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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1
2006-09-13 19:44:14
박성인
(키하라 마사오)[자본론]에서의 사회주의 경제론
[자본론]에서의 사회주의 경제론  
  
키하라 마사오 (木原正雄)  / <정세와노동>2006년09월
번역 : 김성칠

머리말

새로운 사회=사회주의ㆍ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비젼을 그린다는 것은 단순한 이상사회상으로서의 미래 사회를 그리는 그런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과학적 예견에 기초한 것이어야 한다.

맑스=엥겔스의 위대한 공적은 자본주의가 붕괴하고 그것이 사회주의ㆍ공산주의로 이행함이 역사적으로 불가피함을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운동법칙을 과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증명하였다는 점에 있다. 맑스의 [자본론]은 이러한 과학적 분석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맑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운동법칙”([자본론] 제1판 서문)을 밝혀냄으로써 사회주의ㆍ공산주의만이 “과학을 부르주아적 질곡으로부터, 자본의 예속으로부터, 추잡한 자본주의적 탐욕스러운 이해로의 굴종으로부터 해방”하고 사회주의ㆍ공산주의만이 “어떻게 하여 모든 근로자들의 생활을 편안하게 하고 그들이 복지를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가라는 과학적 고려에 의거하여 물자의 사회적 생산과 분배를 널리 확대하고 이것을 진정으로 제어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져다주는”1) 것임을, 그리고 사회주의ㆍ공산주의만이 “개인들의 독창적이고 자유로운 발전이 결코 공허한 구호로 끝나지 않는 유일한 사회”2)임을 과학적으로 밝혀내었다.

맑스=엥겔스의 사회주의론은, 그것이 과학적 사회주의이기 때문에 일본의 사회주의로의 길, 사회주의 일본의 문제들을 고찰함에 있어 그 방법을 가르쳐주는 기초가 되어야 할 과학이다. 그렇지만 경제학의 대상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부단히 변화하고 발전하며 복잡한 것으로 된다. 이 같은 변화, 발전에 입각하여 맑스=엥겔스의 사상, 이론을 기초로 하고 그것을 창조적으로 발전시키고 체계화, 정밀화시켜야 한다. 그리고 일본의 과학적 사회주의상을 분명히 제시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자본주의 사회 현실―일본에서의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물질적 기초와 조건들―에 대한 분석과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국민의 투쟁 및 그 사회적 역량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장래에 있어야 할 구체적인 사회주의상이 어떤 것인가라는 것은 각 나라에서 역사적으로 형성된 경제제도, 정치체제, 문화, 사회생활의 현실을 출발점으로 하고 현실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에 의거해서 밝혀져야 한다. 사회변혁에 있어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은 현실에 대한 과학적 인식에 의거하고 변혁의 객관적 조건의 유무, 그 가능성을 밝혀냄과 동시에, 주체적 조건, 즉 변혁주체의 형성, 주체의 역량, 주체세력의 배치를 밝혀내고 사회주의로의 길과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 방법이 어떤 것인가를 자주적이고 창조적으로 결정하는 일이다.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구체적 조건과 형태는 각 나라들의 객관적 주체적 조건, 사회주의의 창출을 둘러싼 조건에 응하여 불가피하게 다종다양하며, 생활양식이나 주민의 교양정도도 사회주의로의 길의 특수성에 반영됨은 말할 것도 없다.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국가생활, 사회생활, 경제생활의 다종다양한 형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아주 완전한 자유를 조금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전제하고 있다”3)

어떠한 나라의 경우에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사회주의 “모델”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소련 등 그 밖의 나라의 사회주의 건설 경험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수많은 긍정적인 교훈이며, 부정적인 요소는 아니다. 1917년 10월 이래의 사회주의 건설의 경험은 제국주의의 포위라는 험악한 조건 속에서 게다가 “경제발전이 비교적 뒤처진 조건에서 출발하였다는 역사적 제약” (일본공산당 제15회 대회결의)으로 인해서 오늘에 이르는 과정에서 정치, 경제, 사회생활에서 여러 가지 부정적인 현상을 수반하였다. 말할 것도 없이 이 같은 부정적인 현상은 사회주의에 고유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로부터 공산주의로의 발전법칙에 관한 인식 깊이와 관련된 문제다. 왜냐하면 사회주의 건설은 자본주의 아래에서 달성된, 문화적 기술적 진보적 경험은 물론 자본주의의 모든 성과를 이용하는 것에 의해서 인간 본성의 전면적 발전을 보장하는 조건들을 창출하는 합목적적인 의식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현존했던 사회주의 나라에 나타났던 부정적인 현상이 마치 사회주의에 고유한 것인 양 선전되고 있는 오늘날, 맑스=엥겔스의 과학적 사회주의론과 그 방법을 출발점으로 하고 그 후의 역사적 과정의 변화, 발전 속에서 발생했던 현상들을 분석함으로써 객관적 법칙의 인식을 심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각 나라의 민주주의적 변혁 및 사회주의 변혁을 지향하는 입장에서 그것이 변혁과 행동의 지침이 될 수 있도록 각 나라의 현상에 관한 이론적 분석과 현존 사회주의 나라들의 현상에 관한 과학적 분석에 의거하여 사회주의에 관한 명제들을 창조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오늘날 사회주의에 관해서 정책상의 문제와 관련해서도, 이론적 문제와 관련해서도 다양한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다. 이 소론에서 모든 것에 걸쳐 언급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맑스=엥겔스의 지적을 기초로 해서 “사회의 자본주의 형태가 폐지되어 사회가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결합체로 조직”4)되는 사회주의 사회의 기본적인 특징을 밝히는 데에 한정시키고자 한다.

1. [자본론]과 사회주의

맑스가 [자본론]에서 밝히고자 했던 것은 그가 제1판 서문에서 기술하고 있듯이 “근대사회[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운동법칙”([자본론] 제1판 서문)이었다. 맑스는 근대 사회의 경제운동법칙을 해명함에 있어 “역사적으로 특정한 어떤 사회의 생산관계를 그것의 발생, 발전, 쇠퇴에서 연구”5) 하고 있다. 그리고 맑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을 이런 분석적 방법에 의해서 더 깊게 파악하기 위해서 자본주의 이전의 생산관계들 뿐만 아니라 장래의 공산주의적 생산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양자를 비교 대조함으로써 그 각각의 특징들을 밝혔으며,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불가피성에 대한 과학적 논거를 제시하였다.

그렇지만 맑스는 [자본론]에서 사회주의 상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기술하지 않고 있다. 그 일반적인 모습과 기본적인 특징에 대해서만 그리고 있다. 또한 계급사회인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무계급사회인 공산주의 사회로의 이행의 도정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는 기술하고 있지 않다. 엥겔스는 이런 것에 대해서 [듀셀도르프신문](1867년11월)을 위한 [자본론] 제1권 서평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본서는 많은 독자들을 몹시 실망시킬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마침내 본서의 간행 광고를 보았을 때, 공산주의적 천년왕국이란 본래 무엇인가를 바로 이것으로 알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이 같은 기쁨을 기대한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었다.---맑스는 의연히 그가 항상 그러했던 것과 똑같은 혁명가이며 또 계속 그러하다. 그리고 확실한 과학적 저작에서도 이런 점에서의 그의 견해를 누구에게도 숨기려고 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러나 사회적 변혁 뒤에 그때부터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그는 우리에게 지극히 막연한 암시밖에 주고 있지 않다. 6)

사회적 변혁 뒤에 그때부터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맑스가 우리에게 “지극히 막연한 암시”밖에 주고 있지 않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혁명가로서의 맑스가 [자본론]에서 밝히려고 한 것은 무엇보다도 “자본일반의 폐지”와 사회혁명의 요구를 제시하였던 데 있었기 때문이다. 맑스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불가피성을 밝혔지만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과 그 건설은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광범위한 근로자들이 정치권력의 획득, 즉 사회주의 혁명이 전제임을 무엇보다도 밝히려고 하였다.

