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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6번 : [59호/연재-기획] 지상강좌/노동자 교양 경제학
           -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과 공황
글쓴이: 채만수 등록: 2000-10-06 00:00:00 조회: 1300


지ˇ상ˇ강ˇ좌



본 지상강좌는 연구소가 노동자 교양강좌의 첫 기획으로 지난
1월13일부터 주1회 7차례에 걸쳐 진행한 강의내용을 강사가 수정․보완하여 싣고 있습니다.
강좌는 시간상의 제약으로 경제학의 많은 내용을 모두 전달할 수 없었습니다. 진행도 주로 논쟁적인 방식으로 되었었습니다. 그래서 이 지상강좌는 강사가 강의 과정에서 여러 제약으로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 내용들을 보강하여, 강의를 듣지 못한 분들뿐만 아니라 강의를 들은 분들에게도 도움이 되도록 충실하게 정리하여 싣고 있습니다.


제5마당/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과 공황
지상강좌/노동자교양경제학


채 만 수
부소장






1.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단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주요한 특징의 하나는, 그것이 엄청난 속도로 노동생산력을 발전시키고, 따라서 사회적 생산을 엄청난 규모로 증대시키고 있다고 하는 점입니다. 노동생산력의 발전 속도와 사회적 생산의 규모 증대라는 면에서 역사상 어떠한 양식도 자본주의에 비교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한에서 자본주의는 위대하고, 맑스가 말했듯이, 역사에서 자신을 변명할 근거를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은 결코 순탄한 게 아닙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적대적 성격, 즉 사회의 계급적 분열과 착취, 억압, 타락, 침략과 전쟁 등등은 차치하더라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그 자체가 주기적인 위기와 파국을 필연적으로 수반하면서 발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바로 이것, 즉 자본주의적 생산에 필연적인 위기 곧 공황의 문제입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위기’와 ‘공황’ 개념에 대해서 잠깐 얘기해 봅시다.
우리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그리고 특히 부르주아 경제학자나 사회학자들, 그리고 기자들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위기’ 혹은 ‘경제위기’ 따로, ‘공황’ 따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최근 수년 동안을 보면, 정말 넌더리날 만큼 ‘경제위기!’, ‘경제위기!’를 얘기하면서도 그것이 ‘공황’ 혹은 ‘경제공황’은 아니라는 거지요. 그리하여 신문의 논설 같은 데에서 우리는 가끔 이런 주장을 보게 됩니다. 경제위기를 논하면서 “구조조정을 서두르지 않으면 잘못하다간 공황상태로 발전할지도 모른다” 운운하는 소리 말입니다.
이러한 어법, 특히 ‘공황’이라는 어휘를 이렇게 사용하는 것도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경제위기, 즉 공황기에는 엄청난 규모의 파산이나 금융상의 사건이 돌발하면서 사회구성원 모두가 공포에 휩싸이면서 사회적 대혼란이 발생하는 것도 결코 드물지 않고, 저들은 ‘공황’이라는 말로 그러한 상황, 그러니까 패닉(Panic)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황’이란 용어의 의미를 이렇게 극히 협소하게 한정하는 것은 그 용어의 전통적인 용법과 다른 것입니다. 예컨대, ‘자본주의 경제는 필연적으로 주기적인 공황을 수반한다’라든가, ‘1930년대의 대공황’ 등이라고 말할 때, ‘공황’의 의미는 그러한 특수한 상황만을 가리킨 게 아니거든요. 이때 ‘(경제)공황’이란 명백히 ‘(경제)위기’와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실제로, 두 용어는 본래 전적으로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경제학이란 본래 자본주의적 생산의 구조와 운동법칙을 분석하여 밝히는 학문이기 때문에 당연히 자본주의가 가장 먼저 발전한 곳, 즉 영국에서부터 발생하고 발전했지요. 그리고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에서 가장 먼저 자본주의가 발전했기 때문에 일본의 학자들이 서양, 그것도 특히 영국의 고전파 경제학 및 그 전통 위에서 경제학을 비판적으로 완성하고 있는 맑스의 경제학을 수입하고 번역했지요. 그때 그 초창기의 일본인 경제학자들이 경제학 문헌상의 ‘crisis’ 혹은 독일어로 ‘Krise’를 ‘(경제)공황’이라고 번역했던 것이지요. 이 말들의 본래 의미가 ‘위기’지 않습니까? 그리하여 영한사전이나 독한사전에서 이 단어들을 찾아보면, ‘위기’라고 쓰여 있고, 저 뒤쪽쯤에 가면 ‘[경] 공황’ 하는 식으로 쓰여 있지요. 본래의 의미는 ‘위기’인데, 경제학에서는 ‘공황’이라고 한다는 뜻이지요.
문제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나 사회학자들 그리고 기자들은 왜 이렇게 같은 의미를 갖는 두 단어를 구분하고, 그리하여 공황이란 어휘를 기피하거나 그 의미를 특수하고 예외적인 상황으로 왜소화시키느냐 하는 점입니다. 다름 아니라 자본주의의 안위에 대한 애틋한 애정 때문이지요. 말하자면, 1930년대의 대공황을 겪으면서 ‘자본주의는 필시 공황으로 망한다’는 것이 대중의 정서로 되었기 때문에, 즉 공황이라는 말에는 그러한 귀신이 붙었기 때문에 자본주의 이데올로그들은 그 말을 피하고 싶고, 그리하여 그 말에 특수하고 예외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지요.
정말이냐고요? 89년, 90년의 상황을 예를 들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 직전까지 한국 경제는 이른바 ‘3저호황’이라고 해서 전에 없던 호황을 구가했지요? 그런데 89년 2/4분기가 되자 경기 상황이 갑자기 나빠지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되자 국가와 자본, 언론은 ‘총체적 위기’니 뭐니 하면서 노동자․농민의 더 한층의 희생을 요구했습니다. 당시 그러한 상황을 저는 자본주의 경제에 주기적이고 필연적인 공황으로 규정했는데, 스스로 진보적임을 자처하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반응이 무엇이었는지 아세요?
대략 간추리자면, ‘공황은 과거의 일일 뿐,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국가의 효과적인 경제 개입으로 더 이상 공황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한국사회과학연구소의 정건화, 임휘철, 정태인 같은 자들이었는데, 그들은 공황을 얘기하는 저야말로 ‘파국론자’라고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물론 이때 ‘파국론자’라는 의미는, ‘자본주의란 결코 끝장날 수 없는데 공황을 얘기하는 끝장론자’라는 뜻이었지요. 하지만, 당연한 말이지만 상황은 그들의 원망(願望)을 배반해서 진행되었고, 나중에 그들은 ‘공황이 아니라 소공황’ 운운하는 옹색한 변명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지요.
(경제)공황이란 이렇게 (경제)위기란 말과 같은 것을 가리킨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지금부터는 주기적인 공황이 필연적인 것으로 되기까지의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과, 그 원인, 그 사회적 귀결 등등에 대해서 보기로 합시다.


