을 통해 시장적 경제조절을 특징지우는 경제의 무정부성 등이 폐기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융합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가 만들어내는 경제위기의 표출을 예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표출의 형태를 변형시키는 데에 기여할 따름이다. 예를 들어 케인즈주의적 국가개입이 이루어지는 체제 하에서 경제위기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의 형태로써 표출되는데, 이는 무엇보다 (케인즈주의적인) 국가적 경제조절 메커니즘의 작용에 기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국가적 경제조절은 유효수요의 창출, 실질임금의 인상과 같은 케인즈주의적 개입 등을 통해 과잉생산-과소소비로 인한 경제위기에 대처할 능력을 지니지만, 그 과정은 동시에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가 만들어내는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에 기인하는 ‘과잉축적의 위기’의 발생을 촉진시키는데, 이러한 과잉축적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역으로 실질임금의 감축 등과 같은 비케인즈주의적 국가개입이 요구된다. 그리하여 과잉생산(=과소소비) 위기에 대처하는 수단은 과잉축적의 위기를 재촉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과잉축적의 위기에 대처하는 수단은 역으로 과잉생산의 위기를 촉진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다른 한편, 노동력의 정상적인 재생산을 위한 국가의 사회정책적 개입은, 자본축적 과정이 자본축적의 기본요건인 노동력의 재생산을 파괴하는 경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일반적으로 증대하는 경향성을 지니고 있지만 독점자본주의 단계 국가의 본질적인 특성에 속한다고는 말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국독자는 이른바 사적 독점자본주의 발전단계 이후의 자본주의발전의 새로운 단계가 아니라, 독점자본주의의 경향적 특성 그 자체로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둘째, 그간 ‘국독자론자들’은 국독자 체제의 주요한 특징으로서 이른바 ‘국가와 독점자본의 융합테제’을 제기해 왔다. 그런데 이 융합테제의 합리적 측면은 ‘시장적 조절메커니즘과 국가적 조절메커니즘의 단일의 경제조절 메커니즘으로의 융합’으로 이해해야지, 그 테제를 국가와 독점자본의 단일의 지배체제로의 전환, 국가관료층과 독점자본가층의 인적 결합, 국가와 독점자본가의 직접적 결합체제로의 전환, 경제에 대한 정치의 개입증대로 인한 가치법칙의 폐기 등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문제들은 오직 경험적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 국독자 일반의 본질적 측면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국독자 체제의 성립을 사회주의권의 성립과 발전이 가져오는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로부터 도출하는 것은 세계사회주의권의 성립이 가져온 진영모순을 과대평가하는 견해였다.

셋째, 국독자 체제 하에서도 ‘정치적’ 심급으로서의 국가체제는 독점자본가층과의 관계에서 기본적으로 독점자본의 직접적인 경제적 이익을 제한하고 그 장기적 이익을 옹호할 수 있는 상대적 자율성을 지닌다. 자본주의국가가 ‘사회의 곁과 위에 세워진 공적 권력체’라는 기본적 형태성을 지님으로써 생겨나는 이러한 상대적 자율성은 자본주의사회의 원활한 재생산을 위해 독점자본주의 단계의 국가에게도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상대적 자율성을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다고 해서, 국가가 항상 그러한 상대적 자율성을 발휘한다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된다.


넷째, 독점자본주의 단계의 국가는 ‘총독점자본의 국가’라는 성격을 지닌다. 그런데 이 규정은 독점자본주의 발전단계의 국가 역시 ‘총자본의 국가’라는 형태성을 지닌다는 규정과 양립될 수 없는 것으로 파악해서는 안된다. 임금이 ‘노동의 대가’라는 형태를 지니고 나타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이듯이, 독점자본주의 단계의 국가란 자본가들과의 관계에서 형태상으로는 ‘총자본의 국가’라는 규정을 지니게 되고 이에 따라 중소자본에 대한 국가적 배려 등을 통해 그 형태성을 유지하려고 하지만, 그 실질적 내용에서는 ‘총독점자본의 국가’로서 기능하게 된다. 이러한 파악과는 달리, 그간의 국독자론자들은 독점자본주의 발전단계의 국가를 ‘총독점자본가’로, 국가도출론자들은 독점자본주의 발전단계를 부인하는 가운데 ‘총자본의 국가’로 규정하면서 서로 대립해 왔다. 그러나 이 두 규정은, 자본주의사회의 국가가 사회구성원 모두와의 관계에서 형태적으로는 사회구성원 모두를 최소한 사법적 권리를 지닌 법적 주체로서 포섭하는 ‘시민국가’의 형태를 지니면서 그 실질적 내용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유지시키는 ‘자본의 국가’로서 기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독점자본주의 발전단계의 국가에 대한 (자본가들과의 관계에서 본) 형태적 규정과 내용적 규정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다섯째, 종속국에서 생산된 잉여가치의 제국주의적 독점자본으로의 항상적인 유출은 종속국에서의 자본축적을 ‘봉쇄’하는 요인이 아니라, 종속국에서 자본축적이 이루어지는 ‘특수한’ 조건에 속한다. 그리고 종속적 독점자본의 제국주의적 독점자본으로의 발전 가능성은 처음부터 봉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적 독점자본의 세계적 규정력으로 말미암아 비록 실현되기 어렵다고 할지라도 ‘각국에서 자본주의의 불균등적 발전’으로 말미암아 오직 경험적으로만 확정될 수 있는 문제로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 ‘독점강화․종속심화 테제’는 물론 ‘독점강화․종속약화 테제’는 둘 다 모두 경험적으로 확정되어야 할 것을 일반적인 법칙으로서 절대화하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는 그간 크게 보면 ‘종속약화’의 과정을 걸어왔다고 한다면, 자본운동의 세계화-지구화와 더불어 제3세계의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종속심화’의 과정이 크게 진척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오늘날 한국과 같은 나라는 세계화․지구화 시대를 맞이하여 세계시장에서 자국자본의 국제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국민들을 총동원하는 ‘국민적 경쟁국가’로 발전하고 있는 반면, 1980년대에 심대한 발전의 위기를 거치면서 신자유주의적 충격요법을 마지못해 행한 제3세계의 대부분의 나라들은 자본의 국적에 상관없이 타국의 자본을 끌어들여 전세계적으로 생산된 총잉여가치에 대한 자국의 몫을 크게 하려는 ‘탈국민적 자본유치국가’로 변모하고 있다.


