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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10 23:49:57
박성인
[발리바르] 공산주의 이후에 어떤 공산주의가 오는가?(2000)
공산주의 이후에 어떤 공산주의가 오는가?

에티엔 발리바르, 2000

1-1.

마르크스가 정확히 '공산주의자'임을 선언하면서 자신의 시대의 '사회주의'와 거리를 두었다는 것은 사실이고 또 우연일 수도 없다. 그러나 '사회주의'라는 용어는 레닌을 통해 불가항력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안에 다시 들어오게 되고-이 때문에 공산주의와 사민주의로 마르크스주의의 분화가 발생한다-양자는 분리할 수 없게 된다.
그후 사회주의는 잠재적인 공산주의처럼 간주되고 또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의 귀결이자 완성인 것처럼 생각된다.
이러한 사고는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와 사회적 생산성의 자본주의적 발전양식에 대한 사회주의적 대안의 내재적 형태를 구성하기 때문에 역사의 목적이 된다는 관념과 하나가 된다.
이는 자본주의의 발전이 '현실의 운동'으로서 공산주의의 역사적 출현을 위한 필요조건임을 의미한다. 자본주의는 실제로 생산력을 사회화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공산주의로의 전환점에 도달하게 된다. 또는 자본주의는 노동력을 예속시키는 자본주의적 사회화 경향과 노동력을 해방시키는 대안적인 사회주의적 경향 사이의 영속적인 투쟁을 야기한다.
이렇게 해서 공산주의는 생산력과 인간적 생산성의 필연적 조직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원리적으로 반대하여 그것의 내재적 모순을 해결하고 그것이 담지하는 사회화를 인간 개인들의 공동의 생활양식으로 승격시키는 '생산양식'으로 출현할 수 있게 된다.
이런 핵심적 관념으로부터 '이행'과정의 주체와 대상, 즉 인류에 의해 제어되는 역사를 지향하는 역사의 주체와 대상으로서 '프롤레타리아화된' 노동자라는 표상, 따라서 프롤레타리아의 역사적 사명이라는 테제가 직접적으로 도출된다.
이런 표상과 테제를 근본적으로 상대화시켜야 한다.

1-2.

상대화시킨다는 것은, 이런 관념이 오류라거나 또는 그 의미작용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공산주의의 다른 형태들, 공산주의의 다른 인식들이 존재하거나 존재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르크스적 공산주의는 그 중 하나일 따름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 일정한 역사적·사회적 조건들에 조응한다. 기존의 지배질서를 비판하는 운동에서 그것의 '헤게모니'는 기껏해야 19세기와 20세기 일부에만 타당할 뿐이다. 그리고 그런 조건들이 소멸된다면 비가역적이고 필연적인 방식으로 마르크스주의가 상이한 이질적 요소들(과학으로서 마르크스주의와 이데올로기로서 공산주의·사회주의, 나아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로 분해되지 않을까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우리는 공산주의의 마르크스적 형태가 유일한 진리라고 판단하거나, 또는 반대로 이전의 형태들이 마르크스주의에 의해 은폐되고 부인되는 어떤 '본질'을 표상한다고 판단할 수 있는 어떤 선험적 기준도 갖고 있지 않다.
우리는 '공산주의'라는 관념과 용어자체의 근본적인 '다의성'을 인정해야 한다. 이 용어가 반복되는 핵심적 의미, '파라미터'를 갖는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고 해도, 이 파라미터가 정치적이고 인간학적인 주요 특징들의 전도에 이를 수 있는 부단한 '변이'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점도 즉각 인정해야만 한다.
끝없이 쇄신되는 것으로 표상할 수 있는 공산주의, 항상 새로운 조건들 속에서 공식적인 역사, 지배와 국가의 역사의 이면으로 지속되는 것으로 표상할 수 있는 공산주의는 그 자체로서 어떤 고정된, 유일한 형태로 각인된 긍정적 내용(동일성)도 갖고 있지 않다.

1-3.