1) 수공업적 매뉴팩춰와 공장제 대공업

자본제적 생산이라고 하면 오늘날 우리는 대개는 거대한 기계 시설이 윙윙거리거나 첨단 자동화 설비가 갖춰져 있는 대규모 공장을 연상합니다. 오늘날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크게 틀린 생각이 아니지요.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이 처음부터 이렇게 기계제 생산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그저 재래의 수공업적인 도구를 가진 숙련공들을 자본이 한 자리에 모아 놓는 것으로부터 출발했지요. 여러 수공업 장인(匠人)들을 하나의 작업장에 모아 놓고 그들에게 일정한 작업규율을 강제하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형태의 협업과 분업이 발생하고, 그에 따라 노동의 생산력이 증대하면서 자본의 잉여가치가 생산되었던 것입니다. 생산이 이렇게 자본에 의해서 지휘되는 수공업 장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던 형태를 경제학에서는 매뉴팩춰(manufacture)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조건에서는 생산은 여전히 노동자들의 숙련기능에 의존해서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자본에게 있어서 근본적인 제약이었지요. 시쳇말로 ‘기술자 곤조’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예요. 매뉴팩춰에서는 생산이 주로 노동자들의 숙련에 의존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자본은 임금이나 기타 노동조건에서 이들 숙련공들의 비위를 맞추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 만큼 자본의 의지는 제약을 받았던 것이지요.
이러한 제약은 자본으로서는 참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본은 그러한 제약을 돌파하는 길이 강구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산업혁명입니다.
산업혁명! 역사는 그것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배웠습니다. 그리고 산업혁명은 그렇게 찬양받을 충분한 근거가 있지요. 그것은 인간의 노동생산력을 비약적으로 증대시켰고, 그리하여 인간이 이전에 비해서 극히 적은 노동시간으로 훨씬 풍부한 생활자료를 얻을 수 있도록 했으니까 말입니다. 산업혁명의 성과와 그 이후의 물질적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은 어떤 반동을 통해서도 되돌릴 수 없는 인류의 자산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찬양 받는 산업혁명이 추진되게 되는 정황․조건이나 동기는 ‘찬양 받을 만한 것’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탐욕과 강제에 의해서 추진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결코 노동의 노고는 줄이되 생활자료는 풍부하게 얻자는 식의 고상한 동기에 의해서 추진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잉여가치에 대한, 그것도 보다 큰 잉여가치에 대한 갈망과 탐욕에서 자본에 의해서 촉발된 것이고, 잉여가치의 취득을 둘러싼 자본간의 경쟁이라는 강제에 의해서 추진된 것입니다. 보다 고도의 생산방법을 통해서 값싸게 생산함으로써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시장의 패권자가 되려는 탐욕에서 말입니다. 바로 그러한 이기적인 탐욕이 결국은 생산력의 증대라고 하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그러한 이기적인 탐욕은 찬양 받을 것일 망정 비난받을 것은 아니라는 부르주아적 윤리도 강하게 주장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이 아무리 강하게 제기되더라도, 산업혁명이, 즉 생산의 기계화가 노동자 계급과의 관계에서는 어떤 동기에서 추진되었고, 그것이 노동자 계급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알게 되면, 그러한 부르주아적 주장은 곧바로 무색해지고 맙니다. 산업혁명이란 생산현장에서 노동자들을, 그것도 고임금의 숙련노동자들을 몰아내고, 그들을 무력화시키려는 의도에서 추진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산업혁명을 통해서 기계화가 이루어지면 보다 적은 수의 노동자가 보다 많은 상품을 생산하게 되고, 그리하여 노동자들이, 특히 숙련노동자들이 일자리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물론 아직까지 비자본주의적이었던, 그리하여 농업과 수공업이 미분리 상태에 있었던 농촌지역과 나아가 해외의 더 넓은 지역이 자본주의화되고, 자본주의의 시장으로 편입됨에 따라서 상품생산이 증대하고, 그에 따라서 영국 등 당시의 선진공업국에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공장에 노동자로 고용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과거와 같은 고임금의 숙련노동자가 아니라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이라는 열악한 노동조건에 시달리는 단순노동자였고, 특히 수많은 여성과 아동이 그러한 열악하기 그지없는 노동조건의 희생자로 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그 숙련노동 때문에 이제까지는 형식적으로만 자본에 종속되어 있던 노동자들이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이제는 실질적으로 자본에 종속되게 되지요. 노동자들의 탈숙련화, 숙련노동자의 폐기․무력화가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이제 과거에는 자신의 숙련에 자부심을 가지고 그 노련한 노동으로 가족을 부양하던 숙련노동자들은 아무 데도 쓸모가 없는 잉여노동력으로 되고, 마누라와 자식을 공장에 노동력으로 팔아먹음으로써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맑스의 표현을 빌면, ‘노예상인’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지요. 당연히 숙련노동자들의 저항이 없을 수 없었는데, 그것이 역사에 유명한 러다이트 운동, 즉 기계파괴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역사의 진전을 거스르는 반동적인 운동이었기 때문에 결코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적 산업혁명, 기계화의 적대적 성격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모순을 격화시켰습니다. 기계화를 통한 생산력의 비약적 증대, 상품생산의 거대한 증대는 다른 한편에서의 대중의 빈곤화를 수반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생산과 소비 간의 모순이 증대했고, 생산력이 발전할수록 그 모순은 격화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9세기 20년대가 되면 그것은 드디어 폭력적으로 폭발하기 시작했고, 그것도 대략 10년을 기한으로 주기적으로 폭발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경제위기, 즉 대량생산 공황이지요.


