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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1번 : [106호/특집] 혁명정당 건설의 막연한 전망과 종파주의라는 문제
글쓴이: 현종혁 등록: 2005-02-20 00:00:00 조회: 3327

특 집

    “노동운동 어떻게 다시

     세울 것인가 -2”

혁명정당 건설의 “막연한 전망”과 “종파주의”라는 문제

    -ꡔ현장노동자ꡕ의 문제제기에 답하여-


지난 호에 이어서 노동운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모색을 계속합니다. 애초에 편집진은, 지난 호 특집 ?노동운동 어떻게 다시 세울 것인가-1? 에서 발표되었던 글 ?왜곡과 혼란으로 가득 찬 사회주의 정치그룹비판?에서 비판받은 그룹에게 반비판을 요청하여, 특집을 구성할 계획이었으나 투고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특집은 예외적으로 하나의 글로 구성됩니다. 

?현장노동자?신문과의 논쟁의 형식으로 혁명적노동계급정당건설에 대하여 논하고 있는 글입니다. “70년대 이후 민주노조 건설투쟁의 역사 속에서, 87년 대투쟁의 산물로써 또는 90년대 초중반 민주노조운동의 뜨거운 열정이 식기 전에 운동에 참여한” 선진노동자층이 몰락하고 있고, 여기에 근거하고 있는 “좌파 운동”이 “약화 속에서 기존 좌파 질서의 각 그룹들이 붕괴와 소멸, 분리와 통합, 신생이라는 과정을 겪으면서 서유럽 형태로 변화하는 정치지형과 운동 상황에 적응해가리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당건설의 흐름을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하며, 현 시기는 당건설의 토대가 될 선진노동자층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노동운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계급정당설에 대해 보다 풍부한 논의가 진행되었으면 합니다.

혁명정당 건설의 “막연한 전망”과 “종파주의”라는 문제

- ꡔ현장노동자ꡕ의 문제제기에 답하여 -


현 종 혁

자유 기고가




필자는 ꡔ사회주의노동자신문ꡕ 창간준비 9호에 「전노투를 둘러싼 몇 가지 논쟁에 대해」라는 글을 기고했다. 필자의 글에 대해 ꡔ현장노동자ꡕ는 다소 거친 비판을 해왔다.

감정적이고 즉자적으로 보이는 「혁명정당이 아니면 회의체라?」라는 제목의 인터넷 글에 대해 필자는 동일한 방식으로 대응할 생각이 없다. 또한 비판에 대한 필자의 답변이 “우리들 사이에 빠르게 전노투의 진로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1)도록 작용하는 것 역시 바라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필자는 답변을 일정한 시간적 간격을 갖고 제출한다. 보다 적극적으로 말해, 필자는 전노투의 흥망성쇠에 개입할 의사가 없다. 또한 (이것 역시 ꡔ현장노동자ꡕ의 감정적이고 즉자적인 서술이 갖는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필자는 “투쟁체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을 회의체로 끌어내리”는 재주도, “제대로 된 투쟁체로 기능할 수 있도록 전노투라는 단위를 이끌”2) 능력도 없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ꡔ현장노동자ꡕ가 혁명정당 건설과 관련한 필자의 견해를 왜곡하고 있으며 이를 바로 잡을 권리가 필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ꡔ현장노동자ꡕ가 필자에게 던진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할 필요를 느끼기 때문이다.

“필자에게 묻고 싶네요. 혁명정당은 어떻게 건설할 수 있는 것입니까? 구체적으로 현 단계 남한의 계급투쟁 지형과 제세력의 역관계 속에서 어떻게 만들어 나가야 할까요?”3)



왜곡에 대한 몇 가지 사실 확인


ꡔ현장노동자ꡕ가 필자에게 던진 질문에 답하기 전에, ꡔ현장노동자ꡕ가 필자에게 가한 왜곡을 밝히기 위해 몇 가지 간단한 사실 확인을 먼저 하겠다.


(1) ꡔ현장노동자ꡕ는 “전노투가 혁명정당의 대체물로 기능하거나 혁명정당으로 발전하기를 결코 기대하지 말라고? 전노투 가맹 단위 중 그런 기대를 하는 단위는 아무도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왜 이런 설정을 하는지 모르겠군요”라고 말한다.

필자가 없는 사실을 뜬금없이 제기한다는 말투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첫째, 필자는 “전노투 가맹 단위”들이 그런 기대를 하고 있다고 말한 바 없다. 전노투에 대한 전투적 그룹들 간의 논의 중에 그러한 견해들이 제기됐다고 했을 뿐이다. 보다 정확히 필자는 “전투적 그룹들은 전노투의 전망을 당이 부재한 현 상황에서 당의 대리물 또는 당 운동의 발전과정에서 ‘과도적 기구’로서 세우고 싶어 한다”4)라고 말했다. 전노투의 모든 가맹 단위들이 전투적 그룹이라고 생각하거나 또는 전노투에 참가하지 않은 단위들은 전부 전투적이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 필자의 “전투적 그룹들”이라는 표현을 “전노투 가맹 단위”로 바꿔치기 하여 논지를 펼치는 ꡔ현장노동자ꡕ의 태도는 정당하지 못하다.

둘째, 전노투가 혁명정당의 대리물 또는 당 운동의 발전과정에서 ‘과도적 기구’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기대와 견해가 있었음은 필자의 창작물이 아니다. 필자는 「전노투를 둘러싼 몇 가지 논쟁에 대해」에서 이와 관련된 견해들을 인용하고 그 출처를 밝혀 놨다.

“왜 이런 설정을 하는지 모르겠군요”라고 말한 ꡔ현장노동자ꡕ 자신이 「전노투는 확대되어야 한다!」는 글에서 “전노투는 모든 생존권 방어 투쟁들에 앞장서고 계급적 연대투쟁의 기치로 복무함으로써만이 전노투를 상층의 특정 정파에 반대하는 블록으로 추락시키거나 폄하하려는 내외의 종파주의적 기도를 배격할 수 있다. …… 현 시기 노동운동의 위기를 돌파할 ‘투쟁하는 당’이 필요하다. 지금 그런 투쟁 당이 없으면 전노투라도 대신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2) ꡔ현장노동자ꡕ는 “자기 정파의 성장을 우선시 하는 종파주의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려면, …… 전노투가 혁명정당으로 발전하기를 기대할 수도 없겠지만, 현존 특정 정파가 혁명정당으로 발전하기를 기대하는 건 더 터무니없는 것 아닌가요”5)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 필자가 “자기 정파의 성장을 우선시 하는 종파주의”, “현존 특정 정파가 혁명정당으로 발전하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듯한 뉘앙스를 전달한다.

필자가 갖고 있는 당 건설과 관련된 견해가 “자기 정파의 성장을 우선시 하는 종파주의”인가 하는 것은 관점과 입장의 문제이므로 굳이 여기서 왜곡이라고 말하진 않겠다. 토론해 보자. 그러나 필자가 “현존 특정 정파가 혁명정당으로 발전하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말은 명확한 사실왜곡이다.

필자는 「전노투를 둘러싼 몇 가지 논쟁에 대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또한 필자는 현재 좌파간의 정치적, 정서적 이질성이 쉽게 극복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좌파질서가 장기간 존속되리라고 보지도 않는다. 좌파 운동의 약화, 운동 상황의 급격한 변화, (몇몇 지도급 소수를 제외한) 좌파 활동가들의 세대교체, 망각의 시간 등이 좌파운동질서 구축의 새로운 틀을 형성할 것이다. 민노당 내 좌파냐 반(半)민노당 좌파냐, 사회당 계열이냐 아니냐, 과거 민중주의의 계보를 잇고 있는가 아니면 비합주의 계보를 잇고 있는가, 지난 시기 조직간 실천적 반목 등이 좌파운동의 갈등과 그룹화의 결정적 요소로 작용했던 시기가 지나가고 있다. 새로운 실천적 경험과 이념적 논쟁이 보다 중요한 요소로 등장할 것이다.”

필자는 현재의 좌파 질서가 장기간 존속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말은 좌파 운동이 머지않아 당운동으로 재편되리라는 말이 아니다. 약화 속에서 기존 좌파 질서의 각 그룹들이 붕괴와 소멸, 분리와 통합, 신생이라는 과정을 겪으면서 서유럽 형태로 변화하는 정치지형과 운동 상황에 적응해가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필자가 관계하는 운동까지 포함하여 모든 조직과 그룹들에 다 해당한다. 또한 필자는 뒤에서 밝히겠지만, 남한에서 혁명정당의 건설이라는 것이 결코 짧지 않은 미래의 문제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현존 특정 정파가 혁명정당으로 발전하기를 기대”한다니? 어떤 현존 특정 정파가 5년 뒤, 10년, 20년 뒤에도 변화 없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런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한테 “현존 특정 정파가 혁명정당으로 발전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것은 진짜 “터무니없는 것 아닌가요.”


(3) ꡔ현장노동자ꡕ는 필자에게 “혁명정당이 아니면 회의체라? 참으로 빈곤한 이분법이군요.”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필자는 “혁명정당이 아니면 회의체”라고 말한 적이 없다. 필자가 말한 것은 전노투가 혁명정당의 대리물로 기능할 수 없다. 전노투가 현실적인 무엇인가로 기능하기를 원한다면, 전노투에 대한 과도한 기대를 버리고 우선 소통과 교류, 협의적 사업집행이라는 회의체적 성격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 전노투에 대해 혁명정당과 관련지어 과도한 기대를 갖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비현실적이며 현실적으로 전노투는 회의체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필자의 말이 어떻게 “혁명정당이 아니면 회의체”라는 도식으로 들리는지 이해할 수 없다. 전노투가 회의체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혁명정당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다. 반대로 전노투의 회의체를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 혁명정당의 전망과 무관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ꡔ현장노동자ꡕ의 양효식 동지는 필자에게 비난을 가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다른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어떻습니까? 모두 공동투쟁의 대의를 부정하지는 않으면서도 실제로는 많은 단위들이 회의나 참석하는 수준으로 결합하고 있습니다. 이는 많은 조직이 자신의 핵심 역량을 파견하지 않고 있다는 데서도 단적으로 나타납니다. 실질적인 공투체가 못 되고 회의체로, 그것도 아무 무책임한 회의체로 전락되고 있는 것입니다.”6)

ꡔ현장노동자ꡕ의 양효식 동지한테는 왜 전노투가 회의체에 불과할까요? 그것은 혁명정당이 아니기 때문에 나타나는 “참으로 빈곤한 이분법”의 결과입니까? 아닐 것이다. 그것은 전노투의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양효식 동지와 필자의 차이는 그 현실이 극복될 수 있는 것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일 뿐이다.

양효식 동지나 필자나 현재 전노투가 회의체, 그것도 무기력한 회의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필자는 전노투가 회의체라는 현실을 극복하기 힘들며 혁명정당과 관련짓는 기대심리는 더욱 허망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혁명정당 아니면 회의체라는 “참으로 빈곤한 이분법”인가? ꡔ현장노동자ꡕ의 이러한 논쟁 태도는 사회주의자로서 “참으로 빈곤한” 것이 아닌가?



“그러면 혁명정당은 평생 구경 못해 볼 것입니다.”


얼마 전 사정연 주체 토론회에서 당 건설의 전망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고 한다. 패널 중 한 명이 남한 사회주의운동의 현실은 1883년 <노동해방단>과 같으며 러시아에서 당건설이 그로부터 20년 걸렸듯이, 남한에서도 그만큼의 선전·선동·조직 사업의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한다.

이 논지에 따르면 혁명정당 건설은 우리 운동의 당면 과제가 아니며 결코 짧지 않은 미래의 문제이다. 그날 토론회에 같이 참석했던 ꡔ현장노동자ꡕ가 이 발언에 대해 어떻게 논평했는지는 듣지 못했다. 그러나 필자에게 “당 건설을 막연한 전망으로 돌릴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라고 따지는 것을 보면 내키지 않은 견해였을 것이다.

필자는 남한 사회주의운동의 현실을 1883년 러시아의 <노동해방단>과 비교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주의운동이 민중주의운동으로부터 이념적으로 분화하던 1990년 초반 당시에도 1883년 <노동해방단>은 우리의 현실 좌표로서 이야기됐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토지와 자유당>이라는 혁명적 인민주의로부터 이제 막 과학적 사회주의 이념으로 분화하여 그 이념의 씨앗을 뿌리고 개척할 <노동해방단>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는 사실과 무관하게) 1883년과의 대비는 자주 있어왔다. 1990년대 초반 우리가 1883년 <노동해방단>을 말하고 벌써 10여년의 세월을 넘어섰다. 그러나 우리 운동의 현실은 페테르부르크에서 전투적인 노동자 대중투쟁이 분출하던 1896년과 다르다. 오히려 남한 노동자운동의 현실은 역방향을 취하고 있다. 전투적인 대중투쟁은 개량적 관료들에 의해 통제되고 하강하고 있다.

