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간특별호: 한노정연 백서] 2007.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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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사람들

현장에서 미래를  제종간특별호
이은숙

그때 그 사람들


백서를 만들며, 여러 사람들 눈에 들었던 각자의 한노정연 들을 보니... 새삼 나도 지나간 사람들을 꼽아보게 된다... 그러면서 나도, 생각나는 그때 그 사람들 이름을 백서에 적어 넣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 날아가는 새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던 30 고개에서
 
그러니까 서른 즈음에, 나는 ‘연구소 운동'을 시작했다. 노동조합운동이 이제 막 발화를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노동조합 결성을 위한 상담이 빗발치던 시기가 3-4년 지난 뒤였다. 새로운 사회전망을 목표하면서, 노동자 대중운동의 활성화에 부응하여 보다 중장기적 전망을 세워가며 함께 하려는 문제의식들이 하나 둘 모여들던 시기였다. 전노협이 막 만들어진 시기, 노동조합 지원이나 교육도 중요했지만 정책과 이론을 생산하는 일이 시급을 다투어 조직되어야만 한다는 생각들이 솟아나오기 시작했던 때다.
 
1991년부터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한 그때 그 사람들이 1992년에 ‘연구소 추진위원회'를 구성해서 덩어리로 뭉친 것이 한노정연의 출발이었다.
 
학술연구자들과 실천활동가들 십수명이 함께 만났을 때, 문제의식들도 각양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선 앞으로 뭘 어떻게 함께 할 수 있을지에 대해 밤낮으로 머리들을 쥐어짜는 시간을 가졌다. 근 2년에 걸친 ‘추진위원회’의 초대 추진위원장은 강석재, 2대는 김영수, 3대는 이은숙, 4대는 유길종 씨 등이 맡아 회의와 연구토론회를 병행하면서 논의 끝에 결국 ‘연구소’를 창립하자는 데 뜻을 모으게 되었고, 1994년에는 드디어 ‘서울노동운동정책연구소(준)'을 띄우기에 이르렀고, 1년간의 연구소(준) 활동을 거쳐 1995년에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를 창립할 수 있었다.
당시 우리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다른 분들도 ‘연구소'들을 창립하였는데, 한국노동사회연구소와 영남노동운동연구소가 그 시기에 만들어졌던 연구소들이다. 영남노동운동연구소도 우리 한노정연과 같은 시기, 즉 2006년 12월에 해산하였다.
 
펄펄 날아다니던 20, 30대들이 모여서 창립한 한노정연은, 이제 그들이 40대를 넘어 50대를 바라보는 이 시점에 해산하고 다시 처음처럼 제 갈 길을 찾아가게 된 셈이다. 나에게도 15년이라는 세월이 한노정연과 함께 흘러갔다.
 
지금은 어디서 무얼하는지 모르는 친구들이 무수하다. 생각나는대로 적어보면서 연구소 15년을 되돌아 본다면, 지금의 알싸한 겨울추위 같은 황량함 속에서 새 길을 찾아나서는 나와 다른 이들에게 빛이 들고 온기가 돌 수 있을 것 같다.
 
2. 당산동 그 시절...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나이를 먹었건 안 먹었건 나는 팔딱팔딱 뛰어놀 생명력과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좋았다. 거창한 청운의 꿈이 아니면 어떠랴. 연구소 같이 하자고 모여드는 사람들 속에서 나도 덩달아 뛰어놀았던 시절이기도 하다. 마음 한켠에는 늘, ‘현장운동도 박차고 나온 주제에....’ 라는 무거운 자책이 돌덩이처럼 들어앉아 있기는 했어도,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이 ‘이거다!’ 하고 보였을 때 나는 즐거웠고, 같이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펑펑 품어져 나오는 희망도 찾아냈다. 싸우기도 많이 싸우고 투박도 주고받았지만, 그래도 그 속에서 늘 함께 했다. 다른 이들보다는 조건(?)이 더 좋아서, 나는 마치 붙박이가 된 듯 연구소 만들기에 열정을 바쳤다.
 석재, 경임, 도근, 영수, 혜란, 건호, 용식, 승협, 호창, 경용, 만희, 경순, 경희, 재걸, 병현, 그리고... 갑자기 이름이 생각이 안나는 바람에 적지 못하는 초기의 그때 그 사람들.... 지금은 이제 모두 중년들이 돼 있는 그때 팔딱팔딱했던 사람들이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당산동의 어느 골목 어귀에 있던 그 공부방을 각자 50만원씩 내서 구하면서 얼마나 즐거워했던가...
그때부터 2000년까지 10년 가까이 함께 해주신 복사점의 희영님... 언제 찾아가서 소주라도 한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노동과정 팀이 생기고, 노동경제 팀이 생기고 노동자 교육 팀도 생기고, 그러면서 어우러져 공부하며 새로움을 주고받았던 시절이다.
 
연구소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피터지게 논쟁을 벌일 때, 우리는 막판엔 맹렬하게 고민했다. 이제 막 학위과정들에 있던 학술연구자들의 대부분은 그/녀들의 ‘불안정한 미래’로 인한 고민과 ‘과연 우리가 연구소라는 이름에 걸맞게 연구결과물을 낼 수 있는가’ 하는 고민이 중첩되어 ‘연구소'로의 창립을 저어하였다. 반면에 실천활동가들은 하루라도 시급하게 연구소를 띄우고 더 많은 이론역량과 함께 할 수 있는 장을 열어서 현장의 필요에 부응해야 한다는 당위가 더 강했던 것 같다. 나야 뭐, 이쪽저쪽의 고민들을 들으면서 고민하면서도, 연구소를 띄우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한 축이다.... 그렇다고 내가 연구역량을 갖춘 인물이었던 것도 아니고, 이제 막 공부를 시작하려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게다가 또한 현장을 곧바로 조직할 수 있는 어떤 실천역량을 갖추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크게 발언력을 가지고 발언했던 건 아니다... 여하튼 나는 그때 그 사람들과 함께 연구소를 띄운다면 할 연구들이 많을 수 있고, 충분히 연구해서 결과물들도 내올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연구소가 만들어지면 열심히 연구소 운동을 꾸려나가리라고 생각했던 거였다.
 
당산동 시절 막판의 논쟁 속에서 ‘연구소'를 창립하기로 결정하고, 추진위원회를 해산하면서 서울노동정책연구소(준)을 띄우고 연남동에 널찍한 사무실을 구했을 때.... 그때 추진위원회 속에서 주되게 활동했던 인물들 몇은 한걸음씩 떨어져 각자의 필요에 따라 자신들을 갈고닦는 길을 택했다. 나 역시 나를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나는 그때 코스웤을 시작하며, 내 길을 찾아보는 길을 택했다.
 
3. 연남동 시절

세월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바로 엊그제 같은데 또 한편으로는 까마득 하다... 연남동 사무실에서 고사를 지내면서 연구소 첫발을 내딛던 날.... 그날까지 그때는 무엇에 씌워서 그렇게 열심히 뛰어다녔을까.... 그렇지만 그 전 2-3년을 함께 하다가 떠나간 사람들을 아쉬워하며, 돼지머리를 앞에 두고 절을 하고 막걸리 잔을 기울일 때, 나는 앞으로 한 달에 한번만 연구소에 오기로 한 내가 약간은 모질다고 생각하면서도 충전을 원했었다... 그때도 벌써 노인이 다 된 기분이었는데, 다소간에 지쳐 있던 나를 보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띄우기는 했지만 하고많은 일들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걸 밀쳐두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에 앞서 철이 한 참 지난, 그러나 곧 제 철이 될 바닷가에 홀로 앉아서 밤을 지새우며 달빛에 기대어 노트 여백을 채우면서, 그때도 지금처럼, 또한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난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딘가에 깊이 들어있을 그 노트 한권을 채우면서도, 마음은 채워지지 않아서 시리고 아팠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러면서 지나온 것이 또한 10여년이다... 어쩌면 이후 10여년이 지났을 때도 그런 시간이 또다시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설핏 지나간다.
 
연남동.... 한 달에 한 두어 번이나 갔을까...? 한번 갈 때면 밤을 새운 기억들이 많은데, 막상 무얼 했는지가 가물가물하다... 별로 한 일이 없나보다... 아 기억나는 거... 사무실 개소한 날이었던가...? 역시 가물가물하지만, 그날 앞으로 연구소에서 열심히 일하기로 한 아무개씨가 막 새로 낸 간막이 벽을 주먹으로 내리찍는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그날 그 자리를 싸늘하게 흩어지게 한 그 사건이지만, 그때 나는 거기 있던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 일이 문제는 문제지만, 늘상 있을 수 있는 일 정도로 그 일을 그냥 별 대수롭지 않게 덮어두고 말았다. 얼핏 기억하기에, 끊임없이 연구소를 띄우는 것에 대하여 문제제기를 해온 친구들에 대한 불만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던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는 방관자가 된 셈이다.
 