여섯째, 독점자본주의 발전단계에서도 사회의 ‘기본적 계급모순’(기본모순)은 여전히 노자 간의 모순이다. 그런데 독점자본주의 발전단계에서는 ‘한 사회 내부에서 경제적 지배력을 발휘하는 (국내외) 독점자본 대 독점자본에 직접적으로 고용되어 있는 노동자층 간의 대립’이 중심을 이루는 가운데 독점자본 대 (중소영세자본에 직접적으로 착취당하지만 간접적으로는 독점자본에게도 착취당하는) 중소영세사업장의 노동자층 및 유통과정에서 독점자본에게 수탈당하는 타 근로대중 간에도 대립관계가 생겨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독점부르주아적 지배블럭 내지 권력블럭 대 노동자․민중’ 간의 모순을 독점자본주의 발전단계의 ‘주요 계급모순’(주요모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곱째, 국독자 체제는 제2차 대전 이후 선진자본주의사회에서 전반적으로 정착했는데, 이 국독자체제는 반숙련노동자층의 일반화, 작업장에서의 실행과 구상의 분리, 일관공정체제의 도입과 노동의 파편화 등에 기초한 소품종 대량생산체제인 포디즘적 생산체제에 기반하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2차 대전 이후에 정착한 선진국의 국독자체제는 ‘포디즘적 국독자체제’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이후 세계자본주의체제가 심대한 구조적 불황을 거치면서 포디즘적 생산체제는 생산과정에서 실행과 구상의 결합을 체현하는 소수의 다기능적 숙련노동자층과 다수의 주변노동자층 및 실업노동자층으로의 노동자층의 분할, 팀아르바이트제의 도입과 노동력 사용의 기능적․수량적 유연화 등에 기초한 다품종 대량생산체제인 이른바 ‘포스트포디즘적 내지 유연적 생산체제’로 전환하게 된다. 이 점에서 1980년대 이후의 선진국 국독자체제는 ‘포스트포디즘적 국독자체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선진국의 포디즘적 국독자체제는 ‘케인즈주의적 국가개입’과 결합되어 있었던 반면, 포스트포디즘적 국독자체제는 ‘신자유주의적 국가개입’과 결합되어 있다. 이 점에서 ‘포디즘적 국독자체제’는 ‘케인즈주의적 국독자체제’로, ‘포스트포디즘적 국독자체제’는 ‘신자유주의적 국독자체제’라고 부를 수 있다. 케인즈주의적 국가개입과 신자유주의적 국가개입은 고용보장을 위한 국가개입과 노동력의 정상적인 재생산을 위한 국가의 사회정책적 개입 면에서, 그리고 그 이념적․이데올로기 지향성에서 전자가 ‘개입주의국가’ 내지 ‘적극국가’를, 후자가 ‘최소국가’ 내지 ‘소극국가’를 주창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레이건의 경제정책이 지닌 특징 중의 하나가 ‘공급측면 중시 정책’이었던 것에서 드러나다시피, 자본축적을 지원하는 국가의 경제정책 측면에서는 커다란 차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덟 번째, 파시즘체제를 독점부르주아지의 비헤게모니적 국가체제라고 부를 수 있다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이르러 제국주의국가의 정상적인 국가형태로 정착한 이른바 ‘자유민주주의체제’는 독점부르주아지의 지배를 민주적 방식으로 관철시키는 독점부르주아지의 헤게모니적 지배체제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자유민주주의체제는 ‘독점자본의 반동화 경향’으로 인해 그 속에 파시즘적 지배요소를 많든 적든 내장하고 있는, 그 점에서 ‘많든 적든 결손을 지닌 자유민주주의체제’로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일반적 특징을 지닌 가운데에서도 선진국의 포디즘적․케인즈주의적 국독자체제는 드골체제와 같은 ‘행정국가적․권위주의적 자유민주주의체제, 민주당 집권 하의 미국의 국가체제와 같은 ‘혁신자유주의적 자유민주주의체제’ 및 스웨덴의 사민주의체제로 대표되는 ‘사민주의적 자유민주주의 체제’ 등으로 분화․발전했다. 다른 한편, ‘포스트포디즘적․신자유주의적 국독자체제’는 ‘경제적 자유주의의 반동화’가 가져온 형골화된 자유민주주의체제라 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적 자유민주주의체제’ 내지 ‘신자유주의적인 제한적 자유민주주의체제’로 단일화되어 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적 국가체제는 포스트포디즘적 생산체제만이 아니라 자본운동의 지구화․세계화에 의해서도 뒷받침 받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선진자본주의의 독점부르주아적 지배블럭이 혁신자유주의 세력과 시민주의세력이 주축이 되고, 케인즈주의적 계급타협을 추구한 ‘사회코포라티즘적 지배연합’의 형태로부터 신자유주의 자유주의세력이 중심이 되고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편을 기본적으로 지지하는 사민주의세력이 가담하는 ‘신자유주의적 보수연합’의 형태로 전환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에 출범한 영국과 프랑스의 좌파정부는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편에 반대하는 좌파’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보수연합 내부의 좌파’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다른 한편, 종속적 발전을 이룩한 제3세계의 국가에서는 1970년대를 거치면서 개발독재체제인 군부파시즘체제 하에서 ‘유혈적 포디즘과 파시즘적 통제가 결합한 종속적 국독자체체’가 수립되었다. 이 체제는 1980년대를 거치면서 신흥 개발국가의 선두주자인 한국 등에서 수량적 유연화와 노동강도의 강화 등에 크게 의존하는 ‘유혈적 포스트포디즘과 신자유주의적 통제가 결합한 국독자체제’로 이행하고 있다. 그런데 종속적 국독자체제는 일반적으로 그 속에서 정치적 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정착되기가 어려운 구조적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그 이유로서는 다음의 점들을 들 수 있다.

(1) 종속국에서 생산된 잉여가치의 일부가 제국주의 독점자본에게로 항상적으로 유출됨으로써 제국주의 독점자본과 종속국의 노동자․민중 간에는 간접적인 착취-피착취관계가, 제국주의 독점자본과 종속국의 자본 간에는 직접적인 수탈․피수탈관계가 성립된다. 이로 인해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종속국의 자본 역시 기술혁신, 생산과정의 합리화 등을 통해 상대적 잉여가치 생산을 증대시키지만, 제국주의 자본에게로 이전된 잉여가치 손실분을 보전하고 축적을 가속화하기 위해 내국착취를 강화하지 않을 수 없다. 이때 내국착취의 강화는 절대적 잉여가치생산의 강화를 통한 초과착취 및 유통과정에서의 폭리를 통한 추가적 대중수탈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초과착취와 추가적 대중수탈은 독점자본과 광범한 민중과의 계급적 모순관계를 심화시킨다. 이로 인해 그러한 조건 속에서도 종속국의 독점자본에 의한 초과착취와 추가적 수탈이 안정적으로 지속되려면 피지배대중에 대한 폭력적 억압체제가 유지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체제의 안정적 수립이 지배층에 의해 항상적으로 위협받지 않을 수 없다.