사회주의적 또는 프롤레타리아적 공산주의는 산업혁명의 진행 속에서 구성되고 마르크스가 1848년 '공산당 선언'에서 이론화한 것이다. 이것이 제시하는 기본관념은 노동력의 사용과 재생산으로까지 가치형태의 지배를 일반화하는 자본주의가 개별 자본의 수준과 동시에 경향적으로 세계적 규모의 사회적 자본 전체의 수준에서 사회적 노동의 조직화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자본주의는 그 속에서 '공동의 존재'의 소외와 발전, 억압과 해방 사이의 적대가 형성되는 역사적 틀이 된다. 즉 공산주의는 생산물과 생산력 그 자체의 재영유, 노동의 상품적 사회화에 대한 대안이자 무의식적 조직화에서 의식적 조직화로의 이행으로 사고된다.

1-4.

또 다른 형태의 '공산주의들'에 대한 구상이 가능한가?
아마 그것들이 이미 우리 주위에서 출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미래의 공산주의들로서가 아니라, 생성중인 공산주의들, 아마 그 개별성을 인실할 수 있는 조건이 아직 없었기 때문에 마르크스로서는 인식할 수 없었던 역사의 '대안적' 측면들로부터 출현중인 공산주의들로서 말이다.
그런 공산주의들을 식별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의 '공산주의'가 그 중 하나의 변종일 뿐인 '동일성 없는 파라미터'라는 관념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
따라서 공산주의에 대한 모든 역사적 인식은 '개인화와 사회화 사이의 대립의 지양'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것은 형이상학적 추상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역사적이고 제도적인 현실이기도 한 개인과 사회 사이의 대립을 폐지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마르크스가('독일 이데올로기'부터 '경제학 비판 개요'를 거쳐 '자본'까지) 가장 집요하게 추구했던 것 같아 보이는 관념, 당시의 경제학과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모든 비판적 작업으로부터 유래하는 노동자연합 및 노동력의 재구성에 대한 그의 정식들이 표현하는 동시에 억제하는 관념이다. 또한 그런 것이 마르크스가 공산주의가 '정치의 공간'에서 안정적인 위치를 확보하는 데 결코 성공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즉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정치의 '아래로 내려가' '정치의 종언'으로 특징지어지는 '사회혁명'쪽으로 가거나, 아니면 정치의 '위로 올라가' '자유의 왕국'이라는 윤리학 또는 메타정치 쪽으로 가는 것이다.

1-5.

공산주의 개념의 구성적인 비대칭성과 대결해야 한다. 그것은 그 이름 자체에 각인되어 있는 것인데, 개인성(개별성)과 공동체의 대립의 지양이라는 관념은 말하자면 이미 '공동성(일반성)'에게 유리하도록 부정되고 있다.
근대에 들어와 반개인주의적 낭만주의의 전통, 소유적·상품적 개인주의와 '개인성의 추상화'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낭만주의의 전통 속에서 '공동체적 이데올로기'로서 공산주의라는 해석을 끊임없이 조장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이러한 해석이 무효는 아니지만, 이 때문에 마르크스의 저작에 특징적인 사고의 운동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임을, 즉 어떤 분업도 어떤 개인성의 '추상화 과정'도 완전히 폐지할 수 없는 공동체, 공동의 존재라는 요소의 재확인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추상적' 개인주의에 대한 이런 비판의 반대쪽에서 항상 중요한 것은 개인성의 재건, 공동의 존재 그 자체가 필연적이게 만드는 개별성의 무한한 발전에 도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극한적으로 사고한다면, '공산주의는 또한 하나의 개인주의다'.

1-6

탈영유에 기초한(인간에 의한 자연의 영유라는 노동의 인간학을 상정하는 마르크스의 정식에 따라 '수탈자의 수탈'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탈영유, 즉 '고유성'과 '소유'의 논리로부터의 자유와 그로부터 유래하는 동일성으로부터의 자유를 지향하는) 인식이든, 근본적인 '평등-자유'(인권의 정치)에 기초하는 혁명적(봉기적) 인식이든, 노동력의 사회적 재영유에 기호하는 마르크스주의적 인식이든, 공산주의에 대한 어떤 인식도 문제를 해결했다고 주장할 어떤 근거도 없다. 그런 인식은 '개별성'과 '공동성'의 새로운 정의에 입각하여 문제를 끊임없이 재정식화함으로써 문제를 개방된 채로 유지해 왔을 뿐이다.