우리가 [자본론]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그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과 함께 그 혁명적 정신이다.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아무리 생산력이 발전해 있어도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생산력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노동력의 담당자인 노동계급의 주체적 조건이 성숙하여 노동계급의 역량, 조직력, 선견성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불가능하다.

[자본론]이 새로운 사회에 대해서 “막연한 암시”밖에 주고 있지 않지만 “1857-1858의 초고”나 그 밖의 일련의 저작을 비롯하여 [공산당선언], [고타강령비판] 등 그 밖의 저작 속에서 기술되어 있는 견해, 나아가 또 엥겔스의 저작들과 맞추어 보면, 맑스의 사회주의 상의 전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덧붙여두고자 하는 점은 소론에서도 자주 인용하고 있지만 세계에서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을 경험하였던 레닌의 저작들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2.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불가피성

맑스와 엥겔스는 1848년 12월 [공산당선언]속에서 이미 사회주의로의 전화의 필연성에 대해서 그것이 자본주의적 생산 그 자체에 내재해 있는 법칙들이 작용한 결과임을 훌륭하게 서술하고 있다.

부르주아계급이 생존하고 지배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조건은 개인의 수중으로의 부의 축적, 즉 자본의 형성과 증식이다. 자본의 조건은 임금노동이다. 임금노동은 오로지 노동자 상호 간의 경쟁 위에서만 유지된다. 부르주아지가 싫든 좋든 간에 촉진시켜야 힐 공업의 진보는 경쟁에 의한 노동자의 고립화 대신에 결사에 의한 노동자의 혁명적 단결을 가져온다.  이리하여 대공업의 발전과 더불어 부르주아지가 생산물을 생산하여 그것을 취득하는 지반 자체가 부르주아지의 발밑에서 무너져 간다. 부르주아지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의 매장인을 낳는다. 부르주아지의 멸망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다 같이 피할 수 없는 바이다7)

나아가 맑스는 근대사회의 경제운동법칙을 밝히는 것을 최종목적으로 삼았던 [자본론] 제1권 제7편 제24장[이른바 시초축적]에 대해 기술하였던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노동자가 프롤레타리아로 전화되고 그들의 노동조건이 자본으로 전화되며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자신의 발로 서게 되면, 노동이 더욱더 사회화되는 것, 토지나 그 밖의 생산수단이 사회적으로 이용되는 생산수단, 즉 공동적 생산수단으로 전화되는 것도, 따라서 또 사적 소유자들을 더더욱 수탈하는 것도 하나의 새로운 형태를 취하게 된다. 이번에 수탈 당하는 것은 자기스스로 경영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많은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자본가이다.

이런 수탈은 자본주의적 생산 자체의 내재적 법칙의 작용에 의해서, 자본들의 집중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항상 한 자본가가 많은 자본가를 파멸시킨다. 이런 집중, 즉 소수의 자본가에 의한 다수의 자본가의 수탈과 병행해서 점점 더 크게 되는 규모에서의 노동과정의 협업적 형태, 과학의 의식적인 기술적 이용, 토지의 계획적 이용, 공동으로밖에 사용될 수 없는 노동수단으로의 노동수단의 전화, 생산수단이 결합적 사회적 노동의 생산수단으로의 이용되는 것에 의한 생산수단의 절약, 세계시장의 그물망으로의 세계 각국민의 편입이 발전하고 이리하여 또 자본주의 체제의 국제적 성격이 발전한다. 이런 전화 과정으로 초래되는 모든 이익을 횡령하고 독점하는 대자본가의 수는 끊임없이 줄어들지만, 그에 따라 빈곤, 억압, 타락, 착취는 점점 증대해간다. 그러나 또한 끊임없이 팽창해가면서 자본주의적 생산과정 자체의 기구에 의해서 훈련되고 결합되며 조직되는 노동계급의 반항도 또한 증대해간다. 자본의 독점은 이 독점과 더불어 개화하고 그것 아래에서 개화했던 이 생산양식의 질곡으로 된다. 생산수단의 집중도 노동의 사회화도, 그것이 그 자본주의적인 외피와는 조화할 수 없게 되는 지점에 도달한다. 거기에서 외피는 폭발한다. 자본주의적 사유의 조종이 울린다. 수탈자가 수탈당한다.8)

맑스가 [자본론]에서 예언했던 “자본주의적 사유의 조종”은 51년 후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으로서 드높이 울려퍼졌고 사실로 증명되었다. 더 나아가 제2차대전 후 사회주의는 소련 한 나라에서 여러 나라들로 넓혀졌고 20세기는 바로 세계적 규모에서 “ 부르주아지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ㆍ“자본주의적 사유의 조종이 울리고 수탈자가 수탈당하는” 세기가 되었다.

러시아에서 사회주의가 출현하였던 것은 계급투쟁의 새로운 전개, 노동계급, 농민, 그 밖의 근로자를 포함한 여러 계층의 광범위한 시민운동의 고양, 식민지체제의 붕괴, 민족해방투쟁의 전개를 촉진하였고 19세기에는 볼 수 없었던 그런 넓이로 사회주의로의 세계사적 이행의 시대를 열어놓았다.

3.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회주의, 특히 현존하는 사회주의 사회를 매개로 해서 사회주의ㆍ공산주의의 문제들(소유, 관리 등)이 논해지는 경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발전단계에서 비롯된 차이가 자주 무시 내지는 경시되고, 혹은 양자가 혼돈됨으로써 생기는 혼란과 오류가 보여 지기도 한다. 생산수단의 공유를 기초로 한 사회라는 점에서 양자사이에 구별은 없다. 그러나 맑스=엥겔스는 계급의 폐지라는 점에서 공산주의가 목적으로 하는 무계급사회인 “자유의 왕국”을 실현하기에 이르는 시기(계급이 아직 존재하는 시기)와 일체의 계급이 없어지는 시기를 엄격히 구별하여 고찰하였다. 따라서 이런 점에 대해서 밝히고자 한다.