(2) 종속적 국독자체제로 이행한 거의 모든 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군부파시즘체제가 그러한 이행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로 인해 이들 나라에서는 파시즘체제를 성립시키고 유지시킨 반동부르주아세력이 일반적으로 군부파시즘 체제가 이완되거나 무너진 이후에도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는데, 이는 민주화의 진전에 커다란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에는 한국자본주의의 그간의 지속적인 성장, 밑으로부터의 민주화운동의 성장 등이 민주화를 촉진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지만, 어느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반동부르주아세력의 힘, 분단체제의 지속 등이 민주화의 진전을 방해하는 중요한 요인들로서 작용하고 있다.

(3) 오늘날 제3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공세는 민주화의 진전을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새로운 장애물로서 작용하고 있다.


아홉 번째, 현 시기에 이루어지고 있는 자본운동의 지구화-세계화과정 및 이른바 지구적 자본주의체제의 수립과정은 세계경제 전체를 제국주의적 독점자본의 전일적 지배체제로 만드는 가운데 세계시장에서 작동하는 가치법칙과 경쟁논리에 모든 국민경제들을 더한층 종속시키는 기제로서 작용하고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러한 과정은 국독자체제를 폐기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국가적 경제조절 메커니즘의 약화를 초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국가적 경제조절 매커니즘이 약화되는 가운데에서도 자본주의의 안정적 재생산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물론 그 안정적 재생산 역시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국가적 경제조절 메커니즘의 약화에 상응하는 ‘지구적-세계적 수준의 정치적 경제조절 매커니즘의 창출’을 요구한다. 그러나 제국민국가들 간의 이해조정이 전제되어야 하는 이러한 국제적 수준의 정치적 경제조절 매커니즘의 창출이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 점에서 자본운동의 지구화․세계화가 진척되면 될수록 세계자본주의 전체의 불안정성은 높아지지 않을 수 없으며, 이는 세계적 규모에서 ‘보다 고전적 형태의 경제적 대위기’가 출현할 가능성을 높인다고 말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소득재분배를 위한 사회정책적 개입을 최소화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국독자체제는 불가피하게 소득분배의 불평등을 더한층 심화시키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포스트포디즘적 생산체제에서 가속화되고 있는 자동화과정 및 그 일환으로 나타나고 있는 이른바 ‘무인공장’의 가동 등은 이른바 ‘기술적 실업’을 비가역적으로 확대시켜 나감으로써 수많은 근로대중을 완전 실업층 내지 불완전 실업층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이러한 사태전개는, 비록 포스트포디즘체제가 노동자들의 단결을 더 한층 어렵게 만드는 조건을 창출하고 있지만, 자본주의체제에 대한 노동자대중의 분노를 일국적 수준에서만이 아니라 전세계적 수준에서 증대시켜 나가지 않을 수 없다.



2. 국독자론을 둘러싼 논쟁의 검토와 국독자론이 지닌 변혁적 함의


현시기의 한국자본주의를 종속적 국독자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 오늘날 우리 학계에서는 반론을 제기하는 여러 견해들이 제출되고 있다. 이 점에서 본인은 이 글에서도,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러한 반론들을 검토해 보면서 국독자론이 지닌 변혁적 함의를 추출해 보려고 한다.


먼저 김수행 교수는, 국독자론이 자본주의의 발전단계를 자유경쟁자본주의 → 사적 독점자본주의 → 국가독점자본주의로 구분하면서 (생산의 사회적 성격의 증대와 자본주의적인 사적 취득과의) 모순의 계속적인 확대, 심화론에 기초하여 사회주의를 그 다음의 단계로서 ‘목적론적으로’ 예정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국독자론을 비판하고 있다.3)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지적할 수 있다.

(1) ‘모순의 계속적인 확대-심화론’이 지닌 사회발전에 대한 진화주의적인 파국론적 전망은 이와는 정반대인 ‘모순의 계속적인 완화론’이 지닌 진화주의적인 개량주의적 전망과 마찬가지로 문제점을 지닌다. 그러나 국독자론을 그러한 파국론적 전망과 반드시 결부시켜 파악할 이유는 없다.

(2) 자유경쟁자본주의 → 사적 독점자본주의 → 국가독점자본주의로의 발전과정이란(사적 국가독점자본주의와 국가독점자본주의는 서로 ‘질적으로’ 구분되는 자본주의 발전의 두 단계로 보아서는 안되지만) 오직 ‘선발 선진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과정과 가장 근사한 것으로 한국자본주의의 발전과정이 그러한 발전과정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발전이 지속되는 한, 다시 말해 그 발전이 그 국가가 처한 특수한 조건으로 인해 중도에서 봉쇄되지 않는 한, 그 발전은 (각국 자본주의 발전이 자유경쟁자본주의 단계를 거치든 거치지 않든, 그리고 그 발전이 종속적 발전이든 아니든) ‘필연적으로’ 국독자의 성립을 가져온다는 점을, 그리고 자유경쟁자본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는 국가에서는 자본들 간의 자유경쟁 단계가 부재하기 때문에 오히려 자본주의의 발전이 처음부터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성립을 강하게 추동하면서 진척된다는 점을 우리는 인식해야 한다.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자유경쟁자본주의 → (국가) 독점자본주의로의 발전론’이 지닌 합리적 핵심이란 각국 자본주의의 역사적인 구체적 발전과정을 모두 설명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쟁은 자본의 집적과 집중 및 독점자본의 성립을 필연화시킨다는 점, 그리고 독점자본 지배의 일반화는 동시에 (국가에 의한 ‘사법체계의 강권적 보장’에 의해 보호되는) 시장 메커니즘에 의한 경제조절이 지니 한계를 항상적으로 노출시키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정상적인 재생산을 위해서는 (그 성공 여부에 상관없이) 시장적 경제조절을 보완하는 국가적, 정치적 경제조절을 필연적으로 요구하게 된다는 점, 또한 그렇기 때문에 국독자 성립론은 자본주의 발전의 합법칙성을 표시하는 이론적․논리적 설명으로서 유효하며, 그것이 이론적․논리적으로 유효하기 때문에 그러한 이론적․논리적 설명에 가장 유사한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전형적으로’ 내지 ‘고전적인 형태로’ 표시되어 나타나게 된다는 점을 확인해야 한다.