2-1.

포스트마르크스적인 또는 비마르크스적인 '또 다른 공산주의'라는 관념을 해명할 수 있는 논점을 제시할 수 있다.
한편으로, 자본주의의 동시대적인 발전과 관련시킬 수 있는 현재의 모순들은 어느 정도까지 임금 노동력에 대한 착취에 기초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그 재생산조건들을 제공하는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의 반전으로 사고될 수 있는가?
반대로 그런 모순들은 어느 정도까지 어떤 무언가를 '포스트자본주의', 예를 들어 상품경제의 포스트자본주의적 단계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가?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에 의해 일반화된 시장의 지배에 대한 사회주의적 대안이라는 관념이 오늘의 조건들 속에서 공산주의 운동의 전망을 여는 데, 그리고 그 문제설정에 대해서 말하는 데 어느 정도까지 적합성을 갖는가?

2-2.

'포스트마르크적인 공산주의'라는 질문이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제기되는 것은 국제주의와 관련해서이다. 사실 국제주의야말로 마르크스적 공산주의가 지향했던 '반유토피아'의 가장 유토피아적인 측면인데, 역사는 그 것을 산산이 조각내버렸다. 제1인터내셔날의 해산, 유럽의 프롤레타리아를 통일하여 세계전쟁에 반대하지 못한 제2인터내셔날의 무능력, 제3인터내셔날에서 '일국 사회주의의 건설'과 '사회주의 진영의 방어'를 명분으로 하는 민족주의(애국주의).
이러한 사건들에 비추어 볼 때, 조국이라는 관념에 대한 프롤레타리아들의 무관심, 국경을 넘는 그들 사이의 자연스러운 연대를 언급하는 '공산당 선언'의 유명한 구절들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순진하게 보이거나, 또는 오히려 역사의 현실의 무대에서 작용하는 힘들에 대한 근원적인 몰인식의 증거처럼 보인다.
이 점에서 20세기 현실 공산주의의 역사는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대중적 투쟁을 준비하지도 못했고 그 조건들을 창출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동일성의 정념 및 종족적 순수화의 악화된 형태들로 귀결되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자본주의·식민주의·제국주의의 야만뿐만 아니라 또한 '사회주의의 야만'도 청산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반면에 처음부터 맹렬한 공격을 받은 이 국제주의가 마르크스주의 운동 내부의 수많은 활동가들의 명예이자 '혁명적 양심'으로 남아 있고, 그 자체로서 20세기의 위대한 투쟁 속에서 무시할 수 없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오늘날 그것은 세계 속에서 저항들과 해방운동들을 서로 교통시키려는 일정한 능력, 또는 공산주의의 이전의 인식과 새로운 인식의 결합을 묘사하는 실천적인 보편주의(사회운동 또는 오히려 공동체운동의 새로운 원형)를 구성하려는 일정한 능력 속으로 연장된다.
이런 가설에 따라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관계라는 질문을 재검토할 수 있다.

2-3

자유로운 세계시장의 법칙들에 반대하여 사회적 노동의 투쟁을 재구성하려는 사회주의적 시각이 민족적 이익(일반적으로 지방적 이익)의 방어를 강조해야 하는지, 아니면 일종의 '세계적 규모의 뉴딜', 즉 초민족 수준에서 공적 규제장치와 대항권력의 구성을 강조해야 하는지라는 질문 속에 분명한 점은 없음을 이제 우리는 알고 있다.
착취, 불안전노동, 생활조건의 파괴에 저항하는 모든 전략은 해결 불가능한 이런 양자택일에 당면할 것이다.

2-4.