방관하지 말아야 할 그런 일들 1순위가 한잔먹고 폭력적으로 나오는 그런 현상이라는 생각을 내가 깊이깊이 알게 되고 문제삼고 혐오하게 된 것은, 내가 내용은 다르지만 행태는 그와 비슷한 일을 1998년 말인가 1999년 초인가에 봉천동 시절에 저지르면서도 그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다가, 그로부터 10년째 되던 2004년을 보내면서였으니... 참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연남동에서는, 성인, 가정, 연자, 광훈, 혁(?), 혜란, 탁성 등이 상근하면서 고생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상근체계를 구성하고 열심으로 기초작업을 하며 길을 닦았기에 한노정연이 출범할 수 있었고 나도 한노정연에서 일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러니, 뭐라뭐라 해도 참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다.
 
4. 봉천동 시절1
 
한노정연이라는 이름으로 연구소 간판을 내걸고 봉천동에 있는 더 넓어진 사무실에서 연구소가 시작된 것은 1995년 7월15일부터다. 물론 그 전에 사무실을 구했던 거고 창립일이 그날이라는 거다. 나는 1996년 12월까지 ‘충전의 시간'을 갖고 있었다. 얼추 논문을 마치고, 나는 1월 17일부터 연구소 상근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2001년까지 5년 동안 나는 완전히 연구소 붙박이 가구가 되었다. 그렇지만 뭘 했느냐를 내세우기 전에 먼저 할 말이 있다: 재성아, 그리고 경희야, 그리고 혜란아, 미안하다... 내가 아무리 그때 내 스스로 정당하였다손 내가 그러는 것이 아니었는데... 재성아 보고 싶다... 또한 연자에게도 미안하다... 1998년부터 1999년에 이르는 기간... 연자에게는... 연구기획실, 연구기획1,2실.... 참으로 나중에 너에게서 듣게 된 나의 또다른 모습, 모든 걸 인정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인식되어 있는 걸 이제서야 알고 놀라고 힘들었다. 내 생각만이 옳다고 뻐시던 나의 모습 속에 지배욕이 숨어 있고, 폭력이 숨어 있었던 것을 인정하기까지 숨가빴고 지금도 숨가쁘다... 글쎄... 그렇다고 내가 무골호인이 될 수 있다고도 장담할 순 없지만, 그런 식으로는 앞으로 살지 않을 생각이다...

살다보니 참... 뭐부터 접하는지에 따라 인생들도 여러 가지로 만들어지는 거 같다. 같은 책도 언제 어떤 상태서 무슨 마음으로 보느냐로 입력되는 게 달라지듯 같은 사람도 언제 어떤 상태서 무슨 마음으로 만나냐에 따라 달라지곤 하고, 그래서 인연이란 게 있는가 한다.
 
어제(1월8일) ‘성적소수문화환경을 위한 연분홍치마’ 랑의 ‘중구난방'(연구소에서 2006년 7월부터 설치한 초청토론회 명칭인데, 연구소 해산이 결정되고 나서도 거기 참석하는 사람들끼리 계속 해나가기로 해서 계속되고 있다)에서 또한 맘에 남는 얘기들이 많이 오갔는데, 그 중에 이런 게 있었다. 개인에 초점을 맞추면 이해 못할 사람이 누구겠으며, 하다못해 (누구지? 그 권투선수 이름 까먹었네) 아무개가 상대방 귀를 물어뜯는 것도 그 사람 일생을 거슬러 설명해주는 뭐인가를 읽어보면 그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있다는 거였고 그런 거에서 보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라는 거고, 그래서 남들에게 해악을 끼친다는 행동들 자체가 실로 경계가 모호해져버린다는 거고, 그래서 사람들 한사람한사람 개인에 초점을 맞추면 모든 게 평평해져서 이해 못할 사람이 없어지니까 개인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는 거다... 실은 나도 요새 그런 생각들이 오락가락하고 있는 참이라 귀가 쫑긋했다. 이분들은 나와는 완전 거꾸로 출발하고 계시는 듯했기 때문이다.

나는 전에는 사람들에 너무 초점을 안맞추고 객관이니 어쩌니에 경사되었었는데.... 그래서 이제는 사람들에 초점을 맞추어 보고자 애쓰고 있었다. 그러면서 내가 살아온 과정들을 훓어 보며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비록 극구 싫은 요소들이 많은 사람들이라도 이해 못할 사람들이란 없겠더라... 과연 개인 한사람 한사람들에게 초점을 두고 그들의 삶과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까를 들여다보니 이해 못할 바도 아니었던 거다.... 그런데.... 그렇다고 모두가 살아갈 이유가 있으니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냐....? 라는 생각을 확장해 보자니 니맛도 내맛도 아니게 되는 일이 벌어질 판이었다... 왜냐면 ‘그런데 왜 현실은 요모양요꼴일까... 너죽고 나살자는 해꼬지가 창궐하여, 살고싶은 생각을 싸악 가시게 만드는 요소들이 득시글거리고...’ 하는 생각이 드니까... 그래서 ‘운동’이라는 것이 필요한 거다...

그런 생각들을 들쭉날쭉하는 새 이야기는 더 진전되어, 사람에 초점이냐 상황에 초점이냐 또는 다른 어떤 것들간의 문제냐에서 항상 어떤 것만이 절대축이 될 수 없다는 거... 로 이어졌고, 나도 거기에 공감했다...

그런 고민들 속에서 연분홍치마는 제도나 국가나 뭐 그런 거 보다는 ‘감성을 바꾸는 방향의 일.... 문화가 바뀌는 일을 하고 싶다'는 걸로 방향을 잡아 조근조근 ‘운동’을 하고 있었다. 감성을 바꾸는 일.... 멀고 길고 느리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중요하고 절실한 방향을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내 문화는 뭐라고 할 수 있을까... 거기까지는 어떻게 펼쳐질 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언젠가 어디선가 나 때문에 괴롭고, 눈물빼고, 원망하고,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사람들이 부디 어디선가 그저 행복해지기를.... 그래서 그때 그 힘겨웠던 사람들이 같이 어우러질 수 있는 새로운 터를 일구는 일이 내 일이 되기를...
 
5. 봉천동 시절2
 
한편으로는 나이며 주워들은 상식들이, 한편으로는 칭반욕반의 내 ‘인간성’이 연구소에서 일하려는 나를 수없이 부추기던 봉천동 시절이다. 어제 중구난방에서도 남성중심(우월)주의, 가부장제, 나이주의 같은 것들에 의한 억압구조에 맞선다(연분홍치마)는 취지 얘기를 들으면서 또다시 내운동의 줄거리가 가물거렸지만, 한편으로는 남성우월주의에 가부장제에 나이주의에 입각하여 일을 했었던 봉천동 시절이기도 하다...
 
노동자정책팀을 꾸리고 공부하고 번성하고 산별노조운동연구팀이며 코포라티즘검토팀이며 사회복지팀이며를 분가시키기도 하고 팀명으로 책도 내고 열라리 열심히 살긴 살았다. 게다가 상근연구원이란게 사무실 일이며 사람들 오가는 치닥도 있어 번잡하기 이를 데 없고, 또 기초세미나팀들을 포함하여 무성하게 세미나팀들을 꾸리다보니 그 공부모임 이후 뒤풀이가 중요한지라, 뭘 좀 하려면 밤새우기 일쑤요, 그러다 보니.... 실은 내 명의로 된 집도 어떻게 마련되었었음에도 불구하고 약 2년간 집에를 가물에 콩나듯 밖에 갈수가 없으니, 집이 있으면 무에 쓰나....? 이렇게 되야 지금은 후회막급인 손재 일순위지만, 덜렁 그집을 팔아먹어버렸던 것도 봉천동 시절.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절로드는 그때 그 인물들... 진용,락건,정필,희영,정미,현,명훈,은영1,은영2...... 그리고 현경,은정,상태,영수원... 게다가 원탁,종건,은선,은미,해식.... 준규, 직수 그리고 현숙이!!
 
조선업종연구팀은 동묵의 도장공장 조사연구제안으로 시작돼서, 미아,건형,현일 등이랑 나중엔 구조조정,고용문제 같은 프로젝트를 하게 됐고, 항공화물쪽 프로젝트는 용보,지영과 함께 했었다... 현대자동차 임금 프로젝트는 명록, 경근이랑 했다. 프로젝트나 교육을 통해 만난 현장 분들 중엔, 현중의 병모 성이 우연챦은 기회에 교육위원들 교육에 불려가 내 콧날을 시큰하게 만든 노장으로 기억나고, 섭섭이가 많이 생각나고... 정하 성도 빼놓을 수가 없는 분이다. 나는 그 무수한 날들 동안을 앞으로 어떻게 되갚을 수 있겠는가....?
 