현존하고, 또한 우리가 지금 현실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사회주의 사회라는 것은 “그 자신의 토대 위에서 발전한 공산주의 사회가 아니라 반대로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이제 겨우 갓 태어난 공산주의 사회”9)에 불과 하다. 말하자면 자본주의 속에서 직접 성장해가고 있는 새로운 사회의 낮은 단계 혹은 제1단계라고 하는 그런 사회이다. 사회주의 사회는 공산주의의 높은 단계에 이르는 과도기적 단계의 사회이자 과도적 성격을 지닌 사회이다. 이리하여 사회주의 사회는 “모든 점에서 경제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그 공산주의 사회가 살아 성장해왔던 모태의 구사회의 모반(흔적)을 아직 머금고”10) 있지 않을 수 없다. 이리하여 “개개의 생산자들은 그들이 사회에 기여하는 것(개인적 노동량) 만큼 그 만큼, 모든 것을 공제한 후, 사회로부터 정확히 똑 같은 것을 도로 받는다”11). 말하자면 각자의 노동에 상응하는 생산물의 분배가 이루어지는 사회이다. 왜냐하면 “오랜 진통 끝에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갓 나온 공산주의 사회의 제1단계”12)에서는 권리는 생산력 수준, 사회의 경제 구조 및 그것에 의해 제약 받는 문화의 발전 수준에 의해서 규정받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공산주의 사회는 사회주의 사회가 완전히 확립된 후에 발전하는 보다 고도의 사회형태를 지닌 단계의 사회를 말한다. 고도의 사회형태로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계급차별은 소멸하고 결합사회를 이루는 개인들의 손에 생산이 집중”되고 “공적인 권력은 그 정치적 성격을 잃게 된다”13). 사람들은 “특별한 강제기관이 없어도 사회적 의무를 다하는 습관을 몸에 익히고 공공을 위한 무상의 작업이 보편적인 현상”14)으로 된다. 이 같은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은 “사회를 위한 무상노동이고 어떤 특별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특정한 생산물에 대한 권리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또한 미리 규정된 법정의 할당된 노동기준량에 따르지 않고도 행해지는 노동, 자발적인 노동, 할당된 노동기준량이 없는 노동, 보수를 목표로 하지 않는, 보수에 대한 조건 없는 노동,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일한다는 습관과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일해야 함을 자각한 (그리고 습관화된) 태도에 의거한 노동, 건강한 신체의 욕구로서의 노동”15)으로 된다. 말하자면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주의적인 분업은 사라지고 만인은 첫째, 인간 생존의 자연적 조건인 생산적 노동에 대한 자신의 몫을 타인에게 전가할 수 없고, 둘째로 생산적 노동은 “인간을 예속시키는 수단이 아니게 되고 각자에게 그 일체의 육체적ㆍ정신적 능력을 모든 방면으로 발달시키고 발휘하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인간을 해방하는 수단”16)으로 된다. 그리고 공산주의 아래에서는 일찍이 고역이었던 생산적 노동은 즐거움으로 되고 “단지 생활을 위한 수단 일뿐만 아니라 노동 그 자체가 제1의 생명욕구”17)로 될 것이다.

이 같이 공산주의의 높은 단계에서는 “궁핍이나 외적인 합목적성으로 마지못해 노동하는 일이 없어지고”18), 노동 그 자체가 생활의 제일의적 욕구가 된 후, “개인의 전면적인 발전에 수반하여 또한 그 생산력도 증대하고 협동적 부의 모든 원천이 더욱 풍부하게 솟아나오게”19) 된다. 그리고 “각자는 그 능력에 따라서 각자에게는 그 필요에 따라서” 수취할 수 있게 된다. 즉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로 성장전화하고 “자유의 왕국”이 시작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같은, 일상생활에서 편견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강제가 없어도, 국가라 불리는 특수한 기관이 없어도 공동생활의 근본적인 질서를 지키는 습관을 몸에 익힌 자유로운 사람들의 결합체는 일거에 실현되지 않는다. 공산주의 사회의 높은 단계로 이르는 데에는 앞에서 말했듯이 공산주의의 제1단계라고 하는 사회주의 사회를 거쳐야 한다. 따라서 맑스는 ?고타 강령비판?에서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 사이에는 전자로부터 후자로의 혁명적 전화의 단계 시기”가 있고 “이 시기에 조응하여 또한 정치상의 과도기”가 있으며 “이 시기의 국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집권이외 어떤 것도 아니다”20)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맑스가 지적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산주의 사회로의 “혁명적 전화의 단계 시기”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오늘날 사회주의 건설의 실천에 비추어 논쟁 문제의 하나가 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정책 결정에 있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맑스가 지적하고 있는 “혁명적 전화의 단계 시기”라는 것은 “모든 점에서 경제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그 공산주의 사회가 살아 성장해왔던 모태의 구사회의 모반(흔적)을 아직 머금고” 있고 “부르주아적 권리의 협소한 한계”를 아직 완전히 밟고 넘어설 수 없는 시기이다. 즉 자본주의 속에서 성장해가고 있는 새로운 사회의 최초 단계, 다시 말해 사회주의의 단계를 가리키고 있다.

맑스는 [자본론]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자본주의적 취득방식, 따라서 또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는 자신의 노동에 입각한 개인적 사적 소유의 첫 부정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생산은 자연사적 과정의 필연성을 가지고 그 자체의 부정을 낳는다. 이것은 부정의 부정이다. 이 부정은 사적 소유를 부활시키지 않지만 그러나  자본주의 시대의 성과를 기초로 해서, 자유로운 노동자의 협업과 토지 및 노동자체에 의하여 생산된 생산수단의 공동 소유를 기초로 해서 개인적 소유를 부활시킨다.21)

맑스가 지적하였던 “혁명적 전화의 단계 시기”라는 것은 이런 “부정의 부정” 말하자면 “수탈자의 수탈에 의해서 만들어진 상태는 개인적 소유의 부활이지만 그러나 토지 및 노동 자체에 의해서 생산된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를 기초로 하는 부활”22)의 시기이다. 이런 부활은 자본주의 시대의 성과를 기초로 해서, 또 기초로 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시대의 성과를 기초로 한 단순한 연장선상의 부활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를 사회적 소유로 전화하고 사회적 소유를 기초로 하여 부활한다고 하는 질적인 전화의 과정이며 따라서 그것은 혁명적 전화의 시기인 것이다.

그 다음, 맑스는 혁명적 전화의 시기의 국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집권이외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맑스가 지적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집권이 목표로 하는 바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에 대한 투쟁 속에서 필연적으로 결합하여 계급”을 이루고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서 “스스로 지배계급으로 되고 그리고 지배계급으로서 낡은 생산관계들을 강력으로 폐지함”23)과 동시에 그 주요한 본질은 사회주의를 만들어 내고 “계급대립의 존립조건, 계급일반의 존립조건도 폐지하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기반을 근절함으로써 “계급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지배도 폐지하는”24) 점에 있다. 그렇지만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런 목적은 일거에 실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낡은 생산관계들을 폐지하고 생산을 사회주의적으로 조직하는 일은 곤란한 사업이고 생활의 모든 분야에서의 근본적인 전환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도기로서의 자본주의로부터 공산주의로의 한 시기가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

4. 사회주의와 소유

맑스는 “진정한 자유의 나라”가 시작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서 인간이 진정으로 자유를 향유하고 인간의 본성=인간성을 완전히 발휘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를 위해 필요한, 가장 적합한 조건이 만들어져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 그 조건이라는 것은 사회화된 인간, 결합된 생산자들이 맹목적인 힘에 의해서 지배당하지 않도록 자기 자신들과 자연의 물질대사에 의해서 지배받는 것을 멈추고 자연과의 물질대사를 합리적으로 규제하고 자신들의 공동 통제 아래에 두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자연과의 물질대사를 합리적으로 규제하고, 자신들의 공동 통제 아래에 두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을 공동의 소유로 하는 것이 전제된다. 생산수단이 사회전체의 소유로 된 사회 성원의 공동 소유에 기초한 사회, 즉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착취와 착취제도의 기초는 도려내어지고 경쟁과 생산의 무정부성을 대신해서 사회적 생산은 개개인의 공동 통제 아래에 두어지고 합리적으로 규제되며 합목적적인 의식적 활동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