2) 경쟁적 자본주의와 독점자본주의

지금까지 간단히 본 것처럼, 이렇게 매뉴팩춰로부터 기계제 생산으로의 이행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주요한 발전단계를 이루고, 자본주의적 경제위기가 발생하는 근본적인 생산력상의 기초를 마련하게 됩니다.
그런데 20세기로 들어오면서 자본주의는 다시 근본적인 구조적 변화를 겪게 됩니다. 경쟁적 단계에서 독점적인 단계로의 이행이 그것입니다.
이전에는, 매뉴팩춰 시대에는 물론 기계제 대공장의 시대로 이행한 이후에도 각 산업부문에는 수백 혹은 수천 개의 기업․자본이 있어서 그들은 시장에서 서로 경쟁을 했습니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찬양하는 이른바 ‘자유경쟁’이었지요.
그런데 시장은 다윈적인 적자생존의 법칙이 작용하는 곳입니다. 남들보다 보다 고도한 생산력을 가진 기업, 보다 책략에 뛰어난 자본은 점점 커가고, 그렇지 못한 기업은 쇠락하고 망해가는 것입니다. 자본은 보다 유리한 위치․조건을 선점하기 위해서, 몰락을 피하기 위해서 서로 인수․합병을 거듭하게 됩니다. 잉여가치의 재자본화를 통한 자본의 거대화 즉 자본의 집적과, 인수․합병을 통한 자본의 거대화 즉 자본의 집중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자유경쟁은 이제 그 반대물인 독점으로 전화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19세기 말 ~ 20세기 초가 되면, 자본주의 선진국에서 이러한 자본의 집적과 집중은 거의 대부분의 주요 산업부문에서 진행되어 이제 자유경쟁이 아니라 독점체들이 시장을 지배하게 되지요. 특히 산업자본뿐만 아니라 은행자본의 집적․집중도 고도화되고, 그것과 거대산업자본간의 융합이 발생함으로써 거대 금융자본이 형성되게 되고, 이것들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금융과두제(金融寡頭制)가 등장하여, 이들이 한 국가사회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다투게 되지요. 그리하여 자본과 자본간의 대립․경쟁이 격화되고, 자본의 제국주의적․식민지주의적 팽창이 강화되게 되는데, 오늘 우리의 주제인 경제위기, 공황도 더욱 증폭되게 됩니다. 독점화의 진전으로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본모순, 즉 생산의 사회성과 전유(專有)의 사적 성격 간의 모순이 격화되어 생산과 소비간의 모순이 더욱 심화되기 때문이지요.
이 강좌의 첫 번째 강의에서도 말씀드렸다고 생각되는데, 지난 90년대 초였던가 하는 즈음에 어떤 논자는 한국과 같이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를 경험하면서 자본주의로 이행한 곳에서는 경쟁적인 단계를 거치지 않고 자본주의가 발생 혹은 이식되자마자 그것은 바로 독점자본주의 단계였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었습니다. 그에 의하면, 제국주의는 곧 독점자본주의이고, 따라서 제국주의에 의해서 그 식민지에 수출되는 자본은 독점자본이기 때문에 그 독점자본에 의해서 개발되고 지배되는 식민지 자본주의는 독점자본주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한국처럼 식민지를 겪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자본주의가 발달하는 곳에서는 자본주의는 경쟁적인 상업자본주의 단계를 거쳐서 독점자본주의로 이행합니다. 그리고 독점자본주의로 이행함으로써 그 자본주의적 경제위기도 더욱 증폭되게 되고요. 