6. 양평동 시절

양평동에서 햇수로 3년인데.... 2년은 내가 노힘에서 상근한 거고, 1년은 당시 1년을 마치고 나서 적은 소회로 대신한다.

2004년 한노정연 사업에 대한 개인적인 소회와 반성(2005.1.26)

- 돌아보니 시간이 어떻게 가버렸는지 알 수 없다. 연구소 활동에서 2년 동안의 공백이 이렇게 크게 나타날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연구소 업무를 시작하는 초입에서부터 불거져 나온 ‘탄핵’문제를 둘러싼 소장-부소장간의 대립과 갈등이 나에게는 너무나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 논쟁은 연구소에 대해 생각해왔던 나의 판단기준과 연구소 사업에 2004년에 임하고자 했던 결의도 송두리째 빼앗고 짓밟았다.

- 나는 2004년도 현재 연구소가 깊은 침체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고 노쇠해가고 있다고 보았다. 연구소에 남아서 활동하고 있는 동지들이 버텨주는 그 이상으로 연구소가 활로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힘들게 버텨내는 것도 이 시대에 귀중한 것이라고 물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어떻게든 힘이 되어 연구소에 보탬이 되어 연구소를 살려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달려왔는데, 연구소 상황은 생각보다도 더 나빴다.

- 요소요소에 반목과 갈등이 있고, 연구원들은 예전보다도 더 안움직이고 있고, 실무체계도 모두 펑크 나 있고,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마치 백지에 무엇을 그려야 할지 낯설기만 한 연구소가 되어 있었다.

- 상근을 결의하면서, 연구소 전망을 새로이 찾아 나가면서 그 과정에서 손발을 맞추어 일할 수 있는 상근연구진을 세워내는 문제가 크게 다가온 것은 어쩔 수 없는 나의 과제였다. 그때까지의 사무처 체계를 모두 채워낼 수 있는 역량들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위원회체계로 전환한 것이므로, 당연히 상근연구진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 내 판단에는 적어도 5~7인의 활동력이 풀가동되어도 어려울 판이었다. 일단 이**씨가 있고 내가 있으니까 최소한 세명이 찾아진다면 우선은 상근진을 구성하여 일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판단이 들었다. 이미 연구소에서 구력있는 연구자나 활동가들 중에서 상근역량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상근활동가를 찾는 것은 자연 연구소 바깥에서 해야 하는 일이었다. 여기저기 알아보고 사람들을 만나보면서 3월 시점에서는 두 동지가 결합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달여만에 한 동지는 그만둘 수밖에 없게 되었다.

- 오래전부터 연구소에서 활동을 해온 이**씨가 4월말에 상근을 해소하게 된 것은 나로서도 유감천만이다. 이**씨와 손발을 맞춰가며 일을 할 수 있었다면 상황은 그래도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다. 몇가지 이유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이**씨 얘기를 길게 논하게 됨을 양해 바랍니다. 저에게는 오해와 비난의 지점이며, 연구소와 노힘에 대해서 문제제기 지점이기도 하고, 다양하게 문제를 지적받고 있는 터라 이와 관련하여 제 입장을 밝히지 않을 수 없는 상태입니다. 물론 입장 표명 여부와 관계 없이 많은 개개인들은 이미 판단을 내리고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편집출판위원회 위원장으로 이**씨가 추천되지 못한 초기의 그 상황이다. 나는 권정기씨를 추천했고, 그당시 이의를 제기한 사람도 없었다. 권정기씨는 진보의련에서 기관지를 만든 적이 있고 편집위원으로 연구소에 결합하고 있었기 때문에 추천했다. 내가 잘못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씨의 경우 편집출판위원회를 자기의 운동전망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나는 알고 있었고, 만약 편집위 활동을 전망으로 하는 사람이 찾아진다면 이**씨는 자기의 운동전망과 실무가 통합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중간에 이**씨로 편집출판위원장교체 건이 나왔을 때 이 문제의식은 이어졌고, 당시에 그런 토론이라도 이**씨와 해봤더라면 어땠을까 돌아보게 된다. 아무튼, 소장님이 “그렇게 하기로 이**씨와 얘기가 됐다”고 통보하시므로 그대로 받아들였다. 권정기씨는 이번 총준팀 자리에서 ‘소장님이 통보’하셨다는 데 대해서 이 문구가 “소장님이 무척 권위적으로 한 것처럼 되어 있는데 그게 아니라 소장님이 이**씨에게 얘기하게 된 것은 내가(권정기) ‘도저히 이**씨와 못해먹겠다’고 말해서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둘째, 상근비 문제다. 하지만 상근비 문제만은 아니다. 나는 이 문제를, 자신의 운동전망과 현실의 노동 사이에 괴리가 발생할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의 문제로 생각한다. 당시에 이**씨에게 ‘삼호현장투 기획교육’ 의뢰가 있었다. 이것에 대하여 “기획안 논의라도 좀 해보자”라고 했을 때, 내려가는 바로 전날까지도 무언가를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지만 아무런 토론제안도 없었다. 나는 명색이 연구교육위원장임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최소한 현장조직의 기획교육인데 연구소 사람들과 토론은 좀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한번 말을 했더니, 이번에는 거기 상황만 알아보러 가는 것이라고 일축했다. 나는 뻘쭘하게, 그럼 다녀와서 논의를 좀 해보자고 하고 말았다. 다녀와서 또 아무 말이 없길래 삼호 갔던 일은 잘됐냐고 물어보니, 이**씨는 ‘개인적으로 의뢰받은 것’이라면서, 연구소 사업이 아님을 강조하고, 일체 더 이상 말할 여지를 두지 않았다. 나는 이런 이**씨를 보면서, 어떻게 같이 연구소 활동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되었다. 자신의 관심과 전망은 ‘현장’이고 어쩌면 ‘교육’인데, 상근은 편집위에서 해야 하는 데서 발생하는 괴리감과 고충이 분명히 발생한다... 그렇게 간다면 기계적으로 연구소 일을 하지 않는 한 모두가 힘들어진다....
일정하게 몇 달 동안 목포(영암) 현장까지 내려가서 교육사업을 해야 하는 판인데, ‘연구소 사업이 아니다’면??
연구소는 그런 일을 하는 곳인데, 연구소 사업이 아니라면 그건 무슨 뜻이고, 또한 그정도의 교육사업을 하려면 준비하는 것도 많아야 할텐데, 자동차팀은 또 어떻게 준비할 것이며, 편집출판위원회 일들은 또 어떻게 감당되나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더욱이 최소한 연구소 연구원 이름을 가지고 하는 것인데, 기획논의나 최소한의 보고조차 닫힌 상황이라는 답답함이 몰려왔다. 그리고 이**씨가 아르바이트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이**씨한테 반상근을 권했다. 그리고, 소장님이 편집출판위원장을 이**씨가 하기로 했다고 한 날, 점심 때 이**씨 부군과 같이 1층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잘 됐다. 삼호에서도 교육비를 많이 주라고 해라. 그리고 연구소에서 반상근비를 받고, 아르바이트도 하고 그러면 되겠네...”라고 말을 했다. 그때는 아무 얘기가 없어서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그날 오후 회의 준비를 하면서, 회의안건지에 상근연구진의 상근활동비에 대해 정리를 하고 나서 이**씨한테 이렇게 정리하면 되겠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때 이**씨는 “그렇게 받고는 일 못하지요”라고 했다. 반상근 상근비를 받으면서는 편집출판위원장을 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상근비 문제가 불거진 것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였고, 항간에 말이 돌 듯이 이**씨가 노힘이 아니라서 그랬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다. 또한 다른 신입들에 대해서는 뭐든지 너그러우면서 왜 이**씨한테만 그랬냐는 뒷 얘기도 있지만, 그 판단은 동지들한테 맡기고 싶다. 다만 한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이**씨는 연구소의 주된 주체였어야만 했고, 다른 이들을 연구소로 조직하고 또한 이끌어나가는 사람이었어야 했다는 점이다.