그런데 자본간의 ‘경쟁’이란 단순히 개별자본들 간의 관계 그 자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잉여노동의 착취․피착취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자본․임노동 간의 (경제적․정치적․이데올로기적) 계급투쟁 속에서 이루어지는 개별자본들 간의 관계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자본주의는 이 계급투쟁 속에서 자본이 임노동을 ‘착취’하고 ‘지배’하는 한에서 - 이때 착취와 지배는 서로 구분될 수 없는 한 과정의 두 측면인데 - 재생산된다. 이와 같이 ‘계급투쟁의 효과’ 속에서, 즉 계급투쟁 속에서 ‘임노동에 대한 자본의 착취와 지배’가 관철되고 그 ‘관철의 효과’로서 자본주의가 재생산되는 한, 그리하여 우리가 오직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의 재생산을 전제할 수 있는 한, 임노동에 대한 자본의 착취와 지배란 계급투쟁의 고저에 상관없이 관철되는 가운데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국독자로 발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에서 자본주의가 재생산되는 한, ‘자본의 집적-집중과 독점자본에 의한 경제의 지배’는 자본 간의 ‘경쟁’을 매개로 하여 필연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국가적 경제조절’ 역시 독점자본의 지배가 일반화된 속에서 시장경제적 조절매커니즘만으로서는 자본주의의 안정적 재생산이 불가능하고, 또한 그렇기 때문에 그 재생산을 위해 국가의 경제개입이 반드시 요구된다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3) 국독자론이 ‘국독자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필연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에 역사에 대한 목적론적 해석이라는 주장과 관련하여, 우리는 먼저 이제까지 많은 논자들이 역사를 목적론적으로 파악하는 관점에서 국독자론을 전개해 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목적론적인 파악은 국독자론에 ‘고유한’ 문제점이 아니라, 맑스에게서도 나타났고, 그리고 ‘제2인터 맑시즘’이나 ‘스탈린적 맑시즘’과 같은 맑시즘의 지배적인 조류를 특징지운 ‘목적론적 맑시즘’ 일반의 문제점이다. 그러한 파악과는 달리, 우리는 국독자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란 결코 ‘이미 예정되어 있는 역사발전의 자연필연적인 과정’이 아니며, 자본주의의 재생산이 계급투쟁의 효과 속에서 이루어지듯이, 사회주의로의 이행 역시 계급투쟁의 효과로서만 이루어진다는 점을 확인해야 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역사를 ‘자연사적 과정으로서의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국독자의 사회주의로의 자연필연적 이행’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국독자 이후에 가능한 역사발전단계는 - 역사가 후퇴하지 않는 한 - 오직 ‘사회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국독자 이전에는 변혁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국독자단계로 발전하면 그 자본주의는 이제 자신을 어떻게 변화시키든 국독자의 질을 유지시키면서 형태를 변형시켜 나갈 수는 있어도 ‘국독자 이외의 형태’로서는 변화시킬 수 없으며, 또한 오직 그런 의미에서 레닌이 말한 대로 ‘국독자와 사회주의 사이에는 어떤 중간단계도 없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설령 자본의 국제화가 더한층 진척되어 설령 세계정부가 수립된다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국제 독점자본 역시 독점자본이며, 또한 독점자본 지배가 일반화된 이상 자본주의경제가 시장메카니즘 만으로 재생산될 수 없고 정치적 심급(그것이 현재와 같은 민족국가이든, 아니면 지구적․보편적 국가이든)의 경제적 기능에 의한 매개를 반드시 요구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자본운동의 지구화․세계화 및 민족국가 단위의 국민국가 권한의 세계기구로의 이양 등과 관련하여 우리는 국독자 발전의 소단계들에 대해 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국독자와는 구분되는 자본주의의 다른 발전단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렵다. 이처럼 우리는, 비록 국독자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대한 예정된 보증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국독자체제가 그 다음 발전단계의 경제체제로 전화한다면 그것은 사회주의 이외의 어떤 것일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 현존 사회주의의 몰락을 목격하면서, 오늘날 우리 학계에서는 변혁 이후의 사회화조치의 구체적 내용 및 형태란 미리 확정지을 수 없다는 점에서,4) 또는 ‘국가독점자본의 사회화’를 사회주의 건설의 가장 중요한 조치로 파악하면서도 그 사회화가 ‘국유화’의 형태로 이루어져서는 안된다는 이유를 들어5) ‘국유화․계획화’를 사회주의 건설의 핵심내용으로 말하고 있는 국독자론은 잘못되었다는 견해를 제출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이 지적될 수 있다.