그러나 혁명정당 건설이 당면 과제가 아니라는 점, 우리 운동에 있어 당 건설은 결코 짧지 않은 미래의 문제이라는 점, 현실에서 성숙하지도 않은 당 건설의 열정으로 끊임없이 이합집산하면서 운동 역량을 파괴하고 계급대중 속으로 향해야 할 역량을 헛되게 소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하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필자는 더 나아가ꡔ현장노동자ꡕ가 악담하듯이 말한 것, 혁명정당을 “평생 구경 못해 볼” 수도 있다는 것을 현실 가능성 있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미국이나 서구 유럽을 봐라. 거기에는 우리보다 더 오랜 세월 혁명정당을 준비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소규모 선전 서클 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많은 사회주의 그룹들을 볼 수 있다. 우리는 그와 다르기를 마음 속 깊이 바라고 있을 뿐, 어떻게 하면 그들과 다를 수 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준비는 되어 있지 못하다. 우리는 홉스봄이 19세기 후반 유럽 노동운동의 거대한 성장을 보는 것 같다며 찬사를 보낸 남한 노동운동의 힘에 의존해 서구와 다를 수 있다는 믿음을 간직한다. 그러나 그 서구 관찰자들에 의해 최근 남한 노동운동의 후퇴가 지난 세기 유럽의 것보다 훨씬 급격하고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평가를 인용하는 것은 기피한다.



“구체적으로 현단계 남한의 계급투쟁 지형과 제세력의 역관계 속에서 어떻게 만들어 나가야 할까요?”


ꡔ현장노동자ꡕ는 “구체적으로 현 단계 남한의 계급투쟁 지형과 제세력의 역관계 속에서” 혁명정당을 어떻게 만들어 나갈지 방안을 밝히라고 묻는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필자의 답은 “‘현 단계’ 구체적인 당 건설 방안이란 없다”이다.

“현 단계”는 당 건설 방안이 구체화될 수 있는 시기가 아니다. “현 단계”에서 사회주의 운동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향후 혁명정당 건설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장기적인 과정의 하나로 위치지울 수 있다. 하지만, “현 단계”는 구체적으로 혁명정당 건설을 논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물론 ꡔ현장노동자ꡕ는 이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답을 갖고 있다. 자신들의 답을 갖고 필자를 다그치고 있는 것이다. ꡔ현장노동자ꡕ는 자신들의 답을 ꡔ현장노동자ꡕ발간 제안서를 통해 제출한 바 있다.

ꡔ현장노동자ꡕ는 현 남한 노동운동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본은 이들 기회주의 운동세력의 투쟁회피와 타협주의와 노사협조 아래 노동과정을 폭력적으로 통제하고 지배하였다. …… 노조관료․기회주의 세력의 협조가 아니었다면, 이와 같이 자본이 대공장에서 구조조정을 관철하고 현장 질서를 재편하는 것이 그토록 단시간 내에 거침없이 이루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 이와 같이 ‘노동운동 위기’의 근원은 기회주의 세력이 지배하는 대공장 현장의 운동질서이다. 그리고 98년 이래 생존권 사수투쟁 속에서 최악의 내부 장애물이었던 노조관료․기회주의 세력과의 투쟁이라는 과제를 올바로 수행해내지 못한 전투적 선진노동자와 혁사주의자들의 무능력이 또한 위기의 본질이다.”7)

자본가들은 기회주의 운동세력의 협조 아래 현장을 장악했다. ‘노동운동 위기’의 근원은 자본가들과 기회주의 세력에 의해 지배되는 대공장 현장의 운동질서이다. 그리고 “대공장에서 전투파 선진노동자들이 하나의 세력으로서는 더는 소멸하여 각기 고립되고 원자화되어”8) 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주의자들에게 주어지는 긴급한 과제는 “현장사업으로부터의 퇴각”이 아니라,

“ …… 오히려 노조관료․기회주의 세력에 대당하는 현장사업의 주체로서, 전투파로서, 대공장 비정규직 투쟁의 주도세력으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장의 이 모든 전투적 흐름을 창출하고 선도하는 집단적 선전선동가이자 조직가로서 전면에 나설 것 …… ”9)

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시기 혁사주의자들이” (현장에서) “전술주체로 자기정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 시기 혁사주의자들이 전술주체로 자기정립”하지 않고서는, “총파업 철회와 잠정합의 등의 관료적 배신을 뚫고 대중투쟁을 이끄는 전투정당은 결코 건설되지 못할 것”이다.


필자는 이 모든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현 시기 사회주의자들은 현장사업으로부터 퇴각해서는 안 되며 현장에서 전술주체로 자기정립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이것은 현 시기 대단히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나 현 시기 사회주의자들이 어떻게 현장 전술주체로 자기 정립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필자는 ꡔ현장노동자ꡕ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ꡔ현장노동자ꡕ가 지나치게 ‘반관료 투쟁’에 매몰되어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잠시 뒤에 다루자.


그런데 이것이 “현 단계” 구체적인 당 건설 방안인가?

“현 시기 혁사주의는 스스로를 현장의 전술주체로 정립해야 한다. 혁사주의자의 전술주체로서 자기정립은 특별히 지금 시기만의 과제는 물론 아니며, 정세와 관계없이 항상적으로 지향해야 할 과제이다. 그러나 현 시기 대공장 기회주의 운동질서가 전체 노동운동을 좌우하고 있고 현장의 전투파 세력이 소멸되어 버린 상황에서는 이 과제가 특히 강조되어 마땅하다.”10)

“현장의 전투파 세력이 소멸되어 버린 상황에서” “특히 강조되어 마땅하”나 이것은 ꡔ현장노동자ꡕ가 말한 것처럼 “특별히 지금 시기만의 과제는 물론 아니며, 정세와 관계없이 항상적으로 지향해야 할 과제”일 뿐이다.

특히 “혁명정당을 관념적인 이상형 같은 것으로 만들지” 말고 생각했을 때, 혁명정당이란 사회주의 의식으로 각성한 선진노동자들의 결사체이다. 1996년 말 총파업이후 구조조정 투쟁기까지 우리는 현장조직운동으로 발현된 선진노동자운동을 사회주의라는 대자적 계급의식으로 획득하기 위해 (잘 했든 못 했든) 분투했다. 그런데 그 “현장의 전투파 세력이 소멸되어 버린 상황에서”, “대공장에서 전투파 선진노동자들이 하나의 세력으로서는 더는 소멸하여 각기 고립되고 원자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전술주체로의 자기정립이란 (“현단계” 구체적인 당 건설 방안이 아니라, 당 건투의 토대가 될) 새로운 선진노동자운동을 형성해내기 위한 과제이다.


ꡔ현장노동자ꡕ는 “혁사 세력과 전투파 및 선진노동자운동은 뜨면 같이 뜨고, 가라앉으면 같이 가라앉는 ‘공동운명체’”라고 말한다. 맞다. 동의한다. 그런데 ꡔ현장노동자ꡕ는 이 명제로부터 다음과 같이 나아간다.

“전투파와 선진노동자운동을 통하지 않고서 혁사 세력이 현실의 계급투쟁과 대중운동에 개입하고 지도를 관철할 다른 수단은 없다. 기회주의와의 투쟁을 매개로 전투파와 선진노동자운동을 되살려내야 한다.”11)

이것은 “대공장에서 전투파 선진노동자들이 하나의 세력으로서는 더는 소멸하여 각기 고립되고 원자화되어 있”다는 상황 개괄과 모순된다. 기회주의와의 투쟁을 매개로 하든, 아니면 다른 무엇을 매개로 하든 전투파와 선진노동자운동을 빠른 시일 내에 “하나의 세력으로서” 되살려낼 방법은 없다.

최근까지 존재했던 선진노동자운동은 30대 중반에서 40대 중반의 연령층을 갖고 있는 구체적인 하나의 세대이다. 이들은 70년대 이후 민주노조 건설투쟁의 역사 속에서, 87년 대투쟁의 산물로써 형성된 층이다. 이들은 80년대 초중반부터 민주노조 건설투쟁에 참여해 온 사람이거나 87년 대투쟁의 영광 속에서 운동에 뛰어든 사람, 또는 90년대 초중반 민주노조운동의 뜨거운 열정이 식기 전에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다. 현재 이들의 의식은 현실주의와 합리주의에 깊게 젖어 들어있다. 대개 이들은 다시 혁명의 꿈을 꾸기에는 노동운동의 관성적 정치에 닳고 닳았거나 늙고 지쳐있다. 70년대 이후 민주노조운동은 운명을 다하며 자신이 낳은 산물들을 무덤 속으로 갈무리하여 순장(殉葬)하고 있다.

이에 반해, 20대에서 30대 초반 새로운 운동 층은 형성되고 있지 않다. 또한 비정규직 운동을 중심으로 새롭게 형성되는 대중투쟁은 너무 약하고 불안정하며 여기에도 기회주의의 영향력은 강화되고 있다. 새로운 선진노동자운동을 형성하는 데는 장기적이고 끈질긴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지난 시기 “전투파와 선진노동자운동을 통하지 않고서 혁사 세력이 현실의 계급투쟁과 대중운동에 개입하고 지도를 관철할 다른 수단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노운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자 했다. 그런데 “하나의 세력으로서” 선진노동자운동은 소멸했다. 이제 사회주의자들이 직접 현장에 들어가고 대중활동가로 거듭나고 이를 통해 “전술주체로 자기정립”하는 것 외에 “현실의 계급투쟁과 대중운동에 개입하고 지도를 관철할 다른 수단은 없다.”

그래서 ꡔ현장노동자ꡕ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근거 있는 것이다.

“정세는 혁사주의자가 더욱더 야전으로 나아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12)

다시 말해, 혁명정당은 사회주의 의식으로 획득된 선진노동자들의 결사이다. 그런데 사회주의 의식으로 발전, 획득되거나 재편될 선진노동자운동이 없다. 이제 다시 사회주의자들은 팔을 걷어붙이고 대중 속으로 들어가 대중 속에서 새로운 선진노동자운동을 만들어내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그랬을 때, 당 건설은 “현단계” 구체적인 문제로 대두될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당 건설을 위해 계급운동의 토대를 재형성하는 것이다.

ꡔ현장노동자ꡕ가 말했듯이, “혁사 세력과 전투파 및 선진노동자운동은 뜨면 같이 뜨고, 가라앉으면 같이 가라앉는 ‘공동운명체’”이다. “전투파 선진노동자들이 하나의 세력으로서는 더는 소멸하여 각기 고립되고 원자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사회주의 혁명정당의 건설을 논의한다는 것은 희극이다. 선진노동자운동이 거대하게, 그리고 강하고 전투적으로 재형성됐을 때 우리는, 혁명정당 건설을 구체적인 일정으로 올릴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주어지는 문제는 어떻게 선노운동을 새롭게 재형성해 낼 것인가? 그리고 그 운동의 의식과 전망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이다.



1925~26년 영국 평조합원 운동의 교훈과 사회주의 독자성이라는 문제


필자는 “혁사 세력과 전투파 및 선진노동자운동은 뜨면 같이 뜨고, 가라앉으면 같이 가라앉는 ‘공동운명체’”라는 ꡔ현장노동자ꡕ의 주장에 동의했다. 그러나 이 명제가 의미하는 것은 사회주의 운동의 발전과 쇠퇴는 선진노동자운동의 발전과 쇠퇴에 비례한다는 것, 사회주의 혁명정당이 노동계급운동과의 교호(交互)관계없이 마치 제우스의 머리에서 탄생한 아테네처럼 발생할 수 없다는 것, 계급의 전위로서 사회주의는 노동계급에 비해 열 발 앞서 갈 수는 있지만 (스탈린의 사고처럼) 당이 그 자체로 진리의 구현체로 등장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측면에서 위 명제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이것이 더 나아가 사회주의가 선진노동자운동을 포함하여 노동계급운동으로부터 독립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사용된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다. 그런데 ꡔ현장노동자ꡕ는 그러한 위험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고 있다.