- 상반기 내내 상근연구진 구축 문제, 사업의 가닥을 잡는 문제들이 줄을 이었다. 상근연구진 목요토론도 설치했지만 역시 충분한 준비가 되지 못했고, 하반기에도 야심찬 상근연구진에 의한 주제연구기획도 해보았지만 추진력을 상실하면서 흐지부지 되었다. 정말로 내가 무능해서 그런 것인가를 머리를 쥐어뜯으며 생각해보았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결정적으로 사업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은 6월말에 있었던 집행위원회에서 <연구원 토론회> 제안이 기각된 것이 가장 큰 계기이다. 나는 연구소가 자신의 내용을 가지고 사업하기 위해서는 연구원들이 활발하게 연구소에서 토론하고 학습하고 이렇게저렇게 모여서 연구하는 것이 가장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기본이 모여서 연구소의 사업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연구소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아니 그것이 먼 미래의 모습이라면 지금 당장 <연감>사업이나 <토요노동대학>, 그리고 <현장에서 미래를>의 내용생산, <연구팀들>의 자생력 증강 등 과제가 잔뜩 쌓여 있는데 이 일들을 모두 어떻게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를 놓고 고민하다가 하나의 방안으로 <연구원토론회>를 설치하자고 연구교육위원회에서 논의제안을 했고, 이것을 주관할 수 있는 연구원이 나선다면 설치하자고 해서 <연구원토론회>를 추진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문제의식이 통한 동지가 나타났는데, 오랫동안 연구소에서 자원활동을 해오다가 올해야 현대차노조프로젝트에 결합하면서 신입연구원이 된 김경근씨와 적극적으로 한번 연구원토론회를 조직해보자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그래서 집행위원회(2004년 제3차. 6월29일)에 제안서를 제출하게 된 것이다.
아래는 그때 김경근씨가 제출한 한노정연의 정체성과 진로 모색을 위한 내부 토론회 제안서 중 일부이다.
........
한노정연의 목표가 뭐였더라?
한노정연은 현장성 계급성 전문성을 표방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최소한 제 자신에게는 하나의 이미지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한노정연의 지난 10여년간의 역사동안 이제 그것들은 껍데기 밖에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단순히 그런 구호를 외칠 것이 아니라 당연히 구호의 내용을 이론과 실천으로 충실히 채워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장성이란 무엇이며 계급성이란 무엇이며 전문성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내용을 만들고 그것을 공유하고 나아가 그것을 널리 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노정연은 어떻습니까? 실천은 차치하고서라도 어떠한 세계관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총체적인 관점은 고사하고 부분적 영역들에서도 입장만 있을 뿐 구체적이고 명확한 대안과 계획을 제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있는데 보여줄 능력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과연 있기나 한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현장에서 미래를󰡓 모색할수 있는지에 대한 비전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런 비전을 만들어낼수 없다면 이미지뿐인 현장성과 계급성을 버리고 󰡒대세󰡓를 따르는 것이 현명한 일이겠지요.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가지고 있고 이러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구체적으로 그리고 총체적으로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계급? 아직도 그 얘기니?
적어도 제가 생각하기에는, 지금 한노정연이 다루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은 그리고 구성원 내부에서 가장 많은 의견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은 아마도 󰡐계급󰡑에 대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계급에 대한 다양한 의견과 논쟁이 있었던 것은 비단 오늘날에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맑스가 계급을 󰡐발견󰡑한 이래 계급에 대한 논쟁은 끝없이 이어져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벌어지는 논쟁은 이전의 논쟁들과 질적으로 엄청난 차별성을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계급이 무엇인지에 대한 숱한 논쟁을 넘어서서 이제는 계급, 시민, 대중, 다중, 민중 그 무엇이 운동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전면적인 논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른바 󰡐좌파󰡑 내에서조차 계급은 다시 고민되고, 변화되고 더 나아가 폐기되고 있습니다. 한노정연이 가지는 원칙들의 중요한 뼈대 중의 하나가 계급에 대한 지향이라면 지금 이 시점은 한노정연이 생각하는 계급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반드시 필요한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히도 계급이 무엇인지를 말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서 서로간의 생각을 공유하고 하나로 모아나간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처럼 침묵으로 일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자신만 계급성을 지니는 것에 그칠 때가 아니라, 자신만의 계급성을 지니는 것에 그칠 때가 아니라 계급 논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대체 우리는 계급을 무엇이라고 보고 있는지, 어떤 개념으로 쓰고 있는지, 그 󰡐계급󰡑 속에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에 대하여 정립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장성󰡑도 마찬가지겠지요.

이런 토론들, 다분히 󰡐원론적󰡑이랄 수 있는 주제들에 대하여, 하지만 엄연히 한노정연에서 지향하는 그 󰡐원론󰡑들에 대한 한노정연 내부의 토론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제안서를 제안설명했을 때, 소장님은 거의 노발대발이었고 동석한 집행위원들 대부분이 그러한 소장님과 거의 비슷한 맥락에서 이 토론회 제안문을 묵사발 놓았다.
나는 거기에서 거의 절망적이라고 생각했다. 이정도 제안도 못받을 만큼 취약해져 있단 말인가? 우리 연구소가? 마치 손가락 한 개만 들이대도 무너져버릴 듯 움츠러들어서 도사리고 있는 어떤 물체를 보는 것 같았다. 무엇이 이렇게 연구소 집행위원들이나 남아 있는 연구원들을 몰아세운 것일까? 나는 난생처음으로 회의 석상에서 미친놈/미친년 소리를 들어가면서, 이 토론회가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허사가 되었다. 나는 그제서야 2004년의 연구소 정세를 잘못 판단했음을 알 수 있었다. 연구소의 남아 있는 성원들에 대해 가지고 있던 신뢰는 완전히 삭감되었다. 도무지 토론이 되지 않는다. 토론을 하고싶어하지도 않는 것은 아닐까?
연구원들이 토론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한, <연구팀>이건 <연감>이건 <현장에서 미래를>이건 미래는 없다고 여전히 나는 판단한다.
<연감>팀에서 연구팀 및 연구진들에 대한 조직화 책임을 맡았던 나는 더 이상 <연감>팀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연감팀에서 나온 것이다.
연구자도, <연구팀>도 더 많이 조직해야 한다는 생각과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렸다. 있는 연구자와 연구팀을 추스르는 것만도 기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현장에서 미래를>에 대해서 나의 생각은 50% 이상이 현장에서 올라오거나 직접 취재되거나 해서 한번 걸러주는 분석력을 가진 글들로 채워져야 한다고 주장도 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연구원들이 부지런히 연구하고 그 결과의 일부로서 채워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른 사람들과 충분히 소통하고 토론하고 그 결과 글을 수정할 줄도 아는 연구원들의 글들이 조직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 연구원들과의 소통의 자리를 마련하고자 하는 문제인식에 대하여 “연구소가 망했다?니... 오히려 계급적으로 강화되었는데...”라고 하는 문제인식을 하는 사람들 속에서, 연구소의 진단과 전망을 어떻게 같이 찾아낼 수 있을지에 대하여 고민이 배가되고 막막하기만 했다. 한 연구원이 제기한 문제제기에 대해 그렇게도 자신감이 없는 상태라는 것이 나는 아직도 이해가 안된다.

- 그런 이유들이 복잡하게 작용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포커페이스로 사업을 하지 못한 것은 명백히 나의 잘못이고 무능이다. 사업항목들마나 안한건 없지만 그렇다고 처음 년초의 생각과 결의처럼 살지는 못했다. 내가 혼돈스러워할 때 무엇보다도 <상근 동지> 들에게 고스란히 그 부담이 돌아가는 닫힌 구조와 상황을 돌파하지 못한 것이 힘들고, 그것을 돌파할 수 없었던 2004년 연구소 정세가 원망스럽고, 뒤늦게야 그렇게 판단하게 된 근거 없는 낙관이 고통으로 되돌아온다.
지금부터라도 최선을 다해서 현재의 상황과 투쟁하는 것만이 진정한 반성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2005.1.26)
 
7. 그리고 사당동 시절...

사당동은 한노정연 사상 최단기간 있던 지역이 됐다... 분주하고 부산한 사람들이 많이 이동하는 동네고, 그래서 최고의 상권으로 평판 나 있는 동네기도 하다. 고리짝부터 작은 미술관까지 없는 게 없는 묘한 동네이고, 사람들이 여기서 퍼져 나가면 전국 곳곳으로 가는 사통팔달의 동네기도 하다. 그래서 아마 우리가 여기에서 각자 해산하여 퍼진다면 어디로 튈지 알수 없는 이동네를 지나가는 사람들마냥 아마도 이리저리 사방으로 날렵하게 퍼져나갈 것이다. 
당산동, 연남동, 봉천8동, 양평동1가, 그리고 사당동.... 거기 있는 식당과 주점들 및 구멍가게들, 그리고 더러는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과 나는 대략 무척 친해져서 어디서건 서로 그냥 지나치는 게 아니라 인사라도 주고받는 사람들이 생겨나곤 했다. 식당이나 주점들에서는 내가 뜨면 아주 반색을 하며 반긴다... ㅎㅎ... 이유야 뭐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하여튼 그분들도 모두모두 해방된 세상에서 사실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사당동 시절은, 새로이 시작하려는 마음이 매우 컸는데....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찼던가 보다.... 이 동네에서 연구소를 마감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은 순전히 내가 아직도 너무 어리고 천진난만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웃음을 잃어버렸던 양평동 시절보다는 행복했다. 그리고 첨에는 꿀꿀한 마음도 없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가뿐해지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적어도 나는, 이제 새로운 세계로 완전 자유인이 되어 나가는 것이다.
 