(1) 국독자로 이행한 자본주의체제를 변혁하기 위해서 새로운 국가권력이 우선적으로 취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회화조치는 ‘독점자본부문의 사회화’이다. 왜냐하면 독점자본 부문의 사회화 없이는 설령 국가권력이 프롤레타리아에게 이전되었다고 할지라도 경제과정 전체에 대한 독점자본의 지배는 변함없이 관철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독점자본 부문의 사회화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그 체제는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독점자본주의체제일 따름이다. 또한 독점자본에 의한 경제지배를 그대로 인정하는 한 변혁세력이 설령 국가권력을 장악하였다 할지라도 그 국가는 (비록 변형된 형태이긴 하지만) 여전히 ‘총독점자본의 국가’로서 기능할 따름이며, 그러한 한 변혁세력에 의해 장악된 국가권력의 프롤레타리아성이란 허구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는 달리, 독점자본 부문의 사회화가 이루어지는 경우에만 변혁세력은 국가에 새로운 계급적 성격을 부여할 수 있으며, 나아가 중소자본이 광범하게 존재할 지라도 그 체제는 더 이상 자본주의체제이기를 그치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독점자본 부문의 사회화’를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일차적으로 가장 중요한 조치’로서 명백히 밝히고 있는 점이 바로 국독자론의 가장 중요한 측면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나아가 우리는 독점자본이 지배하는 경제체제를 단순히 그 체제의 ‘생산력조직 방식’이나 ‘축적체제’가 아니라, 독점자본의 운동 및 그것이 지닌 모순관계를 중심으로 파악해야 할, 그리하여 그 ‘생산력조직 방식’이나 ‘자본축적 방식’도 독점자본의 운동과 그것이 지닌 계급적 모순관계와의 연관 속에서 파악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가 존재한다고 본다. 독점자본에 의한 지배가 계급적 모순관계의 중심을 이룬다면, 그 중심적 모순의 해결과 극복에 대한 변혁적 전망을 지니지 못하는 분석은 그 분석이 아무리 탁월하여도 우리의 전망을 주어진 체제의 한계 내에 가두기 때문에 사회분석의 올바른 계급적 관점이 될 수 없다. 다시 말해 국독자단계에 들어선 사회에서 그 사회의 총체적 연관을 독점자본의 운동 및  그것이 지닌 계급적 모순을 중심으로 분석하지 못하면, 우리는 사회변혁의 ‘가장 중요한 기준’ 내지 ‘주요고리’를 포착할 수 없기 때문에 대중의 투쟁이 집중되어야 할 중심고리를 놓칠 수밖에 없고, 나아가  새로운 사회건설에 요구되는 사회화조치의 방향을 옳게 포착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먼저 ‘조절이론’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을 설명하는 관점이 지닌 문제점에 대해 언급할 수 있다. 조절이론은 기본적으로 ‘생산력조직 방식’ 내지 ‘축적체제’ 및 거기에 상응하는 ‘조절양식’의 변화를 중심으로 하여 자본주의 발전을 분석한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그러나 (1) 예를 들어 ‘포드주의적 생산방식’이든, 아니면 ‘포스트포드주의적인 유연적 생산방식’ 이든 초과이윤 획득을 위한 독점자본의 생산공정 상의 혁신과정이 만들어낸 생산방식임을 명백히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독점자본의 운동에 대해 지닌 관계를 명료하게 지적하지 못하고 있으며, (2) 또 이로 인해 사회발전의 문제를 (물론 자본주의에서의 생산방식 등의 변화과정은 새로운 사회에서의 노동과정의 재조직화 문제와 관련하여 커다란 중요성을 지니지만) 기본적으로 ‘생산력조직 방식’의 문제로 ‘환원’시키고 있기 때문에 생산력조직 방식 및 그에 상응하는 조절 양식의 변화만을 문제삼을 뿐, 계급관계로서의 생산관계의 변화와 변혁의 관점에서 포착하지 못하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이 점에서 조절이론에서 제기하고 있는 생산력 조직방식론 등은 국독자론과 구분되는 대안적인 이론체제가 아니라, 기존의 국독자론을 보완하는 이론체계로서 국독자론에 통합되어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 국독자적 파악과는 달리, 예를 들어 우리가 국독자체제를 단지 ‘자본주의 일반의 관점’에서만 파악한다면, 그 이론적 결론으로서 도출되는 바의 사회화 조치는 ‘자본주의 전반의 해체를 위한 자본 전반의 즉각적인 사회화’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극좌적 조치는 사회주의 건설을 필연적으로 실패로 이끌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피하기 위해 부분적 사회화를 점차 확대시키는 조치를 취한다고 할지라도 국독자적 관점을 버린다면 그 조치는 정세에 따라 행해지는 지극히 자의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맑스가 ꡔ자본ꡕ 제1권에서 ‘자본주의적 축적의 역사적 경향’과 관련하여 노동자가 이미 프롤레타리아로 전환되고 그들의 노동조건이 자본으로 전화되면 자본의 집중에 의해 ‘대자본’이 이제 다른 자본가들을 ‘수탈하게’(expropriieren) 되는데, 변혁은 착취자 전체, 즉 자본 일반이 아니라 수탈자, 즉 대자본의 수탈을 가져온다고 밝히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다.6)  이러한 지적은 대자본의 수탈이 사회주의 건설의 ‘출발점’을 이룬다는 점, 그리고 독점자본의 지배가 일반화되면 이 수탈자는 대자본으로부터 (국가)독점자본으로 전화하게 된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2) 사회변혁을 위한 일차적인 조치로서 독점자본 부문의 사회화를 지지하면서도 그 사회화가 ‘국유화’의 형태로 이루어져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논자들은 그 가장 중요한 근거로서 국유화를 단행할 경우 원리적으로는 대다수 근로인민이 소유자가 되지만 실질적으로는 국가기구를 운영하는 관료들이 국유부분을 지배하게 된다는 이유를 주로 내세운다. 이들은 또한 ‘노동자소유주식회사제’,7)  ‘주식회사제 하에서의 경영권과 소유권의 분리제’,8) 또는 ‘해당기업 노동자, 일반국민 및 국민기업화된 금융기관으로의 주식분산에 기초한 혼합소유적 주식회사제’9) 등의 ‘주식소유제’를 국유화의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나아가 이들은 맑스 역시 예를 들면 ‘자본주의적 축적의 역사적 경향’을 설명하는 가운데 ‘사회적 소유’를 ‘자본주의시대의 성과 - 협업 및 토지와 생산수단의 공동점유 - 에 입각한 개인적 소유(das individulle Eigentum)’로 파악하고 있다10)는 점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먼저, 맑스의 위의 언급이 일반적으로는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사회의 소유형태, 예를 들면 “생산자들의 소유 - 그러나 이제 개별생산자들의 사적 소유가 아니라 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 또는 직접적인 사회적 소유”11)라는 그의 다른 많은 언급들과의 관련 속에서, 그리고 특수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축적의 역사적 경향을 ‘자본주의적 생산․취득관계’를 중심으로 논하는 그의 서술이 지닌 기본맥락과 관련시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러한 관점에 서면, 그가 말하는 ‘토지와 생산수단의 공동점유’란 ‘자본주의시대의 성과’ 내지 ‘자본주의 시대에 이미 달성된 것’으로서의 공동점유, 다시 말해 자본주의의 발전이 가져오는 ‘생산의 사회화’를 통해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생산수단의 공동이용’를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개인적 소유’란 법률적 의미의 개인적 소유, 즉 그 의미에서 파악되는 바의 사회적․집단적 소유와 대립하는 ‘개별분산적인 사적 소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적 소유제 하에서의 개인들의 생산․취득관계와 관계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에서의 ‘결합된 생산자들의 직접적인 사회적 소유제’ 하에서는 잉여가치의 사적인 착취체계로서의 계급적 성격과 그 생산․취득이 타인의 사회적․집단적 노동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실상 이미 사회적인 생산경영’으로서의 성격을 아울러 지닌 자본주의적 생산․취득양식의 성과가 계승되고 고차적으로 형태전환되어 (이른바 맑스가 말한 ‘부정의 부정’을 통하여), 이제 생산․취득과정이 사적․계급적 성격을 잃는 동시에 ‘자각적인 개인들’이 ‘협동적’, ‘집단적’으로 생산․취득하는 형태를 발전시킴으로써 그 생산․취득이 이제 ‘개인적 소유’가 전면화된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다. 맑스가 말한 ‘생산수단의 공동점유에 기초한 개인적 소유’를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이 ‘개인적 소유’란 개별노동자들에게 주식지분을 배분하는, 그 의미에서 ‘개별분산적인 사적 소유제’의 일종이라 할 수 있는 노동자주식소유제 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 매우 분명해진다. 오히려 이 ‘개인적 소유’는 오직 ‘결합된 생산자들의 직접적인 사회적 소유’를 통해서만 구현되는 소유형태인데, 이 소유형태 하에서는 그 생산양식만이 아니라, 그 취득 양식이 협동적․집단적으로 이루어지며, 정치적 강제력기구인 국가가 소멸하고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낡은 ‘적대적’ 대립이 지양됨으로써 그 협동적․집단적 생산․취득이 이제는 하나의 공동체로 결합한 개인들의 자유로운 사회적 활동의 결과로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맑스가 말한 ‘개인적 소유의 부활’을 이와 같이 이해할 때만, 우리는 또한 왜 맑스가 결합된 생산자들의 공산주의적인 협동적 공동소유제 사회를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각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각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생산자들의 자유로운 연합체’로 규정하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으며 - 왜냐하면 그 속에서는 공동소유가 각인의 자유로운 발전, 즉 결합된 개인들의 자기실현을 위한 조건이자 ‘결과’이기 때문이다 -, 나아가 ‘각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사회’란 사회주의적 주식회사제를 제창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각인이 자기 몫의 주식지분을 지니고 서로 경쟁하는 사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점이 명백해진다.

