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간특별호: 한노정연 백서] 2007.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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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지속성을 향하여

현장에서 미래를  제종간특별호
박종성

생명의 지속성을 향하여


내가 연구소를 알게 된 지도 10년이 된다. 처음에 연구소를 알게 되었던 것이 96-97년 노동법 개악 투쟁이었다. 그 후 시간이 흘러 2005년에 1년 남짓한 연구소 상근활동을 하게 됐고, 다시금 얼마의 시간이 지나 낡은 해는 마지막을 향하고 우리는 또 다른 새해를 기대하고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 와중에 10년은 넘은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의 생명이 그 한 생명을 마치고 있다. 모든 생명이 그러하듯이 연구소라는 생성 또한 시작과 끝을 처음부터 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꽃을 피우는 순간에 가장 고통스러운 것처럼 사회를 건강하게 만든다는 것 자체가 고통의 연속을 동반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유지와 확장을 위해 죽음의 정치학이 존재하며 동시에 위태로운 생존을 위한 줄타기라도 하듯이 생존을 위한 몸서리치는 투쟁 또한 죽음의 정치학과 짝을 이뤄 생명의 정치학으로 공존하듯이 말이다. 이는 한 개인의 존재에서도 그러하며 조직의 생리에도 적용 가능할 것이다. 노동자와 연구소는 시작과 끝이 있다는 생명이라는 범주에서 같은 위상을 갖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연구소의 발전적 해소와 새로운 2007년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생명과 노동자 계급에 대한 단상을 적어 본다.