사당동에서의 과정은 2005년 11차 총회 때 내가 제출했었던 <‘탄핵논쟁’과 연구소, 평가와 과제>(2005.2.26)로 대신한다....(이글에 대한 채만수 당시 소장의 글... 한노정연 홈페이지 어딘가에 있을 테지만... 아무튼, 나는 그 채소장 글 속에서 '모리배'보다도 더 심한 언설로 낙인 찍혔다... 그때는 기도 안찼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그니도 건강에 행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라지만 내 바램은 어차피 그분 자신의 일이다...)

I. 한노정연에서 이른바 ‘탄핵논쟁’ 문제에 대하여(2005.2.26)

1. 과정

- 3월12일 ‘대통령탄핵’ 국회 가결
- 3월17일 민교협/교수노조/학단협/시민의신문/오마이뉴스 공동주최 “탄핵관련 긴급토론회: 탄핵정국과 한국민주주의의 위기” -> 채만수 소장 <신자유주의 개혁 파시즘을 경계하자> 발표 -> 디지털말(3/18), 현장에서미래를(04년4월호) 게재
- 3월19일 another0415 주최 정세토론회, “민중탄핵이다!” -> 남구현/이해영/최형익 <탄핵정국에 대한 올바른 정치적 접근과 ‘민중탄핵론’ 비판> 글 배포 -> 현장에서미래를(04년5월호 자료)
- 3월19일~20일 채만수 소장의 소장직 사임의사 밝힌 메일 답지 -> 그 다음주에 박성인 부소장, 강연자씨와 소장님댁 방문했으나 외출중이라 만남 불발
- 3월23일 집행위원회 무산
- 3월27일 권정기씨 편집출판위원장 사임의사
- 3월29일 소장님 출근 -> 이**씨 면담 -> 편집출판위원장 이**씨로 교체의견 전달(불발과정은 앞의 ‘소회와 반성’ 참조)
- 3월29일 소장님 면담: 탄핵관련한 소장님의 힘든 심정과 입장을 말씀하셨고, “저에게 사직서를 요구하시는 겁니까?” 질문했고, “그건 아니죠”하시기에, 몇가지 의견을 말씀드렸음.
- 3월 3~4주 ‘탄핵’문제로 인한 소장-부소장 대립문제의 돌파구 마련을 위해 연구소 내부토론회를 4월17일(토) 개최하기로 하고, 내부토론회 준비팀을 구성(박성인 부소장 팀장, 권정기, 강성윤, 김두한으로 팀 구성됨)
- 4월17일 내부토론회: 채만수 소장 불참, 남구현 부소장 참석. (참석자: 남구현, 박성인, 권정기, 강연자, 강성윤, 김두한, 박용준, 박혜림, 이은숙 등)
- 9월4일 채만수 소장 “소부르주아민주주의와 노동자계급운동의 독자성” 원고 인터넷 연구소홈페이지, 노힘 홈페이지 등에 게시. (첨부된 글 소개문: 첨부한 글은 <진보평론> 제21호(2004년 가을)에 싣기 위해서 밤을 새워 쓴 것입니다. 물론, 현시기 노동자 계급운동이 처한 상황에서 극히 필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러나 일부 편집위원들의 검열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명백한 지적 사기를, 그것도 적대의식에서 목적의식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지적 사기를 소부르주아적 점잖음과 진한 동업자 의식으로 감싸주는 것이 요즘 '진보'를 자처하는 일부 젊은 지식인들의 진보적인 직업윤리인 모양이죠?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면 맘껏 퍼날으세요.) --- 20040904 채만수)
- 9월6일 주간회의, 9월9일(목) 긴급확대집행위원회 소집을 제안.
- 9월9일 확대집행위원회, 채만수 소장 불참(*불참사유 메일내용 아래 첨부) -> 간담회로 처리됨. ‘탄핵논쟁’ 관련 대책논의 -> 연구소 내부토론회를 다시 열어 현 사태의 해결방안을 모색해 나가자고 의견을 모음. 그간의 ‘탄핵논쟁’ 관련 자료들을 모으고 목록을 메일발송하여 모두 숙독하여 올 것을 주문.(메일 내용: 지난 9월 9일(목) 긴급소집된 확대집행위는 소장님과 이사장님께서 참석하지 않으셔서 간담회로 처리되었는데, 이번 논쟁과 관련하여 연구소에서는 어떻게 풀어가는 것이 좋을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진행되었습니다. 그 결과 핵심적인 쟁점 사안을 놓고 연구소 내부토론회를 열어 깔끔하게 마무리짓고 가자는 데에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그래서 남구현동지는 회자되고 있는 주요 부분에 대한 본인의 입장을 정리한 간단한 페이퍼를 제출하시기로 하였고, 연구원들은 기간 제출된 글들을 읽고 각자의 생각을 정리해서 토론회에 임하자고 결의하였습니다. 물론 확대집행위에 오시지 못한 연구원들께서도 가능하시면 토론회에 참석하시어, 적극적인 의견개진을 해 주시길 바랍니다.)
(*불참 사유 메일 내용:
9월 9일 학대집행위원회에 보내는 글
최근 제가 남구현·이해영·최형익 교수 등에 관해서 발표한 글을 주요하게 문제삼아 󰡐확대집행위원회󰡑를 소집한 데 대해서 심히 제 입장을 간단히 밝히고자 합니다.

1. 우선, 저의 행위가 주요한 논의의 대상으로 될 것으로 예정되어 있기 저는 회의에 참석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게다가, 저는 󰡐확대집행위원회의󰡑 소집에 관한 정식 통고도 받은 바 없습니다.)

2. 연구소가 이를 주요 주제로 󰡐확대집행위원회의󰡑를 소집한 데 대해서 심히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연구소를 포함하여 어떤 개인이나 조직도 이 사항에 대해서는 󰡐논쟁󰡑―문제의 글에서도 명백히 밝힌 것처럼, 저들은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이고 그것으로써 진한 계급적 적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논쟁󰡑이라는 규정은 적절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모욕적이기도 하지만, 일단 그렇게 부릅시다―의 내용으로서만 개입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지, 󰡒어떻게 같은 조직 내에서 ...󰡓 운운하면서 드러난 문제, 대립?갈등을 미봉하려는 움직임은 이론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움직임은 사실 가장 타기해야 할 분파주의적 행동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3. 나의 상식·지식·판단으로는, 문제의 글에서 명확히 밝히고 있는 것처럼, 저들은 󰡐맑스󰡑 운운하면서 명백히 사기를 치고 있고, 그러한 사기를 통해서 자신들의 종파주의적인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만큼 저들의 일련의 행위는 노동자 계급운동의 진전에 심히 위험한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그것을 폭로하고 비판하고 그에 낙인을 찍는 것이 우리의 이론적·정치적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내용적인 개입이 아닌 어떤 논의나 결정도 그들에 대한 나의 폭로?비판?낙인을 멈추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의 나(와 우리)의 위험한 󰡐적󰡑(!)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이 범한, 그리고 범하고 있는 오류에 상응하는 내용과 형식의 자기비판을 하고 나서지 않는 한, 나는 앞으로도 가능한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그러한 작업을 계속할 것입니다. 물론, 그 폭로와 비판의 내용이 오류일 경우 그 모든 낙인은 나의 것이 되겠지만!