식민지 자본주의는 시초부터 독점자본주의라는 주장의 오류는 그것이 독점자본주의에서 본격화되는 자본의 수출을 ‘독점자본의 수출’로 주장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독점자본주의에서 본격화되는 자본의 수출은 ‘독점자본의 수출’이 아니라 ‘과잉자본 혹은 잉여자본의 수출’입니다. 한국 자본주의에서도 1980년대 말 이후가 되면 특히 동남아 지역을 중심으로 자본수출이 활발히 이루어지는데, 그 주류를 이루는 것은 섬유, 봉제, 신발, 소형가전제품의 조립 등등 국내 산업구조의 변화로 이윤율이 급락해 있던 과잉자본이었습니다.
한국 자본주의가 언제 독점적 단계로 이행했느냐 하는 정확한 이행의 시기는 앞으로 보다 실증적인 연구를 거쳐서 확정적으로 밝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대략적으로만 말한다면, 지난 1960년대 말 이전 혹은 70년대 초 이전의 한국 자본주의는 분명 경쟁적 단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물론 소수의 산업부문에서는 이미 재벌이라는 확고한 독점체가 형성되어 막강한 지배력을 발휘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수의 예외적인 부문에 그쳤고, 아직 대부분의 부문에서는 특히 60년대 중반까지는 수백, 수천의 자본이 서로 각축하고 있었습니다.
두어 가지 흥미있는 예를 들어 볼까요?
여러분, 콜라하면 코카콜라가 사실상 전체 시장을 지배하다시피 하지요? 그런데 1950년대나 60년대에는 어땠겠어요? 코카콜라가 원체 세계적인 시장 지배력을 갖고 있으니까 그 당시라고 지금과 많이 달랐겠느냐? 그렇게 생각하기 쉽지요? 그런데 전혀 아니올시다입니다. 당시에는 아직 코커콜라가 정식으로는 한국에 상륙하지도 않았고, 전국의 어지간한 중소도시마다 한두 개의 콜라공장이 있었으니까요.
그건 코카콜라 자본이 상륙하기 전의 예외적인 상황이라고요? 그러면 토종자본의 각축장인 소주산업은 어땠겠어요?
요즘은 소주하면, 진로를 필두로 열 손가락 이내로 꼽을 수 있는 소수의 자본이 전국의 시장을 지배하고 분할하고 있지요? 60년대 이전에는 어떤 줄 아세요? 전국의 주요 중소도시는 물론이고, 읍 단위, 심지어 조금 대규모의 면 단위 지역에조차 독립적인 소주공장들이 있어서 제각기 맛을 뽑내고 있었어요? 그러던 것이 70년대를 거치면서 소수의 대자본으로 집중된 것이지요.
아, 소주도 박정희 정권의 특권적인 주정(酒精) 배분정책으로 예외적으로 그렇게 되었다고요?
그러면, 신발산업은? 섬유산업은? … 하다못해 빙과(氷菓)산업은요? 모두 다 지금은 소수의 독점자본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지만, 그 전에는 안 그랬거든요. 더구나 위에서 우리가 코카콜라의 상륙이나 박정권의 주정정책을 얘기하면서 그들 산업부문은 그래서 예외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했습니다만, 그러한 것들은 독점화 과정을 가속시킨 사건이나 조치들이었지, 그 이전에 자본을 분산시킨 사건이나 조치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즉, 그러한 예외성조차 한국 자본주의의 독점화를 가속화시킨 것일 뿐, 한국 자본주의가 비독점적인, 경쟁적인 단계를 거쳤다고 하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 논리의 근거는 되지 못하는 것 아닌가요?
아무튼 그렇게 한국 자본주의도 경쟁적인 단계를 거쳤고, 그 단계에서 경쟁의 결과 그 반대물인 독점이 발생․성숙하여 경쟁적 단계를 지양하면서 독점적 단계로 이행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경제위기도 본격화되고, 더욱 격화되기 시작했습니다.