몇가지 일반적이지만 그래도 무시할 수는 없는 분명한 점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경제의 불균등발전의 극단적 형태들과 그것들이 세계경제의 '중심'에서의 생활조건에 야기하는 반작용 충격은 '목적 없는'(그러나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반화된 폭력의 형태들을 출현시킨다. 여기서 부정적인 방식으로 소묘되는 공산주의는 역사적 의미에서 '비폭력'이라기 보다는 무엇보다 '반폭력'이다. 즉 폭력에 대한 저항에서의 연대이고, 세계사회의 '평화화' 또는 '문명화'의 형태들의 발명에서의 연대이다.
그러나 '소속의 감정', 즉 배제적 관계로서 집단적 동일성(민족적, 문화적, 또는 심지어 계급적 동일성)의 전화 또는 전변 없이는 어떤 연대도 생각할 수 없다.
공산주의의 관념이 환기하는 '공동의 존재'는 여기서 명시적으로 국경의 지양, 즉 국경 위에서 생활하는 능력과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선 개인과 집단에 대한 국가의 재량적 권력을 표현하는 제도로서 국경을 민주화하는 능력으로 나타난다.
바로 그것이 '공산당 선언'이 모든 사회혁명의 정치적 전제조건이라고 한 저 '민주주의 정복'의 결정적 형태, 직접적으로 의미 있는 형태이다.
국제주의의 이러한 재활성화와 구체화를 통해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적 전화의 결과 또는 종말 목적이 아니라, 자본주의적인 노동의 조직화에 대한 사회주의적 대안의 '객관적'이고 '주체적'인 조건으로 나타난다.

2-5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마르크스적 개념은 개인에게 그 자신의 재생산의 관리를 맡기는 사회적 관계의 계약적 형태를 작동시키지 않고서는 생각될 수 없다.
오늘날 노동자운동의 투쟁들은 세력관계, 노동의 가장 발전한 생산성 및 사회화의 형태들과 일치하는 '정상적' 자본주의, '중심'의 자본주의에게 불가결한 그런 자유('노동에 대한 봉기적 권리'라기 보다는 '법적으로 형식화되는 노동의 권리와 그에 따른 의무'로 표현되는 자유)를 유지할 수 있는 세력관계를 재구성하는 코포라티즘적 기능만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노동력의 '개인적 자유'가 이미 소멸되기 시작하고 동시에 '사회화'라는 문제의 조건들이 전복되기 시작한다.
이는 고전적인 개인의 경험을 조직하는 중심이었던 '고유한 육체'의 능력과 개인성이 종종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형태로 분리되기 시작한다는 점과 관련된다.
네그리는 '일반적 지식'에 대한 마르크스적 직관을 구체화한다고 간주되는 현상, 즉 자본에 의한 노동의 '실질적 포섭'의 최고 단계로 출현하지만 동시에 자본주의적 분업을 전도시킨다는 '사회적 노동의 지식화'('대중적 지식'에 의한 지적 차이의 소멸)라는 현상에 주목한다. 네그리는 그로부터 '집합노동자'(사회적 노동자)의 '의식화'를 통해 자본주의적 노동의 조직화의 종말 목적으로서 공산주의가 도래한다는 결론, 즉 마르크스주의적 진화주의를 강화하는 결론을 도출한다.
이런 시각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노동력의 공동체적 재구성의 관점에서 해석하기가 훨씬 더 곤란한 개인성의 전화의 또 다른 형태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생정치'가 아니라 '생경제'라고 부르는 것인데, 그것은 노동력이 아니라 생체기관 또는 생명 자체의 매매과정을 의미한다. 아직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가장 '저발전된' 지역들에 국지화된 그런 주변적 실천은 현실적으로 인공수정, 표준화된 재생산, 긍정적인 우생학 등을 위한 가장 현대적인 생명공학기술과 상호작용하고 있다.
경향적으로 그런 기술들은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자유'의 지위, 또는 말하자면 권리로 형식화되고 모든 종류의 사회화 과정에 의해 강화되는 주체적 조건을 개인성으로부터 박탈하고 있다. 그 결과 인간적 존재는 객관화되고, 심지어 초객관화되는데, 이는 또한 인류의 유산과 소유(고유성)를 공유화하는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방법이다.

2-6.