필자는 언젠가 다음과 같은 평가를 제출한 적이 있다. 지난 시기 사회주의 운동은 전투파 재편에 자신의 모든 역량을 올인한 나머지 자신의 독립적인 선전선동, 조직화 사업의 과제를 유실해왔다. 그 과정에서 사회주의 운동은 자신의 중심을 잃고 선진노동자운동을 사회주의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투적 조합주의의 강한 흡입력에 딸려 들어갔다.

ꡔ현장노동자ꡕ는 여기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한다.

“‘선진노동자운동은 조합주의이므로 이로부터 사회주의의 독립성을 확보하자’는 유치하고 종파적인 논리 하에 써클 내부의 이데올로기 강화 작업으로 움츠려드는 것은 현 시기 혁사주의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경향이다. 이것은 종파주의와 써클주의와 선전주의의 질병을 격화시킬 것이며 종국에는 혁사 세력의 고사로 이어질 것이다.”13)

ꡔ현장노동자ꡕ는 전투파 운동의 조합주의적 성격과 사회주의의 독자성을 확보할 필요를 부정한다. 그런 것은 “유치하고 종파적인 논리”이며 “종파주의와 써클주의와 선전주의의 질병을 격화시”켜 결국에는 “혁사세력의 고사로 이어질 것이다.” ꡔ현장노동자ꡕ는 「혁명정당이 아니면 회의체라?」라는 글 이전부터, 필자에게 “종파주의”라고 비난을 가해왔다. 사회주의의 독자성을 주장하는 것은 극도의 “종파주의와 써클주의와 선전주의”이다.


그런가? 그런데 선배 혁명가들은 다르게 말한다.

“기회주의적 오류와 편향의 사회계급적 원천과 정치적 원인이 무엇이든 항상 이러한 오류와 편향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분석하면 혁명정당에 대한 잘못된 이해, 그리고 혁명정당과 기타 노동계급조직 및 계급 전체의 관계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집약될 수 있다. 노동계급전위로서의 당 개념은 당의 모든 조직들로부터의 완전하고도 무조건적인 독자성을 전제로 한다.”14)

ꡔ현장노동자ꡕ가 “종파주의와 써클주의와 선전주의의 질병”이라고 부르는 그것이 올바른 것이며 오히려 ꡔ현장노동자ꡕ처럼 “당의 모든 조직들로부터의 완전하고도 무조건적인 독자성을 전제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모든 기회주의적 오류와 편향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트로츠키는 우리의 현장조직운동과 자주 대비되어온 영국의 평조합원 운동을 평가하는 가운데 이 교훈을 다시 한번 추출한다. 트로츠키는 “1925~26년 영국총파업 과정을 명확히 이해하지 않고는 공산주의운동 일반, 특히 좌익반대파는 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 없”다고 말한다.

트로츠키에 의하면, 1920년대 평조합원 운동은 스탈린의 “피상적 조급성, 당의 영향력이 서서히 성장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결여” 등 기회주의적 심리에 의해 실패했다. 소련의 세계적 고립 속에서 무언가 빠른 성과를 보고자 했던 스탈린은 “허약한 영국공산당”에 만족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거의 1백만 노동자를 포괄했던 평조합원 운동은 아주 희망적으로 보였으며 스탈린은 (지난 시기 우리 운동이 소규모 선전 서클을 전투적 현장조직운동으로 대체했듯이) “허약한 영국공산당을 ‘더 광범위한 조류’” 즉, 평조합원 운동으로 대체했다. 이를 위해 “영국공산당은 모든 독자성을 박탈당해야” 했으며 “평조합원 운동 즉, 노동조합 내 좌파로 해소”돼야 했다.

그러나 전투적 조합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평조합원 운동은 “그 자체에 파괴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평조합원 운동의 발전이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와 충돌하자 평조합원 운동의 지도자들은 “비겁하게도 배반했다.”

“그러자 혁명적 노동자들은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운동 자체에 실망하고 이 실망감을 자연스럽게 영국공산당에게로 확대시켰다. 영국공산당은 이 배신과 사기극의 전 과정에서 수동적인 방관자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평조합원 운동은 붕괴했다. 공산당은 별 볼일 없는 종파로 전락했다. 이렇게 코민테른의 근본적으로 잘못된 당 이론 때문에 총파업까지 상승한 영국노동계급의 가장 거대한 운동은 반동적 노조관료집단 기구에 전혀 도전하지 못했다. 이와 반대로 관료기구를 강화시키고 상당히 오랜 기간 영국공산주의운동에 해악을 끼쳤다.”15)

이러한 평조합원 운동의 진행과정에 반대하여 트로츠키와 러시아 좌익반대파는

“우선, 노동조합 내에서 영국공산당의 완벽한 독자성을 다시 확립할 것을 요구했다. 당의 독자적인 구호와 공개적인 비판을 통해서만 평조합원운동은 수립될 수 있으며, 자신의 임무를 좀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으며, 자신의 지도자를 교체할 수 있으며, 공산주의의 진지를 강화시키면서 노동조합 내에 자신을 강력히 구축할 수 있다는 입장을 우리는 명확히 제출했다.”16)

그런데 좌익반대파의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 스탈린이 보인 반응은 ꡔ현장노동자ꡕ가 필자나 사회주의운동의 독자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다른 동지들에게 보인 태도와 동일하다. 현실 운동과 단절하려 한다고 모함하고 종파주의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스탈린, 부하린, 로조프스키 일당은 이런 반응을 보였다: “당신네들은 영국공산당을 종파주의의 길로 몰고 가려한다. 또한 퍼쓸, 힉스, 쿡을 적의 진영으로 몰아가고 평조합원운동과 단절하려고 한다.””17)

트로츠키는 1925~26년 영국 평조합원 운동이 실패한 이유는 “피상적 조급증, 당의 영향력이 서서히 성장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결여”라고 말한다. 우리 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한번에 노동조합 관료주의를 누르고 일거에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피상적 조급증”, 혁명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서서히 성장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결여”, 그리고 “서서히 성장”해 나가기 위해 대중 속으로 들어가고 대중활동가로 성장하는 가장 기초적인 활동부터 충실히 해 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무능력한 바보들의 답답한 종파주의라고 보는 관점, 스스로의 힘을 키워나가려 하기 보다는 한 판 크게 벌여 성공하기 위해 “개인적 외교술을 통해 대중을 획득하려는 욕구” -- 이런 기회주의적 심리가 우리 운동을 거듭 실패로 몰아가고 있다.

이러한 기회주의적 심리는 결국 조직적인 토론과 결정보다 대중적 영향력 있는 활동가와의 밀약을 중시하게 하며 소규모 사회주의 조직의 선전선동과 조직화 사업은 대규모 전투파 운동을 재편하기 위한 활동에 비해 유치하고 별 볼 일 없는 것이라는 생각, 유치하고 별 볼 일 없는 것에 매어 있기 보다는 전투파 운동의 재편과 대중투쟁에 올인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생각, 결국 사회주의의 독자성에 대한 부정으로 나아간다. 사회주의가 대중운동에 대한 전술 지도를 잘 하기 위해서도, 독자적인 선전선동과 이데올로기 사업 그리고 계급대중 속에 독자적인 조직망을 구축하는 사업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우리의 주장은 이들한테는 유치하고 현실에서는 별 볼 일 없는 써클적 운동에 몰두하는 종파주의이다.

우리는 전투파 운동과 단절할 생각이 없으며 정세의 요구에 따라 노동조합 내 제세력과 공동행동을 조직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공산당은 노동조합 내에서조차 완벽한 독자성을 유지해야 한다; 모든 원칙적 문제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행동해야 한다; 필요할 때마다 ‘좌파’ 동맹자들을 비난해야 한다; 이것을 통해 서서히 대중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그러나 이 유일하게 가능한 길은 코민테른 관료들에게는 너무 멀고 불확실하게 보였다.”18)

그리고 ꡔ현장노동자ꡕ와 우리 운동의 많은 동지들에게도 “이 유일하게 가능한 길은” “너무 멀고 불확실하게 보였다.” 이들의 시각에서 봤을 때, 볼세비키 전통은 “유치하고 종파적”이며 “써클주의와 선전주의의 질병을 격화시”키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뭐라 하든 볼세비키 전통과 교훈을 따를 것이다.


우리는 선진노동자운동을 새롭게 만들어내야 한다. 이를 통해 당 운동의 토대를 다시 구축하는 장기적이고 고통스러운 길을 가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계급대중 속으로 들어가야 하며 현장 전술주체로 자기 정립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올바르게 수행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어떠한 현장 전술주체인가? 노동계급운동을 사회주의로 이끌고 지도하기 위한 전술주체인가 아니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대중운동 속에 매몰된 전술주체인가? 사회주의와 대중 간에 직접적인 관계를 확립하지 못하고 전투파 운동에 파묻혀서 그 운동의 한계와 실패의 오욕을 같이 뒤집어 써야 하는가 아니면 사회주의운동의 독자성을 유지하고 그 활동방식을 계발할 것인가?


1925~26년 영국 평조합원 운동이 실패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96년말 총파업 이후 구조조정 투쟁기까지 전투적 현장조직운동의 실패를 발 딛고 있다. 트로츠키는 “영국에서 당을 평조합원 운동에 종속시키는 등등의 정책은 피상적인 혁명적 조급성으로 시작되어 기회주의적 배신으로 끝나는 관료적 협잡의 현상”이라고 말했다. 우리 운동 역시 사회주의운동을 현장조직운동에 종속시켰다. 그것은 분명 “피상적인 혁명적 조급성”의 산물이다. 그러나 우리 운동에서 그것은 “관료적 협잡의 현상”은 아니다. 순수하게 혁명적 조급성이라는 유아적 심리가 가져온 오류일 뿐이다.

우리는 이 오류를 극복하고 새로운 선진노동자운동을 창출할 것인가 아니면 지난 시기의 미망(迷妄) 속에 헤맬 것인가?



1970년대 영국 평조합원 운동과 SWP


1970년대 영국 평조합원 운동과 그에 대한 SWP의 전략은 1990년 중후반 이후 남한 노동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맑스는, 헤겔을 인용하면서, 역사는 두 번 반복하는데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소극(笑劇)으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좀 다르다. 역사적 경험을 올바르게 평가하고 깨닫지 않는 이상, 비극으로 끝난 역사는 소극으로 몇 번에 걸쳐서건 다시 반복되기 마련이다. 남한에서 평조합원 전략 역시 몇 회에 걸쳐 리바이벌되는 소극 중 하나로 나타났다.


남한에서 평조합원 전략은 현장조직운동의 전략적 전망으로 제출됐었다. 노조관료주의에 맞서 현장조직운동을 대중투쟁기관으로, 더 나아가 대체권력기관으로 발전시킨다는 전략은 대중투쟁의 퇴조와 정세의 부침에 따라 다양한 변이를 가져왔다. 그러나 알랙스 캘리니코스가 로조프스키의 다음 사상이 평조합원 전략의 모태가 됐음을 인정하듯이, 평조합원 전략은 (남한에서도) “적색” 노조론의 독특한 변이이다.

“영국에 관한 한, 당이 자신의 소규모 당 중핵 안에서만 자신의 세력을 조직하는데 만족한다면, 이것은 재앙을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명확히 알고 있다. 여기서 목표는 더 큰 규모의 비(非)제도권 노동조합 운동을 만들어 내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공산당 그룹들이 비제도권 분자들을 결속시킬 초점으로 기능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여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비제도권 세력을 만들어 내고, 배치하고 통합시키는 것이어야 하며, 공산당은 그 자체가 비제도권의 성장과 나란히 성장할 것이다.”19)

제도화된 노동조합운동에 비(非)제도권 노동조합운동을 대치시킨다 -- 지노비에프와 스탈린 체제 하에서 “적색” 노동조합운동을 이끈 로조프스키의 위 주장을 보면 「‘비제도권 노동운동’ 건설을 위하여」 의 모티브가 어디로부터 주어졌는지 확연히 알 수 있다.