3) 비국가자본주의적 단계와 국가자본주의 단계

이렇게 자본주의적 생산의 독점 단계로의 이행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적대성과 모순을 격화시켜 근대 자본주의에 필연적인 주기적 공황을 격화시키는데, 1930년대가 되면 그 위기는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정도에까지 격화됩니다. 주지하는 것처럼, 1930년대의 대공황이지요.
오늘날 신자유주의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경제와 기업활동에 대한 국가의 개입과 규제를 배제․완화하고, 기업활동을 자유시장에 맡기라고 하지요? 그게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예요. 실제로 1930년대 대공황 전의 자본주의는 대략 그런 상태였거든요. 자본주의적 생산은 봉건사회의 태내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하여 봉건적 억압과 투쟁하면서 자신을 세워왔기 때문에 그것은 본래 자유로웠고 무정부적이었던 거지요. 그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모순이 격화되는 주요 요인의 하나였지만, 동시에 자본주의적 생산 그 자체의 주요한 성격이었던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론 후발 자본주의 국가에서 자국의 산업을 보호․육성하기 위해서 고율 관세의 설정 등 국경적 조치를 취하긴 했지만, 자본의 활동 그것 자체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자유방임적이었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 대공황이 발생하여 자본주의적 생산 그 자체의 명운이 문제로 되자 얘기가 달라졌습니다. 자본의 지배를 보증하는 기구로서의 국가가 더 이상 자본의 운동에 대해서 방관자적인 입장만을 취할 수는 없게 된 것이지요. 그리하여 이제 국가가 자본의 재생산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는데, 이로써 자본주의는 과거의 비국가적․자유방임적 자본주의에서 국가자본주의 단계로 이행하게 되지요.
재생산과정에 대한 국가개입은 크게 뉴딜형과 파시즘형으로 나타났는데, 어느 것이나 국가가 화폐․금융․재정적 수단을 무기로 대량의 ‘유효수요’를 창출함으로써 자본주의적 과잉생산을 해소하려는 정책을 쓴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개입을 이론화한 것이 유명한 케인즈주의지요.
중요한 것은, 경제적 재생산과정에 대한 자본주의 국가의 개입은 다름 아니라 더 이상 방임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에 대한 국가의 대응이라는 점입니다. 문제는 그러면 국가의 개입으로 자본주의는 그 위기를 극복했고 극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인데, 오늘날 빈발하는 세계적인 경제위기, 국제금융․외환위기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신자유주의 소동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자본주의적 경제위기는 자본주의적 생산에 고유한 적대성의 표현이고, 그 기본모순의 폭발이어서 자본주의가 성숙할수록 그 위기는 경향적으로 증폭된 형태로 폭발하는 것이지요.
참고로,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는 독점체의 지배에 의한 위기의 격화의 결과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선진국에서 국가자본주의는 당연히 국가독점자본주의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한국 자본주의 같은 경우는 아직 경쟁적인 단계에서부터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전반적 위기에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그때부터, 즉 비독점적인 경쟁적 단계에서부터 강력한 국가의 개입이 자본주의 체제 생존의 절대조건이었고, 따라서 그때부터 국가자본주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타락한 형태로 나타났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을 그것을 ‘관료자본주의’라고 주장하지요. 아무튼 한국 자본주의는 그러한 이유 때문에 ‘비독점적․경쟁적 국가자본주의 →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이행과정을 겪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한국에서의 경제위기 논쟁