4. 다시 한번 옳지 못한 󰡐확대집행위원회의󰡑 소집 의도에 유감을 표시하면서 이 글을 보냅니다.
20040909 채만수 )))

- 9월17일(금) ‘탄핵국면에 대한 이론적 입장과 평가’ 2차내부토론회, 채만수소장 불참(출국)
- 이은숙 연구교육위원장 상근 휴가 신청(10월)
- 10월15일(금) 3차 내부토론회, 채만수 소장 참석, ‘적대적 대립관계로서 공존할 수 없다’는 입장 재확인. 입장차이를 확인하고 해결방안은 찾지 못한 채 내부토론회 종료.
- 11월2일 채만수 소장, ‘논쟁’을 ‘현상태에서’ 봉하기로 했다고 홈페이지에 발표 (제목: 이른바 ‘민중탄핵론 논쟁’과 관련하여/ ‘탄핵정국’에서의 노동자계급의 대응을 둘러싼 남구현 교수 등과의 이른바 ‘민중탄핵론 논쟁’과 관련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논쟁’의 격렬함에 거북해 하고 당혹해 하는 일부 회원을 고려하여, 그리고 직접적으로는 지난 10월 30일 만남에서의 박성인 부소장 동지의 더 없이 강력한 권고에 부응하여 ‘논쟁’을 ‘현상태에서’ 봉(封)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는 물론 ‘현상태로도’, 혹은, 같은 말이지만, 지금까지의 전개로도 관련 쟁점들이, 미진하긴 하지만, 사실상 명확히 해명되었다고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만일 이러한 ‘현상태’에 변화를 가하는 어떤 요인이 발생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논쟁’은 다시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10월 15일에 제출된 “연구소 내부토론회용 자료”와 관련해서는, 그것은, 거기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너무나 급히 작성되어 미진함뿐 아니라 비문과 오타를 포함하고 있지만, 그리하여 수정·보완을 거쳐 다시 제출하겠다고 약속했었지만, 그것 역시 현상태대로 그대로 봉하고자 합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불성실은 책하시되, 여러 정황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논쟁’의 내용에 관심을 가져주신 분들께 감사하며, 이 ‘논쟁’으로 본의 아니게 마음에 불편함을 드린 회원들이 있다면 미안한 마음을 표하고 싶습니다.
20041102 채만수 드림 ))))

- 12월18일 박성인 부소장, 홈페이지에 채만수 소장께 제하의 글 게시([채만수 소장께] 박성인 부소장이 /

채만수 소장께
어제 한노정연 송년회 뒷풀이 자리에서 채만수 소장께서는 저에게 두 가지 점을 제기했습니다.
첫째, ‘민중탄핵 논쟁’과 관련한 저의 입장을 제출할 것
둘째, 내년 2월 총회는 ‘민중탄핵 논쟁’에 대한 전면적인 평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

이 점에 대해 제가 채만수 소장께 두 가지를 이야기 드렸습니다
첫째, ‘민중탄핵 논쟁’과 관련한 저의 입장을 제출하겠다는 점
둘째, 총회준비팀원에서 사퇴하겠다는 점. 왜냐하면 ‘민중탄핵 논쟁’에 대한 평가가 전제되어야 한다면 평가 이전에 총회 준비를 해 나가는 것은 맞지 않기 때문에.

그런데 두 가지 문제가 걸렸습니다. 이 점에 대해 채만수 소장께서 공식적인 입장을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첫째, 채만수 소장께서는 지난 11월2일 이 홈페이지를 통해 ‘논쟁’을 현상태에서 ‘봉(封)’하신다고 밝힌바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이러한 ‘현상태’에 변화를 가하는 어떤 요인이 발생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논쟁’은 다시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채만수 소장께서는 제게 현상태에 대한 변화를 가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채만수 소장께서 ‘봉(封)’한 것을 풀겠다는 점을 공식적이고 공개적으로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둘째, 지난 연구소 수련회에서는 이후 연구소의 발전 전망을 중심으로 사업계획을 잡아나가자고 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취지에서 ‘총회준비팀’을 구성했습니다. 그런데 채만수 소장께서는 이번 총회가 ‘민중탄핵 논쟁’에 대한 전면적인 평가를 중심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기존의 총회 준비과정과는 상이 달라질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합니다. 이번 총회의 상에 대해 연구소 연구원들은 분명하게 알고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해 채만수 소장께서는 어떻게 판단하는지 공개적이고 공식적으로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후 이에 관련한 모든 논의는 이 알림난을 통해서 공개적이고 공식적으로 논의해 나갔으면 합니다.

2004.12.18.
부소장 박성인 )))

- 12월20일 채만수 소장, 홈페이지에 박성인 부소장께 제하의 답글 게시(박성인 부소장님께 /

예기치 않았던 서신이군요.
우선 말씀드리자면, 제가 박 부소장님의 요청을 받아들여 "논쟁을 '봉하겠다'"고 했던 것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다른 것 같군요. 그 말로 제가 의미했던 것은 상대방에서 그 문제와 관련한 더 이상의 발언이 없는 한 저 역시 그에 대해서 더 이상 발언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의 그 말은 그렇게밖에는 해석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 부소장님의 말씀 중에 암시되어 있는 것과 같은, 그 문제와 관련한 "어느 누구의 논쟁도 ‘봉하겠다’"는 의미일 수는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저한테는, 그리고 누구에게도, 그럴 권리도, 능력도 없는 것 아닙니까?
다음으로, 저는 연구소의 이번 총회가 그 문제에 대한 평가를 기초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연구소의 사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처럼, 지금 연구소에는 예사롭지 않은 긴장과 갈등이 조성되어 있고, 그 주요한 계기, 주요한 원인이 문제의 그 논쟁이요, 그에 대한 연구소 주요 성원의 태도 아닙니까? 이러한 상황에서 그 문제에 대한 평가를 회피하고 총회를 치루는 것은 제 판단에는, 그날 말씀드렸던 것처럼,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고 그만큼 부정직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번 총회가 지금 조성되어 있는 긴장과 갈등을 해소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한에서 제기된 문제와 그에 대해서 취했던 태도들에 대한 평가는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성되어 있는 긴장과 갈등을 해소, 혹은 최소한 완화시키지 않은 채 연구소의 발전전망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 저로서는 상상되지 않습니다. 그에 대한 전면적인 평가 위에서만 발전전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저는 그날 뒷풀이에서 박 부소장님께서 이 문제에 대한 평가와는 무관하게 총회를 치루겠다는 의미의 발언을 하셨을 때 적이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평가를 기초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저는 저의 이러한 요구가, 어떤 의미에서도, 박 부소장님께서 총회준비팀에 참석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아가서 박 부소장님께서 준비팀에 참가하셔서 책임있게 총회를 준비해주셨으면 하는 것이 저의 바램입니다.
기대하신 답변이 되었으면 합니다.
20041220
채만수 드림 ))))

- 12월21일 박성인 부소장, 홈페이지에 채만수 소장께2 제하의 답글 게시 ([채만수 소장께2] 박성인 부소장이 /

답변 잘들었습니다.
몇 가지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0. ‘예기치 않게’ 홈페이지에 공개적으로 질문을 드려, 혹 당혹스러웠다면 죄송합니다.
연구소를 둘러 싸서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는 논의가 정보를 왜곡하고, 연구원 상호간의 감정만을 더욱 자극하고 있어, 투명하고 공개적으로 논의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0. 먼저 ‘토론을 봉(封)하는 것에 대한 이견’에 대해 말씀드려야겠군요.
지난 10월 30일 토요노동대학 졸업식 이후 뒷풀이 자리에서 저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탄핵국면을 둘러 싼 적대적인 논쟁을 중단’할 것을 요청드린 바 있습니다.
첫째, ‘탄핵국면을 둘러 싼 논쟁’은 노동자계급운동과 관련하여 중요한 쟁점을 포괄하고 있지만,
둘째, 이 논쟁이 실천적으로 아무런 담보를 하지 못하고 있고, 이후 이러한 쟁점은 현실의 운동의 진전 속에서 계속 제기될 것이라는 점.
셋째, 논쟁이 적대적인 성격을 띄고 있어, 주변에서도 적대적으로 되어 버린 논쟁에 끼어들기 힘들어 하고 있다는 점.
이런 이유로 저는 채만수 소장께 ‘탄핵국면을 둘러 싼 논쟁’을 중단해 줄 것을 요청했고, 이에 채만수 소장께서는 그러겠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리고 11.02.에 연구소 홈페이지에 논쟁을 ‘봉(封)’하겠다는 입장을 올렸습니다. 물론 이 논쟁과 관련하여 누구도 다른 사람이 입장을 발표하는 것을 '봉(封)할 권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이 논쟁과 관련하여 입장의 발표를 강요할 권한도 없습니다. 왜 ‘논쟁의 중단’을 요청한 저에게, 논쟁을 ‘봉(封)’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비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입장을 제출하라고 합니까?

0. 저는 11월2일, 채만수 소장께서 ‘논쟁을 '봉(封)하시겠다’는 입장을 듣고, 이후 내년 2월 총회 준비와 관련해서는 ‘연구소의 발전 전망’을 중심으로 준비해 나가는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12월 3일 총회 준비를 위한 ‘연구소 조직발전전망’ 수련회에서 [발제문]을 제출했습니다. 사전에 [발제문]에 대해 채만수 소장께 검토를 요청했고, 채만수 소장께서는 ‘토요노동대학’과 관련한 지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고, 다른 것에는 이견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토요노동대학과 관련해서는 사회과학대학원을 준비하시고 계신 오세철 교수와 채만수 소장께서 만나 논의한 후, 다시 이야기해 보기로 했습니다. 제 발제문은 물론 '연구소의 이후 발전 전망'을 중심으로 사업계획과 조직체계를 제안한 것입니다. 물론 수련회에서 제가 제출한 [발제문]에 모두가 동의한 것은 아니지만, 어쨋든 사전에 채만수 소장과 논의를 거쳐 제출한 것입니다. 그런데 송년회 뒷풀이 자리에서는 총회가 '탄핵논쟁에 대한 전면적인 평가를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혼란스럽습니다.