맑스는 사적 소유가 폐지되고서야 생산의 공산주의적 규제가 가능(사적 소유의 사회적 소유로의 전화는 공산주의적 규제의 전제이다)하며 그것의 당연한 결과로서 “인간과 그들 자신의 생산물 사이의 소원한 거리가 없어지면 수요와 공급의 관계는 완전히 그 효력을 상실하게 되어 인간은 교환, 생산, 그것들의 상호관계 양식을 자유롭게 지배할 수 있는 힘을 되찾으며”25), 인간은 “개인들 그 자체 속에 있는 능력 전체를 전개할”26)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 같이 개인들의 자유로운 발전에 있어 조건이 되는 것은 사적 소유에 기초한 자본주의의 폐지다. 이리하여 사적 소유가 폐지되면, 곧 바로 “자유의 왕국”이 시작되고 곧 바로 개인들이 각자의 모든 능력과 소질을 전면적으로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공동의 생산수단으로 노동하고 개인의 많은 개인적 노동력을 자기 스스로 의식하여 하나의 사회적 노동력으로 지출하는 그런 자유로운 사람들에 의해서 구성된 사회, 즉 권리에 의거하여 노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위해서 일하는 습관을 몸에 익힌 사람들로 형성된 사회는 자본주의가 폐지되면서부터 곧바로 실현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폐지되는 것으로는 진정 자유의 왕국이 시작하기 위한 경제적 전제들이 곧 바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권리는 사회의 경제구조 및 그것에 의해 제약되는 문화의 발전보다도 결코 고도일 수는 없다”27).

공산주의 사회는 이미 완성된 제도로서 우리 앞에 존재하고 우리에게 수여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무엇 하나 하늘로부터 떨어지지는 않으며 또한 선의의 소망으로부터 생겨나는 그런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유물로 건설”28)해야 한다.

맑스가 [고타 강령비판]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오랜 진통 끝에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갓 나온 사회”는 사적 소유가 폐지되었다고 할지라도 모든 점에서 경제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구사회의 모반(흔적)을 아직 머금고 있으므로, 따라서 이들 모반을 도려내고 자유의 왕국이 시작되기 위한 경제적 전제들이 만들어짐으로써 비로소 “개개인의 독자적인 자유로운 발전이 결코 헛소리가 아닌 유일한 사회”가 가능하게 된다. 개개인의 독자적인 자유로운 발전은 공산주의 사회의 내부에서는 “바로 개인들의 연관을 조건으로 하고 있다. 이런 연관은 일부는 경제적인 전제들 위에도 또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필연적 연대성 위에도, 결국에는 또한 그 시대에 존재하는 생산력의 토대 위에서의 개인들의 보편적 활동 방식 위에도 존재한다.”29)

이상과 같이 사회주의ㆍ공산주의 사회로의 이행의 전제 조건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적 소유에 의거한 자본주의 사회를 폐지하는 것이다. 사적 소유를 공동의 소유로 바꾸는 일은 사회주의ㆍ공산주의의 실현에서 근본적인 문제이다.

그렇지만 생산수단과 유통수단의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를 공동소유로 바꾸는 일은 “계급 대립에 의거한, 일부의 인간에 의한 다른 인간의 착취에 의거한 생산물의 생산과 취득”을 없애기 위함이지 “소유일반을 폐지하는”그런 것이 아니다30). 사회주의를 비방하는 사람들은 사회주의ㆍ공산주의가 개인의 소유는 물론 일체의 소유를 부정하고 있는 것같이 선전하고 있으나 그러나 이런 비방은 과학적 사회주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함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생산수단(자본)이 공동의 소유, 바꾸어 말하면 사회의 전 성원에게 속하는 소유로 변해도 당연히 노동생산물의 개인적 취득은 없어지지 않는다. “노동자가 자본을 증식하기 위해서만 살아가고, 지배계급의 이익을 필요로 하는 경우에만 살아 간다”31)라는 이 같은 비참한 성격을 폐지할 뿐이다. 말하자면 소유는 그 계급적 성격을 잃게 된다. 개인의 소유라고 말하면, 생산수단의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에 의거하는 개인적 소유 대신 생산수단의 공동소유에 의거한 개인의 소유가 등장하고 자본주의에서의 개인적 소유와 같은 그 계급적 성격으로부터 나오는 제약은 없어지고, 개인적 소유는 욕망에 즉하여 실현하게 된다.

5. 사회주의 아래에서의 잉여노동과 노동생산성

맑스는 [자본론] 제3권 제48장 “삼위일체적 정식”에서 사회주의ㆍ공산주의 아래에서의 잉여노동과 노동생산성의 관계와 관련해서 어떠한 사회에서도 “주어진 욕망의 한도를 넘어서는 노동으로서 잉여노동일반은 언제나 있어야 한다”32)라고 쓰고 있다. 일정량의 잉여노동이 필요로 하는 것은 첫째, 욕망의 확대와 인구의 증가에 대응하고 전 사회를 위해서 이용되는 대량의 생산수단과 생산물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재생산과정의 필연적인 누진적 확대를 위해서이다. 이 확대는 자본주의적 입장으로부터는 축적이라 불려지는 것이지만 결국 축적을 위해서 필요한 부분으로서이다. 둘째, 재해 등으로 야기되는 손해를 벌충하는 사회적 보장 ? 예비를 위해서 필요한 부분으로서이다. 이 두 부분은 모두 사회적 확대재생산이 부단히 유지되기 위해서는 불가결한 부분이다. 이와 같이 주어진 욕망의 한도를 넘어서는 노동으로서의 잉여노동일반이 사회주의 아래에서도 필요함은 말할 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자본의 문명적인 측면의 하나는 자본이 이런 잉여노동을, 생산력이나 사회관계의 발전을 위해서도 또 보다 높은 새로운 형태를 위한 요소들의 창출을 위해서도 이전의 노예제나 농노제 등의 형태에서보다 더 유리한 방식과 조건에서 강요한다는 점이다. 이 같이 하여 자본은 한편으로는 사회의 일부분이 다른 부분을 희생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발전(그 물질적인 이익도 지적인 이익도 포함해서)의 강제나 독점이 없어지는 단계를 가져온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 자본은 사회의 더 높은 형태에서 이 잉여노동을 물질적 노동일반에 바쳐지는 시간의 보다 큰 제한을 결부시킬 수 있게 하는 그런 관계를 위한 물질적 수단과 맹아를 만들어 낸다. 왜냐하면 잉여노동은 노동생산력의 발전 여하에 따라서 총 노동일이 짧더라도 클 수 있으며 또 총 노동일이 길더라도 총체적으로는 작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필요노동시간이 3이고 잉여노동이 3이라면, 총노동일은 6이며 잉여노동율은 100%이다. 필요노동이 9이고 잉여노동이 3이라면 총 노동일은 12이고 잉여노동율은 겨우 33⅓%이다. 그런데 일정한 시간에, 따라서 또 일정한 잉여노동시간에 얼마만한 사용가치가 생산되는가 하는 것은 노동생산성에 의해서 결정된다. 따라서 사회의 실제적 부도, 사회의 재생산 과정을 끊임없이 확대할 가능성도 잉여노동의 길이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생산성에 달려 있으며, 또 그것이 이루어지기 위한 생산조건이 풍부한가 빈약한가에 달려 있다. 실제 자유의 왕국은 궁핍과 외적 합목적성으로 인해 마지못해 노동하는 일이 없어질 때에 비로소 시작된다”33)

자본주의 아래에서의 잉여노동의 성과는 이윤, 결국 잉여가치로서 자본가계급이 취득하는 것으로 된다. 이 때문에 노동계급의 소비는 항상 최저한도로 제한되지 않을 수 없다. 사회주의 아래에서도 사회적 보장을 위해 필요한 부분은 “물론 직접생산자에 의해서 규칙적으로 소비되는 부분이 현재와 같은[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아래에서와 같은) 최저한도로 제한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34)