이제 자본주의적 경제위기 혹은 공황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접근해야 하는데, 우선 우리 사회에서 이에 대한 관념과 논쟁은 어땠는가를 간단히 보기로 합시다.
한국 사회는 그것이 본격적으로 자본주의화하기 이전부터 자본주의 세계공황의 혹독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1930년대 대공황의 영향이나 그것의 직접적인 연장인 제2차 세계대전은 말할 필요도 없고, 사실은 50년대 초의 한국전쟁도 40년대 말에 미국을 엄습한 전후공황과 일정한 관계가 있지요. 미국 자본주의는 제2차 대전을 경과하면서 엄청나게 생산력을 증대시켰던 것인데, 그것이 1948-49년을 경계로 급격히 위기로 빠져들지요. 그랬다가 한국전쟁을 계기로 다시 호황으로 반전하게 되는데, 바로 이 때문에 많은 논자들이 미국의 전후공황과 한국전쟁의 인과관계를 지적하는 것이지요.
그후에도 한국은 대략 1960년 전후, 1970년 전후 등 경제공황 현상을 겪게 됩니다. 말하자면, 1960년의 4월 혁명이나, 전태일 열사의 분신, 광주대단지(현재의 성남시) 폭동, 위수령, 82년 8월의 사채동결조치 등을 거쳐 72년 10월 유신에 이르는 정치적 동요․대립의 격화가 모두 우연이 아니었던 거지요. 그러한 정치적 대격동의 기초에는 한국경제의 위기와 그에 따른 노동자․농민․도시서민의 생활파탄이라는 경제적 상황이 놓여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해방 후 한국에서는 극한적인 파쇼적 사상탄압으로 천박한 미국식 부르주아 경제학, 부르주아 정치학의 아류들만이 판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사태들이 자본주의적 경제위기에 의해서 규정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없었습니다. 정치적 동요는 이른바 자유민주주의라는 자로서만 재단했고, 노동자․민중의 경제적 파탄은 전후(戰後) 빈곤이라든가, 부정부패, 정책실패 등등의 자로서만 판단했던 것이지요.
80년대 후반의 대민중투쟁기를 거치면서 사회과학에도 르네쌍스가 오고, 그리하여 자본주의 경제의 구조와 운동법칙, 그 주기적 위기에 대한 이해도 이제 많이 깊어지고 확산되었지만, 그러나 가장 진보적인 학술 진영이나 노동자․민중운동 진영에서조차 아직도 과거의 비과학적인 사고의 관성을 극복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논쟁을 봅시다.


1) 89 ~ 92년 공황과 논쟁
우선, 1989년에서 대략 92년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이는 공황과 관련한 논쟁인데,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당시 제가 그 국면의 성격을 공황으로 규정하자 지금 한신대에 교수로 있는 정건화 등은 그것을 ‘파국론’이라고 비난하면서,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국가의 효과적인 정책개입으로 더 이상 공황은 없다’는, 말하자면 ‘국독자영구번영론’를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그리고는 공황국면이 아니라 ‘산업구조조정국면’이라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더 이상 공황은 없다’고 말할 때, 사실 그들은 자본주의적 산업순환에서 공황 혹은 위기란 어느 국면인지조차 무지했던 것이지요.
자본주의적 산업순환의 제 국면을 간단히 그림으로 그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d
a
b
c
e
g
f
h