트로츠키는 “적색” 노동조합론에 대한 유혹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제국주의시대에 접어들면서 세계자본주의체제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쇠퇴한 영국의 자본주의는 노동조합이 개량투쟁을 할 수 있는 기반을 갉아먹었다. 노동계급의 생활수준을 하락시키는 것을 통해서만 자본주의는 유지될 수 있다. 이 상황에서 노동조합은 혁명을 위한 조직이 되지 않으면 더욱 가혹한 노동착취를 돕는 자본의 하수인이 되어야 한다. 노동조합 관료층은 자본이 남겨준 떡고물로 자신의 사회적 문제를 만족스럽게 해결했기 때문에 후자의 길을 택했다. 이들은 노동조합의 축적된 권위를 전부 동원하여 사회주의혁명을 저지했고, 자본과 반동의 공격에 대한 노동자들의 투쟁도 가로막았다. …… 이 상황에서 퍼뜩 이런 생각이 든다: 노동조합을 빼고 혁명투쟁을 하는 방법은 없을까? 혁명적 노동조합, 직장위원회, 소비에트 등 신선하고 오염되지 않은 대중조직으로 노동조합을 대체할 수는 없을까?”20)


유사하게 직장위원회를 통한 평조합원 운동 또는 현장조직운동을 통해 노동조합을 대체해 나가고자 하는 이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노동조합은 대중투쟁기관으로서의 성격을 잃어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관료주의자들의 영향력 아래 대중투쟁을 억압하는 기관이 되어가고 있다; 노동계급의 생존권은 위협받고 있다; 그러나 개량주의적 노조관료주의자들이 지배하는 노동조합은 투쟁을 회피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생존권 사수투쟁을 회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대안은 평조합원 운동 또는 현장조직운동을 새로운 대중투쟁체로 조직하는 것밖에 없다.


평조합원 전략의 주창자들은 자신들의 견해가 “적색” 노조론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이유로 자신들이 다음과 같은 단서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노조 관료들이 노동자들을 올바로 대표하는 한 그들을 지지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노동자들을 올바로 대표하지 않는 즉시 독립적으로 행동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이론의 출발점이 노조 관료는 필연적으로 노동자들을 올바로 대표할 수 없다는 것21)이었음을 교묘하게 잊고 있다.


“노동자들이 수행하는 투쟁, 심지어는 현존 체제로부터 단순히 개량을 빼앗아 내려는 투쟁조차도 체제의 안정성을 위협할 수 있다. 그리하여 거듭 조합 지도자들은 이러한 투쟁이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막고 조합원의 열망에 턱없이 못 미치는 수준에서 투쟁을 끝내기 위해 관여한다. 이러한 배반은 일반 노동자들 사이에서 분노를 불타오르게 하고, 이것은 특정한 조건에서(……) 관료들과는 독립적으로 싸우는 평조합원 조직들을 탄생시킨다.”22)

이들이 “적색” 노조론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단서’는 차별성을 입증하는 ‘단서’로써 기능하지 못한다.23) 직장위원회 운동에 그 전국적 연합질서를 형성하든, 현장조직운동을 ‘전국투사동맹’으로 결집시키든, 그 전략노선은 다수의 대중으로부터 선진적인 노동자들의 운동을 분리시킨다는 점에서 “적색” 노조론과 동일한 성격을 갖는다. 당장의 투쟁의 요구로부터 독립된 행동이 필요하고 선진 분자들의 선도적 투쟁은 필연적으로 대중의 역동성을 일깨워 전면적인 대중투쟁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주장이 오류임은 지난 시기를 통해 들어났다. 그것은 대중 속에서, 대중을 투쟁으로 결의시키는 지난하고도 끈질긴 과정을 못 견뎌하는 유아적 심리의 산물이다.


평조합원 전략은 영국에서도, 남한에서도 실패했다. 알랙스 캘리니코스는 그 주된 원인을 평조합원 전략이 적합하지 않은 조건에서 도입됐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24)

영국에서 직장위원회 운동은 1950년대와 60년대 호황기 동안 완전고용이라는 조건을 이용하여 노동자들이 그들의 생활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한 투쟁으로 발생하여 성장·번성했다. 그러나 1970년 초 세계적 공황과 맞물려 직장위원회에 대한 공격과 포섭이 진행됐다. 정부는 노사관계 안정을 위해 직장위원 활동을 지원하는 정책을 주도했고 1975년에는 직장위원에 대한 경영의 지원을 의무화하는 법을 제정했다. 자본 역시 신기술도입, 유연임금제 도입 등의 교섭 파트너로 직장위원을 포섭하고 양성화했다. 이에 따라 1970년대 직장위원 운동은 양적으로는 급속도로 팽창했으나 대중투쟁과 전투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반대로 작용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알랙스 캘리니코스는 1974년 이후 직장위원회 운동에 기반한 평조합원 전략은 사실상 부적합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남한에서도 동일하다. 1990년 중반 사회주의자들의 토론 결과 입증된 것처럼 남한에서 평조합원 운동의 성격을 갖는 대중운동은 민주노조운동이다. 민주노조운동은 기업별 노조를 강제한 지배계급의 전략과 운동지형으로 인해 직장위원회 운동으로 등장했다. 이것은 1990년대 후반까지 조직적으로는 강화됐지만, 90년대 초반 이후 합법화와 포섭, 전투성의 상실로 나아갔다. 1992년 대공장에서 신경영전략이 도입되고 ‘현장권력’을 빼앗기고 있다는 평가가 돌던 그 시점에서 남한 역시 (알랙스 캘리니코스 식으로 말하자면) 평조합원 전략을 적용할 조건은 사라졌다. 남한 민주노조운동이 형식 그 자체에서 직장위원회적인 형태로 보다 강화된 시점은 90년대 중반 이후이다. 대소위원체계는 대중투쟁이 정점에 올라있던 80년대 후반이나 90년대 초반이 아니라 90년대 중반 이후 발전되고 안정화됐다. 그리고 정부는 97년 ‘근로자 참여 및 협력 증진에 관한 법률’ 제정을 통해 대의원들에게 일상적인 교섭권을 제도적으로 부여했다. 자본은 대의원체계와 맞물린 노사협의회를 통해 신기술도입, 텍타임 조정, 작업공정의 변경 등에 대한 교섭을 진행하고 있다. 크게 네 개의 분기로 나누어 진행되는 노사협의회는 단체교섭투쟁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현재 노조 집행관료와 대의원 중에 어디가 더 계급적이냐 하는 질문은 부르주아 국가에서 행정부와 의회 중 어디가 더 근로인민의 이해를 대변하는 기관이냐 하는 질문과 동일하게 어리석다.25)여하튼 남한에서는 민주노조운동이 합법화, 관료화, 체제내화되는 것에 대한 반동으로 현장조직운동이 부각됐으며 여기에 평조합원 전략이 부여됐다. 남한에서는 평조합원 운동이 붕괴하는 상황에서 평조합원 운동의 대안으로 평조합원 전략이 제시된 꼴이다.


알랙스 캘리니코스는, 혼란스럽지만 생생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오늘날의 평조합원 운동」이라는 문서를 통해 평조합원 운동과 발전과 후퇴를 같이 한 1970년대 SWP의 역사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영국 IS는 1940년대 후반 제4인터내셔널에서 분리하여 1960년대 초반까지 200명 규모의 소규모 선전서클을 넘지 못했다. 영국 IS는 1960년대 직장위원회 운동에 개입하기 시작하여 다수의 평조합원 그룹들을 형성했다. “1971년과 1974년 사이에 IS는 주로 학생 조직에서 주로 노동자 조직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것은 1973년 5월에 IS 총회가 공장 지부들을 건설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1974년 9월의 다음 총회에 이르러서 IS는 거의 4천 명의 멤버와 40개 가량의 공장 지부를 갖게 되었다. 동시에, 여러 산업부문과 조합에 있는 IS 멤버들은 평조합원 신문들을 발간하기 시작했”26)다.

영국 IS는 1975년 말 반(反)실업운동으로 ‘전국 노동권 캠페인’을 전개했다. 이 캠페인은 성공을 거두었다. ‘전국 노동권 캠페인’의 성공에 기반하여 1976년 의회 보궐선거를 앞두고 IS는 SWP를 창당했다.

그러나 1974년 이후 직장위원회 조직은 부식되고 있었다. 특히 직장위원회 운동을 이끌어 왔던 자동차 산업을 위시로 한 금속 부문에서 직장위원회 운동은 약화되고 있었으며 특히 SWP의 공장 지부들은 대부분 와해되었다. 그 와중에 ‘전국 노동권 캠페인’은 그 자체로서는 성공했지만 오히려 현장 기반의 약화를 촉진시키는 작용을 했다. 반면 화이트칼라 부문에서 평조합원 운동의 퇴조는 더디었으며 평조합원 그룹의 기반은 점차 화이트칼라 노조에 집중되었다.

“더욱이 1973년과는 대조적으로, 남아있는 평조합원 그룹들은 거의 화이트칼라 노조에 집중되어 있다. …… 전투적 활동의 틀이 직장위원회 조직이었던 금속과 부두 같은 부문들에서 침체기를 무시하기란 불가능하였다. 거의 모든 육체 노동자들의 평조합원 신문들이 붕괴한 것은 바로 여기서 비롯한 것이다. 비록 그 쇠퇴의 속도는 달랐지만 말이다. ꡔGEC 평조합원ꡕ은 강력한 GEC 연합위원회를 건설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출현한 것이었다. 다수의 지도적인 투사들이 희생의 제물이 된 이후 그 시도가 파산하였을 때 평조합원 그룹들도 또한 파산하였다. 반면, ꡔ자동차 노동자ꡕ는 투사들이 히스의 실각 이전에 이미 타격을 받은 산업에서 그들의 많은 공장 지부들이 산산이 부서진 후 한동안 SWP 멤버들에게 일종의 손쉬운 대안을 공급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조적으로 화이트칼라 노조에서는 투사들이 공식 조합 구조에 지향을 두는 경향이 언제나 꽤 컸고, 1974년 이후에 크게 강화되었다.”27)

대중의 행동력은 약화되고 있었고 이와 맞물려 현장 조직력 역시 붕괴하고 있었다. 특히 전투적인 직장위원회 운동을 이끌어왔던 자동차를 위시로 한 금속 부문에서 이 문제는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이것은 두 가지 경향을 발현시켰다.

하나는 “대신주의를 향한 유혹 -- 혁명가들, 이전 혁명가들 그리고 그들의 측근들의 아주 협소한 코커스28)를 평조합원 조직으로 취급하고 싶은 유혹 -- 이 그 결과 매우 컸다.” 평조합원 운동을 소수의 평조합원 그룹으로 대신하려는 대리주의 유혹은 선도투와 초좌익적 전술 운용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것은 대중으로부터의 고립을 강화하는 것으로 귀결됐다.

다른 하나는 금속 부문에서 현장 조직력의 약화는 인텔리 출신의 접근이 용이할 뿐 아니라 자본의 공격이 보다 덜 했던 화이트칼라 운동에 기울게 했다. 그런데 화이트칼라 부문은 “직장 조직이 취약한 부문들이며 또한 노동조합주의가 저임금의 주로 여성 사무직 노동자 대중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중간계급’의 성원들 -- 상당 부분 대졸자들로부터 충원되고 다른 노동자들에 대해 권위를 갖는 지위를 점하는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의 이질적인 집단 -- 에 의해 지배되”29)었다. 그리고 상당 부분 대졸자들로부터 충원된 ‘신중간계급’의 성원들이 “화이트칼라 평조합원 그룹들을 지배하는 경향”30)마저 강화됐다. 그리고 이들 경향으로부터 좌우 기회주의가 강하게 등장했다.


평조합원 전략과 맞물린 SWP의 역사는 우리 운동에 시사하는 부분이 많다. 우리 운동 역시 운동의 퇴조기에 겪는 질환들 -- 몇 되지 않는 사회주의자들로 구성된 모임으로 현장조직이나 여타 대중조직을 대신하며 또한 그 조직으로 대중운동을 대신하려는 경향의 오류, 선도투와 초좌익적 전술, 비합조직운동에 대한 청산주의적 태도 등 -- 을 겪고 있다는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인텔리겐챠들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운동이 노동계급운동과 결합하는 과정에서의 어려움 역시 겪고 있기 때문이다.


직장위원회 운동의 성장 속에서 “주로 학생조직에서 주로 노동자조직으로 탈바꿈”했던 영국 IS가 1974년 이후 직장위원 운동의 약화로 인해 4~5년 만에 금속 부문에서의 현장 기반을 유실한 것은 많은 고민을 안겨준다. 짧은 기간 동안 그들은 주로 블루칼라에 기반했던 40개 가량의 공장 지부들을 거의 유실했다. 그리고 원치 않게, 의식하지 못한 사이 화이트칼라 노조로 운동의 기반이 이동해 들어갔다.