이것과는 반대로 사회주의 아래에서는 “나이 때문에 생산에 아직 참가하지 못하거나  또는 더 이상 참가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잉여노동을 제외하고는 일하지 않는 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노동은 모두 없어 질 것”35)임은 말할 나위 없다. 이런 것은 자본에 의한 잉여가치의 취득을 목적으로 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형태가 폐지되고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일이 없는 사회주의적 생산형태 아래에서는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아직 생산에 참가할 수 없고 또는 결국에는 생산에 참가할 수 없게 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을 부양하는 노동이 모두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회주의가 되면 자본주의적 생산형태에서는 잉여노동의 일부분이었던 사회적 축적 부분과 예비 부분은 필요노동으로 계산될 것이고 노동일은 필요노동에만 한정할 수 있게 된다.36)

이런 문제에 대해서 맑스는 [자본론]의 다른 곳에서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임금을 그 일반적 기초에, 즉 자신의 노동생산물 중에서 노동자의 개인적 소비에 들어가는 부분으로 환원해 보자. 이 몫을 자본주의적 제한에서 해방하여 이것을 한편으로는 현재의 사회생산력(즉 실제적인 사회적 노동으로서의 노동자 자신의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이 허용하는 소비의 범위까지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개성의 충분한 발전이 필요로 하는 소비의 범위까지 확장해 보자. 더 나아가 잉여노동과 잉여생산물을 사회의 주어진 조건 아래에서 한편으로는 보험과 예비 재원의 형성을 위해서 필요한,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욕망에 의해서 규정되는 정도로 재생산을 끊임없이 확대하기 위해서 필요한 한도까지 축소해 보자. 끝으로 제1의 필요노동과 제2의 필요노동 속에, 사회 성원 중 노동능력이 있는 성원이 아직 노동능력이 없는 성원이나 이미 노동능력을 상실해버린 성원들을 위해서 항상 행해야 하는 노동량을 포함시켜 보자. 그렇게 되면 이러한 형태들은 더 이상 남지 않을 것이며 모든 사회적 생산양식에 공통한 이 형태들의 기초만이 거기에 남을 것이다37)

그런데  사회주의에서는 착취가 없게 됨으로써 근로자들의 생활조건은 훨씬 풍부하게 되며 근로자들의 생활상의 요구는 점점 더 크게 되고 다종다양하게 된다. 나아가 자본주의적 생산형태 아래에서의 잉여노동의 일부분이 필요노동에 계산되게 되면, 이른바 필요노동은  그 범위를 확대하게 된다. 그렇지만 노동생산력이 상승하고 노동의 강도가 증대하면 할수록 노동일은 단축된다. 맑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노동 강도와 노동 생산력이 주어져 있다면, 노동이 사회의 모든 노동능력있는 성원들 사이에 보다 균등하게 분배되어 있으면 있을수록 또한 사회층이 노동의 자연 필연성을 자신들로부터 다른 사회 층에 전가시킬 가능성이 적으면 적을수록, 사회적 노동일 중 물질적 생산에 필요로 하는 부분은 보다 짧아지며, 따라서 개인의 정신적 및 사회적 활동을 위하여 이용될 수 있는 시간부분은 더욱 증가할 것이다38)

그리고 필연성의 나라로부터, 그것을 기초로 하여 진정한 자유의 왕국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노동일의 단축”이야말로 근본적인 조건이다. 이런 것에 대해서 맑스는 자유의 문제와 관련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인간이 발전함에 따라 이 자연 필연성의 나라는 확대된다. 왜냐하면 욕망이 확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욕망을 충족시키는 생산력도 확대된다. 자유는 이 영역에서 단지 다음과 같은 점에 있을 뿐이다. 즉 사회화된 인간, 결합된 생산자들이 맹목적인 힘에 의해서 지배받지 않도록 자연과 자신들의 물질대사에 의해서 지배당하는 것을 멈추게 하여 이 물질대사를 합리적으로 규제하고 자신들의 공동적 통제 아래에 두는 점, 결국 가장 적게 힘을 들고도 자신들의 인간성에 가장 알맞고 가장 적합한 조건 아래에서 이 물질대사를 영위해가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역시 필연성의 나라다. 이 나라의 저편에서 자기목적으로 인정되는 인간의 힘의 발전이 시작되고 자유의 진정한 왕국이 시작된다. 그러나 자유의 왕국은 이 필연성의 나라를 그 기초로 해서, 그 위에서만 꽃을 피울 수 있다. 노동일의 단축이야말로 근본조건이다39)

이와 같이 인간은 자본의 지배와 강제로부터 해방되고, 그들이 자신들의 인간성에 가장 알맞고 가장 적합한 조건 아래에서 이 물질대사를 영위해가고, 사회의 재생산과정을 부단히 확충하고 사회의 풍부한 부를 생산할 수 있게 되고서야 비로소 자유를 향유하고 인간 본성을 전면적적으로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자본주의 아래에서의 잉여노동은 “그것이 아무리 자유로운 계약적 합의의 결과로서 생겨난다고 해도 그 본질에서 보면, 결국에는 강제노동”40)이다. 이 같은 노동이 강제되는 곳에 인간 본성의 전면적 발전은 있을 수 없다. 말하자면 진정한 자유는 없다.

6. 사회주의와 인간의 자유로운 개성

맑스는 사회주의ㆍ공산주의에서의 인간의 자유로운 개성의 발전과 그 조건을 만들어내는 자본주의 사회의 역할과 의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인격적 의존관계(최초에는 완전히 자연발생적인)는 최초의 사회형태이다. 거기에서는 극히 좁은 범위에서 또 고립된 지점에서만 발전한다. 물적 의존성 위에 구축된 인격적 의존성은 제2의 커다란 사회형태이다. 거기에서 일반적인 사회적 물질대사, 보편적인 대외관계, 전면적인 욕망, 그리고 보편적인 역능(力能)이라는 체계가 비로소 형성된다. 개인들의 보편적 발전 위에, 또 개인들의 사회적 역능으로서의 그들의 공동체적ㆍ사회적인 생산성을 종속시키는 바탕 위에 구축된 자유로운 개성은 제3 단계이다. 제2 단계는 제3 단계의 조건들을 만들어 낸다41)

맑스는 인격적 독립성에 대해서 세 개의 단계와 그것을 만들어 내는 조건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말하자면 제1 단계는 “인격적 의존관계”단계, 제2 단계는 “물적 의존성 위에 구축된 인격적 독립성”의 단계, 즉 자본주의의 단계이고 제3 단계는 “자유로운 개성”의 단계 말하자면 사회주의ㆍ공산주의 단계이다.

나아가 맑스는 개인들 자신의 “공동적 관계로서 결국 그들 자신의 공동적 규제에 복종하고 있는 그런 사회적 관계를 지닌 보편적으로 발전한 개인들은 자연의 산물이 아니라, 역사의 산물이다. 이러한 개성이 가능하게 되는 역능의 발전 정도와 보편성은 바로 교환가치를 기초로 하는 생산을 전제로 하고 있고, 이 생산은 일반성과 함께 개인의 자기 및 타인으로부터의 소외를, 그러나 또한 그 대외 관계와 역능의 일반성과 전면성도 처음으로 생산한다”42)라고 기술하고 있다.