여기서 ‘공황’, 그러면 언뜻 a나 f지점이 형편없이 밑으로 떨어져 있는 상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실제로 정건화 등이 ‘더 이상 공황은 없다’며 ‘파국론’ 운운했을 때, 그렇게 a나 f가 한없이 밑으로 떨어져 있어야 ‘파국’이고 ‘공황’인데,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그렇게 한없이 떨어지도록 국가가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거지요. 그야말로 산업순환에 대한 무지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지요.
위 그림에서 a-b, 혹은 e-f-g의 국면은 공황이 아니라 ‘침체’ 국면이지요. 그러면 ‘공황’ 혹은 ‘위기’는 어느 국면이겠어요? d-e의 국면이 공황 혹은 위기지요. 즉, 공황 혹은 위기란 최대로 팽창한 자본주의적 생산이 경련을 일으키면서 축소․수축되는 국면이지요. 이 생산의 축소․수축은 그냥 그래프에 줄을 긋거나 통계숫자를 줄여나가는 것처럼 무감동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난 97년 말 이후 절절하게 겪은 것처럼, 수많은 기업․자본의 파산과 그에 따른 실업의 양산 등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적으로도 팽팽한 긴장과 대립을 불러일으키면서 자본주의적 생산의 위기, 즉 공황을 조성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공황이란 이렇게 호황기를 통해서 확대되었던 생산이 수축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현대 자본주의에는 산업순환 혹은 경기순환은 있되, 공황은 없다’는 식의 부르주아적 관념은 사실은 허위 외에는 설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참고로, 위 그림의 b-c 혹은 g-h 국면은 ‘중위(中位)의 호황’이라고 불리는 국면으로서 경제가 힘차게 호황으로 내닫는 국면인데, 이북에서는 이를 아주 역동적으로 ‘활기증진기’(活氣增進期)라고 번역하는 것 같더군요. 그리고, c-d는 호황말기 국면으로서 일반적으로 ‘번망기’(繁忙期)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근대 자본주의의 경제는 대체로 ‘중위의 호황(활기증진기) → 번망기 → 공황(위기) → 침체 → 중위의 호황 → …’의 순환을 하는 것이지요.
저들이 ‘공황이 아니라 산업구조조정 국면’이라고 강변했던 데에 대해서도 무언가 언급을 해야겠지요?
실제로 88년 후반기 이후가 되면 국가와 자본은 ‘산업구조조정’ 운운하면서 소란을 떱니다. 저들은 그 소란을 받아서 ‘산업구조조정 국면’ 운운했던 거지요. 그런데, 자본은 어떤 조건에서, 왜 이른바 ‘구조조정’을 하나요? 다름 아니라 이윤율에 압박을 받기 때문에 그런 소동을 피우는 것 아닙니까? 바로 번망기, 그러니까 호황의 말기가 되면 생산이 과잉확대로 자본은 극심하게 이윤율의 압박을 받게 되고, 그것이 폭발하는 것이 공황인 거지요. 그렇게 때문에 자본은 호황 말기가 되면 으레 ‘(산업)구조조정’이라는 부산을 떨기 시작해서 공황기에 가장 격렬하게 ‘구조조정’이 이루어지게 되지요. 이미 19세기 때부터 말입니다. 그러니까 저들처럼, ‘공황이 아니라 (산업)구조조정 국면’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지요. 89년 2/4분기 이후라면, 바로 공황기이고 따라서 (산업)구조조정이 활발히 이루어지던 시기지요.
이 시기에는 과잉생산으로 이윤압박을 받던 자본이 반노동자적 이데올로기를 유포하면서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세를 본격화하기 시작한 때이기도 합니다. 87년 7-9월의 노동자 대투쟁과 그 이후의 투쟁을 통해서 노동자들의 임금이 다소 상승한 사실도 있고 하여 자본은 노동자들의 ‘고임금’과 ‘생산성을 넘는 임금의 고율 인상’이 경제위기의 원인이라는 악선전공세와 더불어 노동자들에 대한 공격을 강화한 것이지요. 그러한 이데올로기 공세와 그에 대한 노동운동의 대응 등에 대해서는 이미 ‘임금’에 대해서 얘기할 때 얘기한 대로 입니다.
또 한 가지, 이 시기에 특기할 만한 사건으로는 토지 및 주택 가격의 급상승과 이른바 ‘토지공개념 강화’ 소동입니다. 그리고 이 ‘토지공개념 강화’ 소동을 통해서 ‘경실련’, 그러니까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뜨면서, 가히 시민운동의 시대가 열립니다.
그러나 이 토지공개념 강화 소동을 통해서 토지 및 주택 가격의 상승을 제어하겠다는 경실련 및 일부 부르주아 경제․사회학자들의 주장은, 전에도 말한 것처럼, 당시 토지 등 부동산 가격이 왜 폭등했는지, 산업순환의 국면이 전개되면서 그 가격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에 대한 철저한 무지를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심각한 경제위기로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자 이른바 토지공개념은 김대중 정권 초기에 89년 당시 경실련의 핵심 경제 이데올로그로서 그 강화 주장의 선봉에 섰던 김태동 씨, 당시는 성균관대 경제학 교수였다가 김대중 정권 초기에 대통령 경제수석을 한 바로 그 사람의 손으로 사실상 해체된 것 아닙니까?
당시의 부동산 가격의 폭등은, 88년-89년 초라는 호황 말기에 자본의 이윤율이 급락한 결과로 수많은 자본이 일확천금의 투기에 나섰고, 자본주의 경제에서 부동산 시장은 증권시장과 더불어 주요한 투기의 장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토지공개념 소동은 부동산 가격의 그러한 폭등이 그러한 자본운동에 고유한 성격으로부터 발생한다는 것을 은폐하면서 노동자․민중을 엉뚱한 데로 오도했던 것이지요. 많은 노동자․민중운동도 뭐가 뭔지 모른 채 더불어 어릿광대 춤을 추고 말입니다.

2) 96-97년의 위기 논쟁
― ‘경제위기-노동자 책임론’ 대 ‘경제위기-재벌 책임론’