그런데 우리는 엥겔스만이 아니라 맑스 역시 자본주의 이후의 경제체제와 관련하여 생산영역에서의 직접생산자들의 직접적인 자기통치체제인 ‘생산자들의 자유로운 연합체’ 모델과 아울러 ‘중앙집권적인 국가적 계획경제’ 모델을 아울러 제시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맑스는 「공산당선언」(1848)에서 프롤레타리아계급에 의한 국가권력의 장악과 주요 생산, 금융, 교통운수 수단 등의 국가로의 집중 등을 옹호하고 있고, 「고타강령비판」(1875)에서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를 논의하면서 사실상 중앙집중적 계획경제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12) 그런데 우리는 맑스와 엥겔스의 이러한 이중적 언급을 그들의 후자본주의 구상의 모호성이나 애매함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완성된 형태의 ‘생산자들의 자유로운 연합체’로 나아가는 이행기로 파악한 프롤레타리아독재 시기의 ‘중심적’ 경제체제를 ‘노동자소유 주식회사’체제 등이 아닌 ‘국유화에 기초하여 작동하는 국가적 계획경제체제’로 보았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3)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맑스와 엥겔스, 그리고 레닌이 어떻게 말했는가가 아니라, 국유화․계획화를 배제하고서도 과연 자본주의의 모순이 적극적으로 극복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먼저 그간 ‘현존사회주의’ 사회에서 국유화․계획화가 관료지배체제를 생성시켰고, 또 이것이 주요원인이 되어 결국 사회주의체제가 붕괴했다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이 사실을 이유로 국유화․계획화를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은 본인의 견해로는 맑스 이론이 지닌 가장 중요한 합리적 핵심의 하나를 폐기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된다. ‘국유화․계획화 배제론’에서는 무엇보다도 ‘국유화’를 ‘관료화’와 동일시하는 국가관, 즉 국가권력이란 어쩔 수 없이 관료권력이라는 국가주의적이거나 엘리트주의적인 또는 비관주의적 국가관이 깔려 있다. 이러한 국가관을 지니고서는 한마디로 변혁의 ‘사활’이 걸린 가장 중요한 문제, 다시 말해 국가권력을 대중권력 내지 대중 자신의 직접적인 권력으로 전화시키는 문제, 즉 ‘국가의 비국가로의 전화’ 내지 ‘국가의 소멸’을 완성시킨다는 문제에 결코 대처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문제와 적극 대결하지 않고 그 문제를 우회하거나 회피하면서 자본주의적 사적소유제를 ‘주식소유형태의 개별분산적인 사적소유제’로 전환시킴으로써 사회화를 추진하려 한다면, 과연 그것이 국가관료권력의 지배를 극복하고, 나아가 사회화를 완성시킬 수 있을까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와 관련 무엇보다도 국가가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제를 새로운 형태의 주식소유제로 변경시키고, 또 그러한 주식소유제를 계속 유지시키려고 하면 그 국가는 프롤레타리아 국가권력이라기보다는 기본적으로 ‘주식을 보유한 단순노동자로 구성된 무수히 많은 소유적 개인들의 국가’라는 성격을 지니게 된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그리고 주식을 보유한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소유적 개인’(C. B. Macpherson의 표현)들은 자신이 소유한 주식을 밑천으로 하여 자신의 개인적 부를 증대시키려고 경쟁하게 될 것이다. 이 경우(예를 들어 경쟁력이 강한 기업의 주식을 보유하는 것과 부실한 기업의 주식을 보유하는 것이 만드는 최초의 불평등 등은 일단 제쳐두더라도)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밖에 없는 이러한 경제적 관계의 발전 경향성을 국가가 억제하려고 하면, 이 국가는 불가피하게 ‘강한 국가’여야 하며, 경제관계의 그러한 경향성이 심화되면 될수록 국가는 더욱 더 그러한 경향성의 전개를 억압하는 새로운 형태의 관료국가로 전화되어 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와는 달리, 국가가 주식소유제 하에서 개인적인 부를 늘리려는 사람들의 그러한 경쟁을 묵인하거나 아니면 촉진시킨다면(실제로 그러한 경쟁을 보장하지 않는 한 주식소유제와 같은 소유제를 도입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 이 국가는 경쟁의 결과가 가져오는 부의 집중현상으로 인하여 점차 주식미소유자로 전락해갈 다수의 노동자들에 대해 억압적인 (초기적 자본주의국가라 할 수 있는) 유산자적 관료국가로 변화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사적 소유제와 시장매커니즘를 기본으로 하는 체제란, 그 체제가 설령 자본주의적 사적 경제체제가 아닐지라도, 한편으로는 재자본주의화의 경향성 속에 놓일 수 밖에 없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매커니즘을 유지시키면서 재자본주의화를 저지하거나 또는 촉진시키는 국가개입의 증대 및 그에 따른 국가관료기구의 발전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런데 국가적 소유제는, 그 국가권력이 프롤레타리아권력인 한, 새로운 사회에서 ‘구계급사회적 요소와 공산주의적 요소 간의 모순적 통일’의 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는 ‘전문관료적 통제와 인민대중에 의한 밑으로부터의 직접적인 민주적 통제와 자주관리의 모순적 통일’로서 나타난다.13) 이로 인해 이러한 소유제는 서로 상치되는 두 개의 발전가능성을 지니게 되는데, 그 하나는 (현존사회주의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관료권력이 강화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생산과 정치가 더욱 결합되고’, ‘생산수단에 대한 직접생산자들 모두의 직접적인 통제’가 갈수록 더욱 확대․강화되는 길이다. 그리하여 국가적 소유제는 관료권력을 강화시킬 위험성을 안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 없이는 ‘생산과 정치의 직접적인 결합’과 ‘생산수단에 대한 직접생산자들 모두의 직접적인 통제’를 잘 실현시킬 수 없다는 모순적 소유제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바꾸어 말한다면 ‘생산자들의 자유로운 연합체’는 이 모순을 ‘우회’하고 ‘회피’하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이 모순 속에서 이 모순을 ‘자각’하고 이 모순과 ‘대결’하여 이 모순이 관료권력이 아니라, 생산자대중 자신의 권력이 강화되는 형태로 해결시켜 나감으로써만 완성되어 나갈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어떻게 프롤레타리아 정치 및 대중정치를 활성화시켜 관료지배를 소멸시켜 나갈 것인가를 우리 사고의 중심에 놓아야지, 이 문제를 회피하고 우회하면서 관료지배를 주식회사제와 같은 개별분산적인 사적 소유제의 도입을 통해 극복한다는 것과 같은 (기본적으로 부르주아적인) 구상으로 도피해서는 안된다.