우리 운동 역시 2001년 이후 현장으로부터 밀려나고 있다. 「선진노동자의 길」같이 선도적인 그룹을 제외한다면, 대체적으로 1990년대 말 구조조정 투쟁기 중반에야 선전서클에서 벗어나 현장사업을 시작했던 사회주의 그룹들은 잠시 반짝하다 만 상황이다.

우리 운동이 현장에서 밀려나는 양상은 몇 가지 측면에서 SWP와 동일하다. 대중투쟁의 고양이 가져왔던 열기가 가시면서 나약한 활동가들이 운동으로부터 이탈하고 있다; 현장조직과 선진노동자운동이 붕괴 · 변질되면서 전투적 사회주의 그룹들이 연대하고 결합했던 현장기반들이 유실됐다.


그러나 중요한 한 가지 측면에서 우리는 SWP와 다르다. SWP는 금속 부문의 현장 기반이 유실되면서 탈현장화하거나 (인텔리의 접근이 용이한) 화이트칼라 노조로 조직 기반이 이동했다; 우리는 현장조직운동이라는 정규직을 중심으로 한 선진노동자운동이 붕괴하면서 대공장 하청 비정규직운동으로 기반을 이동하고 있다.

이것은 중대한 차이이다. 이것이 196·70년대 어느 정도 생디칼리즘적이고 초좌익적이지만 전투적이라고 --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전투적 현장주의’라고 -- 평가받았던 SWP가 현재 보여주는 우익화의 물질적 토대는 아닐까? 남한 IS의 운동 기반 역시 (인텔리들의 이동성이 용이한) 민노당 운동으로 표현되는 사회적 운동이거나 사무직, 전교조, 학생 부문이다. 그리고 이 부문들은 민주노총 내 우파로 기능하고 있다. 이것과 그들 정치의 우익성과의 연관성을 부정할 수 있을까?

SWP는 직장위원회 운동이 퇴조하면서 화이트칼라 부문으로 운동기반이 이동하거나 탈현장화했다. 반면 우리는 새로운 육체노동자 운동으로 현장 기반을 이동하고 있다. 이것은 유지돼야 한다. 이것이 우리 운동의 계급성과 전투성을 보장한다. 우리는 생산직, 특히 대공장 생산직 현장 기반을 유지해야 하며 그에 기반한 ‘현장 세포’를 우리 운동의 기본 구성 -- 기본 세포 단위로 삼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당장은 현실 운동에 대한 개입력이 약한 볼 일 없는 세력으로 취급받는다고 할지라도. 이것만이 페리 앤더슨이 ꡔ서구 마르크스주의 연구ꡕ에서 보여준 사회주의의 변질의 위험을 막을 수 있다.


그렇다면 1974년 4000명의 멤버와 40개의 공장 지부로 출발했던 영국 IS가 몇 년 만에 금속 부문의 현장 기반을 유실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운동의 퇴조로 인한 활동가들의 이탈, 직장위원회 운동의 변질 등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단기간에 “주로 학생조직에서 주로 노동자조직으로 탈바꿈”했던 그들의 방식에 원인이 있지 않을까? 학생조직에서 노동자조직으로 이동함에 있어, 그 방식을 주되게 현장 취업이 아니라 직장위원회 ‘간사’라는 방식을 취하지 않았을까? 현장 취업은 그 활동가가 운동을 그만두지 않는 이상 쉽게 현장 운동에서 밀려나게 하지 않는다. 하지만 ‘간사’라는 지위는 빠르게 활동 포지션을 잡을 수 있는 반면 직장위원회라는 조직의 흥망이나 변질에 따라 쉽게 현장 운동에서 밀려날 수 있다. 또한 현장 영향력 있는 활동가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현장에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상황은 어쩔 수 없이 영향력 있는 그 활동가들을 추수하게 만든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반복되는 이러한 과정은 사회주의자 자신의 사고체계에도 대단히 부정적인 결과를 남기게 된다.31)


필자는 앞서 ‘기존 정규직 현장조직을 중심으로 한 선진노동자운동은 붕괴했다. 새로운 선진노동자운동을 형성해내야 한다. 이를 위해 사회주의자들은, 7·80년대 혁명적 민중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다시 팔을 걷어붙이고 대중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측면에서 “정세는 혁사주의자가 더욱더 야전으로 나아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주장한 ꡔ현장노동자ꡕ의 주장은 근거가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사회주의자들의 현장 취업을 의미한다.32) 사회주의자들은 현장 이전을 통해 사회주의 운동이 현장으로부터 탈각하고 있는 추세를 막고 새롭게 선진노동자운동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 포지션을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하청 노조 건투의 주역으로 나서야 한다. 또한 비정규직 노조에 존재하고 있는 사회주의자들은 무엇보다도 현장 기반 사업을 강화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성과는 ‘사회주의 현장 세포’ 건설로 나가야 한다. 그랬을 때, “현장 전술주체로의 자기정립”이라는 과제는 현실화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남한 운동에 있어서도 용이한 과제가 아니다. 1990년 초반의 퇴조기와 달리, 사회주의 운동을 받쳐줄 학생운동이 급격히 몰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반 유학생들로부터 서구에서는, 집회와 거리에서 4·50대의 68세대가 유인물을 나눠주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안타까움에 혀를 찬 적이 있다. 그런데 이제 이것이 남의 문제가 아닌 상황이 되고 있다. 조속히 학생운동 내에 현장 이전의 전망을 불어넣어야 한다. 학생운동의 고양과 좌익화는 노동자투쟁의 고양의 산물로 나타난다. 그러나 현재 노동자운동은 학생운동을 이끌 만한 상황이 못 된다. 학생운동을 고양시키는 것까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좌익화는 노동자투쟁의 고양 없이도 시도할 수 있다. 학생운동은 이데올로기의 힘에 따라 좌익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사회주의 그룹들은 (자신들의 학생파트에 맡겨두기 보다는) 보다 적극적으로 학생운동에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성장판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 학생운동에 현장 이전 전망을 불어넣어야 한다. 또한 이를 위해서는 우익들이 불어넣은 ‘예비노동자’라는 관념, 가족들과 마찰 없는 직업으로의 정상적인 취업이라는 관념과 투쟁해야 한다.

반관료 투쟁 속에서 당을 건설한다?


ꡔ현장노동자ꡕ는 자신들의 당 건설 방안을 설명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따라서 현시기 혁사주의자들의 전술계획은 이들 기회주의 세력에 대한 타격․무력화의 내용을 담고 있어야만 한다. 아무리 그럴듯한 정책과 투쟁방향을 담고 있는 전술계획이라도 대공장 기회주의에 대한 타격 방침이 빠져 있다면 현실 계투에서 탁상공론이 될 수밖에 없다. 기회주의 세력의 대중 기반과 영향력을 어떻게 허물어뜨리고 어떻게 그들의 통제로부터 대중의 투쟁의지를 해방시켜낼지, 어떻게 그들로부터 지도력을 빼앗고 노동대중을 전취해야 할지 그 투쟁의 방향과 방법을 알려고 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당적 선전선동’도 ‘정치 지도’도 모두 공문구에 불과하다.”33)

물론 우리는 기회주의 세력과 투쟁해야 한다.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는 기회주의와의 투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회주의 세력에 대한 타격·무력화”는 “기회주의 세력의 대중기반과 영향력을 어떻게 허물어뜨리고 어떻게 그들의 통제로부터 대중의 투쟁의지를 해방시켜낼지, 어떻게 그들로부터 지도력을 빼앗”을지에 대한 궁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회주의 세력에 대한 타격·무력화”는 일차적으로 자본과의 투쟁에서의 사회주의자들의 지도력으로부터 주어진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은 투쟁에서의 지도력을 행사하는 가운데 자본과의 투쟁전선을 교란시키는 기회주의자들과 투쟁한다.

이것은 아주 단순한 진리처럼 보이지만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자본가들은 어용이거나 협력적인 노동운동 세력을 이용하여 노-자간의 투쟁을 아주 손쉽게 그리고 자주 노-노간의 투쟁으로 변질시키기 때문이다. 분명 선진 분자들의 시각에서 봤을 때, 개량주의적 관료들은 자본과 한통속이다. 그들이 대중투쟁을 가로막고 있다. 이것은 분명한 진실이다. 그러나 대중의 시각에서 봤을 때, 상황은 다르다. 노-노간 투쟁은 노동자운동 내부의 지도자들간 갈등이다. 이것은 대중투쟁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분열하고 약화시킨다. 자본과의 투쟁전선을 교란시키는 기회주의자들과 투쟁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자본과의 투쟁전선을 와해시키는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자본의 음모, 기회주의 세력의 도발에 흥분하여 발생하는 ‘반관료 투쟁’에 대한 과도한 열정은 의도와 다르게 대중운동을 약화시키고 대중운동 내에서 전투파를 무력화시킨다.

이것은 전투파가 자주 저지르는 유아주의적 오류이다. SWP는 자신들의 경험 속에 겪었던 동일한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승리와 패배를 더 이상 고용주와의 투쟁이 아니라, 우익 조합 관료와의 투쟁의 차원에서 바라보게 된다. 성공은 결의가 통과되는 것 또는 멤버가 어떤 자리에 선출되는 것이 된다.”34)

이것은 운동 상황의 악화와 맞물린다. 운동 상황의 악화는 전투파가 독립적인 힘으로 대중투쟁을 전개할 수 없을 만큼 약화된 상황을 의미한다. 이 상황에 도달하면 전투파는 모순적인 태도에 빠져든다. 기회주의적 노조관료를 격렬히 증오하면서도 그들을 압박하고 음모적 전술을 꾸며 그들이 대중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려고 한다. 그리고 (전투파가 전술이라고 부르는) 모사(謀事)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대중투쟁을 회피할 때, 거의 자학적인 분노로 스스로를 피폐화시키며 오로지 적개심으로 살아간다.


이러한 지나친 열정과 적개심은 분명 “적색” 노조론적 사고와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 1920년 후반 이것은 ‘사회파시즘’이라는 공식을 통해 현실화한 적이 있다.


“노동조합 관료가 ‘사회파시스트’라는 인식은 논리적으로 노동조합을 분리시킨다는 관념, 즉 별도의 ‘적색’ 노동조합을 결성한다는 관점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공식적으로 제기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레닌이 ‘분리주의적 노동조합 활동’을 명백히 비난했기 때문이다. 대신에 초좌익적이고 모험주의적인 정책들이 추구되어 독일·영국·미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노동조합 관료들이 좌익을 축출할 수 있게 하거나 프랑스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그랬듯이 좌익 노동조합을 고립시킬 수 있게 했다. 그리하여 모든 경우에 우익이 강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물론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수많은 도발과 전면적 계급 협력과 울분을 자아내는 배신행위들이 있었다. 영국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1926년 이후에 TUC 지도자들이 여러 해 동안 ‘파업 파괴 조직’ 구실을 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 노동조합 분리를 조장한 공산당 투사들은 진정한 청중을 갖고 있었고 소수로부터 진정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 영국공산당과 코민테른에 있는 그들의 스승들은 1920년대에 레닌이 그랬던 바와 같이 “적색” 노동조합에 대한 초좌익주의 환상을 격렬하게 비판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환상들을 부추겼다. 노동조합 관료에 대한 투쟁과 관련하여 코민테른 ‘3기’ 노선이 진정으로 비난받아야 하는 점은 그것이 노동조합 관료들을 실질적으로 도와주었고, 노동조합 관료들이 좌파와 우파로 분열하는 상황을 활용하지 못했고, 투사들과 그들의 직접적 주변 청중을 노동조합원 대중으로부터 고립시켰다는 것이다.”35)

필자는 실제로 김금수와 <한노사연>에 대해 ‘사회파시스트’라는 표현을 과감하게 쓰는 동지를 본 적 있다. 그러나 ‘사회파시즘’과 관련된 국제노동계급운동의 경험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여기까지 밀고 나가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이론에 대한 답변과 달리 그 동지들의 정서는 ‘사회파시즘’과 공명하고 있으며 이성과 정서의 경계선에서 분노와 증오심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평조합원 전략이나 ‘반관료 투쟁’ 노선들이 현실에서 자주 “적색” 노조론과 오버랩되는 이유이다.


필자는 기회주의적 노조관료와 투쟁해야 한다는 정당한 사실에 동의함에도 불구하고 전투적 현장주의자들의 ‘반관료 투쟁’ 노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지울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반관료 투쟁’ 노선에는 대중의 역동성에 대한 우상화가 항상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주의자는 노동계급대중을 신뢰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그들의 계급적 본질에 대해 변치 말고 가져야할 궁극적 믿음일 뿐, 계급대중과 운동의 상태에 대한 분석을 대체하는 우상숭배로 나타나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들은 대중의 역동성에 대한 신화와 ‘반관료 투쟁’ 노선으로 구체적인 정세 분석을 아주 손쉽게 대체하고 대중사업의 필요성을 교만스럽게 부정한다.