이런 폭력 속에서 기본적인 '인간학적 차이들'이 노출되고 유동된다.(마르크스는 동시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근대 자본주의의, 부르조아 시대가 인간학적 차이들에서 낡은 '고대성'을 박탈하고 결정적인 새로운 형태를 부여했다고 믿었다.)
'성적 차이'(성적 태도)의 사회적 지위에 의해서 인간학적 차이들의 모든 복잡성이 점차 정치적 질문이 되는 동시에, 바로 성적 차이에 의해서 정치가 그 한계들로 인도된다.
가설적으로 드러나는 공산주의, 아마 이미 수많은 실천들(유토피아적-장소가 없는-이라기 보다는 헤테로피아적인-이질적인 장소들을 갖는-) 속에서 실천적으로 추구되는 공산주의는 국제주의와 달리 마르크스의 마찬가지로 사변적인 가설과 근원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그것은 인간학적 차이들의 문명이고, 차이들의 공유화 또는 오히려 집단적 허구로서 인류의 구성에 대한 차이들의 공헌의 공유화이다.

2-7.

포스트마르크스적 공산주의로서 국제주의와 페미니즘이라는 작업가설들은,
첫째로, 이 가설들이 마르크스를 넘어서, 그러나 동시에 개인성과 공동체 사이의 대립의 '지양'이라는 인간학적 전망을 유지하면서, 공산주의를 다시 시작한다는 관념에 실체를 부여한다.
둘째로, 이 가설들이 초주체적인 또는 객관적인 '극단적 폭력'의 현상들이 자신들의 윤곽을 드러내고 심지어 일반화되는 상황에 준거하기 때문이며, 동시에 다수의 개인들·관계들·차이들로서 인류의 사회적 지위가 권력과 표상의 구체적 쟁점이 된다.
현재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수많은 조류들이 강한 종말론적인 기조를 띤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은 바로 이점(극단적 폭력으로서 일상적 학대·잔혹의 일반화)이다. 이 조류들 모두가 마르크스적 공산주의의 한계를 향해 가면서 그 쇄신의 가능성을 찾고 있거나, 또는 '공산주의 이후의' 또 다른 공산주의의 형상을 소묘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무차별적으로 가정할 수 있다고 해도, 그러나 이런 지향의 조류들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진화주의적 실증주의와 종말론적 메시아주의 사이에, 또는 오히려 이런 양자택일의 바깥에 '비극적 사고' 또는 '비극성에 대한 사고'라는 제3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리스인들로 소급하는 오랜 전통은 그런 사고를 통해 운명과 대결하는 인간적 행위의 고유성을 인식한다.



25
 역사학연구소 제3회 심포지움 안내  

 역사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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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21일 발제문(분석적 맑시즘의 의의와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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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주의/공산주의 이론과 좌파운동-남구현  

 nam
2006/09/15 9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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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하라 마사오)[자본론]에서의 사회주의 경제론  [1]

 박성인
2006/09/13 8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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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7일 발표문 -네오모더니즘과 사회주의(이성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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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07 6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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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30일 발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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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30 5895
18
 이름도 아름다운 황새울을 지켜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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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29 5056
17
 9월 일정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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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25 5461
16
 8월 23일 발표문 : 21세기 변혁의 주체? 노동계급의 분화와 다중(multitudes)  

 한노정연
2006/08/23 6187
15
 8월 16일 발제문 - 유고슬라비아의 노동자 자주관리에 대한 이론들  

 한노정연
2006/08/16 5848
14
 8월 16일 발표문 - 21세기와 트로츠키  

 한노정연
2006/08/14 5784
13
 8월 9일 발표문  

 한노정연
2006/08/09 5687
12
 [알림] 8월 9일 일정 변경 안내  

 한노정연
2006/08/08 5712
11
 7월 26일 발표논문 - 북한의 ‘민주집중제’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박영자)  

 한노정연
2006/07/24 5984
10
 4회 발표논문 - 동구 현실사회주의의 성격과 전환  

 한노정연
2006/07/20 5580
9
 3회 발제문 -코뮌주의와 특이성  

 한노정연
2006/07/18 5707
8
 [알림] 7.19.(수) 일정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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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18 5907

 [발리바르] 공산주의 이후에 어떤 공산주의가 오는가?(2000)  

 박성인
2006/07/10 5931
6
 한노정연 2006년 기획콜로키움 일정(수정)  

 박성인
2006/07/06 6722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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