0. 권정기 동지, 사태를 왜곡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연구소의 전망과 관련하여 동지는 "독자적 연구소인가 아니면 계급정당의 산하연구소인가를 두고 이견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는 주로 연구소 내부의 "노힘"성원들과 비"노힘" 혹은 반"노힘"성원들과의 갈등으로 표출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쟁점의 근거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밝히길 바랍니다.
첫째, 제가 12월3일 [발제문]에서 제출한 연구소의 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노정연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 자본의 위기 시대󰡑에 󰡐노동운동의 민주적·계급적 발전󰡑을 위한 이론과 정책의 생산과 󰡐계급적 좌파진영의 혁신과 연대를 통한 노동자계급정당󰡑 건설에 기여할 수 있는 󰡐독립적인(정치조직이나 대중조직으로부터) 좌파 연구소󰡑를 지향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날 논란의 된 지점은 '노동자계급정당 건설에 기여할 수 있는' 연구소'라는 지점이었고, 이에 대해 수련회 논의를 통해 이 문구를 삭제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문장이 '독자적 연구소'와 '계급정당 산하 연구소'가 대립하고 있습니까?
둘째, 연구소의 노힘 성원들과 비노힘, 반노힘 성원들이 갈등하고 있다고? 묻겠습니다. 채만수 소장은 노힘 성원입니까? 비노힘성원입니까? 권정기 동지는 노힘 성원입니까? 비노힘 성원입니까? 사태를 더 이상 왜곡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2004.12.21.
부소장 박성인 ))))

2. 탄핵정국에 대한 정세인식과 좌익의 투쟁과정 및 논쟁과정에서 배울 점(노동자정책팀 토론 이번 총준팀 회의에서 이 자료를 보고 강성윤씨는 정책팀이라고만 하면 ‘그 이전에 이황현아씨는 이와 좀 다른 입장을 보인 적이 있어서 이름을 밝히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정책팀의 그날 토론 참석자는 저와 박용준 연구원, 장영호 현장회원입니다. 참고로 이황현아씨가 총준팀에 보내온 입장은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보낸날짜 2005/01/06 15:24:04 [GMT+09:00] 보낸이 이황현아 <treaso n @ jinbo.net>
받는이 kallikyung @ dreamwiz.com 제목 [Re] [한노정연 총회준비팀]2차회의 안건과 속기록
[한노정연 총회준비팀] 2차회의 안건과 속기록 잘 보았습니다. 탄핵논쟁을 둘러싼 여러 견해들이 오고 간 것 같군요.
김영수 동지나 이은숙 동지가 제출한 문건의 내용이 자세히 전달되지 않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회의에 참여한 사람과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그런 점에서 이해의 차이가 발생할 거라 생각됩니다.
당시 논쟁에 대해 제가 판단하고 있는 것은 이런 겁니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신자유주의 비판의 적실성은 채소장에게 있지만, 그런 점에서 남구현 부소장은 신자유주의 비판에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고 봅니다.
채소장의 논쟁법은 좌파정치의 가장 나쁜 점을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채소장의 논쟁을 보며 스탈린이 떠올려지는 것은 왜 일까요? 아무리 좋은 내용도 설득과 토론을 위한 겸손한 노력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없으면 아무 짝에도 쓸 수 없다는 걸 느낍니다.
나만 옳다는 식의 채소장의 태도(신 구좌파 논쟁, 기회주의 개량주의 세려세력에 대한 소장의 독설 등)는 이제까지도 몇 차례 문제를 발생시켰다고 보는데 이번엔 회복불가능할 정도로 치명적이었다고 느낍니다.
이미 한노정연은 당시 그 두 사람을 어찌하지 못할 정도로 제어력이 없는 상태였다는 게 적절한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채-남 논쟁은 필요한 논쟁이었지만 두 사람을 보는 사람들은 정말 짜증이 났다는 게 솔직한 제 표현입니다.
다시 좌파의 정치에 대해 고민해봅니다.
)

- 적을 단결하게 해주는 투쟁은 최악의 투쟁이다. ‘민중탄핵’ 주장은 그 대원칙들에 동의하지만 그 세부적 적용에는 고민이 많았어야 한다. 투쟁주체에 대한 고려, 전술운용 차원의 문제에 대한 고려 등으로 볼 때, 민중탄핵론은 전술이 될 수 없었다. 원칙을 넘어 그것이 전술로 배치되는 순간 소부르주아를 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결시키고, 사회주의자를 단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분열시켰다.

- 탄핵정국은 노무현 정권의 한계를 드러낼 수 있는 기회였다. 좌익은 노무현정권의 한계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 한계를 드러내는 방식은, 신자유주의 정권이어서 안된다는 원칙론적 접근이어서는 대중을 설득할 수 없다. 좌익은 민주주의 논리에 입각한 전술운용이 필요했다. ‘탄핵’발의는 87년투쟁에서 노동자계급이 투쟁결과 획득한 민주주의에 대한 도발이자 모욕이기 때문에 그것을 응징해야 한다는 방향에서 접근했어야 한다. 노무현정권의 한계를 연구해서 설교하는 방식으로는 대중을 설득할 수 없다. 대중이 스스로 깨닫게 눈으로 직접 보여주는 방식이어야 한다. 원칙만 얘기하고 개입고리를 찾아내지 않는 것은 소아병적 발상이다. 주장은 있되 정세개입력을 갖지 못한 채만수 소장의 글과, 노무현정권 활용론이 탄핵정국에서 노무현 살리기로 넘어가게 됐던 남구현 부소장 및 이해영 최형익의 글 모두 정세에서 무기력한 좌익의 자화상이다.

- 좌익은 예를 들어 국민소환권/발의권 주장까지는 할 수 있었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소부르주아의 전유물이 아니다. 좌익이 민주주의 논리에 입각하여 투쟁전술을 배치했을 때, 한나라당은 부르주아 의회주의의 한계를 드러낸 세력이 되고, 열우당과 지지세력은 국민소환권 등의 주장 앞에서 분할되었을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부르주아체제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 단타성 투쟁도 배치할 수 있다. 좌익이야말로 민주주의 논리에 입각한 정세개입이 필요했고 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아직도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해 인정하고 있다. 거기에 개입하여 사회주의자만이 철저한 민주주의자라는 것을 심었어야 한다.

- 덧붙이는 내 생각: (1) 논쟁의 과정이 초기에는 정세 속에서 발단된 것이지만, 이후에는 정세와 무관하게 주장 대 주장, 논리대결 방식으로 진행됨으로써, 논쟁내용이 남지 않고 인신공격만이 남았다. (2) 채-남 간에 ‘적대적 대립’각을 세운 채만수 소장의 입장에 대하여 동의할 수 없다. 채-남 양쪽 다 좌익이다. (3) 현재 연구소 상황(채만소 소장이 ‘적대적 대립관계로서 공존 불가’를 선언하고 있는 상황)에서 채-남이 공존할 수 있는 길은 없다. (4) 채-남 두분 모두 탄핵정국에서의 논쟁에서 현재의 연구소 상황을 초래한 책임을 지고 소장-부소장 직을 내어놓아야 한다.


II. 연구소의 의미와 전망

1. 2004년 한노정연 사업에 대한 개인적인 소회와 반성
(* 앞의 “양평동 시절” 참조)

2. 2004년 연구소 평가와 이후 전망, 그리고 연구소운동의 의미와 전망

1) 2004년 연구소 평가와 전망

(1) 총괄

- 연구, 교육, 출판 등 연구소의 3대 사업영역에서 빈약한 사업역량을 노정. 연구결과를 생산하고 이를 교육과 연계하고 또한축으로는 출판물로 외화하는 흐름이 전혀 형성되지 못함.
- 상호 토론에 둔감하고 선험적이고 단정적인 재단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을 지속.
- 상임역량, 상근역량과 연구진의 결합력 양자 모두 부족 -> 각 사업에서의 무리함과 부실초래.
- 이러한 원인은 매우 복합적. 분명한 것은 연구소의 대대적인 혁신과 사업구상 없이는 전망도 갖기 어려움.