그들에 의하면 대중은 투쟁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관료들에 의해 가로막히고 있을 뿐이다. 활동가들의 선도적 투쟁을 통해 농축된 인화성 물질에 점화하면 대중의 역동성은 공장을 갈아엎는 투쟁으로 전화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현장’이라는 말을 그렇게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대중을 조직하고 의식화하여 투쟁으로 이끌어내는 과정, 대중투쟁에 목표와 성격을 규정할 요구안을 구체화하고 선전하는 작업을 우습게 생각한다.


어떤 동지는 필자와 노조 건투 방안에 대해 논의하는 과정에서, 현장에서 대중을 조직하고 의식화하는 사업을 통해 노조를 건설하는 것은 7·80년대 식 노조 건투 방안이라고 당차게 말했다. 현대식 노조 건투 방안은 이미 중도주의나 개량주의 등에 의해 조직되어 있는 대중을 정치력으로 휘어 감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그들의 중도주의적, 개량주의적 지도부를 옴짝달싹 못하게 투쟁으로 끌어들일 전술적 방안이 필요할 뿐이다; 투쟁이 발발하면 대중은 그릇된 지도자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급진화될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작품’이다. ‘작품 만들기’.36) ‘정치’ 또는 ‘전술’이란 다양한 현장정치세력들을 어떻게 하면 옴짝달싹 못하도록 투쟁 판에 끌어들이고 하나의 잘 짜여진 ‘작품’을 통해 대중을 거대한 투쟁으로 몰아넣는가 하는 것이다.

공장 앞 연대집회를 잘 조직하여 200명만 모으고 공장 정문에서 진입투쟁 실랑이를 할 때, 대오 편성만 잘 하면 진짜 공장문을 뚫고 들어갈 수 있다; 공장 문만 뚫고 들어가면 대중의 불같은 참여로 대오는 천 단위로 늘어날 것이다; 그러면 공장 점거에 들어갈 수 있다는 전술: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최대의 연대집회를 조직하기 위해 정치세력들을 어떻게 끌어들일까, 흔히 하는 진입 시늉을 실질적인 진입투쟁으로 전화시킬 수 있는 책략은 무엇일까 하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전술 고민이다; 1+1식의 대중사업은 수공업적이고 어리석은 짓이다; 한 큐에 뛰어난 모사를 통해 이룰 수 있는 일을 어리석게 물고 늘어지려 하다니.

크레인만 점거하면 노사협조주의자들의 투쟁회피의 발목을 잡을 수 있고 크레인만 점거하면 관료주의자들이 다수인 상황에서 크레인을 점거한 전투파가 투쟁의 지도부로 설 수 있으며 크레인만 점거하면 외부세력의 힘을 빌려 반동의 공장 벽을 부수고 공장 내부로 투쟁을 수입할 수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크레인 점거 전술 기획에 대한 올인이지, 당장 현실 변화로 이어지지 않을 현장과의 끊임없는 접촉이나 대중조직의 통일적 운영이 아니다.

공장 내 광장에서 판만 잘 만들면, 천부적인 예술감이 있는 동지가 선동을 잘 뜨고 군데군데 바람잡이만 잘 심으면 200 대오가 2000이 되고 공장 순회 한번 진하게 돌면 공장을 뒤집을 수 있다; 그게 안 되더라도 LPG 선상 점거로 들어가면, 등등.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이 한 큐에 상황을 역전시킬 ‘작품’이다; 투쟁이 실패한 것은 천부적인 예술감이 있는 동지가 우리 내에 없기 때문이고 바람잡이들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실패 원인은 옭아매려고 했던 기회주의자들이 투쟁을 회피하고 방기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회피하고 방기하지만 않았더라도 투쟁은 성공했을 것이다; 기회주의적 노조관료들을 무력화시키지 않는 이상 우리의 투쟁은 승리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우선시되어야 할 것은 기회주의적 노조관료들을 무력화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전투파와 사회주의자들은 이미 대중과의 접촉면을 유실해 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중과 결합할 루트와 방식을 잃어버리고 있다.


그런데 필자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기회주의자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투쟁을 회피하고 억압하려 할지 몰랐단 말인가? 우리는 분명 우리 힘의 범위만큼 투쟁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기회주의·중도주의의 영향력 아래 있는 대중들까지 투쟁으로 조직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도 자신의 조직화된 대중 기반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빈손으로, 오로지 뛰어난 두뇌 회전과 대범한 스타일로 큰 판을 벌려, 성공한다는 것은 영화 <스팅>이나 <범죄의 재구성>같은 데서나 가능한 것이 아닌가?

우리는 기회주의적 노조관료들을 무력화시켜야 한다. 자본과의 계급투쟁에서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 그런데 대중적 기반 없이, 대중의 지지를 획득하지 못한 상황에서 기회주의적 노조관료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을까? 계급투쟁의 주도권을 쥘 수 있을까? 거의 빈손으로 오로지 뛰어난 두뇌 플레이로 조조의 대군을 대패시킨 적벽대전의 제갈공명 이야기는 과연 역사적 사실일까?

어떻게 하면 기회주의 세력을 무력화할 만큼의 힘을 가질 수 있을까? 오늘 외부인이 낀 술자리에서는 200명을 휘하에 두고 있지만 내일 중식 식당 선동에 서너 명 동원할 힘도 없으면서, 그 반관료 투쟁 노선과 그를 통한 전술주체로의 정립은 어떻게 가능할까? 현재 사회주의자들과 전투성이 변질되지 않은 선진 분자들의 대중 영향력은 대단히 취약하다. 이 상황에서 기회주의자들을 척결해야 한다, 그들이 노동자들의 긴박한 생존권 사수투쟁을 가로막고 있다는 말만으로, 현장 투쟁이 중요하다는 말만으로 기회주의 세력을 무력화할 전술주체가 될 수 있을까?


1987년 대투쟁을 통해 민주노조운동은 강하고 전투적인 대중투쟁을 형성했다. 그리고 ‘노동해방’이라는 추상적이고 모호하지만 계급적인 본능이 느껴지는 한 마디 말에 자신의 삶을 내던지고 나선 폭넓은 선진노동자층을 형성했다. 대중투쟁은 이들 선진노동자들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며 다수의 선진노동자들을 장악하는 세력이 대중투쟁을 주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선진노동자들의 의식은 즉자적인 한계를 갖고 있기는 했지만 계급적이고 전투적이며 변화발전의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90년대 초반 노동운동의 위기가 운위됐던 첫 시기를 지나면서 민주노조운동의 한계, 민주노조운동의 정치적 분화라는 말이 선진노동자운동의 모든 경향으로부터 제기되고 인정되기 시작했다. 선진노동자층은 먼저 세력화된 ‘국민파’와 ‘전투파’로 나뉘었으며 ‘전투파’는 ‘중앙파’와 ‘현장파’로 나뉘어졌다. 그리고 남은 ‘현장파’를 놓고 분명한 세력으로 자리 잡지 못한 노힘, 사회당, 비합 사회주의그룹들을 포함한 제좌파 그룹들의 이전투구가 시작됐다. 그리고 현재 ‘현장파’는 독립적인 세력으로 정립되지 못하고 해체되고 붕괴했다.

15년 이상의 시간 동안, 다양한 그룹과 정치에 속한 활동가들은 다수의 선진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한 활동에 집중했다. 다수의 선진노동자들을 장악하는 세력이 계급투쟁의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상황에서 그러한 활동은 어느 정도 정당했다. 이 시기에 1+1의 수공업적 방식이 한심스러워 보이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현재도 여전히 87년 대투쟁이 가져다준 풍요를 놓고 분배 투쟁에 빠져있을 때인가? 87년 대투쟁이 가져다준 풍요는 이미 고갈되지 않았는가? 사회주의는 선노층을 쥐지 못했으며 대중적 기반 역시 대단히 취약하다. 하지만 87년 대투쟁이 노동운동에 가져다준 풍요는 고갈됐다. 남들한테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현재는 (세력화와 현장 기반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7·80년대 상황과 다를 게 없다.

농경민족에 비해 징기스칸과 기마민족은 멋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들 제국의 부는 그들에 의해 생산된 것이 아니다. 농경민족의 생산력에 기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농경민족이 생산한 부를 힘으로 탈취하여 이룬 제국이다. 그런데 만약 모두가 농사를 거부하고 기마병이 되기만을 꿈꾼다면, 그 제국은 유지될 수 있을까?

현재 우리의 상황이 이와 같다. 풍요롭던 지난 15여년의 세월 동안 벌어진 (분배를 둘러싼) 영토전 속에 노동운동의 생산력은 고갈됐다. 현장이 비고 자본에 의해 탈취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현장으로부터 대중을 조직해 나가는 농사를 비웃으며 지난 시기 영광의 기마병만을 꿈꾼다. 분명 대중투쟁이 정점에 올랐던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에는 ‘작품’만 잘 만들면 한 순간에 폭발적인 대중투쟁을 조직해 낼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은 그 때와 다르다. 국민파와 중앙파의 곳간마저 비어갈 정도로 노동운동의 생산력은 고갈되고 있다. 현장이 붕괴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7·80년대 혁명적 민중주의자들이 처했던 것보다 더 현장으로부터 무력하다.


꿈에서 깨자. 현장으로부터 노동운동을 다시 복구하지 않는 이상, 사회주의자들이 대중활동가로 훈련되지 않는 이상, 아무 것도 될 수 없다. 우리는 기회주의와 투쟁해야 하고 대중 속에서 혁명적 원칙을 유실하지 말아야 하지만, 대중에 대한 지도권을 놓고 기회주의 세력과 벌이는 한 판 투쟁은 현재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주의자들이 대중 속에서, 대중활동가로 스스로를 단련하면서, 자신의 대중적 기반을 형성해내지 않는 이상, 어느 무엇도 가능하지 않다. 혁명정당 건설은 꿈속의 얘기에 불과하다.



혁명정당 운동의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한 장기적 투쟁


필자가 지금까지 주장한 바는 단순하다.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투쟁으로 시작한 민주노조운동의 시대가 마감하고 있다. 70년대부터 축적되어온 투쟁 역량을 기반으로, 87년 대투쟁을 통해 형성된 풍요― 현장 조직력과 두꺼운 선진노동자층 ― 역시 고갈되었다. 현장은 붕괴되었고, 그 권력은 자본에 의해 탈취되어가고 있다. 민주노조운동이 형성한 선진노동자층은 개량주의 정치로 고착되었거나 해체됐다.


1987년 파업위원회로 출생하여 직장위원회로 성장했던 남한 민주노조운동은 합법화 · 관료화 · 체제내화 되고 있다. 남한 노동조합은 이제 명확히 서구적 유형을 취하고 있다. 남한 노동조합은 체제내로 편입했으며 공장 내 모든 노동자들을 조직대상으로 하는 직장위원회 성격에서 벗어났다. 대공장 노동조합은 정규직의 특권화된 이익집단이다. 또한 정규직 현장조직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운동 내 관료적 지배세력을 구축했다. 최근 2~3년간 현중, 현자, 기아차 등에서 보여준 바처럼, 노사협조파이건 중도주의건 모든 현장조직으로 존재하는 선거조직들은 부패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중도주의적 ‘현장의 힘’ 집행부의 부정이 드러남에 따라 노사협조주의적 ‘미래노’ 집행부가 등장하고 ‘미래노’의 부패가 폭로됨에 따라 ‘기노회’가 집권할 기회가 열리는 양상이다. 그러나 이들은 부르주아 정당정치처럼 권력을 분점한 관료적 과두체제를 확립했다. 이에 따라 노동자민주주의는 약화되고 노동조합에 대한 대중의 개입 여지는 간접적이고 대의제적 방식으로 제한되어가고 있다.