96-97년 역시, 우리 모두가 겪어서 아는 것처럼, 노동자 계급을 향한 자본의 경제위기 공세가 거셌던 시기입니다. 하지만, 여러 경제통계가 말해주고 있듯이 당시는 명백히 활발한 경제호황기였고, 어쩌면 생산이 과도하게 확대되던 시기였습니다. 그리하여 생산의 그러한 과도한 확대와 그에 따른 금융 부담으로 자본의 이윤율이 심하게 압박받던 시기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노동자 계급을 희생시킴으로써 바로 그 이윤 압박을 돌파하기 위해서 자본은 경제위기 공세를 펼쳤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공세의 핵심은 역시 노동자들의 고임금과 잦은 파업이 위기의 원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운동의 대응은 어떤 것이어야 했겠습니까?
우선 당시의 산업순환 국면상의 성격, 즉 여러 상황과 근거로 당시는 위기 국면, 즉 공황 국면이 아님을 밝히는 것이어야 했겠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위기, 즉 경제위기는 자본주의적 생산에 내재한 모순의 폭발에 의한 것이지 결코 노동자 계급의 임금인상이나 기타 투쟁에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님을 통렬히 폭로하는 것이어야 했겠지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대응은 결코 그렇지 못했습니다. 당시 경기 국면의 성격에 대해서는 무비판적으로 정부와 자본측의 주장, 즉 위기라는 주장을 받아들인 위에서 위기의 ‘책임’ 논쟁을 벌인 것이지요.
당시 저는, ‘연간 평균 경제성장률이 5-6%에 이르는 현상황은 결코 경제위기 국면일 수 없다’는 의견을 제시했다가 당연히(?) 수많은 ‘진보적’ 경제학자들 및 기타 논객들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았는데, 97년 말에 외환․금융위기가 폭발하자 “봐라! 경제위기였지 않느냐?”며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조차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냉정히 생각해 보세요. 97년 10-11월에 외환․금융위기가 폭발하기 전과 그 이후는 경제적․사회적 상황이 극적으로 대비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그리고 조금만 이성을 잃지 않았다면, 사후적으로라도 “아하, 그때는 위기 국면이 아니었구나” 하고 말해야 옳지, 전혀 다른 상황을 마치 동일한 것처럼 “경제위기였지 않느냐?”라고 해야 옳겠습니까?
그건 그렇고, 당시 경실련, 참여연대 등 이른바 시민운동 단체의 경제 이데올로그들인 ‘진보적’ 경제학자들이 주도하고 민주노총 정책실의 일부 논자 등 노동운동 진영의 상당 부분이 이에 동조한 주장, 그리고 사실상 아직도 그들에 의해서 기회만 있으면 계속되고 있는 주장인즉은 “경제위기의 책임은 천민적인 재벌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경제위기-노동자 책임론’에 맞서는 ‘경제위기-재벌 책임론’이지요.
경제위기의 책임은 재벌에 있다! 경제위기의 주범은 재벌이다! 경제위기의 주범, 재벌을 해체하라!
어때요? 가슴이 후련하지요?
그러나 여러분들의 가슴이 후련한 것과, 정말 경제위기의 원인이 무엇인가는 전적으로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를 구별 못하고 가슴 후련한 것만 쫓다 보면 어떻게 되는 지 알아요? 누군가 그걸 이용해서 은밀하게 자신들의 추악한 계급적 이익을 추구하는 거지요.
실제로 시민운동 단체들이나 ‘진보적 경제학자들’이 이른바 ‘경제위기-재벌 책임론’을 거론하면서 ‘재벌 개혁’, ‘재벌 해체’를 주장할 때, 많은 노동자들이 그 주장에 후련함을 느끼고 따라서 그에 동조하고 있지만, 그들의 그러한 주장은 철저히 자본의 이익, 보다 구체적으로는 독점자본의 이익을 위한 것이예요. ‘재벌 개혁’ 주장은 말할 것도 없고, ‘보다 과격하게’(?) 들리는 ‘재벌 해체’라는 주장도 그 내용 혹은 목표가 뭔지 알아요?
재벌을 해체하여 그것을 노동자․민중의 것으로 하자는 얘긴가요? 노동자․민중의 통제 하에 두자는 것인가요? 아니지요?
그들의 주장은 다름 아니라 ‘비효율적인’ 재벌을 해체하여 ‘경쟁력 있는 대기업’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거예요. 이러한 주장이 갖는 반노동자적 성격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에 보다 자세히 얘기하겠지만, 아무튼 그것은 자본의, 그것도 ‘대기업’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독점자본의 이익을 위한 것 아닙니까? ‘국가 경쟁력’이라는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노동자․민중을 철저히 종속시키면서 말입니다. 저들의 ‘재벌 개혁’론이니 ‘재벌 해체’론이니 하는 것은 사실은 부정직한 ‘독점자본 합리화․효율화’론인 것이지요.
그런데 그들이 재벌의 비효율성, 혹은 경쟁력 부족을 경제위기의 책임, 그러니까 원인으로 드는 것도 우리가 조금만 주위를 돌아보면 얼마나 근거없는 얘긴가를 알 수 있어요. 예를 들어, 바로 이웃 나라 일본을 한번 보세요. 매년 연속 엄청난 무역흑자를 기록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일본의 기업들, 일본의 독점자본들만큼 ‘효율적’이고, ‘경쟁력이 있는’ 자본도 많지 않잖아요? 실제로 ‘재벌 개혁’이니 ‘재벌 해체’니 하고 주장하는 자들 중에 상당수의 사람들이 “제2차 대전 후의 일본 재벌의 해체” 운운하면서 일본의 독점자본과 그 효율성, 그 경쟁력에 찬양을 보내지요. 그런데도 일본은 지금 지난 1991년부터 10년 가까이 엄청난 경제위기에 허덕이고 있는 것 아닙니까?
결국, 재벌의 어떤 행태나 ‘경쟁력 부족’(?)에서 경제위기, 즉 공황의 원인을 찾는 것만큼 이론적으로 천박한 게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저들 소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독점자본 합리화론’으로서의 ‘재벌 개혁론’이니 ‘재벌 해체론’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겠어요? 자본주의적 경제위기, 공황의 진정한 원인이 무엇이며, 그것이 각 계급계층의 이해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를 보다 진지하게 학습하지 않으면 안되겠지요?
이제부터는 그 얘기를 해봅시다.(다음호에서 계속합니다.)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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