(2) 연구사업/출판사업/교육사업

= 연구원의 집단적 연구성과를 조직할 수 있는 방법은 연구프로젝트, 단행본, 월간지 현장에서미래를, 토론회, 연감사업(04년) 등이 있음.
- 2004년에는 그 어떠한 방법들도 연구원의 집단적 연구성과 조직화에 기여하지 못하였음.
- 기존 연구원간의 갈등과 반목을 해소할 수 있는 여유를 갖지 못한 한해였고, 그것은 ‘탄핵논쟁’으로 더욱 격화되었음.
- 새로운 연구역량의 발굴을 위한 하나의 경로로서 기초/연구/세미나팀도 팀장들간의 소통부재 속에서 역량발굴과 연구소사업으로의 연계 등이 상실되고 새로운 경로도 찾아내지 못하였음.

- 연구프로젝트: 2개의 프로젝트가 연구원들에 의해 운영되었지만, 개별 맨파워 의존성이 강했고, 새로운 역량의 결합에서도 미비하였음. 중간발표회 등을 통한 연구소 내부 소통의 과정이 제대로 조직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프로젝트의 이론적/실천적 완결성을 높여내는 데에 연구소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

- 단행본: 단행본 기획은 일체 이루어지지 않았음. (*편집출판위원회 활동보고 자료 참조)

- 현장에서 미래를: 연구원의 다양한 원고를 조직해내고 있지 못함. 연구세미나팀들이나 연구원들이 기고를 안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기고를 조직할 것인지에 대한 구상이 중요. 누구나 글을 쓰고 싶어 하는 현미도 아니고, 활동가라면 누구나 읽고 싶어하는 현미도 아님. 구독자 정체 내지 축소현상이 최근 수년동안 계속 이어지고 있음. (정회원과 자료교환 등을 제외한 순 구독자 수는 2월중순 현재 228명.) 1년 내내 주되게 현미를 장식한 것은 ‘...비판’과 ‘탄핵논쟁’ 관련 글들임.

- 연감사업: 연구원들의 결합력이 가장 많이 조직되어야 하는 사업임. 그리고 가장 소망스러운 연구원 발굴의 경로로도 될 수 있음. 그러나 현재는 그러한 전망을 갖기 어려운 상태. 아직은 한번도 발간하지 않은 시초기간이기 때문에 덜하지만, 앞으로 지금과 같이 지속된다면 이제는 연감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대한 일목만 하나 더 늘어나서 연구소에서 연감 때문에 또다시 일에 쫓기는 상황을 가중시키게 될 것임.

- 토론회: 월례콜로키움과 심포지움, 금요정세토론이 있었는데, 콜로키움은 형식화된지 오래됐고, 심포지움 역시 집단적 연구결과물은 아니었다. 심포지움 준비팀이 있었지만 토론은 공전했고, 심포지움 이후 현미에 녹취록 요약조차 실리지 않는 상황. 금요정세토론 역시 현미 담당자, 연감 담당자 등 주요하게 사업연계되는 연구원들의 참여가 저조한 채 지속성을 유지하는 데 그쳤음.

= 연구성과를 외화하고 또다른 연구관심을 조직하며, 대중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사업이 교육사업임.
- 2004년에는 각별하게 토요노동대학이 설치운영되었음. 그러나 토요노동대학의 주요한 수강층을 어떻게 잡을 것인지, 그들에게 어떤 수준에서 교육을 진행할 것인지, 교재는 어떻게 확보하게 할 것인지, 강사진은 어떤 기준에서 어떻게 선정할 것인지, 이러한 모든 준비들이 대부분 누락되었음. 사실상 이러한 교육사업의 경우 방대한 시스템은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시스템이 필요한 것임. 그러한 시스템 구축이 어려운 것이 연구소의 현재 조건임.

(3) 이후 과제

- 2004년은 연구소에서 그동안 공존 아닌 공존을 해온 거대한 대립적 입장들이 존재하다가 폭발했음을 보여주었음.

- 연구소의 구성원들, 정회원 전체에서부터 사무실 상근연구원에 이르기까지 전면적으로 연구소의 상과 발전 방향에 대한 고민을 통해 완전 재조직화되는 것이 선차적 과제임.(2005.2.26.)

8. 마감하며

사랑은 해방의 씨앗이고 과거는 미래의 씨앗이다. 현재는 과거이고 미래이다. 과거는 현재와 미래 속에서 숨 쉴 수 있을 때 과거일 수 있다. 지나간 일들이 나와 우리에게 무엇일 수 있기 위해서는 현재를 거침없이 달려 나가 미래를 열 때뿐이다. 인간의 삶에서 과거현재미래 라고 하는 시제는 그렇게 결합되고 분열된다.
 
영욕이 함께했던 한노정연 해산을 예비하며 나는 뭐라할 수 없는 자괴의식과 격렬하게 싸웠다. 그러면서 주위에서 침울하고 심각한 그 어떤 조짐이 발견될라치면 나의 자괴의식은 더욱 더 맹렬하게 불타올랐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고 씩씩한 것 같았다. 그래서 아쉬움을 가득담고 회한 속의 무거운 침묵이 깔려 있는 해산총회 자리에서 사람들은 잠깐이나마 나의 마지막 발언 때 얼굴을 펴고 웃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거기 왔던 한사람한사람들이 웃는 게 좋다. 앞으로도 그렇게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해산총회 전전날은 연구소의 컵이 하나 깨졌다. 나는 그것이 그의 운동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컵이 나를 향한 것이며 내가 만들어나가고 싶었던 한노정연에 대한 것임을 알고 있다. 나는 그 컵과 같이 한노정연이었고 박살이 났다. 나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직시했다. 화해할 수 없는 것은 마치 깨진 컵이 도로 물잔이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컵은 다시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해산총회 전날은 처음 연구소를 작당한 칠인 중 오인이 만났다. 나는 무신 의식인양 해산 전에 꼭 한번 그이들과 만나고 싶었다. 한명은 청하지 않았고 한명은 오지 않아서 다섯이 만난 것이 그때와 오늘의 우리들 모습이다. 우리는 이미 모두 헤어져 있었고 이미 곳곳에 퍼져 있다. 14년 전... 해가 바뀌어 이제는 15년전... 그때와 지금의 우리는 가슴 속에 부채를 수만개씩 품고 살아온 점에서 달라져 있었다. 모두들 노안이 와 있었고 그 사실을 놓고 한바탕 웃었다. 그리고 나는 공식적으로는 마지막으로 연구소에서 밤을 지샜다.
 
한노정연은 훌륭한 콩나물통이었다. 한노정연에서 자라난 콩나물은 빛깔도 맛도 좋았다. 더러 썩은 콩나물도 나왔지만 사람들은 곧 가려냈고 쌈빡하게 잊어줬다. 창립한 뒤 몇년간 이 콩나물통은 계속 비워지고 새로운 콩나물들이 자랄 수 있었다. 콩나물통을 떠받들고 있었던 가레도 튼튼했고 그 밑에 두어지는 물다라니도 튼튼했으며, 콩나물들에게 주어진 물들도 청량하고 깨끗했다. 물을 푸는 바가지도 빛이 났고, 물을 주는 손길은 열정과 사랑으로 가득했다. 콩나물들은 사방으로 퍼졌다.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까지 한다면, 한노정연과 연을 맺은 사람들은 수천명을 헤아릴 것이다. 그/녀들은 한노정연을 여러가지 모습으로 변형시켜내고 있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세상 앞에서 당당하게 바꾸어나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역사다.

그리고.... ‘운동’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부조리한 세상에 맞서는 일일 텐데... 한노정연도 하나의 운동체였고.... 나도 그 속에서 운동한다면서 모든 가치 중에서 최우선시하며 살아왔는데.... 그 운동이 혹시 부조리를 다른 방식으로 퍼트리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한노정연의 해산은 ‘운동체’로서의 한노정연이 수명을 다한 것을 의미한다....

나는 우리가 ‘한 일도 무지하게 많았다’는 데 안주하면서 아쉬워하는 것에 그치기를 바라지 않는다.... 부조리한 세상에 맞서는 운동을 하기 위해 이제 한노정연이라는 틀을 벗어던지고 사방으로 흩어져서 날아가는 것이 ‘발전적 해소’에서 ‘발전’이라고 생각하므로, 나는 거기에서 나와 우리들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들도 감성을 바꾸어야 하지 않겠냐고... 운동체들 속에서의 문화를 바꾸어야 하지 않겠냐고....

우리는 이제 처음처럼 그렇지만 그때 그사람들이 되어 다시 길을 잡아 떠난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마주치더라도 그전처럼 살고 있지 않은 우리가 되어 있기를... 남성우월주의와 가부장제와 나이주의와 유사가족주의에서 빠져나와 있기를.... 자기해방되어 있기를... 그러면서 모두모두 행복해질 수 있기를 나는 바란다. (전 부소장)

2007-01-18 19: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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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항상 동지이길... phl / 2007-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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