(4) 그간 소련에서는 국가적 소유를 ‘전인민적 소유형태’로 부르면서 사회적 소유의 완성형태로서 파악해 왔다. 그러나 국가적 소유는 그 자체만으로는 말 그대로의 전인민적 소유라고 부를 수 없으며, 단지 국가권력의 대중권력으로의 전화가 이루어지는 만큼 관료적 통제가 배제된 참다운 의미의 전인민적 소유로 발전해 갈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사회적 소유의 형태에는 국가적 소유만이 아니라 ‘협동조합적 소유’나 스웨덴 사민주의체제가 1980년대에 추구한 적이 있는 ‘노동조합적 소유’ 등도 포함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독점자본 부분에 대한 소유를 협동조합적 소유나 노동조합적 소유로 만드는 것은 사회변혁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합적 소유는, 조합에 가입하지 않은 다른 근로대중의 생산수단에 대한 권리를 배제한다는 점에서, 또 조합이기주의를 견제하고 전인민적 이익의 확보를 위해 조합소유 기업들에 대해서도 국가적 수준의 통제가 요구된다는 점에서, 낮은 수준의 사회적 소유형태에 속할 뿐, 사회적 소유의 발전된 형태이거나 완성된 형태가 결코 아니다.

(5) 시장경제체제가 곧 자본주의체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자본주의체제는 시장경제체제의 가장 발전된 형태이다. 그리고 모든 시장경제체제는 그 속에 자본주의화의 경향성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내재적 발전동력으로서 지니고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는 그 체제가 지닌 내적 모순으로 말미암아 독점자본주의단계에 이르러 시장적 경제조절를 보완하는 국가적 경제조절을 필요로 하게 되는데, 국가적 경제조절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에 계획경제적 요소를 가미시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국독자체제에서 발전된 계획경제적 요소는 새로운 계획경제 체제 수립의 출발점을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경제계획화는 한편으로는 시장경제체제에 내재하는 자본주의화로의 경향성을 저지하기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직접생산자들이 시장매커니즘에서 작동하는 가치법칙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그들이 사회경제적 과정을 목적의식적으로 통제해 나가기 위해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이 점에서 - 물론 사회주의사회에서의 상품․화폐 관계란 단순히 ‘자본주의의 유제’가 아니라,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내재적’ 구성요소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단숨에 폐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활용하면서 서서히 소멸시킬 수 있을 뿐이지만, 경제계획화를 확대․심화시키는 것 없이 직접생산자들의 사회적 해방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현존사회주의의 계획경제를 특징지운 것과 같은 ‘관료적․지시명령적 계획경제체제’의 요소들은 ‘기본적으로’ 대중권력의 국가권력으로의 전화를 통해 ‘계획과정으로의 생산자대중의 더 많은 참여’와 ‘전문성과 민주성의 더 한층의 유기적 결합’을 보장하는 ‘민주(집중)적 계획경제체제’를 발전시키는 것을 통해 극복해야지, 계획경제를 시장경제로 전화시키는 것을 통해 해결되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국가적 소유는 계획경제 체제를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소유형태로서도 중대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6) 기업과 기업간의 유기적인 직접적 결합도를 높여 나가려는, 맑스와 엥겔스에게서 이미 나타난 ‘일국가 일공장’ 구상 및 국가적 경계를 넘어서는 기업과 기업간의 유기적인 직접적 연관성의 제고는 계획경제의 심화․확대와 관련하여 적극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독점자본주의 단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독점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계열화 및 이른바 일국 수준 및 세계적 수준에서의 네트위크기업 등의 출현은 기업과 기업 간의 유기적인 직접적 결합도를 높이는 것으로 새로운 계획경제 체제 수립의 중요한 기반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7) 제3차 산업혁명을 수반하면서 수립되고 있는 포스트포디즘적 생산체제는 전인류에게 풍요로운 물질적 생활을 가능케 할 정도로 높은 생산력 수준을 지니고 있다. 이 점에서 자본주의적 이윤생산의 논리를 벗겨낸 포스트포디즘적 생산체제는 모든 인민의 풍요로운 삶을 보장하는 물질적 기반이 될 수 있다. 나아가 포디즘적 생산체제와는 달리, 포스트포디즘적 생산체제는 생산과정과 노동과정에서 구상과 실행 및 지식노동과 육체노동의 재결합,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의 극소화와 같은 계기를 지니고 있다. 이 점에서 자본주의적 착취논리를 벗겨낸 포스트포디즘적 생산체제는 노동시간의 대폭적인 단축과 자유노동시간의 대폭적인 확대 및 생산과정과 노동과정에서 지식노동과 육체노동의 대폭적인 재결합을 가능케 하는데, 이러한 것들은 공산주의적 생산관계의 출현을 실질적으로 가능케 하는 물질적 기반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다.