맑스는 또한 [공산당선언]과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은 독립성과 개성”을 지니고 있으나 “활동하고 있는 개인에게는 독립성도 없으면 개성도 없다.”43)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의 분할, 즉 분업과, 그런 것에 의해서 필수가 된, 여러 개인들의 자연발생적인 협동이라는 데에서 생기는 생산력=사회적 힘은 활동하는 개인에게는 통일된 힘으로서는 나타나지 않고, 뭔가 소원한, 개인 밖에 있는 강제력으로서 나타나기44) 때문이다.

이와 같이 맑스는 개성의 발전과 그를 위한 조건에 대해서 기술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활동하고 있는 개인에게는 독립성도 없으면 개성도 없”으나 “자유로운 개성”은 “교환가치를 기초로 한 생산” 즉 자본주의적 생산을 전제로 하여 형성되는 점,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의 이중의 생산(일반성과 함께, 개인의 자기 및 타인으로부터의 소외와 개인의 대외관계와 능력의 일반성과 전면성의 생산)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이는 “자유로운 개성”의 형성에 있어 자본주의가 담당하는 의의와 역할에 대한, 또 사회주의로 계승되어야 할 조건들에 대한 중요한 지적이다.

7. 사회주의와 자유ㆍ민주주의

맑스는 [공산당선언]에서 “노동자혁명의 제1보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계급의 지위로 올려 놓는 것,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것이다”45)라고 쓰고 있다. 우리가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서 투쟁하는 것은 민주주의나 자유가 첫째,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유용할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일하는 사람들에게 유용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폐의 권력, 자본의 권력이 유지되고 있는 한, 민주주의와 자유는 불철저하고 우유부단한 것에 그치고, 불평등과 착취를 절멸시키고 사회적 불공정을 없애는 일은 불가능하다. 맑스는 자본의 억압으로부터 노동계급을 해방하고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를 폐지하며 인간에 의한 인간의 모든 착취를 근절하는 사회주의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보다 광범위한 민주주의와 자유를 쟁취함의 필요성을 기술하고 있다. 레닌도 기술하고 있듯이 철저한 민주주의와 자유는 한편으로는 사회주의로 전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주의를 요구한다46). 민주주의와 정치적 자유가 없으면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물질적 준비인 자본주의에서의 “생산력의 완전한 발전도, 광범위하고 공공연한 자유로운 계급투쟁도,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의 정치적 계몽, 교육 및 결속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자각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완전한 정치적 자유를 위한, 민주주의 혁명을 위한 단호한 투쟁을 항상 자기의 임무”47)로 삼고 있다. 민주주의 및 자유의 확보와 확대는 인간의 존엄과 능력을 전면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를 풍부하게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불가결한 최대의 과제 중 하나다.

그런데 민주주의는 국가의 한 형태이고 국가의 한 변종이다. 이리하여 자본주의 위에 세워진 상부구조의 가능한 형태 중의 하나로서 자본주의 사회에도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민주주의는 존재한다. 그렇지만 자본주의에서의 민주주의와 자유는 자본주의적 착취라는 좁은 울타리 속에 가두어져 있다.

민주주의는 평등을 의미한다. 자본주의에서의 인간의 인격은 절대 평등인 것같이 말해지고 있지만, 자본주의 아래에서의 평등은 상품생산관계의 반영으로서의 평등에 불과하다. 자본주의인 한, 가장 자유롭고 가장 민주주의적이라고 하는 나라에서조차 “자유”와 “평등”은 기본적으로 상품소유자들의 평등과 자유, 자본의 평등과 자유를 표현한 것 이외 아무것도 아니다. “오늘날 부르주아적 생산관계의 내부에서는 자유라고 하면 자유로운 상업, 자유로운 매매를 말한다”48)

그러면 흡족한 소유자에게 있어서의 자유가 아니라, 인간적 인격에 있어서의 진정한 자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관계에서의 진정한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진정한 자유와 평등은 계급을 폐지함으로써만 실현된다. 사회주의가 목적으로 하는 바는 일체의 계급을 폐지함이다. 그러므로 사회주의 아래에서야말로 완전한 민주주의, 진정한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는 것이 가능하다. 따라서 계급을 폐지함을 목적으로 삼는 사회주의는 주민의 다수에게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일, 나라의 관리나 경제의 관리에로, 사회주의 건설사업의 복잡한 문제에로 모든 국민대중이 “진정 똑 같은 권리를 가지고 진정으로 전반적으로 참가하는 일을 완전히 발전”49)시키지 않으면, 그것의 실현은 불가능하다. 이와 같이 사회주의에 있어 완전한 민주주의와 자유를 실현함은 불가결한 요건이며 완전한 민주주의와 자유 없이 사회주의는 있을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몇 년에 한번 있는 그런 선거에서의 투표를 제외하고 주민의 대다수는 공공의 정치생활로부터 거의 배제 당하고 있다. 국민경제나 기업 관리는 물론 대의기관의 운영기술에 의해서도, 신문, 잡지, 텔레비젼 등 정보수단의 조직에 의해서도 민주주의와 자유는 모든 점에서 제한되어 있고 방해당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민주주의는 “항상 자본주의적 착취라는 좁은 테두리 안에 갇혀있으므로 실제로는 항상 소수자를 위한, 유산자들만을 위한, 부자들만을 위한 민주주의”50)에 그치고 있다.

8. 사회주의와 과학ㆍ기술

맑스는 사회의 발전에서의 과학ㆍ기술의 중요성, 공산주의 사회가 과학ㆍ기술의 진보와 그 성과를 기초로 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과학은 자연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과학연구의 대상과 방법에서 차이가 있든 간에 진리를 밝히려고 하는 인간 영지의 소산이고 지적 노동의 한 결과임에는 변함이 없다. 기술은 과학연구의 성과를 생산과정이나 그 밖의 부면에 채용하고 구체적으로 응용함으로써 노동=생산조건을 개선하고 인간생활을 물질적으로도 문화적ㆍ정신적으로도 풍부하게 하고 인간의 다면적 욕망을 충족함으로써 인간의 존엄, 인간성의 존엄을 보증하는 사회를 실현하고 인간의 진정한 해방을 달성하는 데에 기여하는 것이어야 한다.

인간은 그 오랜 역사에서 자연에 적극적으로 작용하고 노동=생산을 부단히 반복함으로써 생존을 유지함과 동시에 사물에 대한 인식을 깊게 하고 단순한 기술에서 복잡한 기술까지 여러 가지 기술을 체득하고 인간 자신의 노동력만이 아니라 과학까지 발전시켜왔다.

자연과학과 인문ㆍ사회과학의 양 분야에서의 과학연구에 의해서 자연법칙과 사회발전 법칙의 인식이 심화되고 또한 과학 연구의 성과에 의거한 기술 개발과 함께 자연에 대한 지배와 그 이용의 범위는 확대되고 또 이용의 방식이 고도화됨으로써 사회적 생산력은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다.