생명의 부정을 먹고사는 자본주의

생명은 자기 보존적이며 자기 재생산적이다. 생명이 자기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지속성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생명체가 연속적 운동의 성격을 갖지 않는다면 자신의 생존이 불가능하며 더 이상 생명체이기를 그치기 때문이다. 이는 사유 속에서의 명백함이 아니라 물질적 존재로서의 명백함이다. 다시 말하면 생명체는 자신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여러 기능을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이를 테면 노동할 수 있는 기능을 위한 휴식의 시간을 자신이 조절 할 수 있어야 한다. 더 이상 추상적인 얘기로 들리지 않기 위해 땅으로 내려와 보자.
이 사회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일반적으로 생존 그 자체를 위한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자본가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때 노동자가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이 생명의 본질적 특성인 지속 가능성과 어떤 관계로 설정되고 있는가? 생명의 지속을 위해 자신이 조절하는가, 아니면 외부적 강제에 의해 생명의 점차적으로 죽어가면서 생존이 가능한가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사회에서 생명의 지속은 외부적 강제의 틀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 결과 생명체 자신의 본연의 모습은 일그러진 형상으로 질식당하고 있다. 따라서 생명의 지속성은 자발적이지 못하고 강제적 조건에 놓이게 된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자본주의 하에서의 노동이 ‘강제’노동이기 때문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계약으로 은폐된 노동, 바로 강제노동 속에서 마치 자발성을 갖는 듯한 노동 또는 능동적 노동인양 취급되는 노동이다. 노동의 강제성은 이미 맑스가 자본주의 사회의 잉여가치의 비밀을 풀기위한 작업 속에 등장하고 있는 ‘노동력’ 개념에 함축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노동력 개념에는 지배와 강제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어서 단순한 의미를 넘어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갖는다.
자신의 기능을 조절할 수 없는 것, 즉 강제 노동이라는 외부적 힘에 의해 노동하는 인간의 내면을 역으로 통제하고 지배하는 힘으로 작동한다는 것은 이미 생명의 특성을 상실한 상태를 의미한다. 나아가 인간이 자신의 생명의 지속을 위해 조절 능력을 자신으로부터 상실하고 외부의 조건에 의해 강제적으로 역작용당할 때 드러나는 종착역은 죽음으로 이르는 길이다. 조절 능력의 상실은 우리로 하여금 더 낮은 인간으로, 단순히 먹고사는 인간으로 전락시킬 것을 강요한다.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의 이율배반적 행위는 가치의 잣대에 의해 사용가치를 양화시키는 문제, 즉 질적인 것을 양적으로 것으로 환원시키는 문제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인간의 내면으로부터의 조절은 이렇듯 양적인 것, 외부적인 것에 의해 모두 환원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적 환원은 동시에 궁극적으로 생명체로서가 아니라 사물로서, 잉여가치의 수단으로서 취급하고 그 이유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모든 노력의 집중을 그 전제로 이루어진다.
자유계약이라는 틀 속에 은폐된 강제 노동이라는 조건 하에서 인간의 내면은 마치 양적으로 것으로 측정 가능한 것이 되어버린다. 잴 수 없는 것을 마치 잴 수 있다고 하며 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수량화에는 생명의 지속이 없다. 이를테면, 노동력의 판매와 그 교환 속에는 생명체의 지속을 위한 노동력의 회복이 고려되고 있지 못하다. 자기 보존과 재생산을 위한 노동력의 회복, 다양한 문화적 욕구의 충족을 위한 활동의 시간 등등. 따라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생명의 지속에 대한 사고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인간은 자발성을 결여한 인간, 자기 조절 능력을 상실한 인간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의 지속을 위해 자신이 조절할 수 있는 인간이다.
앞서 우리는 노동력 개념이 사회적·정치적 의미를 가진다고 말했다. 이 문제를 좀 더 밀고 나가 보자. 언급한 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 노동력의 판대, 곧 ‘지출’은 계약에 의해 은폐된 ‘강제’이다. 여기서 문제는 생명체의 지속을 위해서는 생명체의 에너지의 지출, 즉 노동력의 지출이 전제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갖는 의미에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먼저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생산 활동은 인간 노동력의 ‘지출’을 전제로 하며, 이 지출은 ‘사회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노동력의 지출이 사회적으로 필요한 시간이라는 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의미한다. 이때 사회적 관계 속에서 성립하는 노동력의 지출은 사회적 필요 시간을 의미하고 이는 곧 사회적으로 조절된 지출의 시간이다. 따라서 여기서 노동력의 지출은 사회적 조절원리를 나타낸다. 다시 말하면, 노동력 지출은 지출에 대한 사회적 강제라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인간노동력의 지출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시간인데, 이때, 노동력 지출이라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시간은(계급투쟁 속에서 결정된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는다면) 단순한 의미를 넘어 계급관계로 확장되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노동력 지출은 노동력에 대한 사회적 강제의 의미, 그리고 노동력 지출이 사회적으로 강제된 것이며 사회적으로 조절된다는 것은 계급관계를 의미하므로 노동력 지출이 담고 있는 의미는 정치적 차원을 포함하고 있다. 왜냐하면 자본의 생산력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자본가는 노동력을 소비해야만 한다. 이렇게 볼 때,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는 노동력 지출의 노동력 소비로의 전화이다. 노동력의 지출의 주체는 노동자이지만, 노동력 소비의 주체는 자본가이다. 이제 노동력 지출의 의미는 노동력 소비로까지 확대되었다.
또한 자본가가 노동자의 노동력을 소비할 때 노동과정 전체에 대한 결합과 노동과정 전체에 대한 감독이라는 착취의 기능이 통일되어 이루어진다. 다시 말하면 자본가에 의한 노동력의 소비는 생산과정과 가치증식과정의 통일 속에서 기능하고 있다. 자본가가 노동력을 소비할 때 그들이 규정하는 생산의 목적은 오직 잉여가치의 생산이다. 이 속에서 노동자들은 그들의 노동력을 지출하는 것이다. 그런데 감성 없는 자본은 노동자의 노동력의 지출에 대해 노동력의 회복을 사고하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자본주의 사회라는 생명체를 지속 가능하게 하는 노동력의 지출은 노동자라는 생명의 비지속성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최대한의 잉여가치의 생산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이와 상응하는 노동자 계급의 저항을 억압하고 있기 때문에, 동시에 이 때문에 노동자 계급은 자본가에 대한 투쟁을 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전면적인 계급의 대립 속에서 자본가 계급은 자신을 끊임없이 지도적 계급으로서 확립하고 유지, 발전하려 한다. 이를 위해 자본가 계급은 노동에 대한 이유를 만들어 내며 노동의 사회적 목적을 사회의 보편적 이해로 둔갑시킨다.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의 목적은 노동력 지출의 주체들의 내부에서 자발적, 능동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체 바깥에서 주어진다. 그것도 강제적으로 주어진다. 즉 자본주의에서 노동의 목적론은 잉여가치라는 자신들의 형상이 노동자라는 생명체의 바깥에서 강제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이렇듯 21세기의 자본주의 목적론은 형상이 물질을 지배하듯이 고대 목적론과 같은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