(8) 종속성의 탈피문제는 부르주아적 관점에서, 또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문제삼을 수 있다. 이때 부르주아적 관점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이 ‘중진자본주의론자’ 등이 제기하고 있는 ‘선진자본주의로의 도약론’이다. 그리고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이 ‘자립적 민족경제론’이라고 할 수 있는 반면,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는 ‘제국주의적 독점자본의 지배로부터의 세계해방’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셋째, 장상환 교수는 한국사회의 독점자본은 제국주의 독점자본의 수탈로 인하여 국가권력에 의존한 추가적인 대중수탈을 불가피하게 요구한다는 점을 들어 한국의 독점자본을 ‘국가독점자본’이 아니라 ‘관료독점자본’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한다.14) 그러나 그가 말하는 제국주의 독점자본의 수탈이 야기하는, 국가권력에 의존한 추가적 대중수탈이란 종속국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에의 ‘구조적 종속’으로 인한 종속적 국독자의 ‘특수성’을 말하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이 아니므로, 국가독점자본을 특별히 관료독점자본으로 바꾸어 불러야 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더욱이 독점자본이 국가권력에 의존하여 추가적 대중수탈을 행하는 것은 종속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하지만 제국주의국가에서도, 특히 경제위기 시에는 대규모로 일어나는 보편적 현상임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한/노/정/연


1) 역시 ‘종속적’이란 형용어를 괄호 안에 넣어 처리한 것은 ‘종속성’의 문제 보다 ‘국독자’의 문제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겠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2) 여기서 나는 ‘종속적 국독자’를 그간의 우리 사회의 사회구성체 논쟁을 통해 보편화된 용어인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와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한다. 그런데 ‘신식민지’ 대신에 ‘종속’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로서는 (1) ‘신식민지‘라는 용어가 ‘종속’을 강한 의미로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 (2) ‘종속’이라는 말이 세계적으로 더 보편성을 지닌 용어라는 점 (3) ‘신식민지’ 보다는 ‘종속’이라는 개념이 세계적 수준에서 제국주의에 구조적으로 종속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독자성’을 지닌 사회구성체의 성격을 잘 들어낸다는 점 (4)그간 우리 사회의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신식민지’라는 개념이 사용된 것은 주로 ‘식민지 반봉건사회론’과의 논쟁에서 비롯된 것으로 한국에서의 사구체 논쟁이 지닌 ‘특수한’ 지형을 반영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 등이 지적될 수 있다.


3) 김수행, 「한국사회를 어떻게 분석할 것인가?」, ꡔ한국에서의 독점과 종속ꡕ(서울대 민교협 제2회 학술토론회 발표논문집), 8~11쪽 참조.


4) 김수행, 앞의 글, 11쪽 참조.


5) 예를 들면 김호균, 「사적 유물론은 폐기되어야 하는가」, ꡔ사회평론ꡕ, 1992년 1월호, 132~139 쪽; 황태연, 「사회적 소유는 공동소유제와 같은 것인가」, ꡔ사회평론ꡕ, 1992년 3월호, 252~262 쪽; 같은 이, 「소련의 해체와 새로운 소유권의 모색」, ꡔ사회비평ꡕ 제7호(1992), 100~122쪽; 송희석, 「새로운 사회주의의 가능성」, ꡔ사회평론ꡕ 1992년 3월호, 240~251 쪽; 장상환, 「민주변혁과 재벌해체의 내용」, 학술단체협의회 편, ꡔ한국사회의 민주적 변혁과 정책대안ꡕ(역사비평사, 1992), 77~85쪽 참조.


6) K. Marx, Das Kapital 1, MEW 23, pp. 790~791참조.


7) 예를 들면 김호균, 앞의 글,137~138쪽 ; 황태연, 앞의 글, ꡔ사회평론ꡕ, 260 쪽 이하 참조.


8) 송희식, 앞의 글, 245 이하 쪽 참조.


9) 장상환, 앞의 글, 73, 86쪽 참조.


10) 황태연, 「사회적 소유는 공동소유제와 같은 것인가」, ꡔ사회평론ꡕ 1992년 3월호; 황태연, 「소련의 해체와 새로운 소유권정책의 모색」, ꡔ사회비평ꡕ 제7호(1992) ; 장상환, 앞의 글, 77~82 쪽 참조.


11) K Marx, Das Kapital Bd. 3, MEW 25, pp. 453.


12)이와 관련하여서는 F.L. Bender, “The Ambiguities of Marx's Concepts of ‘Proletarian Dictatorship’ and ‘Transition to Communism’,” B. Jessop(ed.), Karl Marx's Social and Political Thought(London, New York: Routledge, 1990), pp. 355~383 참조.


13) 이와 관련되는 일반적 논의로서는 김세균, 「사회주의란 무엇인가(1): 사회주의의 발전논리에 대한 일반이론적 고찰」, ꡔ동향과 전망ꡕ(1990년 여름호), 146~177 참조. 그런데 국유화조치 등에 의해 성립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단지 그 생산력 발전 수준에서만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적 생산관계와 구분되는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적 생산관계로서 미화하고 있는 점에 스탈린의 ‘소유론적 사회화관’의 문제점이 존재한다. 그러나 법률적 사회화 조치 그 자체는 단지 ‘형식적 사회화’만을 가져올 뿐인데, 이 형식적 사회화는 실질적 사회화로 발전해 가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스탈린의 소유론적 사회화관을 비판하면서, 그 역으로 형식적 사회화의 의의를 무시하는 견해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 주식소유제의 도입론도 그 일종이다 -, 자본에 의한 임노동의 ‘실질적 포섭’이 그 ‘형식적 포섭’을 전제로 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듯이, ‘실질적 사회화’는 오직 ‘형식적 사회화’를 전제로 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이 지적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사회적 소유형태로의 소유관계의 법률적 변경이 형식적 사회화를 가져온다면, 실질적 사회화는 생산-소비과정 전체에 대한 노동자대중 자신의 직접적인 통제가 증대하고 산사회경제적 시장매커니즘이 소멸해가는 만큼, 그리고 (그 속에 국가관료의 생산대중으로부터의 자립화와 특권화가 포함되어 있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적대적 대립이 지양되어 가는 만큼 완성될 수 있다.


14) 장상환, 앞의 글, 65~66 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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