1987년 투쟁으로 형성된 선진노동자층은 90년대 초중반을 지나면서 정치적으로 분화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국민파’와 ‘중앙파’는 각기 한 몫씩 챙겼다. 그러나 전투적 계급성으로 90년 중후반 치솟아 올랐던 ‘현장파’ 선진노동자운동은 자신의 전망을 찾지 못하고 ‘국민파’와 ‘중앙파’로 끌려 들어가거나 해체됐다. ‘현장파’에 기반했던 노힘과 비합 사회주의 그룹들은 ‘현장파’ 선노운동의 붕괴에 따라 같이 현장에서 밀려나 약화되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대표적으로 노힘과 현자 민투위의 관계가 보여주는 것처럼) ‘중앙파’ 경향으로 이동하는 현장조직을 따라 같이 우경화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혁명정당 건설은 당면 과제일 수 없다. 우리는 현장으로 들어가야 한다. 서구의 경험이 보여주는 바는 현장으로부터 탈각한 정치는 선전주의로 귀결되거나 우익화 한다. 사회주의자들의 현장 이전을 중심으로, 대공(직)장 육체노동자들 사이에 ‘사회주의 현장 세포’를 건설하는데 우리의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이를 통해 현장으로부터 계급적인 대중운동을 부활시키고 그 대중운동의 힘으로 선진노동자층을 재형성시켜야 한다.

다시 선진노동자운동이 거대하게, 그리고 강하고 전투적으로 재형성됐을 때 우리는, 혁명정당 건설을 구체적인 일정에 올릴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현장으로부터 당 건설을 위한 계급운동의 토대를 재구축하는 것이다.

이 작업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과 행동하는 기다림을 우리 사회주의자들에게 요구할 것이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투쟁이후 민주노조운동이 결실을 보는 데는 이십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그 동안 무수한 선배 동지들이 노동운동에 투신했으며 무수히 많은 패배와 좌절을 경험해야 했다. 또한 무수히 많은 변질과 혁신, 내부 투쟁 -- 그리고 이로부터 서클 운동의 이합집산이 뒤따랐다. 분명 현재는 자본주의의 장기적이고 만성적인 위기의 시대이다. 장기파동의 하향곡선에 위치해 있으며 한참을 더 갈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안정적이기 힘들며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고통과 불만이 쉽게 증폭될 수 있는 시대이다.37) 따라서 계급적 노동운동의 부활이 이번에는 (민주노조운동의 형성과정보다) 보다 빠르게 진행될 수 있다. 그러나 주체의 뼈 빠지는 노동 없이, 자본주의의 객관적 위기가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계급적 노동운동의 부활과 전투적인 선진노동자운동의 재형성을 가져다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작업이 지난 시기처럼 패배하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주의는 대중운동으로부터 자신의 독자성을 확보해야 한다. 현장 세포로 표현되는 독자적인 조직망을 구축해야 할 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선전·선동 사업의 안정성을 확보해야 한다.

또한 1990년대 초반 구사회주의권의 붕괴로 인한 이념적 곤란과 이데올로기적 전망 부재가 90년대 중반 이후 사회주의 운동의 생디칼리즘적 경향을 강화하는 조건으로 작용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를 선전선동하고 당면한 투쟁과 사회주의 혁명과의 연관을 입증하기 어려운 이념적 고통이 투쟁의 전투성만으로도 혁명화 될 수 있다거나, 혁명화를 위해서는 무조건 강한 투쟁으로 “GO”를 외쳐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든 측면이 강하다. 사실 1990년대 초 <전노협>이 발간한 「전국노동자신문」 축쇄판을 다시 보면 ‘사회주의’, ‘임금’, ‘계급투쟁’, ‘국가’ 등의 주제로 노동자대중을 향한 계급적 선전활동이 끊임없이 시도됐음을 볼 수 있다. 현재 <전노협> 정신 계승을 외치는 사회주의자들은 이보다도 못하다. ‘현장 사안’과 대중운동의 투쟁이슈를 쫓아다니기 바쁘다. 의식적인 사회주의 선전활동이란 찾아보기 힘들다. 남한 운동의 이념적 발전은 사실상 1990년 중반 이후 정체되고 있다.

이 정체의 벽을 넘어서야 한다.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연구 작업을 복구해야 하며 현장에서 사회주의 선전활동을 의식적으로 조직해야 한다. 그리고 대중투쟁에 사회주의의 독자적인 슬로건과 선동을 강화하는 사업을 진행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강령 형성 작업으로 귀결돼야 한다. 강령에 대한 고민이 이미, 지금부터 본격으로 들어가야 한다.


누군가는 필자에게 “당신은 모든 것을 다 하자는 것인가?” 하고 물어 볼 수 있다. 맞다. 모든 것을 다 해야 한다. 우리 운동은 모든 것이 다 대단히 부족하다. 혁명정당을 위한 기본 인프라가 전혀 구축되어 있지 않다. 현장, 학술·연구, 정치, 언론, 재정 등 모든 부분에서 혁명정당 운동을 위한 인프라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 운동의 제한된 역량으로부터 이 모든 것을 동시적으로 동일한 수준으로 발전시킬 수는 없다.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다. 필자는 현장 세포를 구축하는 사업이 가장 우선시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 운동을 ‘현장 세포’를 기본 단위로 하는 운동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그 ‘현장 세포’를 주요한 대규모 (직)공장들에 세워내야 한다. 그러나 이 쉽지 않은 작업이 종료될 때까지, 학술 · 연구 · 언론 · 재정 등에서 인프라를 구축하는 사업이 미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현장 이전’과 ‘현장 세포’ 건설 사업에 우선적인 역량 배치가 이루어질 것임으로 쉽지는 않겠지만 최소한의 역량 배치가 이 부문들에도 이루어져야 한다. 아주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현장과 다른 영역에 7:3 정도의 역량 배분이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필요하다면, 혁명적 전망을 견지하는 좌파들 간의 공동사업으로 진행되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언론은 혁명정당 운동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이 모든 활동의 리듬과 흐름, 조화를 이끄는 조율자로 기능해야 한다. 마치 브라질 전통 무술 카포에라의 겨루기 시연인 ‘조고’에서 ‘비링바우(berimbau)’라는 악기가 차지하는 위치처럼.



다시 비합법 활동에 대해


‘비합법’ 문제는 혁명정당 건설을 논의하는데 결코 빠질 수 없는 주제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혁명정당의 비합법적 성격과 활동 방식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2~3년간 적지 않은 비합사회주의 그룹들이 해체됐거나 거의 유명무실화됐다. 그리고 어느 정도 활동력을 유지하고 있는 그룹들은 대개가 다 반합법 영역으로 진출했다. 이 과정에서 비합은 청산되고 있다. 어제까지 비합을 주장하던 동지들 입에서 “책임 있게 실명으로 논쟁하든지 아니면 입을 다물어라”는 말이 나오는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리고 비합을 폐기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조직 전체가 반합 영역으로 나온 경우 역시 많다.

이런 문제를 떠나 비합을 유지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비합 규율은 무력화되고 있다. 비합은 그냥 현실과 동떨어진, 가슴 속 깊이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 숨겨둔 신앙이다. 그리고 더욱 우스운 것은 실천으로 비합 규율과 운영을 부수면서도 비합 노선의 수호자로 나서는 경향들이다. 이러한 경향은 몇 년 전부터 지속적으로 강화된 경향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강화될 것이다.


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가? 이것은 두 가지 원인으로부터 비롯되고 있다.

하나는 합과 반합 공간이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인권관련 비영리 단체 ‘프리덤 하우스’가 2004년 12월 20일 발표한 「2005년 세계의 자유」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정치적 자유에서 1점, 시민적 자유에서 2점을 받아 평점 1.5점으로 자유국으로 분류되고 있다.38) 전년도 평점 2점에 비해 0.5점 상승했을 뿐만 아니라 평점 1점인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는 뒤처지지만 일본, 남아공 등과 동급으로 평가받고 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해 환상을 갖지 않는다면, 남한은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빠른 속도로 확장되고 있으면 서구적 수준에 도달하고 있다. 이에 반해, 전투적 노동운동과 사회주의는 부르주아 체제에 전혀 위협이 되지 않을 정도로 취약하다. 이런 상황이 사회주의 운동에 반합 공간을 확장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비합 역량의 약화다. 1990년 초반 이후 비합 운동 역량은 꾸준히 약화되어왔다. 사실상 혁명적 민중주의 운동이 비합을 폐기하고 합법주의로 나갔을 때, 비합은 독자적으로 자신의 캠페인을 기획·집행할 만큼의 역량을 유실했다. 비합은 주로 조직 관리와 기관지 부위로 유지됐으며 실천 사업은 대중공간을 통해 진행됐다. 실천 사업을 자신의 이름과 힘으로 집행할 수 없는 운동은 뒷방 늙은이처럼 밀려나기 마련이다. 또한 운동 역량은 비합에서 성장하지 않았다. 비합 부위를 견지해온 동지들의 능력은 합·반합 공간의 대중투쟁 속에서 성장하는 동지들에 비해 발전이 뒤처지기 시작했고 노동자 사업이 강화될수록 역전 현상은 강화됐다. 가슴 아픈 것은 비합 부위를 지켜야 한다는 원칙 아래, 비합 내근 역량으로 존재했던 동지들의 능력이 발전하지 못하고 노동자 사업으로의 전환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밀려날 때, 원칙주의의 패배라고 조롱당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것이다.

1990년 초반 이후 사실상 비합은 조직운동으로 존재하지 못했다. 대중공간을 통해 집행되는 실천 사업의 비공개 조직관리부서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다. 또한 비합 내근 역량을 담당할 동지들을 어떻게 훈련하고 강화시켜 나갈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못했으며 당장의 조직 상황에 이끌려 근시안적 안목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비합 운동은 더욱 약화되고 운동의 구심력은 더욱더 반합법적 영역으로 이동해 나갔다. 비합은 다시 구심력을 탈환할 만큼 힘을 축적하지 않는 이상, 노선과 정신은 될 수 있을지언정 운동으로 등장할 수는 없다.


우리는 비합을 유지해야 하는가? 반합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몇몇 좌파 동지들은 비합 전위정당 노선에 동의한다; 그러나 현재 비합은 아니다 라고 말한다. 필자 역시 현재 비합은 전위가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 비합은 반합에 비해 오히려 무능력한 경우가 많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합 활동가들 내에는 ‘비합’ 조직에 속했다는 이유로 전위인 듯, 운동의 지도권을 부여받은 듯 착각하는 동지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주제를 모르는 오만함. 그리고 오도된 전위주의. 이것은 분명 비합 운동이 자기 숙정해야 할 문제들이다.


그러나 비합은 운동 상황이 비합을 요구할 때,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오래 전에 ꡔ오르그의 사람들ꡕ이라는 소비에트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기에 히틀러의 소련 침공에 맞서 지하 레지스탕스 운동을 조직해야 하는데, 지하 활동 경험이 없어 실패를 반복하자 1917년 이전에 지하 운동을 했던 한 노인이 그 지역에 파견되어 지하 레지스탕스 운동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다.

우리 운동은 어떻게 될까? 지금 비합이 전위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사실로 비합을 ‘잠정적으로’ 폐기 처분한다면, 현재 비합이 반합 운동의 역량과 효율성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한시적으로’ 유보한다면, 향후 어떤 노인네가 비합 조직 활동의 경험을 전수해 주고 있을까? 물론 비합을 유지한다는 것이, 현재처럼 비합 규율과 활동방식을 훼손시키고 희화화시켜 자기 편리에 맞춰가는 것이라면 비합은 여기서 중단하는 게 낫다. 향후 혁명 운동에 뛰어들 후배 동지들에게 비합에 대한 희화화된 관념을 심어주고 그 희화화된 관념이 비합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실제적인 비합 활동으로의 전환을 오히려 저해하는 상황을 만들 수 있다면, 지금 비합을 문 닫는 게 낫다.


그러나 비합 운동의 경험과 전통을 올곧게 계승해 나가는 것이 가장 바른 길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솔직히 말해, 현재 비합은 반합 운동과 경쟁력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비합은 반합에 구심력을 빼앗기고 있다. 사업권이 반합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 현상은 비합 운동이 규율성과 헌신성뿐만 아니라 실제 능력에서 명확한 우위를 점하는 활동가들로 재구성되지 않는 이상, 역전되지 않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사업권을 명확히 반합으로 이전하고 거기에 맞춰서 반합법적인 조직체계를 구성해 나가자. 그리고 비합 멤버쉽을 실제 비합에 걸맞는 규율성과 헌신성을 담보할 수 있는 동지들로 제한하자. 비합의 성격을 한동안 사회주의 운동의 싱크탱크로 축소하자. 그리고 비합 멤버쉽을 견지하는 동지들의 정치적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비합과 반합 양자의 영역에서 담금질하자. 반합에서 실제적인 대중투쟁 경험을 흡수할 수 있도록 돕고 노동자운동 내에 개인의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도록 조건을 마련해 주자. 그리고 비합에서 규율성과 비합법 활동방식을 습득하고 운동의 통제권을 쥘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자.