과학ㆍ기술의 연구는 그것 자체 내재적 논리에 의거해서 발전하고 사회적 요청―행정상의 필요는 아니다―에 부응하는 측면을 지닌다. 따라서 과학ㆍ기술이 지닌 내재적 논리를 무시하는 것은 과학ㆍ기술의 발전을 저지하고 그것의 정체를 초래한다. 사회적 생산이 “직접 사회의 욕망”51)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본의 요구에 의해서 규제되고, 자본의 지배 아래에 놓여지고 있는 자본주의적 기반 위에서는, 특히 제국주의 단계에서의 자본주의적 독점 아래에서는 과학ㆍ기술을 착취의 도구로 바꾸고 압도적인 다수의 인간을 노예상태로 머물게 하기 위한 독점물로 바꾸며 과학ㆍ기술의 발전을 저지하고 정체의 경향을 야기하며 그것을 응용함에 있어 큰 왜곡을 낳고 있다. 레닌은 이런 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일시적이라 하더라도 독점가격이 설정되는 한, 어느 정도 기술적 진보에 대한, 따라서 또 모든 다른 진보나 전진운동에 대한 자극요인이 사라지고 더 나아가 기술적 진보를 인위적으로 저지하는 경제적 가능성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아메리카에서 오웬스라는 사람이 핀의 제조에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핀 제조기계를 발명하였다. 그런데 독일의 핀 제조업자의 카르텔이 오웬스의 특허를 매수하였고 그것을 파괴하여 그것의 응용을 방해했다. 물론 독점은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경쟁을 세계 시장으로부터 완전하게 또 장기간에 걸쳐서 배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기술적 개선의 채용에 의해서 생산비를 낮게 하고 이윤을 증대시키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변화가 촉진되기는 한다. 그러나 독점에 고유한 정체와 부패의 경향이 그것은 그 나름대로 작용을 계속하고 있으면서 개개의 산업부문이나 개개의 나라들에서 일정 기간 승리를 제압한다52)

레닌의 이런 지적은 오늘날에도 기본적으로 바꾸어지지 않고 있다.

과학ㆍ기술의 부단한 진보와 그 응용에 의한 생산력의 급속한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사회적 생산에서의 자본주의적 독점의 지배를 없애는 것이 필요하다. 사회적 생산력이 독점의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직접 사회의 욕망”에 의해서 계획적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주의적 생산관계 아래에서 비로소 과학ㆍ기술 연구의 사회적 요청에 부응하는 측면과 사회적 생산의 목적은 일치하고 과학ㆍ기술의 성과는 국민 경제나 사회생활 전반에서 제한 없이 사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내고, 사회의 생산력이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은 더욱 크게 된다.

맑스는 기계의 역할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만약 기계를 다만 생산물을 싸게 하는 수단으로만 본다면, 기계를 적용하는 한계는, 기계 자체의 생산에 드는 노동이 기계의 사용에 의하여 대체되는 노동보다 적어야 한다는 데에 있다. 말하자면 기계는 사회적 노동의 절약과 노동을 경감하는 수단이다. 그렇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기계를 사용하는 한계는 아주 좁다. 왜냐하면 자본은 충용된 노동을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충용되는 노동의 가치를 지불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자본에게 있어서는 기계의 사용은 기계의 가치와 기계에 의해서 대체되는 노동력의 가치사이의 차이에 의해서 한계 지워지고 있다. 기계의 가격과 기계에 의해서 대체되는 노동력의 가격사이의 차이는 비록 기계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량과 기계에 의해서 대체되는 노동 총량사이의 차이는 변하지 않아도 심히 변동할 수 있다53).

따라서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기계는 부르주아 사회에서와는 전혀 다른 활동범위를 가질 것이다”54)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기계사용의 규준은 단위당 생산물에 포함되는 노동 총량의 감소이며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생산성 향상에서 보여지는 자본주의적 한계는 없어지게 된다.

그런데 과학ㆍ기술은 그 내재적 논리에 따라 발전하나, 동시에 과학ㆍ기술의 연구 개발은 항상 어떤 일정한 생산관계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당연히 인간의 진정한 해방에 기여해야 할 과학ㆍ기술의 연구 개발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아래에서는 자본의 논리에 의한 가치체계에 포섭되고, “자본의 논리에 의거한 강력한 과학연구시스템의 구성, 연구 성과의 비밀주의적 독점이 진행하는 가운데, 인간존재는 근본적으로 위협받게 되고 인간성 자체도 광폭하게 유린되어가고”55), 사회적 불평등의 증대, 정신적 불안 등 여러 종류의 궁핍과 새로운 빈곤이 산출되고 있다. 무제한의 이윤추구를 위해서만 과학ㆍ기술의 성과를 이용하는 독점자본=거대기업의 지배체계 아래에서 벌어지는 경쟁과 생산의 무정부성으로 인해서 각종 새로운 공해가 초래되고 환경파괴가 자행되고 있다. 인류의 파괴로 가는 핵무기의 개발과 생산은 과학ㆍ기술의 성과를 악용한 가장 두드러진 예이고 인간의 존엄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다.

분업과 기계의 발명ㆍ발달에 의해 자본주의적 기계제 대공업이 확립되었으며 생산력은 급속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렇지만 자본주의 아래에서의 기계화ㆍ자동화가 진전되고 전자계산기에 의해 관리가 강화되는 것은 인간 소외를 산출하고 있다. 인간 영지의 소산으로서 인간에 의해서 생겨난 과학ㆍ기술이 역으로 비인간적인 것으로 작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과학ㆍ기술이 자본의 논리에 포섭되고 잉여가치 취득을 위한 자본의 나쁜 도구가 되고 또한 자본주의적 생산으로서 거대한 이익의 원천으로 되고 있는 점에 있다.

인간 지혜의 모든 달성이 일하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도구로 되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의 생활을 향상시키고, 인간의 진정한 해방을 실현하는 데에는 공동 노동에 의해 생산되는 생산물은 근로자 자신을 위해서 사용되고 그들이 그들의 생활에 필요한 것을 초과하여 생산된 잉여생산물은 노동자 자신의 요구를 채우고 그들의 전 능력을 완전히 발전시키고 과학이나 예술의 모든 성과를 평등하게 향수하는 것이 가능한 생산조직, 즉 사회적 생산이 “직접 사회의 욕망”에 부응하여 이루어지고 “생산수단과 생산물이 전 사회의 이익을 위해서 이용되는”56) 그런 사회, 대규모 집단적 생산과 최신의 과학ㆍ기술적 기초에 의거하고 “의식적 계획적인 결합체로 조직된”57) 사회를 두고서이다. 사회주의적 생산에서만 노동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모든 것과 과학ㆍ기술의 성과에 의거한 생산 상의 모든 개량은 모든 일하는 사람들 자신의 이익에 사용되게 된다.

과학ㆍ기술을 자본주의적 질곡으로부터, 자본으로의 예속으로부터, 추잡한 자본주의적 탐욕스러운 이해로의 굴종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은 사회주의만이다.58)

맺은 말

맑스가 자본주의 사회의 운동법칙을 분석함으로써,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필연성, 불가피성을 이론적으로 밝혔으며 그 이행의 필연성, 불가피성은 1917년 10월의 러시아에서의 사회주의 혁명과 그 후의 추진에 의해서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사실로 증명되었다. 사회주의로 이행하였던 나라가 경제적으로 뒤떨어진 나라이고 문화적 후진성으로부터  유래하는 많은 약점이나 곤란을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극복해야하는 일, 나아가 정책상의 오류도 더해지면서, 현존하는 사회주의 나라들의 경험은 복잡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에는 없는 사회주의가 지닌 우월성을 부정할 수 없다.  전체적으로 보면 현존하는 사회주의는 세계사적으로 아직 모든 점에서 미성숙한 생성기에 있지만 금후 곤란들을 극복하고 오류를 바로 잡으면서 더 고차적인 단계를 목표로 해서 나아갈 것이다.