생명을 위한 파괴의 역사를 위하여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일의 덕목은 가치의 창출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다른 어떠한 가치보다 잉여가치의 창출이 모든 것에 우선시된다. 잉여가치 앞에서는 인간도 단지 잉여가치 창출의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그런데 자본은 가치 창출의 탐욕을 더 오래 지속하고 싶어 뚱뚱한 배와 두루미의 긴 목을 하고 있다. 왜 자본은 긴 목을 하고픈가?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듯이 “어떤 미식가가 그의 목구멍이 학의 목구멍보다 길게 될 것을 기구(祈求)한 것도 이 때문이다.” 자본이라 이름 붙은 미식가는 잉여가치라는 배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입으로 모든 민중의 삶을 자신의 배로 미끄러져 떨어지게 한다. 동시는 그 입으로는 ‘자유무역’이라는 말로 탐욕의 정당성을 내뱉는다. 민중의 삶을 먹어 치우는 혓바닥은 안으로 희생과 착취를 집어삼킴으로써 자신이 “자유무역협정”임을 드러낸다. 다시 말하면, 자유무역이라는 음식을 먹는 자본은 가치 창출이라는 음식을 배어 넣고 기뻐함으로써 자신의 본질을 드러낸다. 그런데 이제 자본의 배의 탐욕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은 21세기 신성모독죄에 걸린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본이 부르짖는 ‘영원한 진리’ 인 자본의 운동의 자유를 모독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21세기 지배계급이 모시는 ‘신’은 이제 ‘자본’임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들에게는 이들이 모시는 자본의 ‘말씀’이 세계의 근거이고 존재 이유의 출발점이 된다. 마치 기독교의 ‘태초의 말씀’처럼 말이다.
그러나 노동자, 그리고 또한 비정규직 노동자! 이들은 자본이 규정하는 대상으로만 존재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런 삶은 비극에 다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낡은 해와 동시에 새로운 해, 낡은 역사와 새로운 역사는 역사의 지평 속에 공존하듯이 체제를 안정하려는 운동 속에 언제나 새로운 반란의 역사가 함께 해 왔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규정하는 것과 규정되는 것의 일방적인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시간적, 내지 역사적 시점을 잘라서 보면 자본에 의한 일방적 규정만이 보일 뿐이다. 그러나 그 단위를 넘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거나 미래로 시점을 옮겨보면 일방적 규정의 필연적 관계라는 것은 끊임없는 파괴와 생성의 공존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우리 사회의 자본과 맞선 새로운 투쟁의 주체로 거듭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계급, 동시에 현실의 운동 속에서 나약한 생명의 외줄을 타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모든 억압받고 착취 받는 이들에 의한 그리고 이들을 위한 끊임없는 파괴와 생성의 역사, 그 속에서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도 자신의 생명을 다 하고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길 기대하며, 그동안 연구소를 만드신 모든 분들과 연구소와 함께 하셨던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그동안 나의 삶에 큰 자양분의 역할을 한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는 자신의 생명을 다 하였지만, 그 생명의 죽음은 또 다른 땅에 거름으로 뿌려져 비참한 삶을 파괴하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길 바라며...... (철학 연구자)

2007-01-18 19:4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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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vfmyASpZVGVVhb oHCMT / 2013-03-12 
2. sorcspcxxy sorcspcx / 2010-04-20 
1. 누구를 위한 글인가요?? 만득 / 2008-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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