쉽지 않고 짧지 않을 이 과정을 통해 실제적 능력을 갖춘 비합 활동가들이 양성됐을 때, 다시 캠페인권을 갖는 실제 조직운동으로서 비합은 복구될 수 있다. 이 때 비합은 (현재의 상태에서의) 개별 그룹의 단독 산물로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좌파 운동 내 혁명적 사회주의의 목표와 전략을 견지하는 그룹과 동지들의 공동 산물로서 만들어져야 한다.


혁명정당은 비합을 핵으로, ‘사회주의 현장 조직’을 기본 세포 단위로 하여 건설되는 사회주의 의식으로 자각한 선진노동자들의 결사체이다. 핵이 되기에 현재 비합은 대단히 부족하다. 그리고 현재 비합만으로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착각이라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혁명정당 건설을 목적한다면, 사회주의 혁명을 자신의 과제로 지향하고 있다면, 비합을 관념의 영역으로 두어서는 안 된다. 청산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 진정 비합이라는 성격에 맞게 강화할 것인가? 고민하고 투쟁해야 한다. 비합 전위정당 노선에 동의한다면, 그것이 언젠가 때가 되면 강림할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글을 맺으며


현재 남한 노동운동은 민주노조운동의 역사가 마감함에 따라 기회주의적 노조관료들이 풍기는 부패의 냄새로 가득 차 있다. 자본의 착취와 억압은 강화되고 있으며 노동형제들과 동지들의 분신과 자살, 산재 사망 소식이 연일 끊이지 않고 있다. 이 상황에서 사회주의자라는 것이 있다면, 혁명주의자들이 있다면 무언가 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울분에 찬 호소와 질책의 목소리 역시 끊이지 않고 있다.


우리는 투쟁 속에 있어야 한다. 그 사실을 필자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운동의 현실은 울분에 찬 목소리처럼 ‘확 들고 일어나 뒤집어버릴’ 그런 상황이 아니다.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그렇게 힘들게 세운 민주노조운동이 기회주의 세력의 손으로 넘어가고 자본에 의해 부서지는 일은 애초부터 없었을 것이다.


올해는 을사조약이 체결된 지 백년이 되는 해이다. 을사조약으로 국권이 붕괴하던 당시 상황에서 민족주의자들이 느꼈을 비통함과 현재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비슷할 것이다. 여기에 대한 백범 김구 선생의 회고를 반추하는 것으로 글을 마감하겠다.

“을사보호조약이 늑결(勒結)된 소식이 알려지면서, 1904년 상황과 비교해 차라리 평온했던 한반도는 다시 들끓었다. 나중에 상해임시정부를 이끌게 되는 백범 김 구는 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급히 서울로 올라와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작성해 조정에 올리는 한편, 11월 30일 동지들과 함께 종로에서 조약 체결의 부당성을 알리는 항의 시위를 벌였다. …… 백범은 자신의 회고록 ꡔ백범일지ꡕ에 이 날의 상황을 기록했다. ‘왜놈들이 총을 쏘며 군중을 해산시키려 하자, 불탄 집에 나뒹굴던 기와 조각을 집어던지며 성난 군중이 항거했다.’ 육군부장 민영환이 유서 5통을 남기고 자결한 것도 바로 이날이었다. 백범은 이날 참찬 이상설이 자결하려다 미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려가는 장면도 목격했다. ‘어떤 한 사람이, 흰 명주저고리에 갓 망건도 없이 맨상투 바람으로 의복에 핏자국이 얼룩덜룩한 채 여러 사람의 호위를 받으며 인력거에 실려가면서 크게 울부짖는 모습’을 보았는데, 누군가에 물으니 이상설이더라는 것이다. …… 그 뿐 아니라, 허위 이강년 신돌석 연기우 홍범도 강기동 민긍호 유인석 우동선 등 우국 지사가 모두 의병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 이처럼 울분과 분노의 함성이 삼천리 강토에 메아리치면서 1905년이 저물었지만, 기울어가는 대세를 돌이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 나라의 존엄과 주권이 비분 강개나 단기필마 식의 저항 운동, 명분을 내세우는 호소만으로 지켜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 그나마 일부 지각 있는 인사들이 결단을 내렸다. 백범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상소 운동을 벌이다가 이내 귀향을 결정했다. ‘7년 묵은 병에 3년 묵은 쑥을 구하는 식’의 처방으로는 독립이 무망함을 깨닫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발길을 돌린 것이다. 그는 ꡔ백범일지ꡕ에 당시의 의병운동에 대해서도 ‘충천하는 의분심만 가지고 일어났으니 여러 곳에서 실패했다’고 적었다.”39)

한/노/정/연



1) 양효식, 「전노투 논의로 발전하기를 바라며, 정현수 동지에게」


2) ꡔ현장노동자ꡕ, 「혁명정당이 아니면 회의체라?」


3) ꡔ현장노동자ꡕ, 「혁명정당이 아니면 회의체라?」


4) 현종혁, 「전노투를 둘러싼 몇 가지 논쟁에 대해」


5) ꡔ현장노동자ꡕ, 「혁명정당이 아니면 회의체라?」


6) 양효식, 「전노투 논의로 발전하기를 바라며, 정현수 동지에게」


7) 「사회주의 대중신문 발간을 위하여」


8) 「사회주의 대중신문 발간을 위하여」


9) 「사회주의 대중신문 발간을 위하여」


10) 「사회주의 대중신문 발간을 위하여」


11) 「사회주의 대중신문 발간을 위하여」


12) 「사회주의 대중신문 발간을 위하여」


13) 「사회주의 대중신문 발간을 위하여」


14) 트로츠키, 「노동조합문제에 관한 공산주의동맹 우파의 오류」


15) 트로츠키, 「노동조합문제에 관한 공산주의동맹 우파의 오류」


16) 트로츠키, 「노동조합문제에 관한 공산주의동맹 우파의 오류」


17) 트로츠키, 「노동조합문제에 관한 공산주의동맹 우파의 오류」


18) 트로츠키, 「노동조합문제에 관한 공산주의동맹 우파의 오류」


19) 로조프스키, 「오늘날의 평조합원 운동」에서 재인용


20) 트로츠키, 「영국의 노동조합」


21) “상근 전임자들은 작업 현장의 규율과 지저분함과 위험으로부터, 작업반장과 관리자와의 직접적인 충돌로부터, 작업장 동료들 간의 동료의식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조합 사무실이라는 아주 다른 환경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조합원들보다 더 많은 보수를 받지 않을지라도 그들의 소득은 더 이상 자본주의적 생산의 부침에 좌우되지 않는다. 그들은 더 이상 잔업에 매이지 않으며, 조업 단축에도 영향 받지 않는다. 한 공장이 폐쇄될 경우, 감축 대상 인원을 놓고 협상하는 전임자는 해고되지 않을 것이다. 항상 경영진과 사실(私室)에서 밀담을 나누다 보니 상근 전임자들은 협상, 타협, 노자간의 화해가 바로 노동조합의 본업이라고 여기게 된다. 투쟁은 교섭 과정을 뒤흔드는 것, 조합 기금을 날릴지도 모르는 골치 아픈 일로 비쳐진다. 조합 기구의 효율적인 운영 그 자체가 목적이 되면서, 노동자가 착취당하는 정도를 개선하는 제한된 목표조차도 방기하기에 이른다.”(알랙스 캘리니코스, ꡔ노동조합 속의 사회주의자들ꡕ)


22) 알랙스 캘리니코스, ꡔ노동조합 속의 사회주의자들ꡕ


23) 평조합원 전략이 “적색” 노조론과 다른 또 다른 이유로 그들은, 평조합원 전략은 사회주의자들로만 또는 사회주의에 동의하는 자들로만 운동을 구성하려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은 SWP 내부에서 평조합원 조직이 SWP의 ‘프론트’였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의 상황이었다는 데 있다. “적색” 노조론자들 역시 사회주의에 동의하는, 또는 사회주의자들로만 운동을 구성하려 하지 않았다. 단지 “적색” 노조론을 적용한 현실이 그렇게 됐을 뿐이다.


24) “끝으로, 평조합원 전략은 적절한 조건 속에서 본질적으로 옳다. 그 적절한 조건이 1974년 이후 존재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알렉스 캘리니코스, 「오늘날의 평조합원 운동」)


25) 물론 (단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행정부에 비해 의회에 개입 여지가 많은 것처럼 대의원체계가 훨씬 개입할 가치가 크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26) 알렉스 캘리니코스, 「오늘날의 평조합원 운동」


27) 알렉스 캘리니코스, 「오늘날의 평조합원 운동」


28) 직장내 당 세포조직


29) 알렉스 캘리니코스, 「오늘날의 평조합원 운동」


30) 알렉스 캘리니코스, 「오늘날의 평조합원 운동」


31) ꡔ현장노동자ꡕ가 이전에 했던 말을 빌자면, ‘상층’ 중심적 전술관에 빠져들게 된다.


32) 물론 현장 취업이 모든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현장 취업을 통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노동조합 활동의 결합이나 이데올로기 사업 모두 필요하다. 그러나 현장 취업이 가장 중심적이고 가장 중요하게 집행돼야 한다. 이를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현장 세포’가 우리 운동의 기본 단위가 돼야 한다.


33) 「사회주의 대중신문 발간을 위하여」


34) 알렉스 캘리니코스, 「오늘날의 평조합원 운동」


35) 던컨 핼러스, ꡔ우리가 알아야 할 코민테른 역사ꡕ


36) 필자는 울산에서 전투파 사이에 유행어처럼 떠도는 ‘작품’이라는 말에 당황한 적이 있다. 거기서는 적지 않은 활동가들 사이에서 ‘작품’과 ‘작품 만들기’가 제비들이 ‘예술’과 ‘카바레의 전설’을 말하듯이 얘기되고 있다. 고참들은 ‘작품’의 전설을 구전하기 바쁘고 신참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사를 연신 터뜨리며 듣기 바쁘다. 대중투쟁은 끈질긴 대중활동의 산물이 아니라 기가 막힌 스텝과 턴으로 이루어진 ‘작품’의 산물이다. 한심한 족속들이나 뼈 빠지게 일해 돈벌 생각하는 것이고 현명한 사람들은 예술적 ‘작품’ 활동을 통해 한 큐에 돈을 번다. 현명한 활동가는 손에 흙을 묻히는, 기품을 잃는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


37) “이른바 경제 5단체 가운데 최고의 역사와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대한상공회의소‘는 김재원 한양대 디지털경제학부 교수에게 용역을 의뢰해 서울과 6대 광역시 제조업체 노동자 1,196명을 대상으로 ‘제조업 근로자 근로의식 실태조사‘를 실시했다. 지난8월 30일부터 9월 17일까지 실시된 이 조사에서 응답자의 54.8%가 ‘자본주의가 가장 우월한 경제 체제냐‘는 질문에 대해서 반대 의사를, 4.9%는 적극 반대 의사를 나타냈다.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선 대상자의 53%가 반대, 13%가 적극 반대라 답했다. 대체적으로 노동자의 60% 이상이 현 경제 체제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같은 맥락의 다른 질문들에 대한 결과도 대동소이 했다. ‘성장이 분배보다 우선되어야 하나‘는 질문에 대해서는 55%가 반대의사를 나타냈다. 또한 ‘경제가 잘 된다는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문항에 대해서는 31.4%가 ‘빈부격차 해소‘로 , 20.9%가 ‘완벽한 복지제도 구축‘, 14.8%가 ‘완전고용 실현‘을 답으로 내놓았다. 이에 비해 국민소득 향상은 29%, 선진국 목표 달성은 3.9%에 불과했다.”(「매일노동뉴스」2004년12월01일)


38) 정치적 자유는 정당 결성의 권리와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를 통해 대통령·총리 등을 선출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시민적 자유는 종교·인종·경제상태·언어에 따른 차별이 없고 언론·양심·집회·결사 등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점수는 1점이 최고고 7점이 최저다. 보고서는 국가별 평균 점수에 따라 ▶자유국(평점 1~2.5점)▶부분적 자유국(평점 3~5점)▶비자유국(평점 5.5~7점)으로 분류하고 있다.


39) 박성준, 「100년 전 그때 무슨 일 있었나」, ꡔ시사저널ꡕ제79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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