사회주의는 전체적으로 보면 생성기에 있다고 할지라도 사회주의 나라의 존재는 자본주의 사회의 운동법칙의 작용에 있어 새로운 역사적 조건이 생겨났음을 의미하고  동시에 새로운 조건 아래에서의 사회주의로의 전망을 밝힐 수 있는 가능성을 주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 제2단계 이후에 특징적인 과학ㆍ기술 (주로 제2차대전 중에 개발되었던 군사기술)의 최신 성과에 의거한 자본주의적 대규모 생산은 여러 가지 새로운 형태를 취하며 발전하고 있다. 또한 다국적 기업에서 보여지는 생산의 국제화, 자본가들의 카르텔, 신디케이트 및 트러스트의 성장과 그것들의 국제화(다국적 기업은 오늘날 국제트러스트의 새로운 특징이 되고 있다), 금융자본의 규모와 위력의 증대, 국제적 금융기구형성에 의한 지배강화는 세계자본주의가 점점 더 최후의 단계에 도달해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것은 “물자의 생산과 분배 과정에 대한 사회적 규제의 기구”59)가 점점 정비되고 준비되고 있음, 다시 말해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중요한 물질적 기초가 만들어지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오늘날 다국적 기업화 등에서 보여지는 자본주의적 생산과 축적의 국제화는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생산성과를 취득하는 사적 자본주의적 형태 사이의 모순을 국제적 규모에서 더욱 더 첨예화시키고, 각 나라 국민의 민족적 이해의 충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독점체의 규모와 위력이 증대해감에 따라 국제적 규모에서 각 나라의 근로대중을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착취하고 수탈하는 것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이런 것은 또한 사회주의로의 전화의 “지적ㆍ정신적인 원동력”이고 “그 물질적 집행자”인 노동계급의 의식을 높이고 있다.

1970년대 이후 국제통화제도의 사실상의 붕괴나 “석유위기”는 세계자본주의의 구조 자체의 심각한 위기를 표현하고 있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있었던 일정한 “상대적 안정”의 종언을 의미하며 현 체제의 테두리 안에서는 그 위기를 해결할 수 없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의 자본주의는 그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물질적 수단=객관적 조건과 사회적 세력=주체적 조건을 세계적 규모로 성숙시키고 세계적 규모에서의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가능성, 혁명적 체제 변혁의 연쇄적 진행 가능성을 심화시키고 있다. 하지만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불균등 발전 법칙의 작용에 의한 변혁의 객관적ㆍ주체적 조건의 성숙도의 차이로 인해 세계사적으로 비교적 장기간에 걸치는 과정으로 될 것이다.

그렇지만 반사회주의, 반공주의의 파고가 아무리 높아도 사회주의의 물질적 기초와 사회주의로의 전화를 위한 지적ㆍ정신적 원동력인 근로자가 존재하는 한, “사회주의 혁명의 고난이 어떠한 것이라도 혁명이 일시에 패배하는 일이 있더라도”60) 사회주의 사회로의 전화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불가피성을 과학적으로 논증하고 과학적 사회주의의 기초를 다졌던 맑스의 [자본론]의 방법과 명제들을 연구하고 현실의 조건들에 빗대어 그것을 발전시키는 일은 우리나라의 사회주의로의 길을 밝히는 데에 점점 더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노사과연>

[자본론]에서의 사회주의 경제론*61)
키하라 마사오 (木原正雄)
번역: 김성칠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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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레닌전집 27권 426쪽.
   (역자 ― 유감스럽게도 우리에게는 아직도  맑스-엥겔스-레닌의 체계적인 전집에 대한 우리 말로 된 자료가 없으므로 일본어판의 전집의 쪽수를 쓴다.)

2)  맑스-엥겔스전집[이하에서는 전집이라 줄여 쓴다] 제3권 475쪽.

3) 레닌전집 27권 210-211쪽.

4)[자본론] 제3권 673쪽.
(역자 ― 여기에서 가리키는 [자본론]의 쪽수는 독일 Dietz Verlag판의 쪽수에 의거했다).

5) 레닌전집 제21권 47쪽.

6) 전집 제16권 215-216쪽.

7) 전집 제4권 48쪽.

8) [자본론] 제1권 790-791쪽.

9) 전집 제19권 19쪽.

10) 같은 책 20쪽.

11) 같은 책 20쪽.

12) 같은 책 21쪽.

13) 전집 제4권 495쪽.

14) 레닌전집 제30권 286쪽.

15) 레닌전집 제30권 538쪽.

16) 레닌전집 제20권 302쪽.

17) 레닌전집 제19권 21쪽

18) [자본론] 제3권 828쪽.

19) [자본론] 제1권 92쪽.

20) 전집 제19권 28-29쪽.

21) [자본론] 제1권 791쪽.

22) 전집 제20권 136쪽.

23) 전집 제4권 495쪽.

24) 같은 책 495쪽.

25) 전집 제3권 31쪽.

26) 같은 책 63쪽.

27) 전집 제19권 21쪽.

28) 레닌전집 제30권 446쪽.

29) 전집 제3권 475-476쪽.

30) 전집 제4권 488쪽.

31) 전집 제4권 489쪽.

32) [자본론] 제3권 827쪽.

33) [자본론] 제3권 827-828쪽.

34) 같은 책 855쪽.

35) 같은 책 855쪽.

36) [자본론] 제1권 552쪽.

37) [자본론] 제3권 883쪽.

38) [자본론] 제1권 552쪽.

39) [자본론] 제3권 828쪽.

40) 같은 책 827쪽.

41) 맑스, [정치경제학비판요강]

42) 맑스, 같은 책

43) 전집 제4권 489쪽.

44) 같은 책 제3권 83쪽참조

45) 전집 제4권 494쪽.

46) 레닌전집 제25권 488쪽 참조.

47) 레닌전집 제8권 517쪽.

48) 전집 제4권 490쪽.

49) 레닌전집 제23권 18쪽.

50) 레닌전집 제23권 18쪽.

51) 전집 제26권 Ⅲ 115쪽.

52) 레닌전집 제22권 319쪽.

53) [자본론] 제1권 414쪽

54) 같은 책 414쪽 주116a.

55) 학술회의『전환기의 과학기술』32쪽.

56) 전집 제20권 291쪽.

57) [자본론] 제3권 673쪽.

58) 레닌전집 제27권 426쪽 참조.

59) 레닌전집 제24권 497쪽.

60) 레닌전집 제27권 497쪽.

* 역자주 ― 이 글은 1980년에 쓰인 키하라 마사오의 [[資本論]に おける 社會主義 經濟論](岡本博之 외 감수 [マルクス [資本論]の硏究] 新日本出版社 東京 1980)를 옮긴 것이다. 소련의 현존 사회주의체제가 해체되기 이전의 글이라, 그 후의 역사적 경험을 반영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맑스가 [자본론]에서 제시하고 있는 사회주의상이 무엇이었는가를 종합적으로 아는 데에 독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리라 믿어 번역 소개한다.

박성인 (2006-09-16 12:36:48)

이 글을 번역한 김성칠 씨가 연구소로 보내온 e-mail편지입니다.
번역자를 밝히지 않아 번역자에게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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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귀 연구소의 사이트에 들어가 아주 유용한 자료들을 잘 보고 있습니다. 제 연구는 지금도 사회주의 문제이랍니다.
제가 번역한 글이 실어 있ㅇ 아주 영광이었습니다.
혹시 원칙에 벗어나지 않는다면 역자 이름도 넣어주었으면 합니다. 그런 것이 학문세계에서의 도덕성이자 양심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글도 쓰고 좋은 글이 있으면 번역도 하려고 합니다. 그런 글을 보고 그런 글들이 귀 연구소의 편집방향에 맞는다면 제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고 게재해도 됩니다.
귀 연구소에게 더 큰 발전과 희망이 있기를 바랍니다.
제게 맞는 세미나가 있다면 참가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인천에 사는 김성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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